제 5화
용사의 요정은 200년의 낮잠에서 깨어난다. (5)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도시에서 빠져나와 큰길로 나온 레이븐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트럭을 가리키며 미소를 지었다.
"저게 내 트럭이야. 저걸 타고 배달해. 이름은 엘리자베스."
지금까지 자기 이름에 대해서는 토씨 하나 알려준 게 없으면서, 트럭에 지어놓은 이름은 저렇게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다니. 에리스는 반쯤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의 장단에 맞춰주기로 했다.
"'엘리자베스'씨의 크기가 생각보다 작네요."
"전쟁 전 문명 사람들이 만든 무지막지한 크기의 자동차 같은 걸 기대했다면 좀 실망할 수도 있겠네."
그래도 나름 수동 기어에 사륜 구동. 거기에 짐도 꽤 많이 실을 수 있다.
범퍼에는 방사능 좀비들을 쓸어버리기 위한 추가 범퍼를 달아놓았고, 타이어도 튼튼한 걸 사용했기 때문에 황무지 바닥에서 오래오래 달려도 차체에 가해지는 부담이 적다.
레이븐은 가방으로 챙겨온 데스 스토커의 전리품을 트럭 안에 실어버리곤 어째서인지 운전석 쪽에 올라타지 않고, 그대로 짐칸에서 랜턴, 불을 피우는 데 쓰는 장작, 부싯돌, 텐트 같은 야영 도구를 몇 개 꺼내선 바닥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 기다려요. 지금 당장 출발하는 거 아녜요?"
"지금?"
레이븐은 지금 이 년이 머리에 총 맞았나, 하는 표정으로 잠시 에리스를 바라보다가, 욕이 목을 타고 입 밖으로 튀어나오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그녀가 200년 전 사람이라는 걸 떠올려낼 수 있었다.
"내가 아까 말했었잖아. 밤에는 못 돌아다녀. 그리고 아무리 내 엘리자베스가 튼튼해도, 밤에 튀어나오는 괴물들 상대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 밤에 돌아다니는 건 웬만하면 피해야 해."
"잠깐... 만요?"
에리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며 지금 막 모닥불을 피우려는 레이븐에게 물었다.
"밤에 괴물들이 위험하다면서. 불을 피우는 건 괜찮을 거예요?"
"불을 피우면 대부분 야생 동물은 안 건드리거든. 그리고... 웬만해서는 어두운 어둠 속에 오래 있으면 안 돼. 아까 말했잖아. 섀도가 나온다고."
대체 그래서 그 섀도라는 게 뭔데, 라고 물어보려고 했지만 질문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에리스는 하는 수 없이 입을 삐죽이며 물었다.
"뭐 도와드릴 거 있어요?"
"지금 여기 내가 꺼내놓은 랜턴이 몇 개 있거든? 모닥불 중심으로 원형으로 그걸 늘어놔줘. 이거, 부싯돌이랑 나이프는 여깄어."
"무. 무슨 랜턴이 이렇게 많은 거예요?"
거의 꺼내놓은 랜턴의 숫자만 해도 10개가 넘어가자, 에리스는 소환기를 보유한 소환사조차도 두려워하는 '섀도'의 정체가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야영지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랜턴을 늘어놓으며 꼼꼼하게 불을 붙여나갔던 그녀는 뒤에서 열심히 천막을 치고 있던 레이븐에게 물었다.
"그. 섀도라는 건 정확히 뭐죠? 소환사가 두려워할 정도면. 일종의 영체 같은 건가요?"
"자세한 건 나도 잘 몰라. 제대로 상대해본 적도 없고. 상대해보고 싶지도 않거든. 그리고... 녀석들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조차도 솔직히 좀 꺼려지거든. 좀비도 제 말하면 무덤에서 기어 나온다는 속담이 있잖아.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일반적인 소환사는 못 이겨. 그거."
"왜죠?"
"서번트의 마법이 전! 혀! 안 통하거든. 그렇다고 총알을 때려박을 수 있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야. 무적이지 무적. 그런 주제에 녀석이 하는 공격은 치명타로 들어와. 무덤 파고 튀어나오는 좀비들이 귀여워 보인다니까. 그런 걸 보면."
모닥불 위에 새카맣게 그을린 냄비를 솜씨 좋게 올린 그는 대체 어디서 구해왔는지, 트럭 안에서 보존용 아이스박스를 하나 꺼내, 거기서 어딜 어떻게 봐도 수상 쩍은 고기를 꺼내 냄비 안에 던져 넣었다.
"배고프지? 뭐라도 만들어줄게. 맛은 보장 못 하겠다만."
"그.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요. 그거, 무슨 고기에요?"
"아 이거? 데몬래빗이라고. 방사능 좀 처먹어서 변이된 토끼인데. 전골 해 먹으면 맛있어. 지금은 전골 해먹을 형편이 안 돼서, 그냥 굽기만 하는 거지만."
"..... 네?"
방사능.
처먹은.
토끼?
"우웩... 진심이에요? 지금? 그런 걸 먹는다고요? 진심으로? 저 놀리는 거 아니죠? 200년 전 사람이라고!"
"우웩은 무슨. 먹을 거 앞에서 그러면 안 돼. 아 어차피 다 굽고 삶고 하면 살균돼. 장에 들어가면 다 똑같은 고기야.
그리고 요즘 세상에선 방사능 안 처먹은 야생 동물 찾기가 더 어려워. 내가 마지막으로 '일반적인' 토끼를 본 게 오래전에 버려진 도서관의 데이터베이스 안이었는데 뭐."
"으... 으으으... 타. 탈 나면 어쩌죠?"
"속이 망가졌을 때 먹는 약초 같은 건 조금 있는데."
정말 날 것 그 자체의 삶을 오랫동안 살아왔는지, 별 대수롭지 않게 나이프와 포크로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토끼 고기를 굽는 레이븐의 모습은 200년 전 사람이었던 에리스의 눈에는 별종 그 자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통조림 음식 같은 건 없어요?"
"유적 같은 데 잘 찾아보면 있긴 하던데. 그런데 통조림은 대부분 엄청 귀해서. 내가 직접 먹기보다는 주로 다른 사람들에게 팔아. 비싸게 받을 수 있거든."
"그렇... 구나."
"..."
즉, 문명이 없어지기 이전의 음식은 아무래도 구하기 어렵다는 레이븐의 말에, 에리스는 침울해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귀찮은 여자 같으니라고."
마음속으로 과연 이 여자에게 잘 대해준 것만큼의 리턴이 돌아올까? 를 주도면밀하게 계산했던 그는 손가락으로 턱을 어루만지며 모닥불 앞에 쪼그려 앉은 에리스를 바라보았다.
모닥불의 불빛과 달빛에 비춰 살짝씩 흔들리는 은발과 금발 사이의 머리카락. 따뜻한 모닥불 근처에서 몸을 녹이고 있음에도, 혼자 남겨지고 말았다는 고독함이 그녀의 몸으로부터 온기를 빼앗아가고 있었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M1911 권총을 힐끔 바라본 그는 그녀가 마법 사용자라는 점을 떠올려내고, 트럭에 실린 아이스박스에 손을 뻗었다.
그가 아이스박스에서 꺼내온 건, 지금부터 구워먹을 데몬 래빗에 뿌려먹을 향신료였다.
하나같이 구하기 힘든 녀석들 뿐이라, 가격이 꽤 나가긴 하지만 매 식사는 형편이 되는대로 맛있게 먹어야 한다는 신조를 갖고 있던 그는 이런 면에서는 씀씀이가 컸다.
그리고 향신료를 꺼내오는 김에, 그는 원래는 대도시의 상인에게 내다팔 목적으로 보관해두고 있었던 어느 작은 깡통 하나를 꺼내 에리스에게 던져주었다.
"자."
"아팟!"
별 악의 없이 던진 깡통에 정확히 머리를 맞아버린 에리스는 갑자기 왜 물건을 사람한테 휙휙 던지냐며 툴툴거렸다.
"진짜... 그러지 마세요. 어?"
별 생각 없이 그가 던져준 깡통을 집어 들자, 뭔가 적당히 무게감이 느껴졌다. 쓰레기를 던진 건 아니었나? 그렇게 생각하며 벗겨지기 직전의 포장지의 적힌 글귀를 읽었던 그녀는 깜짝 놀라 레이븐을 바라보았다.
"이... 이거...?"
"지하 유적 탐사하다가 찾은 거야."
런천 미트. 가공육을 통조림 안에 넣어둔 구 시대의 물건으로, 지하 유적... 그러니까. 방공호 안에서 찾아냈다는 레이븐의 말 대로 손상된 흔적이 거의 없이 깨끗했다.
통조림의 특성 상, 용기에 크게 문제가 없는 이상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내용물은 부패하지 않는다.
특히나 전쟁 전 에리스가 살던 시대의 마법 기술로 만들어진 통조림이니, 의도적으로 용기를 외부에서 부수려고 하지 않는 이상은 크게 손상이 갈 일도 없다.
200년 전, 그녀가 그녀의 인생을 살고 있었을 때에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통조림 음식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통조림 캔에 담긴 싸구려 런천 미트가 현재, 유일하게 그녀와 200년 전 세상을 이어주는 유일한 매개체였다.
그걸 보고 옛날의 향수에 젖었는지, 그 자리에서 말을 잃은 채로 또 눈물을 찔끔 흘리려 하는 에리스에게, 레이븐은 한숨을 내쉬며 조건을 걸었다.
"단 조건이 있어."
"... 뭔데요?"
"그 통조림 하나를 마니아들에게 팔면 얼마 받는 줄은 알고나 있는 거야? 아무튼 그만큼은 일해줘야겠어."
레이븐은 홀스터에서 M1911 권총을 빼선, 방아쇠울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빙글빙글 돌렸다.
한 두번 총을 만져본 솜씨가 아닌지, 화려하게 공중에 총을 던졌다가, 총열 부분을 손잡이 삼아 낚아챈 그는 그대로 자신의 권총을 선뜻 에리스에게 건네주었다.
"잡아."
레이븐의 말에 순순히 권총의 손잡이를 꽉 쥐었던 에리스는 예상외로 꽤 나가는 권총의 무게에 깜짝 놀랐다.
주변 사람들이 쓰는 건 많이 봤어도, 자신이 직접 권총을 쥔 적은 없었던 에리스는 사람을 죽이는 무기에서 느껴지는 무겁고도, 차가운 감각에 잠시 몸을 떨었다.
"최근 의뢰 때문에 바빠서 잠을 제대로 못 잤어. 오늘 하루 난 푹 잘 거야. 그러니까 너는 나 대신 내가 야영할 동안 경계를 서."
"경계를요?"
"밤을 꼬박 새면서 주변에 위험한 게 오나 안 오나 보라는 거야. 말했잖아. 밤에는 위험한 것들이 우글거린다고. 원래 요즘 같은 세상에 제정신이 박혀있는 새끼들은 밤에는 안 돌아다녀. 나 같이 직업 상 밤에 돌아다닐 필요가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만 돌아다니지. 밤의 경계 작업은 필수야."
레이븐은 거의 다 구워진 데몬 래빗의 고기에 소금과 후추를 솔솔 뿌려선 뜨겁지도 않은 지 후후 불지도 않고는 그 두꺼운 고기를 거의 10초 만에 해치워버렸다.
현재 소환해두고 있는 서번트인 '잭 오 랜턴'의 화염 내성 덕이었다.
화염 내성을 가진 서번트를 소환해둘 경우, 서머너 또한 똑같은 내성을 얻게 되는데, 이를 이용하면 실생활에선 뜨거운 음식을 먹을 때 입천장을 데지 않게 된다든가, 화상을 입을 확률이 낮아지는 등 유용하게 쓸 수 있다.
"자 먼저. 조심해야할 거 첫 번째. 좀비."
경계 시, 조심해야할 것들을 알려주기 위해 레이븐은 검지를 치켜들며 에리스에게 빠르게 설명을 인수인계를 시작했다.
200년 전에는 마소도 없었고, 그로 인해 튀어나오는 괴물들도, 변이된 동물들도 없었을 테니 지금은 이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서라도 하나하나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좀비... 요? 제가 알고 있는 좀비... 인가요?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는 그. 막. 물어뜯으면 감염되고."
"아니 전혀 다른데?"
레이븐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좀비는 마소에 피폭되어서 악마로 변이된 인간을 말해."
"마소가... 방사능인가요?"
"마력 때문에 변질된 방사능. 캠프 파이어만 잘 유지하면 잘 다가오려 하지 않지만, 만약 다가오면 해결법은 간단해. 총을 쏴. 되도록 머리를 노리면 좋고."
"거 참 간단한 해결 방법... 이네요."
에리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중지를 치켜들며 다음으로 넘어갔다.
"두 번째. '영체'. 간혹 가다가 영체가 기습적으로 소환될 때가 있는데, 소환되는 영체는 대부분 우리에게 있어서 적이라고 생각하면 돼. 가장 흔하게 마주치는 영체는 고블린일 텐데. 아무튼 해결 방법은 간단해. 총을 쏴. 되도록 머리를 노리면 좋고."
"첫 번째 거랑 해결 방법이 완전히 동일한 건 제 기분 탓인가요?"
"뭐 어때. 세 번째, 야생 동물. 간혹 가다가 모닥불을 피워놓아도 음식 냄새 맡고 몰려오는 들개들이나 늑대개들이 있는데. 역시 녀석들도 싹 다 적으로 간주해. 해결 방법은..."
"총으로 쏘고. 머리를 노려라?"
"응. 이야, 이제 너도 황무지 생활 마스터야. 야 너두 황무지 생활할 수 있어."
"뭐가 나오든 일단 쏘라는 거잖아요."
"맞아. 지금까지 내가 살아있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야. 그게."
진지하게 돌아온 레이븐의 대답에, 에리스는 전쟁이 일어난 뒤 얼마나 이 세상이 막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자신이, 용사님이 없는 사이에 아수라장이 되었는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당부할게."
레이븐은 마지막으로 랜턴의 불빛이 미처 닿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먹구름이 낀 게 원인이든. 달이 그 시간대에 떠 있지 않은 게 원인이든. 빛이 '전혀' 닿지 않는 어둠이 내릴 때. 간혹 어둠 속에서 뭔가... 튀어나올 때가 있을 거야."
"... 그때는 어떡해요?"
"아무 랜턴이나 집어서 그 쪽을 비춰. 두더지일 수도 있거든? 하지만 만약에 두더지가 아니라... 뭔가 사람의 형상을 띄고 있다. 혹은 그런 거 같다... 싶으면."
"싶으면?"
"날 깨워. 그 다음부턴 내가 알아서 할게."
어렴풋이, 에리스는 마지막으로 레이븐이 언급한 것이 그가 그렇게나 두려워하는 '섀도'라는 걸 알아차리고 침을 꿀꺽 삼켰다.
어둠 속에서...
'사람의 형상'이 나타난다고?
"아무튼 뭐가 나오면 일단 쏘고 봐. 알았지? 그럼 난 먼저 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