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핵전쟁 이후 용사 파티-0화 (1/49)

제 0화

마왕의 공략이 성공한 날, 핵폭탄도 터졌다.

"가볼까요? 용사님?"

마왕을 쓰러뜨리고 인간 세계에 평화를 되찾아라.

숭고한 소명을 지니고 있던 '당신'은 길고 긴 여행 끝에 지쳐, 잠시 모닥불 앞에서 눈을 붙이고 있었다. 그런 용사를 언제나 챙겨주는 건, '당신'의 '요정'이었다.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당신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었던 그대의 요정.

에리스는 다른 당신의 파티원들의 기운을 북돋아주며 당신에게 아름답고도, 요염한 손을 뻗었다.

"자자. 조금만 있으면 마왕이 있는 성에 도착할 수 있어요. 마왕을 쓰러뜨리면, 저희 여행도 이제 끝나요. 이제 행복한 지상 세계로 돌아올 수 있는 거예요!"

그러자 모닥불 앞에서 뻗어 있었던 파티원들이 하나둘씩 일어섰다. 가장 먼저 일어선 건 레인저였다. 원거리에서의 화력 투사를 맡고 있던 그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당신의 어깨를 두드린다.

"눈 좀 붙였어?"

당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레인저는 손에 든 돌격 소총의 탄창을 교환하곤 길잡이답게 먼저 앞장을 섰다. 사실 요즘 시대에, '길잡이'라는 역할이 필요한 지가 다소 의문이었다.

'마법'을 사용하면 목적지로 가는 길이야 한 눈에 알 수 있기 마련인데. 그럼에도 길잡이의 역할을 자처하는 건, 용사의 목숨을 노리는 혹시나 모를 악마들이나, 함정으로부터 그를 지켜주기 위함인 걸까.

레인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 뒤에 육중한 전사가 일어났다. 마지-텍에서 개발한 특수 강화 외골격, 마도 아머를 장착하고 있던 그는, 등 뒤에서 큼직한 화염방사기를 꺼내 들며 특유의 힙한 슬랭을 내뱉었다.

"웰던으로 새끼들을 구우러 가볼까?"

그 다음으로 일어난 건 마법사였다. 여기저기에 각종 마법 장치들을 매달고 있던 안경 쓴 마법사는 바닥에 흩뿌려놓은 각종 마도구들을 챙기곤 저 멀리 보이는 마왕성을 바라보았다.

"준비는 됐어?"

당신은 고개를 끄덕인다.

"과묵하기는."

마법사는 당신의 뺨을 손가락으로 훑는다.

악마와의 전투로, 이미 당신의 얼굴은 흙과 피로 얼룩져있다. 그러나, 그 모습이 오히려 더 아름답다는 듯, 마법사는 촉촉한 눈동자로 당신을 바라보았다.

"이번 원정이 끝나면, 결혼하자."

당신은 잠시 고민한다.

그러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몸을 추스린 당신의 파티원들에게 말했다.

원정은 얼마 남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마왕성에 쳐들어가, 마왕을 쓰러뜨리면 이제 이 마계는 '우리들, 인간'의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전쟁은 끝나고, 인류는 전례 없는 발전을 이룰 수 있으리라.

파티원들은 당신의 연설을 듣고 기운을 낸 듯 보인다.

* * *

마침내 도착한 마왕성.

하지만 그 안은 어째서인지 텅 비어 있었다. 마왕을 지키기 위해 대기하고 있어야할 터인 경비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그 외에 다른 위협적인 마계의 병기도 확인되지 않는다.

당신은 레인저에게 의문을 표한다.

"그러게. 뭔가 이상하군. 이렇게까지 조용할 줄이야. 네비게이터에 의하면, 저쪽이 마왕의 방인데."

레인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으로 당신은 먼저 호기롭게 앞장 서려 했다. 그러나, 그 길을 전사가 막아섰다. 육중한 마도 아머를 이끌고, 그는 자신이 위험을 불사하고 탐색에 나서겠다고 말했다.

"그 길은 내가 먼저 가지. 무슨 함정을 설치해놨을 지 몰라."

당신은 고개를 끄덕인다. 먼저 전사가 앞장을 서서 마왕성으로 가는 길목을 뚫었지만, 예상외로 함정도 용사들의 앞길을 막아서는 악마들도 없었다.

"설마 마왕이 이미 이 곳을 뜬 건 아니겠지?"

당신은 마왕이 기다리는 알현실까지 가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고 마법사에게 답한다.

"확실히. 그건 그렇지만."

"에잇. 답답해. 안 되겠어. 내가 먼저 돌진해보지. 레인저, 마왕이 보이면 바로 저격해. 알았지?"

"알았어. 한 번 해볼게."

마왕의 알현실의 문을 발로 걷어 차 안에 들어가자, 텅 빈 홀 한가운데 마련된 왕좌에 한 악마의 남성이 용사 일행을 기다렸다는 듯이 앉아 있었다.

"왔구나. 용사여."

마왕은 여유롭게 말했다.

당신은 허리춤의 '검'을 뽑아들고, 장난질할 시간 따위는 없다고 일갈한다.

"서두르지 마. 이 성에는 내 수하는 없다. 오로지 용사, 너와 마왕인 나뿐이지."

마왕은 마법을 쓸 생각도, 싸울 생각도 없어보였다. 그는 그저 자리에서 일어나 모든 걸 체념했다는 얼굴로 당신과, 당신의 일행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말해주게. 인간의 용사여. 인간들의 탐욕을 위해, 더 많은 마법을 위해, 우리들의 땅을 침공하고 승리를 거둔 기분은 어떤가?"

"시끄러워! 당신도 만만찮게 우리 인간들을 공격했잖아!"

당신의 요정이 마왕에게 일갈했다. 그러자 마왕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누가 먼저 우리 차원에 모기처럼 달라붙어 고혈을 빨아갔는지 잊은 건가?"

"그. 그건..."

"용사여. 그대의 대답을 듣고 싶군. 마왕, 그렇게 사람들이 나를 부르곤 하지만. 내게는 마법의 재능도, 검의 재능도, 총의 재능도 없네. 내게 있는 건,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통솔력과 그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노력뿐이지."

당신은 헛짓거리할 시간은 없다고 대답한다.

"그런가."

마왕은 자리에 털썩 앉아 왕좌에 있는 어떤 '스위치'를 눌렀다.

당신은 마왕에게, 방금 무슨 스위치를 눌렀는지 묻는다.

"이거? 별 거 아니네."

마왕은 대답했다.

"자네 인간계에는 한 번 폭발하면 모든 것을 무로 되돌리고. 젖과 꿀이 흘러 넘치는 비옥한 땅을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불모의 땅으로 바꾸어버리는 병기가 있다고 하더군.

핵폭탄. 이라고 하나? 자네들 인간들이, 인간들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 만든 추악한 병기 말이네. 이 스위치는 그냥 그 핵폭탄을 발사하는 스위치. 그뿐이야."

"자... 잠깐만. 뭐라고? 핵을 터뜨려?"

"자네들의 기술을 우리라고 못 쓸 거 같나? 믿지 못 하겠다면. 보여주도록 하지."

마왕은 단말을 띄워, 투명한 홀로그램의 스크린을 보여주었다.

세계 곳곳에 피어오르는 거대한 버섯 구름. 그 아래에서도 멀쩡히 살아 사람들을 공격하는 악령들.

그걸 보고서 당신의 파티원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마법사는 돌아갈 고향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바닥에 쓰러져 구토하기 시작했고, 전사와 레인저는 분노에 휩싸였다.

당신은 왕좌에 앉은 마계의 왕을 향해 검을 겨눕니다.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거 알고 있나? 자네의 탐욕 때문에 죽은 악마들이 얼마나 많은 지? 내 모든 선택에 후회는 없네. 용사여."

당신은 저항 하나 하지 않는 마왕의 목을 검으로 내리칩니다.

네.

그 이후의 마왕이 어떻게 되었는 지는. 말할 필요도 없겠죠.

마왕은 쓰러지고, 용사는 승리했습니다.

고향에 버섯 구름을 뒤로한 채로요.....

그리고...

200년의 세월이 지나게 되었습니다.

네.

자그마치 200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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