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184화 (184/186)

재림의 장(5)

5.

당혹스런 기습.

야비하게도, 적들은 해가 지고 상황이 마무리될 때까지 쭉 기다리고 있었다.

사냥꾼이 용을 쓰러뜨리고 지쳐 주저앉는 모든 순간을 지켜보며.

위화감이 드는 저격이었지만, 이는 빅터 조차 눈치 채지 못했다.

거대한 적에게 모든 힘을 소모한 탓에 예지능력조차 쓸 수 없었던 것이다.

“아, 아아···.”

니엘의 하나뿐인 동공이 확장된다.

보고 있지만 보이지가 않아.

모든 게 너무도 비현실적인 광경처럼 느껴졌다.

바다를 가르는 거대한 짐승이나, 하늘을 나는 용보다 있을 수 없는 일 같아.

소녀는 쓰러진 오라비의 모습에 망연자실했다.

노련한 전사라면 몰라도, 마음의 그릇이 성장하지 못한 소녀가 받아들이기에 상황은 수시로 급변하고 있었기에.

“뭘 하고 있는 거냐! 당장 일어나라, 니엘!”

파파팟!

한 발 늦게 빅터가 나섰다.

그는 도끼로 니엘에게 날아드는 화살 세례를 모조리 막아냈다.

“사, 사부···.”

“마음을 추슬러라!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그치만 니코 형이···!”

니엘의 울음조차 외면한 채, 빅터는 눈을 부릅떴다.

정안이 월광 아래 암약한 적을 주시했다.

망토를 두른 무리.

사방에 비늘 투성이 피부를 감춘 기이한 군단이 살기를 풍기고 있어.

그들은 하나 같이 손아귀에 쇠뇌를 든 채였다.

“아핫, 겨우 다시 만났군요. 전엔 신세를 졌습니다. 덕분에 고생도 많이 했죠. 댁들을 수소문하느라 시간이 꽤나 걸렸다고요?”

짝짝짝.

이어서 전에 들은 적이 있는 경박한 박수소리와 함께 나긋나긋한 음성이 울렸다.

“얼굴이 당장 죽을 것처럼 납빛이신데, 예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지쳐 보이는데요? 제가 참 시기적절하게 잘 방문한 것 같습니다.”

“그 가식적이고 역겨운 말투···. 네놈은 설마?”

“왜 이러시나요?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있을 수 없어.

분명 저 자는 산사태의 마을에서 모가지를 분질렀을 터···.

“쯧, 못 알아보는 겁니까? 며칠이나 지났다고? 유감인데요. 어떻게 자기 손으로 죽인 사람을 까먹을 수 있담.”

달빛이 내리자 언덕 위에 오른쪽 얼굴을 가린 웨이브 진 갈색머리가 드러난다.

그곳에는 마치 여자 같은 곱상한 얼굴이, 그리고 핏방울처럼 새빨간 눈동자가 번뜩이고 있었다.

빅터는 치를 떨었다.

망자의 우물을 앞에 두고 실제로 죽음에서 되살아난 자와 마주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놈이 부활할 수 있단 걸 읽어내지 못한 거지?’

돌이켜보면, 무의식으로도 감정을 숨기는 부류가 종종 있었다.

그들은 대게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자이거나, 어떤 연유로 본심을 깊숙이 가라앉힐 수밖에 없는 인생은 살아온 이들이었다.

아마도 청년은 그 후자였으리라.

“겁 대가리를 상실했군. 한 번 죽은 걸론 성이 차지 않나?”

“제가 남다른 재주가 하나 있어서 말이죠.”

“뒈지지 못하는 것도 재주에 속하다니, 오늘 처음 알았다.”

“하핫, 귀공은 여전히 기세가 등등해서 좋네요. 과연 그 몸으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저도 궁금합니다.”

상대는 빅터가 지쳐있다는 걸 간파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그에게 여유가 얼마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까지도···.

‘결정적인 순간까지 능력이 발동되지 않았다. 지금의 나에겐 그 정도의 힘도 없단 말인가?’

머릿속이 몽롱하다.

전신의 신경이 실시간으로 타들어가고 있었다.

빅터는 한걸음을 내딛는 것조차 격통에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물러날 순 없어.

빅터는 떨리는 손끝을 멈추기 위해 도끼에 힘을 불어넣었다.

“그렇다면 직접 시험해봐라. 이번엔 목 하나로 끝나지 않을 테니.”

바로 앞에 마녀의 재생과 비슷한 방법으로 되살아난 자가 있다.

빅터가 싸울 이유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안광을 내뿜은 거구가 걸어 나오자, 청년은 살짝 움츠려든다.

거리가 멀다고 해도 오싹한 귀기가 전해져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노림수는 있었다.

철컹!

언덕 아래에 연모양 방패로 무장한 리저드맨들이 걸어 나왔다.

청년의 양 옆에는 장창을 든 다섯···.

그리고 사방에는 화살이 장전된 쇠뇌가 포복한 채 겨누고 있다.

머릿수로 압박하는 효율적인 전략.

빅터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적나라한 의도가 담긴 배치였다.

“전면전은 사양하죠. 짐승 같은 귀공과 달리 이 몸은 연약하거든요. 그래서 성격이 신중하죠. 제가 예전과 같은 실수를 할 거라 생각합니까?”

그랬다.

이번에 청년이 대동한 리자드맨의 수는 산사태에 매몰된 마을에서보다 훨씬 더 많았다.

두 배.

어쩌면 세 배는 될 지도 몰라.

복수를 작심했는가?

그는 빅터에게 철저하게 앙갚음을 해줄 셈이었다.

“썩 귀엽지 않습니까? 충언이나 아양을 부리진 못하지만, 그래도 착실한 하인들이죠. 아무리 더러운 명령이라도 시키는 일은 뭐든 한 답니다.”

“징그럽게도 많이 끌고 왔군. 네놈은 헛된 피를 흘리는 게 취향인가?”

“그래도 사람을 투입하는 것 보단 났겠죠. 그것들은 양심이라는 쓸데없는 감정 때문에 다루기가 영 성가시거든요. 나중엔 뒤처리도 해야 하고··· 여러모로 골치 아픕니다.”

처리.

그 발언은 노상강도로 전락했던 사내들을 가리키는 게 틀림없었다.

용서받지 못할 일을 저지르고 만 무리.

그러나 동시에 부조리한 천재지변과 마의 희생자들.

빅터는 예지와 평행세계의 관측 없이도 감히 짐작한다.

용의 출연과 산사태, 그리고 저주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평범하게 가족과 지내고 있었지 않았을까, 하고.

“···역시, 네 녀석은 이 세상에 살려둬선 안되겠군.”

“하하, 섭섭하네요. 이 목을 분지른 죄인이면서, 저를 언제까지 ‘놈’이나 ‘녀석’으로만 부를 겁니까? 살인에 대한 죄책감도 없나요? 아직도 뻐근해서 뭘 삼키지도 못하는데 말이죠.”

청년은 자신의 턱 아래를 매만진다.

그곳에는 새파랗게 멍이 든 흔적이 남겨져 있었다.

“관심 없다. 나는 쓰레기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해두지 않으니.”

“···그렇다면 저승길 선물로 다시 한 번 소개드리죠. 이번엔 잊어버리시면 안 됩니다. 이 몸은 하이데의 알데카인. 며칠 전에 당신에게 죽임당한 남자이자, 또한 복수할 사내의 이름입니다.”

살아있는 시체, 알데카는 자신의 건재함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한 팔을 위로 들었다.

대기 중인 리저드맨들에게 내리는 지시, 일제 사격의 신호였다.

그런데 그 순간···.

“잠깐··· 방금 하이데 가문의 이름을 입에 올렸나?”

“니코 형?!”

니코가 힘겹게 몸을 일으킨다.

사슬 위에 두꺼운 직물을 덧씌운 갑옷 덕분이야.

가까스로 상체에 박힌 화살은 내장까지 닿지 않은 듯했다.

“다행이야. 난 또 형이 당한 줄로만 알고!”

“생체기다. 이 정도 상처쯤은 아무 것도 아니야. 그보다도···.”

니코는 자신이 부상을 입었단 사실 따윈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집중한 것은 어디까지나 무리를 이끄는 자가 내뱉은 발언이었으니.

“거기, 너··· 어째서 귀족의 이름을 사칭하지?”

“사칭?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군요.”

“시치미 떼지 마라! 만에 하나라도, 너 따위가 하이데의 출신일 리가 없지 않은가?”

“하, 그건 모욕적인 발언이군요. 그냥 넘어가기 힘들겠는데요.”

“이 개자식이, 지금 감히 누가 할 소릴 지껄이는 거냐···?”

니코가 진심으로 분노한다.

이까지 갈며 알데카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왜냐하면···.

“네놈은 하이데가 아니야. 이 세상에서 그 이름을 당당히 쓸 수 있는 자격을 가진 건··· 오직 정통 후계자인 내 여동생 니엘 뿐이란 말이다!”

그의 외침에 알데카의 미간이 크게 실룩였다.

적지 않게 동요한 표정.

암운의 그늘 속에서 미남의 얼굴이 순식간에 추한 주름으로 일그러졌다.

“···쯧, 가문의 생존자가 있었나요? 적지않은 거금을 들여서 겨우 구한 이름인데,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갔군요. 이런 낭패가 있나. 성가시게 됐어요. 아주 골치 아파.”

작위를 사고파는 것 자체는 특별한 일이 아니다.

특히나 상업이 발달한 아일론과 더불어 잦은 교류를 하는 프로스트 공국의 경우···.

충분한 대가를 국가에 상납만 한다면 얼마든지 귀족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례는 어디까지나 새로운 가문의 이름을 등록할 때나 허용되는 것···.

기존에 있던 가문의 유명세나 영예까지 살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신분 사칭은 양 국가 모두 허락되지 않은 중죄였으니.

“비록 몰락한 귀족가라고 해도 네놈이 멋대로 입에 올릴 이름이 아니다. 목을 쳐줄 테니 거기서 당장 내려와라!”

“이상한 소릴 하시는군요. 목을 친다는데 스스로 다가갈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좋다, 개자식아. 그럼 내가 직접 가지.”

“아냐, 니코 형은 움직이지 마.”

니코가 칼을 뽑으려하자, 니엘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이미 장검을 양손에 쥐고 있었다.

“니엘, 너···.”

“등에 구멍 난 아저씨는 무리할 필요 없어. 잠자코 보고나 있으라고.”

나 완전 열 받았어, 라며 니엘이 거친 말투를 뱉어냈다.

그녀는 빅터의 바로 옆에 서며 미약하게나마 힘을 보탤 셈이었다.

청년, 알데카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아하! 당신이 방금 저 자가 입에 올린 ‘여동생’입니까? 문제의 그 정통 후계자시다 그거죠? 구면이었는데도 눈치 채지 못했었군요.”

“그래! 뭐 불만 있어?”

“놀라워요. 참으로 신비한 운명의 장난입니다. 고귀한 하이데의 마지막 핏줄이 이런 조금의 기품도 없는 계집일 줄이야···.”

“헹, 덕담 고마워. 너한테 청혼 같은 거라도 받으면 자살충동이 일거 같거든!”

“말투까지 저급하군요. 혹여 여쭙건데, 여러분 말고도 하이데 가문의 사정을 아는 자가 또 있습니까?”

“글쎄. 그건 또 어떨까나?”

“어느 쪽이죠?”

“알 사람은 다 알겠지.”

말을 이어가면서도 니엘은 살짝 시선을 위로 향했다.

빅터의 힘겨운 얼굴이 보여.

그가 온전한 상태가 아니란 건 확실해 보였다.

그렇다고 전열을 가다듬은 대군을 부상자 둘과 여검사 하나가 상대하기엔 역부족.

니엘은 결국 잡담을 통해 최대한 시간을 끌려했다.

만에 하나, 단장의 귀환이 너무 오래 걸린단 사실을 베른하트르가 깨달아주길 바라면서···.

그러나 상대는 소녀의 예상보다 참을성이 많지 않았다.

“후, 관둡시다. 제대로 소통하긴 힘들겠네요. 이젠 저도 어쩔 수 없죠. 손을 더럽히긴 싫지만 후환은 미리 제거해야 하니까요. 계획을 조금 앞당기겠습니다.”

“뭐라고?”

딱.

알데카가 손가락 끝을 튕기자 보이지 않는 그늘에 감춰진 그림자가 움직인다.

눈앞의 쇠뇌는 발사되지 않았다.

이 명령의 목적은 다른 데에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작작해라, 이 망할 자식···.”

번쩍.

하늘에 뭔가가 나타나자 빅터가 뿌득 이를 악문다.

밤이 내려앉은 마을에 일제히 별빛이 내리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자연스러운 유성우가 아니야.

살의와 악의로 점철된 불씨였다.

화륵···.

얼마 지나지 않아 목조 건물이 밀집된 주택가를 시작으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멀찍이서 남녀의 절규가 들여오기 시작했다.

짧게나마 용병단과 함께 지낸 사람들의 목소리···.

그 무자비한 행위에 니코는 다시금 분노를 느껴야만 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끌어들이나?”

“아하하! 이걸로 마을도 분주해지겠죠. 다들 불을 끄느라 여념이 없을 겁니다. 댁들을 도울 용병단 관계자도 당분간 나타나지 않을 테고요”

따로 배치시킨 복병이 있었던가?

어쩌면 알데카는 처음부터 방화를 생각해 두었는지도 몰랐다.

“여러분 덕분에 일이 잔뜩 꼬였습니다. 이렇게 돼서 실로 유감이군요. 이 마을은 소중한 제물 후보였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앞으로 반년은 더 숙성시켰어야 했는데 말이죠. 정말 아깝게 됐어.”

예정이 뒤틀린 원인이 빅터 일행에게 있다는 걸 떠올리자, 차츰 알데카의 시선은 싸늘해져갔다.

그것은 마치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의 심술과도 같이···.

세 사람을 향해 잔혹한 응징으로 표출되었다.

지면을 제외한 모든 방향에서 화살이 날아든다.

부상을 입은 니코는 움직일 수 없다.

니엘의 능력으론 화살을 내치지 못한다.

그렇다고 빅터 혼자서 두 사람을 구하는 것도 무리다.

어디에도 탈출구는 존재하지 않아.

희망은 사라진 것만 같았다.

그런데···.

“···후후, 이게 웬일이람? 도움이 필요한 것 같네요.”

소름끼치게 맑은 여성의 목소리와 함께···.

위기의 순간, 가느다란 두 개의 실루엣이 눈앞에 나타났다.

두 사람 모두 사냥꾼 복장···.

그들은 돌아선 채로 화살이 닿기 전에 어떤 비술을 펼쳤다.

어둠으로 짠 것만 같은 얇은 막이 사방을 감싼다.

놀랍게도 그에 닿는 화살의 모습이 족족 사라진다.

그것은 물리적인 공격을 대부분 막아내고 있었다.

‘검은 방패Schwarzes Schild?’

빅터는 한 눈에 알아보았다.

밀집시킨 이븐 가지의 분말을 이용한 기技의 유파의 주특기···.

어지간히 마기의 조종이 능숙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기술이야.

대스승급을 제외한다면 이걸 쓸 수 있는 베테랑은···.

“한창 재미있어 보이는데, 우리도 끼워줄래요?”

웃음기가 섞인 음성이 거부하기 힘든 제안을 해온다.

평균보다 조금 큰 키의 여인이었다.

모자 아래 흰머리가 섞인 금색 머리카락이 창백한 만월에 빛나고 있었다.

이어서 한쪽 얼굴을 살짝 덮을 정도로만 기른 단정한 모양새의 단발이 보인다.

그녀는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로 미소 짓고 있었다.

한 번 마주하면 결코 잊을 수 없는 개성의 소유자.

동료이지만, 동시에 악연이라고 할 수도 있을 인물···.

빅터는 자기도 모르게 그 이름을 외쳤다.

“도리스.”

“후후, 저뿐만이 아니랍니다.”

검은 방패를 다시 가루로 되돌리며 또 다른 인물이 고개를 들었다.

마침 장갑을 낀 손가락이 진한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그 자의 정체를 드러냈다.

상대와 시선이 교차하자 빅터의 표정에 동요가 인다.

누구보다 만나고 싶으면서도 만나고 싶지 않은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기에.

“드디어 만났네요. 뵙고 싶었어요, 빅터 씨···.”

클라르테.

빅터는 차마 그 이름까진 부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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