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182화 (182/186)

재림의 장(3)

4.

용의 유골을 빌린 마수가 일렁이는 섬광을 만들어내기 수 분 전···.

토굴을 달리던 중, 빛을 발견한 니엘이 정면을 가리켰다.

“니코 형, 저기!”

“그래, 내게도 보인다.”

군청와 주홍이 뒤섞인 자연의 은총.

마침 저물기 직전에 가장 찬란하게 번쩍이는 황혼이 두 사람 앞에 나타났다.

겨우 출발점으로 돌아왔어.

함박웃음과 함께, 니엘은 조금의 망설임 없이 뛰어들어 로프에 몸을 맡겼다.

“···휴우, 아슬아슬했네. 조금만 늦었으면 달님을 볼 뻔 했어.”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니엘.

그런 그녀를 맨 먼저 반긴 것은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후덕한 사내, 베른하르트였다.

“오, 무사히 잘 돌아왔군! 고생했어, 단장. 니엘, 어디 다치진 않았냐?”

“아, 응! 난 괜찮아, 베른 아저씨. 니코 형도 상처하나 없어.”

“음? 왜 둘 뿐이야? 나머지 사람들은 어딜 가고?”

“그게···.”

“하우저와 요하임은 죽었다.”

뒤따라 우물에서 올라온 니코가 담담하게 사실을 전한다.

베른은 눈썹을 실룩이며 놀란 듯 되물었다.

“뭐라고? 그게 정말이야, 단장?”

“내가 부하들의 죽음을 가지고 농담 따먹기나 할 놈처럼 보이나?”

“아니, 당연히 자네가 그럴 리 없겠지만···. 나로선 도무지 믿을 수 없군. 그 실력자들이 당하다니? 요하임만 해도 5년은 최전선에서 구른 놈들인데···.”

“나도 믿고 싶지 않아. 하지만 이 아래는 생지옥이나 마찬가지다. 제정신이 박힌 인간이 들어갈 곳이 아니야.”

베른하트르는 즉시 단장의 말을 이해하고 탄식한다.

그 또한 5년 전에 동방에서 심록의 사역마와 싸운 도펠죌트너 중 한 사람이었기에.

“이거야, 원. 마치 악몽이 되살아난 것만 같군. 우리 용병단은 무슨 저주에라도 걸린 건가?”

“저주라···.”

“그렇지 않나? 잊을만하면 이런 도깨비장난에 휘말리니 말이야. 모처럼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해괴한 마물들이랑 싸우는 일만···.”

“베른.”

“아차차, 고용주를 욕하면 안 돼지. ···그래도 가볍게 듣진 말아. 나는 영 느낌이 싸하단 말이야.”

니코는 베른의 말에 딱히 긍정하지도, 달리 부정할 생각도 없었다.

‘그렇지. 사냥꾼과 얽힌 이후로 모든 게 엉망이다. 마냥 허튼 소리로 치부하기도 어려울 정도야.’

흔히들 부정 탄다느니, 재수가 옴 붙었다며 내뱉는 미신···.

변방의 교인들이 근거 없는 두려움에 빠졌을 뿐이라 여겨왔던 니코였지만, 지금은 말로 형용 못할 막연한 불안감이 들었다.

어쩌면 한 번 어둠에 노출된 자는 몇 번이고 같은 사건을 겪어야할 운명에 놓이는 게 아닐까?

사실이 아니길 바라나, 단언 못할 상황에서 괜한 위험부담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나나 용병단이 그런 처지가 되는 것까진 견딜 수 있다. 하나 녀석만은 안 돼. 니엘은 절대로···.’

막아야 한다.

니코는 니엘이 하우저나 요하임과 같은 결과를 맞이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니엘.”

“응? 왜, 니코 형?”

“이번 일이 일단락되면···.”

“뭐야? 벌써 날 떼어놓을 작정이야? 그런 거라면 굳이 말해줄 필요도 없거든요? 예전처럼 용병단에 민폐 끼치지 않을 테니까. 어차피 앞으로 빅터 사부님을 따라서 사냥꾼으로서 살아갈 거야!”

니엘은 니코가 잔소리를 늘어놓기도 전에 수다부터 떨었다.

자신의 길을 개척했다는 듯,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님을 어필하기 위한 허세였다.

그러나 니코가 말을 꺼낸 의도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만둬라.”

“···어?”

“기분 나쁜 낮도깨비들 사이에 끼어서 뭐가 되겠나?”

“잠깐, 니코 형. 지금 내 인생에 참견하는 거야? 언제부터 내 장래를 그렇게 신경 쓰셨어?”

“···인생? 장래라고?”

“그래! 나는 세상에 도움이 될 거야! 남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갈 거라고!”

“멍청하긴. 홀려도 제대로 홀렸구나, 니엘.”

“뭐가? 난 나를 알아. 이게 내 길이라는 걸 제대로 인식하고 있단 말이야!”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지옥에서 흘러나온 괴물에게 시체 하나 남기지 않고 뒈지고 싶은 거냐?”

“웃기시네! 내가 죽긴 왜 죽어? 내겐 이 대검도, 돌봐주는 빅터 사부님도 있는데?”

“정신 차려라. 대체 언제까지 형편 좋게 만사가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하? 그런게 아니···.”

“착각하지 마라, 니엘. 넌 특별하지 않아.”

“뭐?”

“놈들은 널 이용하는 것뿐이다. 매번 괴물들과 싸움 때마다 죽어나가니까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 아무나 건드려서 끌어들이는 거야.”

“그게 무슨···.”

“누구라도 좋았겠지. 목숨을 내다버릴 방패막이라면 어떤 바보라도 써먹을 곳이 있을 테니 말이다.”

“아니야, 니코 형! 빅터 사부님은 달라! 말로는 설명하기 힘들지만··· 아무튼! 나를 인정해주고 엄청 다정하게 가르쳐 준다고! 일전엔 바다에서, 나보다 훨씬 어린 아이들도···!”

“정신을 못 차리는구나. 5년씩이나 지났으면 좀 변했을 줄 알았더니, 여전히 꼬마로군.”

니엘은 여기서 살짝 울컥했다.

“또 애 취급···.”

“아무리 몸이 자라도 현실을 분간 못하면 의미가 없지.”

“왜 그렇게 심한 소릴해? 형은 아무 것도 모르면서, 나도 그간 많이 노력했는데···.”

“그렇다면 헛수고다. 써먹을 데도 없는 일에 시간만 낭비했어.”

“···.”

“포기해라. 빅터 놈에겐 내가 잘 말해둘 터이니.”

니코도 인신공격을 할 생각까진 없었다.

하나 이 정도로 강하게 말하지 않으면 알아들을 니엘이 아니야.

그는 자신의 여동생이 또래 아이들보다 기가 세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끄러워!”

“뭐?”

“좀 닥치라고! 손윗사람이면 다야? 당신이 말하면 뭘 하든 다 들어야 해? 헛소리 마! 이건 내가 선택한 거야! 니코 형이랑은 상관없어! 전부 내가 감내할 일이라고!”

“···너는 모른다. 그 말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모르고 나오는 대로 지껄이고 있어.”

“아니거든? 후우, 사실 지금까진 조금 망설이긴 했지만, 방금 확실하게 결정했어. 니코 형을 화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사냥꾼이 되기로 말이야! 이건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저어어어얼대로 바꾸지 않아!”

“점잖게 말해선 못 알아듣겠나?”

“오홍, 때려보시게? 그럼 어디 해보셔! 내가 어릴 때처럼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니엘의 같잖은 도발에 니코의 미간이 경련한다.

그는 화를 필사적으로 참아내고 있었다.

마침 베른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그는 자칫 소중한 여동생에게 손찌검을 했을 지도 몰랐다.

“워워! 둘 다 진정해. 단장도 머리를 좀 식히라고.”

“비켜라, 베른하르트. 이 계집애에겐 교육이 필요해.”

“너무 그러지 마. 평소랑 다르게 왜 그리 심각해, 단장?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꼬마 니엘도 다 생각이 있겠지. 좀 더 존중해주도록 해. 변방에서 여자 나이 열일곱이면 애를 낳아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잖은가? ···아, 그럼 더 이상 꼬마 니엘이 아니군.”

“옳지! 말 잘 한다, 베른 아저씨!”

“니엘, 너도 잘한 거 없어. 오라비에게 예의 없게 구는 거 아니다.”

베른은 슬쩍 니코를 바라보더니.

“실은 너도 알지? 저 치가 애교가 없어서 마음에도 없는 소릴 잘 한다는 걸. 지금도 다 널 걱정해서···.”

“···허튼 소리는 거기까지다.”

눈치 빠른 부단장이 필요 이상의 이야길 내놓기 전에 니코가 말을 끊었다.

서두를 필요도 없는 일에 너무 열을 낸 자신이 바보 같아.

그는 나머지 사안은 빅터가 돌아온 다음 해결할 것이라 다짐했다.

“헌데, 단장. 사냥꾼 코드를 입은 덩치는 어떻게 됐나? 하우저랑 요하임은 가망이 없다 쳐도 그 사내는?”

“아참, 그렇지! 니코 형 때문에 가장 중요한 걸 말하지 못했네! 베른 아저씨, 지금 당장 단원들을 소집해줘!”

“으엉? 그건 왜?”

“빅터 사부님은 우릴 먼저 보내고 혼자 남았단 말이야! 그러니까 도와야 해. 안에 있는 걸 없애버려야···.”

“없앤다고? 대체 두 사람은 안에서 뭘 본 거야? 나는 도통 무슨 소린지 모르겠구만.”

니엘의 두서없는 언변으로는 필요한 정보도 전하지 못할 것만 같아.

결국 니코가 나섰다.

“설명하자면 길어진다. 나중에 여유가 충분할 때 충분히 말해주지. 당장은 한 시가 급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력, 창고의 기름과 화약이 전부 필요하다.”

“으음. 단장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이봐, 다들 단장의 지시는 들었나? 그럼 꾸물대지 말고 서둘러! 모르는 놈한텐 따로 전달하라고!”

베른이 손가락을 튕기며 닦달하자 주변의 인파가 급히 움직인다.

그들은 가능한 동원할 수 있는 수레를 모조리 이끌고 언덕 아래의 창고로 향기 시작했다.

이 기세라면 앞으로 한 시간 안에 모든 준비를 끝낼 수 있을 듯 보였다.

남은 것은 빅터의 귀환 뿐···.

‘사냥꾼이 늦는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걱정보다는 염려.

니코는 빅터가 당할 리 없다고 여기면서도 한편으론 상황의 진중성에 대해 생각했다.

설마하니 두 사람을 따라 우물 밖으로 나오지 못할 사정이 생긴 게 아닌지···.

기이하게도, 니코의 불안은 적중했다.

쿠구구궁!

갑작스레 지면이 흔들린다.

너무도 부자연스러운 지진이었다.

“이, 이건 지하에서 울리는 건가?”

베른이 니엘을 보호하듯 품으며 읊조렸다.

니코는 이 현상이 우물과 이어진 공동에서 벌어진단 걸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쿠궁!

쿠과아앙!

이어서 몇 번인가 더욱 강한 지진이 벌어진다.

아무리 신경이 둔한 자라도 혼비백산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소란이었기에, 마을 사람들도 집에서 빠져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그들은 보았다.

돌연 산지의 땅이 갈라지는 것을.

그리고 그 아래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서서히 오렌지빛으로 변화해가는 모습까지···.

이어서 지면이 부풀어 오른다.

녹아서 위로 솟구치고 있었다.

번쩍!

그것은 머지않아 폭발하며 밤이 도래하기 시작한 하늘 위로 섬광을 쏘아 보냈다.

수초가 지나자 후폭풍이 일었다.

지붕이 날아갈 만치 강렬한 바람이었다.

하늘의 색이 원래대로 돌아왔을 무렵엔 산맥의 일부가 사라진 뒤였다.

일대에 남은 흔적이라곤 중앙이 도려 나가진 뻥 뚫린 구멍뿐···.

산을 증발시키는 괴광선이란,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재앙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사실 전조에 불과했으니···.

“저, 저건 대체···.”

마을 사람 중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이들은 두 눈을 크게 뜬 채 언덕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군청의 배경 사이에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멀리서 올려다보는데도 무지막지한 크기의 무언가···.

빛이 흘러나온 장소에서 꿈틀거리는 거체가 올라온다.

양팔이 보이지 않는 기이하고 거대한 짐승이었다.

놈은 땅 위에 여러 갈래로 벌어지는 흉물스런 대가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고열에 타고 녹은 두상이 지켜보는 이들의 역겨움을 배가 시켰다.

“으, 으아아아아!”

“꺄아아아악!”

미지의 존재를 목격한 사람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른다.

순식간에 공포가 전염되어 마을에 혼란을 낳았다.

“드득, 드르륵···!”

두려움이 스며든 목소리에 자극이라도 받은 것인가?

살아있는 존재를 용서하지 않는 마물이 고개를 든다.

더 이상 용이라 부르기도 어려운 몰골이 된 생명체는 인구가 밀집된 장소를 노리고 있었다.

쩌억!

그리고 또 다시 빛이 모여든다.

두 번째 드래곤 브레스였다.

이 현상은 대기 중에 마기를 빨아들여 전하로 변환시키는 과정으로, 일종의 입자포라고 할 수 있었다.

발사하는데 시간이 걸리지만 고열의 플라즈마를 생성해낼 만큼 강력해.

마법을 중화시키는 빅터의 스펠브레이커조차 막을 수 없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지금 그것이 노리는 곳은 산지 아래···.

바로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 마을이란 사실이었다.

“설마, 빅터 사부가···?!”

베른의 손을 뿌리치며 니엘이 외친다.

그녀는 가장 상상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떠올리고 있었다.

당하고 말았는가?

끝내 빠져나오지 못하고 지하에 매몰된 것인가?

모두가 올려다보는 가운데, 이질적인 오색 빛깔의 광채가 어둑한 하늘을 물들인다.

용의 숨결이 뿜어져 나오기 직전이었다.

이스트 클라인에 위치한 마을은 수 초 뒤 지도에서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압도적 절망감이 사방에 퍼진다.

사람들은 저마다 죽음을 예감한다.

그리고 그 순간···.

“아!”

니엘의 얼굴에 화색이 되돌아왔다.

다행히 세계는 소녀가 절망할 정도로 가혹하진 않았던 것이다.

한 그림자가 일렁이는 빛의 중심에 나타났다.

크게 펼쳐진 까마귀의 날개를 연상시키는 실루엣이 공중을 부유한다.

분명히 온전한 사지가 달린 그것은 니코와 니엘이 아는 사람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무저갱으로 돌아가라. 여긴 네놈이 있을 곳이 아니다.”

곧 드래곤 브레스가 날아올 방향을 정면에서 가로막으며, 빅터는 오른팔을 들어올렸다.

그 움직임에 맞춰 도끼를 든 거인의 팔이 허공에 나타났다.

얼마든지 와라.

거구의 사냥꾼은 마치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번쩍!

만들어진 용이 파멸의 광선을 입에서 토해냈다.

눈부신 줄기가 덮쳐왔지만, 빅터는 적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아니, 사냥꾼의 정안이 직시하고 있었던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마기의 흐름이었다.

“···이젠 지긋지긋하다. 그 공격은 몇 번이고 경험했으니!”

평행세계에서 수 십 번이나 죽어가며 빅터는 비로소 최적의 위치를 찾아냈다.

그의 예지능력은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 이상적인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흐음!”

휘어진다.

광선의 궤도가 눈에 띌 정도로 비틀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야.

놀랍게도, 땅거미 거인이 휘두른 도끼가 브레스를 튕겨내 버렸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마기를 다스리는데 특화된 심의 유파.

그리고 육체와 마기의 융합으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체의 유파.

빅터는 그 양쪽 모두의 가르침과 자신의 능력을 응용해 새로운 힘을 만들어냈다.

스펠브레이커조차 넘어선 또 하나의 비기.

그 이름은 카운터 매직Counter Magic.

‘무효화 시킬 수 없다면 되돌려주면 그만이다.’

쿠구구구궁!

그 말 그대로, 드래곤 브레스는 위력을 그대로 간직한 채 발사된 포구에 적중했다.

반사된 광선이 거대한 마물의 전신을 여지없이 녹인다.

되살아난 용의 유해는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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