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의 장(2)
3.
군체가 하나의 자아를 확립했을 시점···.
거대하고 불경한 생물체가 두상에 시각 기관을 생성해낸 순간, 가장 먼저 포착한 것은 날아오르는 빅터의 모습이었다.
천장에 닿을 정도의 육신에 비하면 포착하기도 쉽지 않은 작은 몸집···.
하지만 그에게선 땅을 기는 연약한 존재가 뿜어낸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강렬한 기백이 흘러나온다.
용의 형상을 갖춘 벌레무리는 단번에 그것이 자신들에게 위협적인 적이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부웅!
인간을 초월한 사냥꾼의 각력이 흙먼지와 함께 지면에다 움푹 파인 흔적을 남겼다.
빅터는 거의 수십 미터 이상을 도약, 도끼를 육중한 적에게 휘둘렀다.
서걱!
푸른 섬광이 공중에서 회전하며 마물의 어깨에 박힌다.
무방비하고 물렁한 살덩이가 마의 존재를 용서하지 않는 이계의 금속에 의해 여지없이 갈라졌다.
그러나 선공을 마치고 땅에 착지한 빅터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으니.
‘역시 통하지 않나? 성가시게 됐어.’
사냥꾼은 혀를 찼다.
견고한 고기의 벽은 깨작깨작 베어내는 정도로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벌레무리의 대응이 상상 보다 재빨라, 유성의 파편에 시작한 용의 일부를 이탈시켜 순식간에 수복했기 때문이었다.
“까득, 까드득!
기이한 울림.
괴물이 세월에 굳은 턱관절을 비틀고 날카로운 이를 갈아대는 소리였다.
이어서 놈은 경질화 되기 시작한 벌레들로 이뤄진 앞발을 치켜들었다.
용의 발톱이 노리는 것은 빅터가 선 바닥이었다.
쿠과아앙!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둠 아래, 맹렬한 일격이 사정없이 땅을 내리친다.
수 천 년 가까이 유지되었을 지형이 한 순간에 뭉개져, 불규칙한 파편과 함께 날카로운 돌기둥이 사방에 솟구쳤다.
잔해 속에서 빅터의 몸은 뭉개졌으리라.
그가 충돌직전, 절묘하게 그림자를 두르지 않았다면 말이다.
“위험했군.”
어느새 빅터는 용의 어깨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용이 시선을 옆으로 향할 쯤, 짐승의 입처럼 크게 벌어진 도끼날은 이미 날카로운 궤적을 그리는 중이었다.
팔의 구동과 탄력을 최대한 이용해 넓게 가르는 종베기의 난무.
양팔을 휘두를 때마다 길게 뻗어 나온 용의 목에 붉은 흠집이 새겨졌다.
아니, 이는 베어낸다기보다 통째로 도려내는 것에 가까워.
실제로 빅터의 도끼는 흉포하게 적의 일부를 뜯어먹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중과부적.
목을 잘라내기도 전에 새살이 돋아나는 괴악한 현상이 반복될 뿐이다.
본디 마기가 차단되거나 유성의 파편에 절단당하는 것만으로도 절명하는 보통 사역마와는 달리, 되살아난 용에게는 갈아치울 육신의 부품이 지나치리만큼 남아돌았다.
잘린 표면이 하얗게 굳자마자 거의 동시에 다른 개체들로 상처가 메워지는 것이다.
‘이래선 끝도 없겠어. 놈의 근원을 뿌리째 뽑아야만 한다.’
방법 자체는 간단하다.
이 무리를 결속시키는 지도자를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해결되리라.
벌레가 철저하게 생물의 기관을 흉내 낸 것을 미루어볼 때, 뇌가 아니면 심장부··· 둘 중 하나일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논리나 이치가 간단하다고해서 그걸 직접 실행하는 게 간단할 리 없었다.
당장 적도 빅터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셈이었기에.
파팟!
빅터의 등 뒤에서 무지막지한 크기의 작살창이 뻗어온다.
본래 용의 꼬리였을 뾰족한 골격이 전방위를 보완하는 무기로 변한 것이었다.
그 맹공은 몸에 밀착한 방해꾼을 날려버리기 위해서라면 수단방법도 가리지 않아.
용은 자신의 어깨와 견갑에 들러붙어있던 벌레들마저 으깨가며 빅터에게 초신속의 찌르기를 날렸다.
“···날뛰지 마라, 썩어 문드러진 시체 주제에!”
무모한 고집이었을까?
아니면 당당히 맞서겠다는 용기의 표현이었을까?
압도적인 질량과 무게가 덮쳐오는 와중에도 빅터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가 행한 것은 그저 온 힘을 다한 맞대응뿐이었다.
콰아아앙!
사념과 마물의 살점을 집어 삼켜 덩치를 불린 도끼와 신전의 기둥보다 굵은 채찍이 맞부딪쳤다.
충격파가 인다.
격돌한 쌍방이 튕겨나갔다.
하지만 어느 모로 보나 압도적으로 불리한 쪽은 인간.
궤도가 살짝 틀어진 것에 불과한 용의 꼬리와는 달리, 빅터는 벽면에 파묻힐 만큼 멀리 날려 보내졌다.
“···쿨럭!”
가까스로 자세를 잡은 사냥꾼의 발 아래로 핏물이 튄다.
선혈.
입가의 피를 닦아내며 빅터가 고개를 들었다.
경기공으로 충격을 한계까지 줄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장의 일부가 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최선이었다. 피하려고 주춤했었다면 더 상황이 나빠졌을 테지.’
그랬다.
찰나, 예지가 보여준 미래는 온몸이 찢겨져 추락하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회피를 시도하면 풍압에 휩쓸려 비참할 꼴이 될 뿐···.
결국 유일한 고차원 확률예측이 내놓은 해답은 이것이 최선이었으니.
그나마 다행인 것은, 빅터의 눈이 아직 죽지 않았단 사실이었다.
“재미있군. 실로 오랜만의 도전이다.”
강적을 눈앞에 두고서도 피식 웃어 보인다.
지금 빅터는 용의 닮은 괴물을 통해 스스로가 경험한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보고 있었다.
사냥꾼의 지식이나 인간의 지혜가 통하지 않는 생태계에서 보낸 3년간의 고난을.
용의 시대.
안락이나 휴식은 고사하고 언제나 자신보다 거대한 호적수들과 맞서던 나날···.
그 경험은 가혹하지만, 돌이켜보면 동시에 향수를 자아내는 추억이기도 했다.
‘그것은 약육강식, 적자생존···. 그런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진정한 대자연의 싸움이었지.’
한 걸음을 내딛은 것만으로도 천지가 울리는 네 발의 짐승.
어떤 고목보다 긴 목으로 숲을 내려다보는 생물···.
이들은 먼 미래에 인류가 종을 분류하며 ‘공룡’이라 명명할 6500만년 전에 멸종한 종이었다.
비늘과 발톱의 세계는 참으로 신비하면서도 무시무시해.
빅터는 그곳에서 수 없는 포식자들과 싸우며 진정으로 강하다는 것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한 가지만은 인정하마. 조잡하게 조립된 덩어리라고해도, 과연 용은 용이로군. 그러나···.”
다르다.
눈앞의 마물과 빅터가 싸운 백악기 말기의 적들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생존의 의미.
살아가는 목적···.
용들의 열대우림은 그야말로 생명의 보고였다.
그들은 매일같이 필사적이고 있는 그대로의 투쟁을 보여주었기에.
진정한 자연에는 복잡한 저주나 사사로운 미움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생존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두고 경쟁할 뿐인, 지극히 단순하면서 확실한 세계관.
불온한 감정이 섞여들 여지조차 없는 것이다.
“너는 진짜 용과 거리가 멀다. 네 목적은 오로지 지상의 인간들을 증오하는 것이지. 살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이는 것만이 유일한 가치인 슬픈 짐승이다.”
고로, 놈을 내버려둘 수 없다.
저 흉물스런 모습은 빅터 자신이 강한 상대라 경외를 품었던 존재들을 모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라도, 그는 모든 힘을 다 해 뒤틀린 망자의 용을 다시금 저승으로 인도해줄 셈이었다.
‘평소처럼 힘을 온전할 때가 아니다. 저것은 이미 레기온 급 중합체··· 아니, 가히 육망성급 마녀에 가까울 정도의 위협일지도 모른다.’
이 땅에 머무는 백골의 수만큼 원한이 서린 육신, 거기에 지상에서 가장 강하다고 일컬어지는 전설 속 생물의 뼈가 융합된 적이 간단할 리 없다.
여기서 빅터는 다소 무리를 각오한다.
그것은 일종의 모험이기도 했다.
‘어쩔 수 없군.’
순간, 빅터에게서 흘러나오는 검은 가루의 멈췄다.
돌연 공기의 흐름이 가라앉은 것이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적막한 고요가 찾아왔다.
단, 이는 정말 모든 것이 정지한 것은 아니야.
빅터가 격정대신 안정된 무의식의 상태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당연히도, 적은 그걸 마냥 내버려두지 않는다.
쿠과아아앙!
직후, 용의 유해에 달라붙은 벌레무리가 난폭하게 오른쪽 앞발을 내질렀다.
천장에서 자라난 종유석을 때려 부수며, 하늘마저 찢어버릴 기세의 세 갈레 발톱을 빅터에게로 휘둘렀다.
그런데 어째서 였을까?
이런 위기의 순간임에도, 도끼를 든 사냥꾼은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피할 수 없다.
시기를 놓쳐, 이번만큼은 빅터가 그림자를 두르지 못했다.
그리고···.
번쩍!
푸른 광체가 암막에 휩싸인 동굴을 비춘다.
그 중심에는 허공에 떠오른 빅터가 있었다.
“···어떻게든 성공했군.”
날개를 펼친 까마귀의 형상.
그것은 심의 유파가 이르는 궁극의 경지, 후케바인Huckebein이었다.
하지만 빅터가 노린 건 이뿐만이 아니야.
그의 속내는 보다 한 단계 발전된 기술에 있었다.
‘홍련과 싸우면서 나는 나 자신의 무력감을 실감했다.’
보다 강하게.
보다 견고하게.
어떤 거대한 적에게도 맞설 수 있도록.
어떤 무시무시한 적에게도 지지 않도록.
손끝에 닿는 모두를 지키기 위해, 빅터는 또 한 번 자신의 한계를 돌파했다.
“뿌득, 드드득!”
빅터의 코앞에서 멈춘 용의 관절이 역방향으로 뒤틀린다.
발톱은 보이지 않는 장막에 막힌 것처럼 경련하고만 있었다.
아니, 사실은 존재했다.
빅터의 왼손이···.
체의 유파가 자랑하는 궁극의 오의, 땅거미 거인이···.
그림자의 육체로 나타나 용의 앞발을 거머쥔 채 버티고 있었다.
“꺼져라.”
우득!
부러졌다.
거인의 손이 석질화된 용의 오른팔을 집어 뜯어버렸다.
놀랍게도, 빅터는 후케바인을 발동한 채로 부분 발현에 성공한 것이었다.
거기다 또 한 가지 덧붙여···.
“흐음!”
이번에는 빅터의 동작을 그대로 수행하는 거인의 오른손이 움직인다.
그 거완巨腕에는 수 백 배의 크기로 불어난 이형의 도끼가 쥐여져 있었다.
부우우우웅!
큰 반원을 그리는 종베기가 내리 찍힌다.
그 궤적은 동굴을 붕괴시킬 기세로 용의 나머지 한 팔까지 날려버렸다.
인간 수백 명 이상의 부피를 가진 마물의 일부는 지면에 떨어지자마자 하얀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으드득! 득! 드득!”
재생이 불가능할 정도의 큰 손실에 육체를 주관하는 지성체가 동요한다.
놈은 빅터를 상대하기에 이 공간이 너무도 협소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화아아악!
두 팔을 잃은 용의 유해가 등에 붙은 날개를 활짝 펼친다.
도망치려는 것일까?
저 거구를 기어이 하늘로 날려 보낼 셈인가?
“어딜···!”
역시나 빅터는 적의 발악을 용납하지 않았다.
투명한 익막을 서넛 번 펄럭이기도 전에, 거인의 오른손은 그대로 용의 두상을 낚아챘다.
투과아앙!
그리고 왼손의 주먹이 작열한다.
원시적인 일격이 흉곽을 깨부수는데 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수 초 사이였다.
‘아직이다! 아직 놈은 살아있어!’
끈질긴 적에 빅터는 진저리를 쳤다.
수많은 개체로 이뤄진 적이란 이토록 상대하기 힘들단 말인가?
두 팔이 사라지고 배가 꿰뚫린 채여도 용은 아직 움직이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것이 문제가 되었는지, 오히려 더욱 위협적인 형태로 변모하면서···.
“이 망할 버러지새끼들이···.”
몇 번을 더 내려쳐도 뒤틀림을 막을 순 없었다.
빅터가 그림자의 팔로 붙잡은 머리가 8갈래로 갈라졌어, 그것은 기존의 골격을 버리고 이질적인 마물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아뿔사!’
빛이 일렁인다.
반딧불이를 연상시키는 반짝이는 입자가 사방에서 몰려든다.
이건 빅터가 든 제노리움의 금속에서 흘러나오는 청광이 아니야.
보다 불길하고 부자연스러운 색채였다.
그것은 갈라진 마물의 입안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큭!”
빅터는 눈앞에 아른거리는 예지와 더불어, 오래 전에 들은 옛 전승에 대해 떠올렸다.
신화 속의 마물, 용의 숨결에는 모든 것을 좀먹는 마력이 담겨있다는 것을···.
그 이름은 브레스Breath.
드래곤 브레스Dragon Breath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