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의 장(1)
1.
동행한 두 사람이 사라졌단 걸 깨달은 즉시···.
니코는 빅터에게 퇴각을 요청했다.
지하 속에 가려진 진실이 어느 정도 드러난 이상, 한 시라도 빨리 마을에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빅터는 동의했다.
마의 흔적을 지우는 일이라면, 마녀 사냥꾼 이상으로 의욕적인 자는 없을 것이기에.
결론이 나오자 일행은 서둘러 우물의 입구 쪽으로 달렸다.
땅을 구르는 벌레가 부츠에 짓밟혀 터지든 말든, 니엘과 니코는 빅터의 뒤를 쫓아 전력으로 질주했다.
하우저가 들고 있던 횃불이 사라진 지금, 그들이 당장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광원은 푸른빛을 발하는 도끼뿐이었다.
“니코 형, 너무 걱정하지 마. 그 아저씨들이 겁쟁이라 먼저 달아난 거겠지. 나가보면 우리보다 한 발 앞서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니코와 나란히 뛰던 와중에 니엘이 입을 연다.
그녀는 오라비의 무거운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풀어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오산이 있다.
니엘의 의견이 너무나 가벼워, 두 사람의 성격을 잘 알던 니코가 단번에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어. 질 나쁜 놈들이긴 해도, 싸움터에서 항상 최전선을 지키던 실력자였다. 돈이 걸린 일이라면 어떤 지옥이라도 사수할 자식들이야.”
어지간해선 용병이 대금을 지불받지도 않았는데 배신하는 경우란 드물다.
원채 좁은 업계이기에, 전장에서 살아가는 자들끼리는 좋든 싫든 얼굴을 다시 마주할 일이 생기고 만다.
친구가 많아도 생환을 확신할 수 없는데 불필요하게 원수만 많아져봐야 무엇이 좋단 말인가?
더럽게 살면 언젠간 먹고 살 길이 막혀버려.
한번 변절자로 찍히면 의뢰주도, 같은 용병 사이에서도 평판이 떨어지기 마련.
따라서 지금껏 쌓은 신뢰를 모조리 날려버리는 멍청한 도박을 베테랑 용병인 하우저가 할 리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두 녀석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 뭔가에 당한 거야.”
“뭔가라니? 벌레들은 빅터 사부님이 막아주고 있을 텐데···.”
“잊어버린 거냐, 니엘? 전쟁터에선 변수가 일어나는 게 일상이다.”
냉정하게 죽음에 대해 말하지만, 니코는 내심 두 사람을 선별한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차라리 전쟁터였다면 다행이었으리라.
그럼 최소한 유해라도 챙길 수 있었을 텐데···.
‘미안하다 하우저, 요하임··· 나는 또 다시 도깨비들 싸움에서 허망하게 부하를 소모하고 말았다.’
그러나 감성에 휘둘릴 만큼, 고블린즈를 이끄는 단장은 연약한 성격이 소유자가 아니었다.
그의 본질은 고민하며 망설이기보단 앞으로 나아가는데 있었기에.
부하의 죽음을 통해서 니코의 의욕이 더욱 박차를 가했다.
“빅터, 이젠 어쩔 텐가? 다음 계책은?”
당장 지상에 있는 동료들과 소통할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마을과 합류하는 것이 최우선이야, 시간을 들여서라도 폭약의 조달해야한다.
철저하게 이 죄악의 땅을 없애버릴 작정으로···.
그러나 그의 말을 들은 빅터가 자리에 멈춰 선다.
니코가 그린 현실적인 대응과는 달리, 사냥꾼의 선택은 보다 무모한 것이었다.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뭐?”
“너희는 마을로 돌아가라.”
홀로 남을 셈인가?
그 돌발 선언에 먼저 반응한 것은 니코보다 니엘 쪽이었다.
“사부님은요?”
“쫓아오는 놈들을 막겠다.”
“그러면 나도···!”
“아니, 네가 남아봐야 짐 밖에 되지 않는다.”
“여기까지 데려와 놓고 그런 소리가 어디 있어요? 고집부리지 말고 귀여운 제자의 도움도 좀 받고 그러라고요!”
“앞으로 5분 정도 남았군.”
“아?”
“그 안에 너희가 자리를 뜨지 않으면 우린 모두 죽는다.”
무거운 이야기를 담담하게 꺼내며, 빅터는 왜 자신이 그래야만 하는 지에 대해 설명했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내게는 대기 중에 섞인 이상 신호가 보인다. 일종의 화학물질이군. 역시나 이 유적에 둥지를 튼 벌레들은 단순한 무리가 아니야. 개미나 벌처럼 체계적인 군집을 이루고 있지.”
“그, 그딴 게 뭐 대수라고···.”
“이 동굴 어딘가에 영리한 우두머리 개체가 따로 존재한다. 놈은 나로 인해 마기의 공급이 막히자 생존의 위협을 느꼈을 터. 지금은 조용해보여도 곧 궁여지책을 낼 거다. 우리가 빠져나가도록 순순히 기다려주지 않겠지.”
“사냥의 시간이다, 그 말씀이로군요?”
“니엘.”
“왜요? 그렇게 무게 잡고 말하면 이제 와서 내가 쫄 거라고 생각했나요?”
팟!
갑자기 빅터가 왼손을 니엘에게 휘둘렀다.
눈앞에 큰 손이 뻗쳐오니 소녀는 눈을 감아버렸다.
설마하니, 말을 듣지 않자 손찌검이라도 할 셈이었던 것인가?
아니, 빅터는 단지 바닥에서 튀어나온 적에게서 자신의 제자를 구했을 뿐이었다.
“지금의 너는 이 정도 습격조차 대응하지 못해.”
“아···.”
“이 이상은 너를 지켜줄 수 없다.”
빅터가 날린 손아귀엔 어느새 길고 굵직한 새하얀 애벌레가 잡혀있었다.
힘을 가하자, 흉물스런 괴충의 몸통이 으깨지며 초록색 체액을 사방에 흩뿌렸다.
“발악을 시작했나? 잔존하는 마기를 긁어모아 암살용 벌레를 보냈군. 아마 두 용병도 이놈들에게 당한 거겠지.”
그 뿐만이 아니다.
지금 막, 용의 유해가 있던 공터에서 거대한 기운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낭패다. 더는 여유부리고 있을 시간이 없어. 니코, 당장 니엘을 데리고 떠나라.”
“그런데 빅터, 정말 혼자서 괜찮겠나?”
“어떻게든 된다.”
“그럼··· 자네를 믿지.”
“빛이 없어서 불편하겠지만 어차피 일방통행이다. 길을 잃진 않을 터.”
“어?! 니코 형, 잠시만! 이거 놔아아아!”
니코는 양손으로 니엘의 허리를 들어 어깨에 짊어졌다.
우연인지, 그것은 예전에 빅터가 그녀를 억지로 끌어냈을 때의 자세와 거의 같았다.
“후우···.”
방해가 되는 남매가 멀어지자, 빅터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더 이상 조사 임무가 아니게 되어버렸군. 어떤 일이든 쉽게 지나가는 법이 없어.’
사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유적의 환경은 빅터가 가진 모든 능력을 극한까지 시험하고 있었다.
살아있는 자보다 죽은 자가 더 많은 이야기를 속삭이는 고립된 공간···.
지금도 살의와 저주, 온갖 욕망이 공기에 섞여 빅터의 귓가를 맴돈다.
혼란스러운 마기와 사념의 뒤섞임이 일행에게 영향을 주지 않도록 막는 게 쉽지 않다.
정신력의 소모가 큰 예지 능력은 최우선적으로 봉인할 수밖에 없어.
빅터는 괴충들을 제어하기 위해 쭉 경계를 유지하는 중이었다.
그것은 큰 구멍이 뚫린 항아리에 쉴 새 없이 물을 채우는 행동과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이 빠져나가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과연 자신이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그 이전에, 이븐 가지의 분말을 쓰지 않고 이 가혹한 싸움에서 살아나갈 수나 있을까?
척.
빅터는 초조함으로 마음이 동요하기 전에 도끼를 들어올렸다.
‘온다!’
위아래, 좌우에서 일제히 역겨운 유충의 파도가 친다.
마기에 영향을 받지 않게 성장한 개체들이 총동원된 것이 틀림없었다.
“흠!”
몇 번이고 참격의 풍압이 흐름을 가른다.
그때마다 이형의 도끼가 뒤틀린 생물체들의 군집을 파괴해나갔다.
물러섬은 없다.
유성의 파편은 단 한 마리의 적도 놓치지 않는다.
전방위에서 날아오는 매서운 공격도 빅터를 몰아붙이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눈속임···.
고대인의 피와 살로 만들어진 흉포한 벌레들에겐 숨겨진 계책이 있었다.
‘역시 마기가 밀집된 곳은 여기가 아니었나?’
빅터는 끊임없이 덮쳐오는 적들을 베어나가는 와중에 이변을 눈치 챘다.
쿠구구궁!
이내 발아래가 흔들려, 사방이 요동친다.
부자연스런 지진에 예지능력을 억누른 상태임에도 불길한 예감이 스쳐지나갔다.
뭔가가 벌어지고 있었다.
빅터는 가능한 최악을 상상했다.
이 사악한 계획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골격이 되는 용의 화석.
무수한 제물.
그리고 그 뱃속을 대체해서 움직이도록 창조된 벌레들까지···.
모든 일연의 과정은 단 하나의 목적으로 귀결된다.
‘어쩌면 나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던 건가?’
유적과 마주했을 때부터 빅터는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고대의 문명이 국토방위를 우선시했다면,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용의 존재를 적극 활용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어.
그저 수 천 년 뒤에나 발견될 토굴 속에 모든 비밀을 파묻고 감춰버렸을 뿐···.
그만한 희생양을 바쳤으면서, 왜 시대의 흐름 속에 역사가 희미해질 때까지 숨겨야만 했던 것일까?
클라인 왕국, 그리고 그보다 이전에 존재했을 나라는 대체 무엇 때문에 용을 부활시키려 했던가?
그 이유는 단순하면서도 확고했다.
바로 침략자를 향한 복수···.
외적外敵에 대한 꺼지지 않는 원망이었다.
‘클라인 왕국의 선조들은 나라를 지키는 것엔 관심조차 없었다.’
그랬다.
고대인들은 자국의 존립보다 후세에 이어질 저주를 선택했던 것이다.
‘언젠가 유적 안에 찾아온 방문자가 속세의 숨결을 불어넣으면 깨어나도록 조작해둔거군. 이 얼마나 악독한 함정이란 말인가?’
비록 마녀가 운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실패작일지언정···.
먼 미래에 재앙을 불러일으킬 수만 있다면 만족해.
용의 무덤 아래에 만들어진 이 공간은 내장을 파먹는 벌레의 수를 불리기 위한 둥지이자, 시대를 초월한 복수를 이루기 위한 마굴이었다.
‘보기 좋게 걸려들었다. 결국 시간을 끈 건 내가 아니라 놈들이었어.’
주변에 북적이던 요충의 무리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마치 썰물이 빠지는 것만 같이···.
밀집한다.
모이고 있었다.
벌레들은 일사분란하게 과거 용이었던 존재의 곁으로 빨려 들어가는 중이었다.
쿠구구궁!
다시금 요란한 진동이 칠 쯤, 빅터는 스펠브레이커의 힘을 해제했다.
니엘과 니코의 무기에 각각 부여했던 유성의 가호가 충분히 멀어졌기 때문이었다.
이제 비로소 그는 방해받지 않고 싸울 수 있게 되었다.
저벅.
죽은 파편만 남은 벌레의 주검을 가로지르며, 사냥꾼은 거대한 적과의 싸움을 준비했다.
2.
자리를 비운 지 십 여분도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용의 유해는 몰라볼 정도로 변해있었다.
골격을 따라 벌레로 이뤄진 힘줄과 살이 붙어있다.
근육이 벌떡인다.
심장이 터질 듯 요동치고 있었다.
비늘이나 거죽은 없어도 형태만큼은 제대로 갖춘 상태.
넝마처럼 형성된 익막이었지만 당장이라도 날아오를 것만 같은 생기가 감돌았다.
본 드래곤Bone Dragon과 이형 생물체의 융합···.
아니, 이것은 이미 하나의 온전한 생명이다.
그야말로 부활, 용의 재림이었다.
현대의 마녀조차 놀라자빠질 무시무시한 성취.
자연법칙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그 사악한 위용에 사냥꾼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빅터는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 놈을 절대 밖으로 내보낼 순 없다고.
“팔자 한 번 사납군. 진짜 용을 상대하기 전에 연습상대라도 해보란 건가?”
애써
힘겹게 가슴 언저리에 손을 올린다.
가루의 양은 예전만 못하다.
한 번 소모된 마음의 힘은 되돌리지 못한다.
평범한 사냥꾼이었다면 피로와 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든 도끼는 보통이 아니야.
그것은 기이하게 벌어진 기관으로 잔존하는 사념을 계속 빨아들이고 있었다.
푸른빛이 강해질수록, 도끼날의 부피가 커져간다.
동시에 빅터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이븐 가지의 분말의 농도가 짚어지기 시작했다.
“다시 지옥으로 돌려보내주마.”
비대해진 무구를 짊어진 채, 빅터는 고대의 마물을 찢어발기기 위해 땅을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