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의 장(7)
11.
시간은 니엘이 하우저의 정강이를 차버린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클라인 왕국의 존망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인 니코와는 달리, 모두가 빅터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던 것은 아니었으니···.
“으, 다리가 붓기 시작했어. 아파 죽겠네, 이 썩을··· 선머슴같은 계집애!”
“그러게 왜 실언을 합니까? 하우저 씨는 생각하기도 전에 떠오른 걸 뱉어내는 게 탈임다.”
“입 싸물어! 애송이 주제에 잔말이 많아!”
“예, 알겠으니까 좀 진정하쇼. 그렇게 거칠게 휘두르면 아교가 다 튀잖슴까? 횃불이 꺼지면 어쩔 거요?”
“그럼 네놈 탓으로 돌리면 되겠지.”
“거참, 애꿋은 사람한테 화풀이를 해봐야 뭔 의미가 있는지.”
“제길, 단장의 동생만 아니었다면 ···.”
“또 무슨 나쁜 생각을 하시는 검까?”
슥.
다리를 어루만지면서도 어느 한 곳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참고 있었는데, 갑자기 비교할 대상이 생기니 군침이 돈 다 이 말씀이야.”
그는 돌아선 니엘의···.
특히 엉덩이 쪽, 가죽 바지가 감싸고 있는 둔부를 집요하게 훑어보고 있었으니.
“너도 슬슬 질리지 않느냐고.”
“허?”
“이 후진 마을. 침대에서 호응도 안 해주는 시골 창녀들한테 말이다.”
“저는 불만 없는뎁쇼. 그거야 순전히 하우저 씨 밤 기술 탓 아닌지?”
“이 X발놈이? 그럼 평생 여기서 살던가?”
“어이쿠, 그건 좀 봐주쇼. 저도 기왕이면 번화가랑 화려한 여자가 더 취향이라.”
하우저가 버럭 언성을 높이자 요하임이 난색을 표했다.
자칫 지저분한 대화가 니코에게 들릴까, 그는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말임다, 하우저 씨? 저는 기가 드센 여자도 그렇게 싫진 않지 말임다?”
“뻔한 거짓말은 술에 취한 다음에나 하시지.”
“정말임다.”
“네가? 아낙이 대꾸만 해도 후려갈기기로 유명한 그 난봉꾼 요하임이?”
“언제적 일입니까? 그건 실수입니다, 실수.”
“퍽이나.”
“됐음다. 하우저 씨에게 이해를 구한 제가 바보지.”
“그럼 뭐지? 저 몸매 말곤 볼 것도 없는 여장부가 네 마음에 들었단 의미냐?”
이때, 질문을 건네면서 하우저가 야비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요하임의 음험한 본색을 익히 알고 있었다.
“말괄량이일수록 얌전하게 만드는 재미가 있을 거 같으니 말임다. 어차피 흉터투성이 애꾸 아님까? 얼굴에 상처가 좀 늘어난다고 별로 티 나지도 않을 테니.”
“···하여간 구제불능 새끼. 그러다 망가뜨린 여자가 몇 이냐?”
“하우저 씨는 간식 먹을 때마다 일일이 그 횟수를 세어보기라도 하심까?”
“쓰레기 놈.”
“피차 마찬가지 아니오?”
마물에 버금가는 오싹한 음욕이 퍼진다.
간략한 일상 대화만으로도 알 수 있듯, 선인과 거리가 멀어.
니코와는 금전 관계로 이어져있을 뿐··· 이들은 지극히 순수한 욕망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이었다.
“쳇, 그런데··· 단장은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 생각인 거지?”
“낸들 알겠슴까?”
“돌았어. 새삼스럽지만 단장도 제정신은 아니야. 잘도 이딴 곳에서 역사 강의를 듣는구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대화가 끝나려면 한참 걸릴 거 같은뎁쇼.”
“마음에 안 들어. 클라인 왕국이 다 뭐야? 수 천 년 전의 고대 유적따위 아무래도 좋다고! 나는 당장이라도 여기서 나가고 싶단 말이다!”
“제 생각도 마찬가지임다. 잘못되면 절대 곱게 못 죽을 거 같으니···.”
“두 배 봉급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그냥 나서지 말 걸 그랬어.”
신경질을 내며, 하우저는 꿈틀거리는 바닥을 구둣발로 거칠게 짓밟았다.
당장 공격해오지 않는다고 해도 괴충들의 모습은 징그럽기 그지없어.
한 놈도 살려둬선 안 된다는 혐오감이 마른 남자의 폭력적인 본능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이봐, 요하임!”
“예예, 또 무슨 불평을 하시려고 그러심까?”
“너, 혹시 이게 뭔지 알아보겠냐?”
하우저가 왼손에 든 횃불을 아래로 향한다.
어느새 그의 오른손이 바닥에 떨어진 납작한 뭔가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조금 전에 한 말은 취소야. 역시 내 선택이 옳았던 거야. 이건 완전 대박이라고.”
하우저의 광대뼈가 급격히 승천한다.
그는 좋아 죽을 것만 같은 얼굴로 으스대고 있었다.
요하임은 의문을 품은 채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하니, 용병의 목숨이나 다름없는 무기마저 내던질 만큼 급히 확인해야할 물건이 무엇이란 말인가?
요하임은 실소하며 능글맞게 굴었다.
“···나참, 사람 기대하게 만들어놓곤. 또 못 써먹을 골동품 수집임까?”
“쉿! 조용히 해라!”
“뭘 그렇게 유난을 떱니까? 기껏해야 오래된 동전인데?”
그랬다.
하우저의 손바닥 위에 놓인 물건이란, 고작해야 시중에 유통되는 것보다 약간 큰 주화에 불과했으니.
하지만 하우저는 벌어지는 입가를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격하게 기뻐하고 있었다.
“케케케, 무식한 새끼. 역시 변방 촌놈이라 아무 것도 모르는군.”
“예?”
“이건 네이라 주화라고 해서, 트레저 헌터들 사이에선 금이나 은보다 비싸게 팔리는 보물이다.”
“이게 말임까?”
“그래, 틀림없어. 이 조잡하고 투박한 무늬··· 은근히 타원형인 모양새까지, 전에 봤던 것과 완벽히 일치해.”
영 미심쩍다.
반 이상이 찌그러지고 표면에 녹까지 쓴 고철에 그만한 가치가 있을 리 만무해.
요하임은 상대가 제정신이 아니거나, 자신을 놀리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뭘 하냐, 대머리 자식! 얼른 날 좀 도와라! 나중에 한 몫 챙겨줄 테니까!”
“후우, 지금이 괜한 뻘짓거리에 힘이나 빼고 있을 때임까?”
“목소리 줄여. 누가 또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단장에게도 숨기실 검까? 나중에 들키면 재미없을 텐데요?”
“X랄 마라! 이런 대박이 인생에 얼마나 찾아올 거 같아?”
장난치곤 얼굴이 심각해.
하우저는 뭔가에 홀린 것 마냥, 계속해서 벌레 무더기를 퍼 올리고 있었다.
그때마다 몇 닢의 주화를 건져내,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의 주머니는 가득 차버렸다.
“키키키키, 보라고. 이 정도면 성은 물론, 공국의 작위까지 일시불로 살 수 있을 양이다.”
“서, 성이라고요? 대체 그 네이··· 어쩌고 동전이 뭐랍니까?”
“나도 자세히는 몰라도 그런 게 있어. 아주 오래 전에 멸망한 네이라 제국이라 해서··· 역사학자들 사이엔 실존 했는지 여부조차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전설이 말이야.”
“하우저 씨, 곰팡내 나는 설명 말고 이게 왜 비싼지 이유나 말해주쇼.”
“케케케, 그게 말이지. 요놈이 아주 희귀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모양이더라고.”
“아무리 희귀해봐야 어떤 쇳덩이가 금보다 비싸답디까?”
“오레이칼코스Orichalcos라고 들어봤나?”
“금시초문임다.”
“그럼 오리칼쿰Orichalcum은?”
“그건 압니다. 무슨 신화 속 영웅이 보호구로 만들어 쓰던 철이랬던가···.”
“잘 아는구만. 바로 그거야. 신들의 금속이지.”
깊은 전말까진 모르나 요하임은 이쯤에서 하우저가 시시한 농담을 하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유물에 신의 이름이 붙은 이상, 손해는 없을 거라 판단한 것이었다.
“호··· 그 이야길 들으니까 구미가 확 도는데요?”
“이제 부자가 될 준비나 해라.”
요하임이 반응하자 하우저도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다.
그는 니코가 빅터와의 대화에 집중하는 사이, 몰래 주화를 빼돌려 이탈할 셈이었다.
두 사람이 슬금슬금 뒷걸음을 친다.
빅터 일행과 거리를 벌리며,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하우저와 요하임은 도굴활동을 재개했다.
벌레가 바글거렸지만 손짓을 멈추지 않는다.
징그러움과 혐오따윈 인간의 끝없는 욕망 앞에선 무용한 것이었기에.
“제길, 좀 더 못 가져가나? 이럴 줄 알았으면 보따리라도 챙겨오는 건데.”
“너무 욕심내지 마쇼. 단장, 아니··· 니코 자식이 눈치 채면 말짱 도루묵이 되니까 말임다.”
“아쉬운 대로 바지라도 벗어야···.”
“잠깐, 이거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음까?”
“오, 네 녀석치곤 꽤 머릴 썼구만.”
요하임이 자신의 방패를 큰 쟁반처럼 뒤집었다.
그것만으로 상당히 많은 양의 주화를 담을 수 있게 되었어.
하우저가 계산하기에, 이 정도면 평생 사치를 부리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양이었다.
“끝내주는군. 요하임, 이제 슬슬···.”
몸을 일으켜 자리를 피하려는 찰나, 갑자기 하우저의 말문이 막혔다.
그는 봐선 안 될 것을 보고 말았다.
바로 피거품을 물고 눈이 돌아간 동료의 모습을···.
꿀럭 꿀럭.
좁은 관속에 뭔가를 밀어 넣는 것만 같은 울림···.
고개를 숙인 요하임의 입속에는 팔뚝 크기의 새하얀 애벌레가 맹렬한 기세로 파고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까닭은 정신적 충격 탓이 아니었다.
순전히 물리적인 이유···.
스스로가 눈치 채기도 전에, 고통을 느낄 겨를도 없이 목 아래 성대가 도려 나가졌기 때문이었다.
‘벌레는 못 움직이는 거 아니었나?’
‘그보다 저 놈은 어디에서 나타난 거지?’
‘덫을 파고 숨어있었던 걸까?’
‘설마 네이라 주화에 정신이 팔린 인간을 끌어들이기 위해?’
‘한낱 미물에게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짧은 순간.
하우저의 뇌리로 여러 가지 의문이 스쳐지나갔지만, 베테랑 용병의 경험은 호기심 이전에 가장 생존에 적합한 방법을 제시했다.
등을 돌린다.
그리고 부리나케 도망친다.
이젠 달아난다는 선택지 외엔 없어.
하우저는 지면 아래로 끌려가기 시작한 요하임을 애써 외면했다.
지금 하우저에게 믿을 것이라곤, 그나마 멀쩡한 두 다리 정도였기에.
툭!
무심코 놓친 횃불이 손아귀에서 벗어나 땅을 구른다.
그러자 빛이 사라진 어둠의 저편에서 똬리를 튼 괴생명체가 덮쳐오기 시작했다.
숨을 쉬기 위해 살짝 벌어진 하우저의 목구멍을 노리고서···.
“칵, 카각!”
선혈과 함께 간헐적인 숨소리가 뿜어져 나오지만 그뿐이었다.
아무리 애써도 비명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하우저는 그 어떤 도움도 요청할 수 없었다.
‘누가 좀! 아무라도 좋아! 단장, 사냥꾼 형씨! 여기··· 나를 보라고! 누가 좀 구해줘어어어!’
니코는 돌아선 채다.
니엘과 어머니의 출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미래를 보는 빅터조차 묵묵부답이야.
그는 당장 일대의 마기를 억누르느라 예지 능력을 의식적으로 꺼두고 있었다.
‘괜찮아! 조금만 달리면 된다! 저기까지만··· 저들의 눈에 띄는 곳에 갈 수 있다면!’
하지만 곧 하우저의 낙관적인 생각은 의미를 잃고만다.
파팟!
땅을 기어 다니는 주제에, 그 움직임은 실로 가공할 정도였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 인간의 필사적인 뜀박질보다 압도적으로 빨랐던 것이다.
퍼석!
갈고리와 같은 가로 턱이 날아온다.
눈 깜빡할 새에 하우저의 양쪽 뺨이 찢어졌다.
이어서 혀를 씹으며 벌레를 닮은 괴물이 입 안으로 밀려들어온다.
순식간에 식도와 기도가 찢기면서 하나의 구멍이 되었다.
“그, 그··· 가악!”
내장이 녹는다.
뱃속에 파고든 괴물이 강산성의 소화액을 토해낸 게 틀림없었다.
철퍽!
불운한 도망자는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안면부터 바닥에 쓰러졌다.
그때를 놓칠세라, 땅을 기는 벌레들이 겉으로 드러난 그의 눈과 코, 그리고 귀 속으로 일제히 파고들었다.
사지가 말려 올라갈 정도의 격통과 함께, 하우저는 의식이 완전히 끊어질 때까지 산 채로 뜯어 먹혀야 했다.
소리 없이.
사람다운 발악마저도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