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의 장(6)
10.
신화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화석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마력을 담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새보다 무거운 동물이 창공을 날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나 눈앞에 직접 이 거대한 여덟 쌍의 날개를 들이 민다면, 어느 누구라도 가벼이 확신하진 못하리라.
이토록 어마 무시한 크기를 가진 생물이 한 때 지상에 존재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세간에 전해지는 모든 전설을 다시금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꼬리 끝이 닿는 것만으로도 산을 허물고, 가벼운 날갯짓만으로도 폭풍을 일으킬 수 있는 세계의 지배자.
마물의 왕, 용이···.
“이, 이거··· 죽은 거 맞슴까?”
“요하임, 이 멍청한 자식! 그걸 말이라고 해? 저 앙상한 뼈가지가 안 보이나? 오래 전에 뒈진 시체에 겁이나 집어먹고 덩치가 아깝다.”
“아니, 그러는 하우저 씨도 벌벌 떨고 있지 않슴까?”
“닥쳐! 두 눈이 제대로 박힌 놈이라면 어떻게 저걸 보고도 쫄지 않겠느냐고!”
“···뭐요? 두 눈이 뭐 어째?”
“아, 이건 아가씨를 말하는 게 아니야! 이건 어디까지나 사내들끼리의 자존심 문제··· 어헉!”
니엘에게 자비란 없었다.
마른 남자가 변명을 할 겨를도 없이, 그녀는 냅다 상대의 정강이를 걷어 차버렸다.
어찌나 강렬한 일격인지, 하우저는 자칫 벌레무리로 가득한 바닥에 쓰러질 뻔 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요하임이 서둘러 그를 부축하지 않았다면 정말 그랬을 지도 몰랐다.
“이 꼬마 계집, 무슨 짓이야? 단장의 여동생이라고 대우해줬더니, 베테랑 용병이 우습게 보여?!”
“어머, 나는 비실거리는 댁한테 기합을 넣어준 건데요?”
“뭐야아아아?”
“흥. 다 큰 어른이 가녀린 여자한테 한 대 맞았다고 엄살은!”
니엘은 묘하게 빅터와 비슷한 자세로 팔짱을 끼며 코웃음 쳤다.
바다에서 선원들과 어울리던 시절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 무시무시한 세계에 발을 들인 것치곤 능청스런 모습이었다.
하나, 사실 이런 니엘의 태도는 공포를 숨기기 위한 단순한 허세에 불과했으니.
‘···뭐, 그래도 이건 솔직히 좀 무섭긴 하네. 바다에서 본 가장 큰 고래보다도, 일전에 빅터 사부를 따라서 싸웠던 바다괴물보다 더 끔찍해.’
대형 선박의 용골조차 하찮아 보일 만큼 육중한 골격은 거친 바다에 익숙한 니엘조차 질겁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빅터를 제외한다면···.
이 자리에서 그나마 외적인 냉철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리더인 니코 정도였다.
하지만 그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는지, 뜬금 옛날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언젠가 고향이 없는 부족의 점쟁이 할멈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아득히 먼 과거, 우리의 선조들은 비늘을 가진 거룡과 공존했었다고. 그런데 그게 사실이었단 말인가?”
“나도 변방에 나도는 흔한 전승이라 여겼다. 하나 저걸 보면 그것도 마냥 헛소리는 아니었던 모양이군.”
빅터는 자신의 호기심과 탐구심을 억누르지 않았다.
보다 많은 정보를 읽어내기 위해, 그의 걸음은 사념이 흘러나오는 중심지로 향했다.
하늘로 우뚝 솟은 상아색 유해.
서서히 석질화했을 표면에는 어쩐지 모르게 불온한 기운이 서려있었다.
그것은 주변에 나뒹구는 조각 난 인골들보다도 훨씬 긴 세월을 보낸 것처럼 풍화되어 있었으니···.
빅터는 자신에게만 보이는 환영 속에서 지나간 역사의 진실을 짊어내고자 부단히 애썼다.
‘생전의 모습을 잃어버릴 만큼 뒤섞였는가? 농도는 짙지만 이래선 알아볼 수조차 없군.’
희생자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지나간 감정의 흔적을 파악하기엔 너무도 오랜 시간이 지난 탓이었다.
그럼에도 잔존하는 혼백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극도의 혼란···.
날붙이를 든 한 그림자가 무방비한 또 다른 그림자의 가슴을 찌른다.
인간이 아닌 자를 향한 기도는 머지않아 탄식으로, 사람의 자비에 애원하는 목소리는 어느새 악랄한 저주로 변해 울려 퍼졌다.
‘목적이 뭐지? 얼마나 큰 대의가 있기에, 왜 이토록 많은 피가 필요한 거냐?’
그 의문에 응답하며, 주변을 가득 채운 살의의 소용돌이가 생지옥을 보여주었다.
우는 가면을 쓴 것처럼 흐린 얼굴 여럿이 맴돈다.
수많은 행렬이 줄을 선 채 절망을 기다리는 광경···.
우선적으로는 규율을 어긴 중범죄자.
도둑이나 사기꾼 같은 잡범이 바쳐졌다.
다음은 전쟁에서 잡아온 포로, 타국에서 납치해 온 상관없는 이들···.
이어서는 빈민, 창부, 병자.
노인과 아이 같은 사회적 약자에게까지 그 마수가 뻗쳐지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백 명이 죽었을 때, 처음으로 의식을 주관하는 자에게 미소가 나타났다.
천 명의 목숨이 사라질 쯤, 겨우 태동이 시작되었다.
만 명 가까이 죽고서야 되살린 고대의 존재의 숨결이 뿜어져 나왔다.
그렇게 의미 없는 학살은 수 개월간 지속되었다.
남은 것은 무수한 백성과 신하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소수의 권력자뿐이었다.
“큭···.”
“빅터, 갑자기 왜 그러나?”
“사부님? 괜찮은 거예요?”
투통과 역함을 참아내지 못하고 빅터가 비틀거리자, 천장과 바닥에 붙어있던 벌레의 벽이 파도처럼 요동쳤다.
가시의 방향이 일행을 향하자마자 멈췄어.
빅터의 초인적인 정신력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일행을 모두 당했을 것이었다.
“생각보다 악질이군. 이 장소는 복마전의 제단이다.”
“네?”
“여긴 광기에 사로잡힌 미치광이들의 악의로 만들어진 시체구덩이였던 거다!”
“자네는 그 사이에 또 무엇을 알아낸 건가?”
“한때 이곳에서 번성했던 작은 나라, 약소한 민족이 있었지. 그들은 긴 세월동안 지겹도록 인접국의 침략과 약탈에 시달렸다.”
“클라인 왕국의 비참한 역사라면 나도 어느 정도 알아. 왜냐면 나와 니엘의 뿌리가 여기에 있으니까.”
“그랬나? 의외로군.”
“우린 전장에서 태어났지만, 어머니의 고향이 이쪽 근방이었다. 그러니 우리 남매는 먼 이스트 클라인의 혈통이라 할 수 있어.”
이스트 클라인을 입에 올리는 순간, 그 단어에서 니코의 자부심이 번뜩였다.
이에 빅터는 짐작한다.
니코가 이끄는 고블린즈 용병단이 위험한 국경 수호 의뢰를 받아들인 까닭엔 돈 말고도 애틋한 애향심 비슷한 감정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안심해라. 이건 그보다 훨씬 오래 전의 이야기니까.”
클라인 왕국의 건국 이전에도 이 대지에선 수많은 분쟁이 오갔다.
지난 사건이 잊히는 동안 피의 역사가 되풀이되고 있었을 뿐.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서···.
빅터는 자신이 의식 속에서 본 끔찍한 것들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용병인 자네가 더 잘 알겠지만,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정복전의 잔인성은 극에 달한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했을 정도로.”
지극히 당연한 흐름.
그땐 협정이나 보호조약도 없었을 때야.
힘이 없는 자에겐 스스로의 생명조차 지킬 권리도 주어지지 않던 시기였으므로.
“그래서 적대국의 점령은 멈추질 않았다. 날이 갈수록 영토를 빼앗기기만 했을 테지. 무능한 지배계층은 병력을 소모하기만 했고, 끝내 민중은 지쳐버렸다. 그들은 언제부턴가 자신을 지켜줄 초월적 존재를 갈망하기 시작했어. 마음을 의탁할 신이 필요했던 거지.”
“그게 하필 저 용이란 말인가?”
“음.”
빅터는 불편한 신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이 어디까지 어리석을 수 있는지 진절머리가 났기 때문이었다.
“미개한 사상관을 가진 고대인이 보기에, 저 유해는 숭배하기 충분한 가치가 있었을 테지.”
“지금 미개하다고 했나?”
니코의 표정에 불쾌감이 감돈다.
그는 선조의 과오를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려운 듯 보였다.
“너무 격한 표현이군. 빅터, 자네는 옛 조상에게 일말의 존중도 없나? 물론 나도 이 토굴이 끔찍하다고 느끼고 있지만···.”
“내가 가장 중요한 말을 하지 않았었군. 그들이 멍청하게도 저걸 되살려낼 셈이었단 걸.”
“살려···낸다고?”
말도 안 돼.
그런 게 가능할 리 없다.
지극히 평범한 니코의 관념은 빅터의 허무맹랑한 소리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니, 그래도 어쩌면···.’
한 편으론 또 납득이 가.
니코는 5년 전 동방에서 본디 존재해서는 안 될 괴물의 무리와 싸운 이후로 세상을 보는 관점이 많이 변했다.
심록의 마녀.
그리고 그녀가 만들어 낸 뒤틀린 생물체들···.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동지들과 애꾸가 된 니엘의 비참한 울음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돌아.
그 당시를 떠올리면 잊고 지내던 가공할 공포가 절로 떠올랐다.
“모르겠나, 니코? 살아있는 숲이나 열선을 뿜어내는 거대한 눈알에 비하면, 죽은 용의 잔해에서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내는 것쯤 그닥 신기한 일도 아닐 터.”
더욱이 빅터가 확신한다.
그에게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인간의 피와 살을 재료로 삼아 만들어지는 마녀의 장난감.
이 일연의 모든 과정은 사역마의 탄생과정과 매우 흡사했기 때문에···.
“저 벌레들은 생체 부품이다. 잘은 몰라도, 아마 손실된 용의 육체를 벌레로 가득 채워 하늘에 날려 보낼 셈이었겠지.”
“잠간, 고대라면 수 천 년 전이 아닌가? 지금도 상상 못할 기술을 무슨 수로 옛 선인들이···.”
“마녀들은 언제나 시대가 허락한 것 이상의 지식을 가지고 있으니까. 우리의 적은 예나 지금이나 자연법칙을 깨부수기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족속이다. 시기상으로 볼 때, 초창기 마술의 실험장처럼 보이는군.”
“슬슬 진저리가 다 난다. 여기서 또 마녀 이야기인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실험이 실패했단 사실이었다.
정확한 원인은 모르지만, 여기까지 진행했음에도 용의 부활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어.
어쩌면 들인 수고만큼이나 지나친 마기의 소모량 탓에 계획이 좌초되었을 지도 몰랐다.
“그래도 악영향이 미쳤지. 정작 원흉이 사라졌어도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전통만은 오래도록 남았던 거야. 이스트 클라인의 다른 지방에까지 퍼질 정도로 말이다.”
“믿기지 않네. 아니, 사실은 믿고 싶지 않다. 전부 확인할 길 없는 억측이 아닌가?”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했으면서 알량한 감성에 흔들리는가? 실망이군. 너는 보통 사람들보다 넓은 식견을 가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부하들과 동생 앞에서 날 매도할 셈인가? 이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이 땅에서 살아간 선대의 명예가 걸린 일이니까.”
“멋대로 생각하도록. 아무리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뻔히 보이는 현실까지 부정할 순 없다.”
“···.”
“나와 니엘은 불과 며칠 전에 이와 비슷한 집단학살의 흔적을 발견한 적이 있다. 그게 바로 결정적 증거지.”
니코가 니엘을 본다.
그는 시선으로 사실 여부에 대해 묻고 있었다.
니엘은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응. 맞아, 니코 형. 여기보단 규모가 작았지만··· 그래도 아주 많은 수의 뼈가 나돌고 있었어. 어떤 전쟁터보다 기분 나쁜 무덤이었지. 같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순진한 여동생이 애써 거짓말을 할 리 없다.
니코가 고개를 숙이자, 빅터는 이내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끔찍한 진실에 쐐기를 박았다.
“다시 말해 인신공양이 지방의 낙후된 풍습이나 일부 이교도의 장난질 정도가 아니란 걸 알 수 있지.”
“그러면···.”
“적어도 클라인 왕국 시대에 대대적으로 벌어진 현상일 터.”
“빌어먹을! 결국 나는, 우리는 그 조상들의 피를 물려받은 죄인의 후손이란 말인가?”
니엘은 의아했다.
동부 사람들이 혈통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으나, 니코의 반응은 다소 지나쳐보였기에.
그는 마치 지금껏 지켜온 신념에 큰 상처를 입은 것 마냥 굴었다.
“니코 형? 왜 형이 분해하는 거야? 어차피 옛날 일, 그것도 잘나신 양반들이 저지른 거잖아? 이미 벌어진 사건을 어떻게 할 수도 없는데···.”
“···그래, 니엘. 너에겐 어머니에 대해 자세히 말해준 적이 없었지.”
“응? 으응? 갑자기 여기서 엄마 이야기가 왜 나와? 그리고 가문은 또 웬 놈의 가문? 우리가 무슨 귀족 출신도 아니고.”
니코는 망설였다.
이런 더럽고 습한 곳에서 오래도록 숨겨온 핏줄의 사연을 굳이 꺼내야 할 지를···.
그런데 그때, 빅터가 니코의 어깨를 잡았다.
아직 비밀을 털어놓기엔 이르다고 덧붙이면서.
“니코, 지금은 미루도록 하지. 아직 우리는 적진 한복판에 있다. 괜히 니엘이 동요할 일을 만들 필요는 없지 않나?”
“그건··· 분명 옳은 소리군. 그런데 자네는 대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사사건건 조언을 하는 거지?”
“잘 알다마다.”
“건방지군. 그 희멀건 눈으로 쓱 보면 내 과거라도 읽을 수 있나?”
“물론이지. 과거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건 전부 다.”
빅터의 당당한 대답에 니코는 말문을 잃었다.
이 덩치 큰 사냥꾼이 상황에 맞지 않는 시시한 농담을 할 리가 없기에.
모자 아래로 그늘이 진 탓에 얼굴마저 보이지 않아,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수 초 뒤, 빅터는 고개를 들어 올리더니.
“차라리 잘된 일이다. 좋은 기회라고 여기도록.”
“기회? 그건 또 무슨 의미지?”
“선조가 저지른 과오를 씻어낼 절호의 기회 말이다.”
“···어떻게 말인가?”
“불태우는 거다. 모조리.”
빅터가 내놓은 계획이란 다름 아닌 방화였다.
그의 능력으로 벌레들이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사이, 우물을 통해 대량의 폭약과 기름을 실어온 다음 화마의 먹이로 삼는 것···.
니코는 그 난폭한 의견에 잠깐이나마 난색을 표했으나, 곧 그 외엔 이 불경한 신단을 파괴하는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 또한 괴물의 둥지나 마찬가지인 이 지하 유적에 깊은 혐오를 드러내고 있었기에···.
“알겠다. 그렇다면 바로 실행하지. 하우저, 요하임! 너희는 당장 올라가서 전해라. 창고에 비축한 화약을 있는 대로···.”
직후, 니코의 목소리가 멎는다.
그가 명령을 내릴 부하들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등 뒤에서 느껴지던 그들의 기척이 증발해버렸다.
어둠에 익숙해진 니코가 찾아낸 것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하우저의 장창과, 요하임이 다루던 방패의 일부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