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176화 (176/186)

추적의 장(4)

8.

좁은 입구에 비해 내부는 의외로 넓었다.

보통 수직으로 파내어 만들어졌을 우물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지름이 커지다니?

세월에 의해 안쪽부터 깎여나간 게 아니라면 이는 의도적인 건축인가?

마치 무언가를 가두기 위해 만들어진 것만 같아.

그야말로 기이한 구조라 할 수 있었다.

“힉!”

밧줄에 의지한 채 내려간 지 수 초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 니엘이 소녀다운 비명을 질렀다.

상상 이상으로 축축하고 끈적이는 내벽에 무심코 손이 닿자 진저리를 친 것이었다.

“우엑, 더럽게시리!”

그녀는 반사적으로 진흙이 뭍은 팔을 털어냈다.

조각난 이끼 파편이 먼저 아래를 내려가던 스승의 모자 위에 떨어질 거라곤 상상도 못한 채.

툭, 투둑!

“앗, 죄송···.”

뒤늦게 니엘은 빅터의 눈치를 살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선두로 내려가고 있던 빅터는 여전히 묵묵한 반응.

그러나 정작 니엘을 꾸짖은 것은 바로 다음 차례였던 니코였다.

“정신 사납게 굴지마라. 우리가 물장난이라도 치러가는 줄 아나?”

“아, 응. 미안해, 니코 형.”

“분위기를 파악해라. 너도 남은 눈도 5년 전처럼 잃고 싶은 건 아닐테지?”

“···.”

다소 심한 꾸중에도 불구하고, 평소답지 않게 니엘은 순식간에 주눅이 들었다.

묘한 그리움과 섭섭함이 몰려들었어.

자신을 대하는 니코의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기에.

그것은 예의를 중시하는 빅터와는 또 다른 형태의 엄격함이었다.

한편, 긴장감이 흐르는 남매간의 대화에 끼어 든 이가 있었으니···.

“단장, 오랜만에 만난 여동생에게 너무 까칠한 거 아닙니까?”

한 손에 든 횃불이 초췌한 얼굴을 비춘다.

마치 웃고 있는 해골을 연상시키는 모습···.

살짝 오싹할 정도로 말라붙은 그는 하우저란 이름의 사내였다.

삼백안에 가까운 눈동자는 잔인해보이고 뱀처럼 내민 혀도 징그러웠다.

그의 얼굴은 아무리 봐도 선인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좋지 않은 의도를 감지했는지, 이내 니코가 위를 쏘아보았다.

“하우저, 언제부터 네가 남의 가정사에 참견했지?”

“뭐, 미녀에게 잘 보여서 나쁠 건 없지 않습니까?”

“무슨 뜻이냐?”

“아뇨, 별 의미는 없습니다. 그저 혈육에겐 조금 친절하게 대해줘도 좋지 않나 싶어서요. 가족은 사이좋게 지내야지요.”

“그렇지, 그렇고말고. 귀여운 여자는 특히 말이야.”

이어서 또 다른 목소리가 하우저의 편을 든다.

지금 막 우물을 내려오기 시작한 남자의 음성이었다.

요하임.

이쪽은 빅터만큼 큰 몸집에 사나운 면상의 소유자였다.

그는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밀어버린 자신의 이마를 두드리며 걸걸하게 웃었다.

“그런데 꿈에도 몰랐음다. 단장에게 이런 예쁜 동생이 있을 줄이야.”

“그 입 닥쳐라, 요하임.”

“아니, 왜 그렇게 열을 내심까? 저는 진심어린 칭찬을 한 것뿐인데?”

그러나 니코가 당장 요하임의 히죽거리는 입가를 보았다면 주먹부터 날렸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품고 있는 의도는 누가 보아도 불건전한 것이었기에.

너무나 노골적이야, 가장 가까이 있던 하우저가 단번에 그 속내 간파할 정도였다.

마른 남자는 횃불의 그림자가 일렁일 정도로 격한 폭소를 터뜨렸다.

“키킥! 이거 뻔뻔한 자식일세! 이봐, 요하임. 네 진심이란 게 혹시 그 횃불에 타버린 송진 같은 거냐?”

“하우저 씨, 설마 이 몸의 순정을 의심하는 검까? 이른 바 순수한 흑심이란 겁니다, 예.”

“까고 있네. 너는 가슴달린 사람만 보면 눈이 벌게져서 달려드는 놈 아니었냐?”

“한창 때의 남자가 좋은 여자한테 반응하는 건 당연한 일입죠.”

하우저와 요하임은 자신들의 저급한 욕망을 숨길 생각조차 없는 듯 보였다.

여느 때와 같은 거친 용병들 간의 대화···.

하지만 이번만큼은 니코도 이를 갈았다.

천박한 농담의 대상이 자신의 동생을 향하자 참지 못하고 폭발한 것이었다.

“너희 두 놈, 내 칼에 목이 베이고 싶다면 계속 지껄여 보도록.”

“농담이었습니다, 단장.”

“맞슴다.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십셔. 우린 원래 이런 놈들 아니었슴까?”

반성의 기색따윈 찾아볼 수 없다.

결국 니코가 내놓은 해답은 힘의 논리를 밀어붙이는 것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부로 내 동생 앞에서 더러운 혓바닥을 놀리는 건 날 모욕하는 것과 동급으로 여기겠다. 알아듣겠나?”

“아니, 그건···.”

“하우저, 우리 용병단의 첫 번째 규율이 뭔지 말해봐라.”

“···임무 중 명령에 불복할 시, 단장의 판단 하에 즉결처분, 이라고 알고 있음죠.”

“그 말 그대로다. 둘 다 명심하도록.”

하우저와 요하임이 속으로 불만을 품었지만, 그 이상 니코에게 대들지는 못했다.

그들의 단장은 결코 만만한 사내가 아니야.

검을 다루는 솜씨만으로 우두머리 자리를 꿰찬 니코에겐 두 명이 작당하고 덤벼들어도 이길 거란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니코 형이야. 무뢰배 같은 놈들 기강을 한 번에 잡았어!’

소녀는 5년 전의 오빠를 기억해냈다.

용병단을 세우려고 마음먹은 그 시점에서 이미 니코가 귀족가의 검술 스승으로 돈벌이가 가능할 정도의 실력자였다는 것을.

‘그러고 보니 이거 완전 든든한 거 아닌가? 앞에는 무적의 빅터 사부, 뒤는 니코 형이 버티고 있으니까.’

보호받고 있는 기분.

실로 오랜 만에 느껴보는 묘한 감각에 니엘은 잠깐이지만 배시시 웃어버렸다.

하나, 곧 소녀의 고개는 스스로의 나약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좌우로 흔들렸다.

마냥 의지하고 싶지 않아.

이대로 빅터의 뒤꽁무니를 쫒거나, 니코에게 돌봄만 당한다면 예전과 다를 게 없기 때문에.

스스로가 사냥꾼이 되고자 했던 이유를 다시금 떠올리며, 니엘은 의욕 가득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녀는 어느새 손바닥의 물컹한 촉감 따위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어랏, 빅터 사부? 갑자기 왜 멈추···.”

“바닥이다. 착지할 준비를 해라.”

“···끼약!”

안타깝게도 니엘은 사부가 내리는 지시를 이행하지 못했다.

밧줄의 매듭에 발을 걸치지 못했어.

급히 하강을 멈춘 빅터의 어깨 위에 니엘이 떨어지고 말았다.

“니엘, 무슨 일이냐?”

위에서 니코가 소리치자, 니엘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겨우 입을 열었다.

“아, 아냐. 난 괜찮아. 아무 일도 없어, 니코 형!”

“···그런 모양이군.”

조금 더 내려온 니코의 눈에 비춰진 것은 거구의 덩치가 조카를 목마라도 태운 것만 같은 우스운 모습.

그나마 주변이 어두웠던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그 덕분에 새빨개진 그녀의 얼굴이 모두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었으니···.

하지만 분위기가 누그러진 것과 달리, 지면을 바라보는 니코의 얼굴은 굳어져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분명 돌입 전에 이 아래가 끝없는 나락이라는 걸 빅터에게 설명했었기 때문이다.

불현 듯 없던 바닥이 생기다니.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다.

“빅터, 이게 어떻게 된 건가?”

“놀랄 것 없다. 마기의 영향으로 뒤틀려있던 공간을 복구 시킨 것뿐이니.”

“복구? 자네가?”

“다 그런 수가 있지.”

모든 마법을 부정하고 지워버리는 빅터의 능력에 대해 문외한인 니코가 알 리 없었다.

“아니, 멀쩡하잖아?”

“어느 틈에 그냥 평범한 우물이 되어버린 검까?”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뒤따라 내려온 하우저와 요하임이 동요하는 사이.

빅터는 슬쩍 지면을 더듬고 있었다.

“···습기가 남아있다. 지하수가 마른지는 얼마 안 된 모양이군. 마을에선 우물을 쓰지 않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하던가?”

“1년, 아니 2년 정도라고 했었나?”

“불과 몇 년 전까진 식수로 썼단 말인가?”

“아마도.”

빅터는 칠흑 같은 어둠 속을 주시했다.

겉으로 보기엔 사방에 빈틈없이 담으로 매워진 것 같았지만, 정안을 통해 비춰지는 사냥꾼의 시야는 사뭇 달랐으니···.

“균열이 있다. 그것도 꽤나 많이.”

“내 눈엔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

“그 편이 자네에겐 다행이지.”

“무슨 뜻인가?”

대답 대신 빅터는 거대한 도끼를 들어올렸다.

칼날의 표면이 은은한 푸른빛으로 발광하자, 주변의 기이한 풍경이 본 모습을 드러냈다.

천장의 햇볕이 들지 않는 무저갱, 횃불로도 비출 수 없는 구석진 어둠 안에 도사리고 있던 무언가가···.

“이건··· 으이익!”

내벽을 만지려던 니엘이 화들짝 놀라 뒷걸음쳤다.

왜냐하면, 쌓아올려진 돌담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혈관이 움직이듯 그녀의 눈앞에서 꿈틀거렸기 때문에.

자세히 관찰하자 수많은 균열이 보인다.

손가락 굵기에 머리가 가시로 된 지렁이를 닮은 괴상한 벌레들이 수없이 뭉친 채로 사방을 포위하고 있었다.

“미, 미친··· 이거 온통 벌레새끼들 천지잖아!?”

“단장! 우리가 언제 놈들 소굴에 빠진 거요?”

“둘 다 진정해라. 네놈들이 그러고도 고블린즈의 돌격대라고 할 수 있나?”

니코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벽면에 자리 잡은 벌레들이 당장 공격 해오지 않아.

그는 짐작컨대, 옆에 선 덩치 큰 사냥꾼의 신비한 힘 덕분일거라 생각했다.

“니코, 이것들인가? 시체를 파먹는 괴물이란 건?”

“···그래. 틀림없어. 놈들이 망자의 뱃속에 가득 찼던 벌레다.”

“으으, 뭐 이런 게 다 있담?”

니엘은 몸체 마디마다 용도 불명의 구멍이 뚫린 괴생물을 끔찍하게 바라보면서도, 묘한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잠깐만요! 빅터 사부, 이거 입이 이상하게 생겼···.”

그러다 이내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애벌레라고 생각했던 것의 주둥이가, 묘하게 사람의 구강구조와 흡사한 특징을 가졌단 것을···.

쓸데없이 고른 치열을 보고서 니엘의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본디 결합되어선 안 될 것들이 뒤섞인 기분이야.

소름끼치는 지옥의 단면을 찾아낸 까닭에 소녀의 머릿속에 가벼운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였다.

“너무 가까이 가지마라. 자칫 건드려서 자극이라도 하면 당장 제어에서 풀려날지 모른다.”

“···빅터, 역시 자네가 이 놈들을 억누르고 있는 거였나?”

“대충 비슷하다. 이것들은 아무래도 마기의 영향권 아래서만 움직일 수 있는 모양이니.”

하지만 빅터는 단언하지 않는다.

동방에서 온갖 괴물들과 싸운 그조차 이번 사태는 처음 겪는 일이었기에.

“이봐, 왜 여태 우린 이걸 눈치 채지 못한 거지?”

하우저가 대끔 묻는다.

그는 사냥꾼의 가호아래 자신이 무사할 수 있단 걸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알아듣게 설명 좀 해주쇼. 댁은 이런 해괴망측한 일 전문이라고 했지 않나?”

“단순하지. 빛의 굴절을 이용한 단순한 착시다.”

“뭐? 굴··· 착시?”

“그것만으로 우린 코앞의 사물조차 인식하지 못하지. 사람의 눈은 그다지 좋은 물건이 아니라서.”

“아니, 이거··· 직접 보고도 믿기지가 않는군.”

“의태하는 생물은 자연계에 썩 흔하다. 개중엔 감쪽같이 나뭇가지나 낙엽을 흉내 내는 놈들도 있을 정도니까.”

나무의 일부로 위장한 가랑잎벌레, 그리고 낙엽사마귀.

그것은 천적에게서 은신하거나, 사냥을 위해 주변의 물체와 비슷하게 위장하는 대표적인 생물들이었다.

“그게··· 이것과 같은 경우라고? 이런 추악한 것들이 조물주의 작품이란 소리요?”

쉽게 납득하지 못했는지 하우저의 양쪽 눈이 각기 다른 크기로 찌푸려졌다.

의외로 독실한 신앙을 가진 모양이었다.

“불신자인 나에게서 그 대답을 기대하지 마라. 만물을 창조한 신의 존재 따윈 관심도 없으니. 하지만 지금 네 눈에 비춰지는 것이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다.”

현실.

그 단어에 급격한 위기감이 몰려들어.

눈치가 빠른 용병들은 그제야 자신들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이어서 칼집에서 검을 뽑아든 니코가 입을 열였다.

“···자네 같은 사냥꾼들은 저걸 뭐라고 부르나? 역시 마물인가?”

“아니.”

빅터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답한다.

우물 내벽에 들러붙은 것들의 정체에 대해.

“이 세계엔 아직 우리가 모르는 생물들이 많이 있다. 단지 그 뿐이지.”

고농도의 마기에 적응하고, 돌담으로 의태하며 동시에 인육을 탐하는 유충 형태의 유조동물.

얕은 지식으로 빅터가 내린 분석은 그것이 전부였다.

하나, 그는 애초에 생물학자가 아니야.

빅터의 목적은 오로지 마의 근원을 잘라내는 것에 있었다.

“이 정도에 놀라기엔 아직 일러. 우리가 찾아내야할 것은 좀 더 깊숙한 곳에 있다.”

빅터는 가볍게 쥔 왼손을 벌레의 벽에다 밀착시켰다.

그러자 시원스런 굉음과 함께 표면이 날아갔다.

빅터가 내지른 파쇄권이 우물의 내벽을 꿰뚫은 것이었다.

그의 앞에는 어느새 큼지막한 암굴이 만들어져있었다.

“아무리 봐도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건 아닌 것 같군.”

“빅터, 자네는 이 안에 뭐가 있는지 아는 건가?”

“글쎄. 직접 마주하기 전까진 모르지.”

저벅.

빅터는 망설임 없이 지하통로에 발을 내딛었다.

뭐가 나오든 상관없어.

빅터는 처음부터 이 안에 존재하는 모든 기이를 베어낼 생각이었다.

그늘이 드리워진 우물 속에서 살의를 품은 사냥꾼의 희멀건 눈동자가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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