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의 장(1)
1.
마을의 비극을 경험한 뒤로, 니엘은 이틀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녀 사냥꾼이란 직업 자체에 의구심이 생겼어, 그들이 마냥 세상을 구하기 위해 싸우는 영웅 같은 게 아님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멍청하긴···. 난 대체 뭘 기대했던 걸까?’
니엘은 극적인 인생의 변화를 바랐다.
어릴 적부터 용병들과 어울리고, 몇 해나 바다에서 지낸 이상, 이제 와서 평범한 여인의 삶으론 돌아갈 수 없어.
그렇다면 더욱 더 특별해 지리라 다짐했다.
그래서 그녀는 비범한 사냥꾼들에게 동경을 품었다.
자신도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가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니엘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잔인했다.
마을은 떠난 직후, 빅터가 건넨 이야기가 그녀의 머릿속에 계속 맴돌고 있었다.
‘이제 알겠나, 니엘? 우리는 구원자가 아니다. 언제나 한 발자국 늦지. 항상 잃고 빼앗길 뿐이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게 뒤처리를 하는 정도···.
그렇다면 마녀 사냥꾼은 어둠과 맞서는 내내 이 절망감과 함께 살아가야만 한다.
견딜 수 있을 것인가?
그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기약 없는 싸움에 남은 청춘마저 바치는 가혹한 미래를?
‘···그러고 보면, 빅터 사부는 쭉 내가 사냥꾼의 일원이 되지 않길 바라는 것 같았어. 이 여행은 단지 날 시험하려던 거였을까? 내가 언제 우는 소릴 할 지 기대나 하면서?’
그녀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마녀 사냥꾼의 각오를 되새길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걸 받아들이고 전선에서 물러날 것인지를···.
그럼에도 이 순간까지 니엘은 알지 못했다.
그녀가 결정을 내리기엔 주어진 여유가 얼마 없다는 걸.
이 시점에서 이미 잔혹한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아가고 있었다.
2.
몇 차례 비슷해 보이는 산길을 나아간 지 나흘 째 되던 날.
빅터가 갑자기 말의 고삐를 놓았다.
길이 끊어졌어.
눈앞에는 적나라하게 이상한 흔적이 펼쳐져있었다.
넓은 지면이 강력한 압력에 눌린 것처럼 움푹 파여진 상태···.
결코 자연적인 모습이 아니야, 빅터가 오랜만에 무거운 한마디를 뱉어냈다.
“제대로 찾아왔군.”
마차가 움직이지 않자, 니엘이 바깥을 내다본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에도 놀라운 변화가 일었다.
새의 것을 닮은 발자국.
하지만 크기가 엄청나게 거대해.
어딜 봐도 평범한 짐승의 것 일리 없었다.
이것이 용의 흔적인가?
그 동안 반신반의했지만, 니엘은 어느 시점부터 세삼 빅터의 조사에 현실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놀랐나, 니엘?”
“···.”
“동화 속의 존재가 실제로 나타난 게 그토록 두려운가?”
신경을 긁는 소리.
빅터가 짓궂게 묻자 니엘은 다시 고개를 획 돌렸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대화하기엔 아직 일러.
그녀에겐 마음이 풀리기까지 조금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하나, 니엘도 한 가지 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람의 몸집 보다 거의 열 배 이상 거대한 발도장이라니···.
그런 무시무시한 흔적을 보고도 주눅이 들지 않는 것이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기에.
“···이봐요, 빅터 사부님.”
며칠 만에 니엘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마차에서 내려와, 먼저 바닥의 흔적을 살피는 빅터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게 언젠가 우리가 대면해야 할 적이다 그거죠?”
단순 크기만으로도 앞서 만난 리저드맨 따위와 차원이 다르다.
사역마, 그것의 상위 개체인 중합체···.
아니, 어쩌면 그보다 무서운 괴물일지도 몰라.
문득 찾아오는 불안감에, 니엘은 빅터에게서 확고한 승리의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런데 정작 빅터는 돌아보지도 않고서···.
“드디어 입을 열 생각이 들었나? 충격이 커서 실어증에라도 걸렸나 했는데.”
“흥, 비꼬시긴. 가뜩이나 지루한 여행에다, 말수까지 적은 댁이 유일한 동반자인데 나라도 떠들어야지 별 수 있겠냐고요?”
“결심은 섰나?”
“그런 거 모르거든요?. 내가 언제부터 앞일 생각하고 살았나, 뭐?”
어려울 것은 없었다.
당장 직면한 일을 순차적으로 해결하는 걸로 충분해.
그것이야말로 지금껏 니엘이 걸어온 인생이었다.
이식을 받기 전, 마녀 사냥꾼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이 떠올라.
사실 빅터도 니엘의 초조함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으니···.
“하지만 두려움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
“하, 또 설교하시게요?”
“너무 나쁘게 듣지 말아라. 너에겐 나나 다른 사냥꾼들과 달리 부족한 것이 있으니.”
“하, 이거 존심 상하게 왜 이래요? 부족하다뇨? 대체 뭐가?”
“마를 증오하는 마음, 그리고 마녀에 대한 분노가 모자라.”
“그거야···.”
니엘은 반론을 이어가려다 멈칫했다.
잘 생각해보니 빅터의 말이 크게 틀린 것도 없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원한이 없어.
근본적으로 달랐던 것이다.
목적 자체가 마녀에게 복수를 살아가는 이들과 전혀···.
“아랑은 헛된 미신과 부조리한 마을의 풍습 때문에 동생을 잃었지. 그래서 자신과 같은 아픔이 반복되길 원하지 않는다. 착하지만 강단이 있어.”
“음, 그 흉터 꼬마는 나이에 안 어울리게 의젓하기도 했었죠.”
“리리 리에겐 과거의 기억이 없다. 그 탓에 정신연령이 어리지만, 순수함도 함께 가졌어. 한때 마녀가 될 뻔했던 몸이기에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네네, 그 계집애는 제 꼬맹이 시절보다 철이 없긴 하더라고요.”
“하나, 그 몸속엔 나조차 모르는 미지의 힘이 숨겨져 있다. 미래가 촉망되는 인재, 어떤 의미에선 마와 싸우기 위해 태어난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지. 결국 사냥꾼 말고는 달리 선택지가 없는 아이다.”
“···굳이 어린애들이랑 비교하고, 결국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맥락상 좋은 이야기가 나올 리 없다.
니엘은 빅터가 곧 내뱉을 쓴 소리를 각오했다.
“그런데 니엘, 너에겐 뭐가 있지?”
“···.”
“남들보다 조금 나은 칼솜씨, 객기 넘치는 무모함 정도로 통할 만큼 마녀 사냥꾼의 길은 만만한 게 아니다.”
“그래서 그만두라고요? 여기까지 와서?”
“더 못 심한 꼴을 보고 싶은가?”
빅터는 아래쪽에 선명하게 박힌 용의 발자국을 가리키더니.
“너와 나는 가까운 시일 내로 이것의 주인과 마주할 거다.”
“그게 뭐 어쨌단···.”
“어설프게 적당주의로 넘길 생각은 마라. 이번 적은 그만큼 강대하니까.”
이어서 빅터는 설명한다.
일전의 산사태의 원흉과 발자국의 크기로 미뤄봤을 때.
용으로 불리는 마물의 덩치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에 대해서···.
“꼬리에 살짝 닿은 것만으로도 산맥을 허물 정도의 마물이다. 놈이 양 날개를 펼치면 거의 500피트(152m)에 육박하겠지. 오거급 중합체도 이것에 비하면 양반이야.”
즉, 두 사람은 성보다 육중한 괴물과 맞서야 한다.
그것은 니엘이 자랑하는 바스타드 소드 조차 이쑤시개로 보일 정도의 차이였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도망이라도 칠 줄 아나요? 질질 짜면서 순순히 물러날 거라 생각했어요?”
니엘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빅터의 걱정이 그녀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었다.
“잊었나본데, 나도 형씨들을 따라 바다 괴물 뱃속까지 들어갔었거든요? 용 따위에 겁먹을 정도로 겁쟁이였음 애초에 배에서 내리지도 않았어!”
이 정도에 쫄면 마녀 사냥꾼이 될 수 없다.
어둠을 모르는 일반인이랍시고 더 이상 빅터에게 얕보이고 싶지 않아.
여기서 물러나면 정말 이도저도 아니게 된다.
니엘은 반쯤 그런 오기로 고개를 들었다.
“마음을 읽을 줄 안다면서요, 낮도깨비 형씨? 그런데 내가 싫어할 소리만 골라서 하는 이유가 뭐죠? 댁도 알잖아요? 난 어린애 취급당하는 거 질색이라고! 나름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아왔단 말씀이야!”
애꾸의 여인은 자신의 안대에 손을 올린다.
“내가 증오가 부족하다고요? 웃기지 마요! 난 말이죠, 이 눈깔을 잃은 이후로 한 시도 열 받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요! 항상 후회했어! 그때, 내가 어리지만 않았으면 이딴 상처가 생기지 않았을 거라고···!”
그랬으면 니코에게 버림받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여전히 용병단에 남아서 식구들과 어울렸으리라.
그 안에 담겨있는 것은 어린 날의 치기···.
이따금씩 몰려오는 욱신거림은 유년기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성장통이다.
소녀는 5년 전부터도 하루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어.
한 사람의 전력으로 인정받기만을 바랐다.
그리고 지금 비로소 기회가 왔다.
니엘은 그런 확신이 들었다.
어떤 위협에도 물러나지 않는 이 사내와 함께라면···.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자연스럽게 성장할 것이라고.
“어둠의 본질이니 뭐니, 아무리 궁리해봐야 난 머리가 나빠서 모르겠네요. 슬픔 밖에 남지 않는 싸움? 눈물 펑펑 흘릴 정도로 감수성이 예민하지도 않고···. 아무튼 마주하는 족족 나쁜 놈들은 무찌르고, 구할 수 있는 건 최대한 건저내면 그만 아닌가요? 네?”
“단순하기 짝이 없다. 고작 그게 네가 고민 끝에 내놓은 결론인가?”
“그래요! 불만이라도 있나요? 그럼 이번 기회에 한 번 허심탄회하게 말해보시던가! 사부님이 뭐라하던, 이젠 오기로라도 쫒아가 줄 테니까!”
“나쁘지 않군.”
“흥, 나이도 고작 두 배 차이 밖에 안 나는데 잘난 척 하시긴. 전장에서의 경험은 이쪽이 훨씬! ···어? 지금 뭐라고 하셨죠?”
“너치곤 훌륭한 대답이었다.”
“그···거 칭찬이에요? 네? 방금 저한테 훌륭하다고 한 거 맞죠?”
니엘의 기세등등한 태도에 빅터의 입가가 슬쩍 웃었다.
그거야말로 그가 듣고싶은 대답이었으니.
빅터가 니엘을 마주본다.
이어서 그는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려 살짝 엇나간 모자를 제대로 씌워주었다.
“지금의 격정을 잊지 말도록. 그 순수한 감정이야말로 우리 마녀 사냥꾼의 원동력이니까.”
“어, 어어···?”
“네겐 소질이 있다. 대스승 밑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법만 배운다면, 몇 년 안에 금방 홀로 설 수 있을 테지.”
벙 찐 표정을 짓는 니엘.
그녀는 잔뜩 매도만 받다가 돌연 칭찬이 떨어지자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설마하니, 빅터가 자신이 결심할 수 있도록 교묘히 대화를 유도한 것일까?
“···사부님, 혹시 기운 차리게 해주려고 쓴 소리한 건 아니겠죠? 나한테 충격 요법이라도 쓸 셈이었어요?”
“글쎄.”
“성격 참 나쁘시네. 기왕이면 좀 곱게 말해주면 어디 덧나나요?”
“어설픈 위로를 바랐나?”
“신경 써 달라고요! 이래 봐도 사춘기 아가씨란 말이에요!”
왠지 휘둘린 기분이 들어, 니엘이 뒤늦게 성난 얼굴로 고개를 들었지만···.
빅터는 어느새 마부석에 올라있었다.
“뭘 멍하니 서 있나? 얼른 타지 않고.”
“으··· 그렇게 어물쩍 넘기시겠다? 나중에 두고 봅시다, 빅터 사부니임···.”
“기대하마.”
“열 받아! 표정 한 번 한 변하시네!”
드세게 말을 내뱉지만, 다행히도 새내기 제자의 마음은 어느 정도 풀린 모양이었다.
길었던 침묵이 거짓말처럼 니엘은 어느새 다시금 미소를 되찾았다.
3.
마차의 바퀴가 다시 멈춘 것은 그로부터 수 시간이 지난 뒤였다.
숲을 등진 채 우뚝 솟은 두 개의 목조 경계 탑.
외곽을 가득 매운 울타리들 사이에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가 자리 잡고 있어.
일견 전선을 앞둔 요새와 같아.
측면에 숲을 우회하는 통로가 보이지만, 이방인의 출입만큼은 철저히 막아낼 거란 의지가 엿보이는 구조였다.
“짐을 챙기도록. 오늘 밤은 이곳에서 묵는다.”
“웬일이래요? 한동안 마을엔 안 들릴 거라 하셨으면서?”
얼굴을 내밀어 주변 경관을 탐색하는 니엘.
빅터가 자신을 생각해서 하루 쯤 쉬어가려는 건가 기대하지만, 곧 그녀의 얼굴은 실망의 빛으로 물들었다.
“여기 완전 깡촌이잖···.”
외견상 마을의 규모는 넓다.
그러나 철책과 나무판이 사방을 틀어막곤 있는 꼴이 황량하기만 해.
어딜 봐도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이런 곳에서 고급스런 숙박시설을 기대하기란 힘들 것이리라.
“착각하지 마라, 니엘. 우린 관광이나 하려고 여길 방문하는 게 아니니까.”
“그럼요?”
“목격자를 찾기 위해서다.”
가까운 곳에 용이 내려온 흔적이 있는 만큼 인근에 사는 누군가가 두 눈으로 직접 봤을 가능성이 높다.
빅터는 자신이 쓰러뜨려야 할 적의 정체를 보다 확실하게 밝히고 싶었다.
“후, 그래도 간만에 침대에서 잘 순 있는 거죠?”
“마땅한 숙소가 있다면 말이지.”
시설이 엉망이라도 따뜻한 식사와 포근한 이불이면 만족해.
그렇게 니엘이 행복의 기준을 타협하려는 찰나···.
“잠깐 멈추시오!”
“이방인은 허가 없이 마을에 들어올 수 없소!”
멀리서 가죽갑옷으로 무장한 젊은 남자 한명이 급히 다가왔다.
검을 뽑지는 않았지만 눈매가 제법 매서워.
추정하건데 그는 마을 자경단처럼 보였다.
“당장 신원을 밝히시오.”
한때 마을의 치안관으로 살아왔던 경험 때문이었을까?
상대의 강압적인 태도에 불구하고 빅터는 가능한 점잖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프르하임의 빅터. 그리고 저 아이는 니엘이외다.”
“도르프하임? 그 먼 곳에서 여긴 어쩐 일로?”
“우리는 크로이 가에서 고용된 일꾼들이오. 이스트 클라인 바깥을 향하는 길이지. 이 마을엔 하룻밤 신세지러 들렸소.”
“그런데 둘 다 행색이 특이하시구만. 부녀지간에 여행이라도 하는 거요?”
부녀.
그 한마디에 니엘의 입가가 히죽 장난스런 미소를 그렸다.
“들었어요? 부녀라는데요, 빅터 아빠?”
“···너는 잠자코 있어라.”
니엘의 농을 무시하고, 이어서 빅터는 서류를 꺼내들었다.
이런 일이 생길 것을 미리 예상해서 아이라가 써준 소개장이었다.
“힘줄과 피역을 대량매입하기 위해서라···. 남단 쪽은 잡을 짐승이 그리도 없소?”
“졸부들의 사냥 놀이가 여간 심해서 말이지.”
“하긴, 그 양반들은 가죽이 상하는 걸 신경 쓰지 않으니까.”
복장에 대해선 아직 의구심이 남은 듯 보이나, 그는 빅터가 대화가 통하는 상대란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뭔가가 부족한 모양인지···.
“으음, 그래도 이보다 공신력 있는 증명서가 필요한데···.”
“이걸로도 모자라나? 변방치곤 너무 경비가 삼엄한 게 아닌가?”
“쯧, 우리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소. 그치만 살반 가에서 직접 명령을 내렸으니 따를 수밖에.”
“살반 가?”
“영주의 이름이오.”
이번엔 청년 쪽이 빅터에게 슬쩍 뭔가를 내밀어보였다.
공문.
일대를 지배하는 영주의 지시가 적혀있는 두루마기였다.
그 내용은 경유지를 지나는 모든 이들의 짐을 살펴보고, 또한 신분이 보증된 자만을 들여보내란 일방적 선언으로···.
시골의 출입확인치곤 꽤나 노골적인 검문이었다.
“에이, 오빠. 적당히 모른 척 통과시켜주면 안 돼요? 우린 수상한 사람이 아닌데···.”
평소와 다르게 요염한 말투를 흉내내는 니엘.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역효과만 낳았다.
경비 일에 잔뼈가 굵은 상대에게 회유를 걸어봐야 괜한 경계심만 부추길 따름이었기에.
“물러나주시오. 우리도 사정이 이러하니···.”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이해해주는 거요?”
“암.”
슥.
거구의 사냥꾼이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포기할 기색이 보이지 않아.
빅터는 경비들에게 암시를 걸어 강행돌파 할 셈이었다.
하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빅터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 순간 의외의 인물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기 때문에···.
“괜찮다. 보내주도록.”
청년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짙은 고동색 머리카락 아래로 이마가 드러난 각진 얼굴이 보였다.
손질하지 않은 수염이 더부룩해.
하지만 그것이 묘하게 남자다운 인상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는 등에 칼집을 짊어진 큰 키의 사내였다.
“대장님? 하지만···.”
“이들의 신원은 내가 보증하지.”
“켁!”
대장이라 불린 남자가 앞으로 나서자, 니엘이 깜짝 놀라서 빅터의 뒤로 숨었다.
빅터는 상대와 마주하며 의외의 재회에 미소지었다.
“오랜만에 보는군. 도펠죌트너.”
“슬슬 당신네가 방문할 거라 생각하던 참이었지, 사냥꾼 나으리.”
“무적의 용병단은 아직 건재한가?”
대답할 필요도 없다는 듯, 수염의 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빅터는 그에게서 상당한 자신감의 파동을 읽었다.
“그보다, 슬슬 설명해줄 텐가? 왜 내 동생이 여기 있는지, 그것도 댁과 같은 복장인 이유가 뭔지 말이야.”
“그건 본인에게 직접 듣는 게 좋지 않겠나?”
“그렇군. ···니엘, 언제까지 숨어있을 셈이지?”
“으··· 으아으으.”
과연, 그녀가 동쪽으로 가고 싶지 않아했던 이유는 여기에 있었는가?
애꾸의 여인은 난처한 얼굴을 내밀더니.
“니, 니코 형···. 오, 오랜만이야.”
웃는지 우는지 모를 표정으로 겨우 인사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