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171화 (171/186)

징조의 장(7)

12.

순식간에 남자가 죽었다.

불현 듯 뒤통수에 날아든 화살이 꿰뚫려 즉사했다.

빅터는 창 밖에서 느껴지는 살의의 진원지를 파악했다.

그 수는 열 댓 명 남짓.

사내의 집을 둘러싸고 있는 무리가 있었다.

빅터는 그들의 배치를 뇌리에 새기고서 두 눈을 감았다.

‘기억했다.’

번쩍.

눈앞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광휘와 함께 빅터의 정신이 시간을 거스른다.

수 초 사이의 현상이 역순하기 시작했어.

사실 이는 머릿속에서 일어난 고차원의 예지.

빅터가 곧 일어날 상황을 예지한 것이었다.

“모처럼 내가 좋은 마음으로 착한 일 좀 해보려···.”

상황은 니엘이 남자를 후려갈기려는 마음을 먹은 그 시점으로 돌아왔다.

빅터의 다리는 어느덧 그녀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앞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꺅!”

빅터는 최면에 빠져 무방비해진 남자를 창가에서 밀어내고, 동시에 니엘의 허리를 낚아챘다.

“뭐에요, 사부님!? 왜 말리시는···.”

파팟!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입을 놀리자마자 그녀의 이마 바로 앞에서 머리카락 몇 가닥이 사라졌기 때문에.

화살이 거의 종이 한 장 차이로 정면을 지나간 것이었다.

“헉, 허어헉! 나, 나는 지금껏 무엇을···.”

바닥에 넘어진 남자가 위를 올려다본다.

나자빠진 충격으로 암시에서 풀려난 모양이었다.

“당신··· 대체 내게 뭘 한 거요?”

“알 거 없다. 네놈은 계속 머리나 숙이고 있도록.”

“무슨?!”

투두둑!

방 안의 벽에 몇 발의 화살이 더 날아와 박히자, 집 주인은 겨우 상황을 파악했다.

“설마 그쪽이 날 구해준 거요?”

“바깥에 성가신 놈들이 찾아온 것 같군.”

“···아니, 잠깐만··· 말도 안 돼. 왜 저들이 나를?”

그는 적에 대해 아는 눈치였다.

공포에 질린 사내의 생각을 읽고서, 빅터는 창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저 자들이 너희에게 거래를 제안한 노예상인인가?”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서, 빅터는 즉시 화살에 의해 금이 간 유리창을 도끼로 모조리 깨뜨렸다.

그리곤 파편으로 가득한 창틀을 부츠로 밟고서 대놓고 상체를 드러냈다.

커다란 표적을 확인한 저격수들이 그걸 마냥 내버려둘 리가 없어.

곧바로 쇠뇌의 시위가 당겨졌지만, 화살은 빅터가 휘두른 무기에 막혀 타겟에 닿지도 못했다.

척!

몰아치는 저격을 가볍게 막아내고서 거구의 사냥꾼이 몸을 일으킨다.

밖을 바라보는 그의 매서운 시선에는,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괴한들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망토와 회백색 후드를 깊게 눌러 쓴 수상한 무리.

서른 걸음 앞의 그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산적치곤 꽤 좋은 무기를 쓰는군. 사람 목숨으로 장사하는 게 돈 벌이가 쏠쏠한가?”

빅터의 비꼼에 상대방은 행동으로 답했다.

철컹!

정면의 다섯이 빅터에게 겨누던 쇠뇌를 아래로 향한다.

이것은 적의를 버린 것이 아니야, 지렛대를 이용한 능숙하고도 재빠른 장전이었다.

이어서 주변을 점거하던 다른 놈들도 거리를 좁혀온다.

몇몇이 검까지 꺼내드는 것을 보아 빅터와 집 안의 남자를 놓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뭉개버린 다음 이야기를 진행하면 그만이다.

빅터는 도끼를 짊어진 채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런데 그 순간···.

“···워워, 사격 중지. 이거 예상치 못한 손님이 계셨군요?”

짝짝짝.

느닷없는 박수소리가 울렸다.

“탐이 날 정도의 무력이네요. 이만한 인원을 앞에 두고서도 전혀 겁먹지 않는 그 기개, 거기다 도끼를 자유자제로 다루는 그 솜씨까지··· 실로 훌륭한 인재이지 않습니까?”

말투에 어울리지 않는 부드럽고 나긋한 음성.

진영을 다잡은 무리 사이로 하나의 그림자 끼어들었다.

그는 비교적 작은 몸집의 소유자였다.

“덕분에 좋은 구경을 했습니다. 과연, 음유시인들의 전장 영웅담도 과장은 아니랄까요? 설마 이런 시골에 귀공같이 용맹한 전사가 있을 줄이야!”

또 다른 인물이 나서자 괴한들이 길을 만든다.

덩치는 외소하기 그지없었지만 거침없는 분위기를 미루어 볼 때, 이 자가 무리의 수장인 모양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들지 않은 양손을 펼쳐 보이며 다가오더니.

“부디 우리의 실수에 기분이 상하지 않았길 바라겠습니다. 고의는 아니었어요. 쥐새끼를 잡으려고 했는데, 달리 방문자가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 거든요.”

“잘도 지껄이는군. 화살을 열 발 가까이 쏜 주제에.”

“아핫, 그건 좀 심하긴 했죠. 그런데 귀공은 누구신가요? 행색은 영락없이 사냥꾼인데, 아무리 봐도 그 흉흉한 날붙이는 보통의 것이 아니군요. 무슨 목적으로, 어디에서 오셨나요?”

계속해서 친한 척 말을 걸어오는 상대.

하지만 빅터는 한층 더 적개심을 품고 날카롭게 대꾸했다.

“면상을 숨긴 주제에 고상한 척 지껄이지 마라. 남에게 뭔가 물으려면 우선 얼굴부터 드러내는 게 변방의 예법일 텐데?”

“아핫, 그렇네요. 반론의 여지없이 옳은 말이에요. 제 무례를 용서해주시길. 신분을 감출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거든요.”

스륵.

눈앞의 상대가 후드를 벗자, 의외의 미모가 나타났다.

이십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미청년.

그는 공들여 가꾼 것으로 추정되는 웨이브지고 기다란 갈색 머리칼의 소유자였다.

앞머리로 오른쪽 얼굴을 완전히 가리는 특이한 꾸밈새.

하지만 그것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왼편의 심홍색 눈동자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한층 더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으니···.

그 진면목은 진주색의 피부와 가느다란 턱선, 그리고 기다란 속눈썹에 있었다.

드러난 상대의 얼굴이 자칫 여자라고 오해할 정도로 곱상했던 것이다.

조금만 더 음역대가 높았다면, 니엘보다도 아가씨란 호칭에 어울릴 지도 몰랐다.

“소개하지요. 저는 알데카. 본명은 알데카인 하이네라고 합니다.”

이어서 상대는 입가를 히죽거리며 기품 있는 손짓을 보였다.

잘난 척 성씨를 자랑스럽게 밝히는 미청년.

그는 빅터의 놀란 반응을 기대하고 있었다.

“세간에는 프로스트 공국의 감찰관이자, 명망 높은 하이데 가의 당주로 알려져 있죠. 어떤가요? 이제 저를 알아 보시겠나요?”

귀족에게 머리를 숙이며 겸손한 태도로 나오길 바라는가?

자신을 알데카라 소개한 자는 한쪽만 드러난 눈을 반짝이며 빅터의 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정작 빅터는 상대의 정체에 대해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듯이···.

“그래서 잘나신 공국출신 나부랭이가 왜 여기에 있지? 요란하게 사병까지 이끌고서.”

“아핫, 이 몸이 하이데 가문을 입에 올렸는데도 그렇게 나오시긴가요?”

청년은 당혹스런 표정으로 턱을 괴더니, 뭔가를 깨달은 것 마냥 또 한 번 박수를 쳤다.

“아! 혹시 식견이 부족하신 분입니까? 그럼 어쩔 수 없지요. 이해해요. 분수에 대해 공부한 것이 없는 평민이라면 모를 만도 하지요. 제 배려가 부족 했구만!”

청년은 폭소했다.

겉으로는 신분의 차를 신경 쓰지 않는 유쾌한 웃음.

하나 빅터는 알았다.

사실은 그의 속이 뒤틀려, 내면은 비위가 상해 꿈틀거리고 있단 사실을.

“닥쳐라.”

“···네?”

“아일론 국경을 넘어온 시점에서 네놈은 그저 외부인에 불과하다. 많이 배운 귀족이라면서 그 정도 상식도 모르나?”

여긴 무도회장도 궁전도 아니다.

빅터가 그렇게 말하자, 청년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이거··· 어디서 오해가 생긴 모양이군요. 귀공은 뭐가 문제라 제게 이토록 모멸감을 주려는 거죠?”

“인간을 사들이는 새끼에게 더 무슨 말이 필요한가?”

“듣자하니 불쾌하군요. 너무 심하게 말하시네요. 누구에게 무슨 이야길 들었는지 몰라도, 그게 다 나름의 까닭이 있는 법이거든요.”

“까닭이라고?”

“서로 깨끗한 척은 그만두죠. 조약이 있다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노예거래가 뭐 대수인가요?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걸까? 가뜩이나 여러 민족이 몰린 연합국 아일론의 대도시에서선 흔한 풍경일 텐데요?”

이 사실만은 빅터도 부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실질적으로 인간은 돈이 되기에.

좋든 싫든 세상 어딘가엔 항상 누군가에게 노역당하는 인부와, 매음굴에서 몸을 파는 창녀가 공존하는 법이다.

그것은 막을 수 없는 거대한 시대의 흐름···.

더욱이 마녀 사냥꾼의 원칙상 국가에 소속되지 않아.

즉, 다른 말로 정치에도 일절 끼어들지 않는단 의미기도 했다.

“물론 저도 떳떳하진 않죠. 다소 인리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이 몸은 국익을 위해 몰래 활동할 뿐입니다. 아시겠나요? 지배하는 쪽 입장도 곤란하다고요. 우리 공국엔 최대한 많은 노예가 필요하거든요. 험한 일에 소중한 백성을 소모할 순 없지 않습니까?”

“···.”

“그런 의미에서 귀공이 못 본 척을 해준다면, 우리 사이엔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습니다. 대가는 이 정도면 어떨까요?”

그는 빅터에게 회유를 시도할 셈이야.

연신 생글거리며 망토에서 한줌 가득 뭔가를 꺼내보였다.

금화와 은화.

그리고 여러 개의 붉은 보석이 섞여있는 주머니였다.

“영롱하지요? 시장에선 집 한 채의 시세로 거래되기도 하는 물건입니다. 이 적석 하나로 귀공은 수년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먹고 살 수 있다고요?”

“재미있어.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로군.”

“아핫, 이제야 말이 좀 통할까요?”

아무렴.

···이라고 빅터는 쿡쿡거리면 답했다.

이때, 빅터는 처음으로 청년의 앞에서 솔직한 감정을 보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상대에 대한 혐오만이 담겨있을 뿐이었으니.

“헛웃음이 절로 난다. 수치도 모르고, 대국이란 것들이 마녀와 붙어먹었다니.”

순간, 청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이런, 거기까지 알고 있다면 곤란한데요. 아주 곤란해요.”

“너희는 각지에 재앙을 일으키고, 맘몬의 적석을 퍼뜨리고 있다. 프로스트 공국은 대체 뭘 노리고 있는 거지?”

“하, 그 사이에 피에트로에게 들었습니까? 이거 양쪽 다 입막음을 하기엔 너무 늦은 것 같네요.”

피에트로.

그 이름은 빅터와 니엘을 이 마을로 안내한 사내의 본명이었다.

“참으로 유감입니다. 겨우 쓸만한 인간 부하를 얻나 했는데···.”

상대가 본성을 드러내려 한다.

그의 오른손이 기울어짐과 동시에 쇠뇌를 든 무리가 살기를 품었다.

이들은 언제든 청년의 지시에 따라 공격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당신이 아무리 강해봐야 고작해야 한 명의 사람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쪽은 다르거든요.”

그 발언은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자신하는 것이 아니야.

청년의 의도는 좀 더 다른 부분을 강조하고 있었으니.

그건 바로 ‘인간’의 여부에 대해서였다.

팟.

청년이 손짓하자 괴한들은 일제히 후드를 벗어던졌다.

이윽고 이형의 마물들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세로로 길쭉한 동공이 번뜩인다.

칠흑과 회백색의 비늘로 가득한 안면.

흉하게 튀어나온 주둥이 사이에는 날카롭고 뾰족한 이빨이 가득해.

단지 두 다리로 걷고 있을 뿐, 그들은 누가 봐도 거대한 파충류에 가까운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용인Draconian. 아니, 이쪽에선 리저드맨Lizardman이라고 했던가? 뭐, 명칭이야 어느 쪽이든 좋겠죠. 어차피 말 잘 듣고 강한 친구들이니까.”

“마녀에게서 받은 괴물을 수족으로 부리는가?”

“그에 대해선 해줄 말이 없습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여쭙죠. 공국과 협력하실 생각은 없습니까?”

“거절하지.”

“역시 그러신가요? 그럼 부디 자신의 어리석음을 저주하며 죽어주시길.”

과연 멍청한 것은 어느 쪽인가?

집안에 몸을 숨긴 채, 니엘은 바깥의 대화를 훔쳐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바로 빅터가 이 숲속 마을로 들어서기 전에 들려주었던 이야기에 대해···.

‘사냥꾼은 세간의 일에 사사건건 개입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마녀와 조금이라도 연관된다면 사정은 달라지지.’

‘마녀는 모조리 죽인다. 그게 우리의 존재의의니까.’

‘예외는 없다. 만에 하나 상대가 국가 단위의 적이라 해도 마땅히 싸우리라.’

그 맹세를 실천하기 위해, 거구의 사냥꾼은 묵묵히 도끼를 들어올렸다.

너무도 당연한 듯.

마치 저항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도 되는 것 마냥···.

“끝까지 허세 한 번 끝내주네요. 그 한결같은 모습만큼은 존경하겠습니다. 그럼 모쪼록 잘 가시길.”

귀족을 자처하는 미청년 알데카는 그의 움직임을 신경 쓰지 않았다.

“섬멸이다. 한 명도 남기지 마.”

이어서 그는 보좌역을 하는 둘만을 남긴 채, 나머지 리저드맨 전원에게 공격을 명령했다.

이제 상대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어.

그렇게 확신하며 청년은 등을 돌렸다.

강자를 잃는 것은 아쉬운 일이나, 그가 가장 우선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국에서 받은 명령 뿐···.

다음 마을의 관리와 더불어 점찍어둔 새로운 희생자를 찾아내는 일이 급선무였다.

하지만 그 때문에 청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남은 일생을 오로지 마에 대항하는 위해서만 살아가는 자들의 존재, 특히 빅터란 이름을 가진 사냥꾼의 강함을···.

퍼퍽!

순간, 뒤돌아선 알데카의 뺨에 질척한 감촉이 전해졌다.

무심코 손등으로 그것을 닦아내보니, 살점이 뒤섞인 핏자국이 잔뜩 묻어나왔다.

“···뭐?”

퍼석!

콰지직!

연달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다.

섬뜩한 소리가 퍼지고, 발아래에 나뒹구는 고기더미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청년이 다시금 빅터 쪽으로 고개를 향했다.

그러자···.

“어딜 가는 거지? 애꿎은 부하들만 개죽음시켜놓고.”

“큭!?”

꾸욱.

커다란 손아귀가 청년의 목을 움켜쥔다.

그 눈앞에는 어느새 전신을 피로 갑칠한 거구의 사냥꾼이 서있었다.

알데카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시선을 돌린 불과 몇 초 사이, 참극이 일어났음을···.

명령을 내린 열 마리의 리저드맨은 순식간에 전멸했어.

주위엔 찢기고 토막 난 용인들의 시체만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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