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170화 (170/186)

징조의 장(6)

10.

애써 무의식이 감추고 있던 기억의 장막을 들춰낸 부작용 때문이었을까?

잔혹한 현실에 남자는 한동안 말문을 잃었다.

‘용 같은 게 존재할 리 없어.’

‘그건 어디까지나 전설 속 이야기에 불과해.’

‘맞아. 그래선 안 돼. 그건 존재해선 안 되는 거야.’

남자의 기억은 두 눈으로 목격한 것을 몇 번이고 되새겼지만···.

연약한 마음이 차마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 보였다.

자각하는 그 순간··· 일 년 사이에 부단히 잊으려 노력했던 모든 게 자칫 허사로 돌아갈 것만 같아서.

‘사랑하는 아내와 이웃을 잃게 만든 것이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었단 말인가?’

남자의 의식이 소용돌이치는 상념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상반된 두 개의 감정, 이성과 믿음이 나선처럼 꼬인다.

둘은 물과 기름처럼 뒤섞이더니, 이윽고 인지부조화와 사고의 불협화음을 낳았다.

이는 정신의 방어기제.

자아를 유지하기 위한 필사적인 발버둥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내는 지금껏 필사적으로 분노를 억누르고 삭혀왔다.

자연 그 자체나 세계를 원망하지 못해.

그렇다고 그의 종교적 신념이 만물의 창조주인 신에게 책임을 돌릴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남자에겐 원수가 생기고 말았다.

비록 그것이 신화나 전설 속에 등장할 법한 괴물일 지라도···.

일단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인간은 매우 구체적인 증오의 상징을 가슴 속에 새길 수 있다.

그렇기에 지금 그는 망설인다.

그리고 고뇌한다.

지내던 것처럼 모든 걸 포기할지, 아니면 참아왔던 격노를 다시금 토해낼지를.

그러나···.

“이, 이제 와서 그걸 알아냈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 것도 없소.”

모두가 마녀 사냥꾼이 되진 못한다.

만인에게 어둠에 맞설 용기를 기대할 순 없다.

오히려 대다수의 약자는 주어진 상황에 안주하며, 현실적인 생존의 길만 강구하는 삶을 택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남자는 지극히 평범한 결론을 냈다.

복수가 아닌 망각을 택하는 것으로.

“···더는 못 봐주겠군.”

어째서일까?

이 순간 빅터의 눈빛은 메말라 있었다.

일말의 동정도 내비치지 않고서, 그는 상대에게 악담을 이었다.

“질질 짜는 건 볼일이 끝난 다음에나 하시지. 네놈은 계속 설명이나 하도록.”

“잠깐만요, 빅터 사부님! 아까부터 말이 너무 심하지 않아요? 이 강도, 아니 이 아저씨는 그래도 가족을 잃었는데···.”

니엘이 만류한다.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빅터가 사내를 대하는 싸늘한 태도에 묘한 거북함을 느끼고 있었다.

언제나 무뚝뚝한 그였지만, 최소한의 인간미는 있었는데···.

비극으로 인생이 망가진 사내에게 그는 왜 이렇게까지 가혹하게 구는 것일까?

“끼어들지 마라, 니엘. 다 연기일 뿐이니.”

“네?”

놈은 전부 알고 있었다.

···라고, 빅터는 한껏 격노하며 말을 이었다.

“이제 와서 갈등하고 반성하는 척 꾸미다니. 역시 너는 용서 받을 자격이 없다.”

니엘을 밀어내며, 빅터가 훌쩍이는 사내의 머리칼을 낚아했다.

이어서 덩치 큰 사냥꾼이 팔을 크게 휘둘렀다.

콰앙!

테이블에 금이 갈 정도의 강렬한 충격.

바닥을 뒹구는 남자의 이마에는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이놈에게선 죄책감보다 자기 연민의 파장이 더 크게 느껴진다. 그 안에는 몇 살도 채 안 되는 어린 여자애도 포함되어 있었는데도 말이다.”

“아, 아이까지?”

“알겠나, 니엘? 놈은 빼앗은 거다. 자기 딸을 위해서 남의 딸을 팔아넘겼단 말이다.”

빅터의 적나라한 폭로에, 남자는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 그렇소. 나는 분명 잘못을 저질렀지. 더 이상 괜한 거짓을 고하진 않으리다. 하지만···.”

의자를 지팡이 삼아 고개를 든 그가 겨우 뱉어낸 한 마디는 변명이었다.

“나도 어쩔 수가 없었소! 당장 하나 남은 자식을 지키기 위해선··· 그 외에 달리 방도가 없었단 말이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빅터는 피투성이가 된 남자의 머리 위에 손을 가져갔다.

또 한 번의 응징이 이어지는가?

아니, 차라리 폭력 쪽이 나았으리라.

“설명해라. 이 땅에 얽힌 역사와 너희에게 인신매매를 명령한 자들에 대해.”

빅터가 이븐 가지의 분말을 흩뿌리자 남자는 순식간에 넋이 나갔다.

암시에 걸려, 그는 눈에 흰자만을 남긴 채 깊은 최면 속으로 빠져들었다.

“···산사태가 벌어지고 일주일이 지날 쯤, 수도에서 병사들이 찾아왔소. 대략 스무 명 정도 되는 것 같았는데, 그들의 우두머리인 남자는 자신의 뿌리가 이 곳에 있다고 소개했지. 옛 클라인왕국 출신의 정통 핏줄이라고 말이오.”

사내가 갈라진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전말은 역사에서 자연스레 잊힌 전승에 대해서였다.

11.

어느 나라에나 건국 신화는 존재한다.

과거에 사라진 국가도 예외는 없어.

남자가 늘어놓은 내용도 크게 특별할 정도의 전설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왕의 핏줄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든가···.

이 땅에 살아가는 민족이 진정으로 선택받은 신의 백성이라는 둥의 시시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것은 누군가에겐 감춰야만 하는 중대한 사실이기도 했으니···.

지도에 이스트 클라인이라는 이름이 쓰여 지기 수 세기 전, 이 대지는 클라인 왕국으로 불렸다고 한다.

영토가 작은 소규모 국가.

그 역사는 대략 300년 남짓으로 추정된다.

기술이나 문화는 가까운 인접국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동시에 거의 항상 침략 전쟁에 시달렸다.

혼란의 시대가 오래도록 지속됐고, 말미엔 귀족간의 파벌 싸움으로 동서가 나누어져 내분까지 일어났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추정하건데 멸망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으리라.

···여기까지만 본다면 지극히 단순한 국가의 흥망성쇠.

그러나 이상한 점은 영토의 정복이 이뤄지고 난 뒤에 나타났다.

일국이 허물어진 뒤, 새로이 클라인 왕국을 지배하에 둔 주인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스트 클라인 지방 외곽에서 기이한 신앙의 흔적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왕가의 문양이 대문짝만하게 박혀있는 제단.

그것은 사람이 아닌 형상의 초자연적 존재를 섬긴 신전이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대량의 인골탑.

역사학자들은 왕족이거나 그에 가까운 권력자가 순장殉葬을 고집한 것이라 조심스레 짐작했지만, 곧 그 가설도 미궁에 빠졌다.

일부 유해에선 식인의 흔적까지 발견되었기에.

악마나 할 법한 짓거리.

그야말로 혐오스런 의식이었다.

“···잔존한 클라인 왕국의 후손들은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려 했소.”

시대가 변하면서 윤리관도 일신한 지금···.

그들은 선조가 저지른 잔인한 결과물을 내버려둘 수 없었다.

사교나 마찬가지인 인신공양 풍습은 이 땅의 소유권과 정통성을 주장하려던 자들에게 독이 되었다.

그렇기에 귀족을 자칭하는 세력은 철저하게 진실을 땅 속에 묻으려 했으니···.

하지만 그것이 근래 다시금 고개를 내밀었다.

바로 산사태를 통해서.

애써 허물어뜨린 수 백, 수 천의 유해가 드러남으로···.

“과연, 어쩐지 사념의 밀도가 이상할 정도로 높더라니 그런 배경이 있었나?”

“으, 감추려고 할 만하네요. 그간 귀족이랍시고 실컷 잘난 척은 다 했을 텐데 조상이 식인종들이라고 드러나면···.”

니엘이 역겨워하는 와중에도 빅터는 놀라지 않았다.

그도 이 지역에 대량학살이 벌어졌을 사실쯤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기에.

하지만 다른 면에서 궁금증은 더욱 증폭된다.

왜 남자를 비롯한 마을의 생존자들이 반인륜 범죄를 저질렀는가?

또 그게 사악한의 전통을 가진 옛 왕가의 추태와 무슨 연관이 있지?

“···우리는 두 가지 조건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마을의 부흥을 약속 받았소.”

“두 가지라고?”

“하나는 산사태에서 나온 뼈들의 정체를 불문에 붙이는 것···.”

“그건 지금까지 들은 맥락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래서 나머지 하나는 뭐지?”

“둘은 이 땅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제물로 바칠 자를 선별하는 일이었소.”

원혼.

그리고 제물.

마녀의 입에서나 나올 법한 그 단어에 빅터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는 말만으로는 알 수 없는 더 은밀한 내용을 캐내기 위해 암안의 힘을 최대까지 끌어올렸다.

“반항적인 남자는 죽인다음 피를 뿌렸다오. 토사에 깔려 죽는 자들을 위한 위령에 쓰였지. 여자와 아이들은 대부분 수도의 병사들에게 끌려갔지만···.”

“두둑하게도 받았군.”

“그렇소.”

“그것도 아주 빌어먹을 물건으로.”

빅터는 거칠게 팔을 뻗어 남자의 셔츠를 찢었다.

그러자 사내가 목에 매고 있던 여러 개의 장신구가 드러났다.

비싸 보이는 반지가 금줄에 가득 이어져서 하나의 목걸이를 이룬다.

거기엔 하나같이 선명한 붉은색을 띠는 어떤 보석이 박혀 있었다.

바로 기현상을 유도하는 요사스러운 돌이···.

‘불길한 빛을 내고 있군. 거의 다 채워진 상태다. 어지간히도 많은 마기를 빨아들였어.’

빅터는 품속에 넣어둔 마몬의 적석이 부서질 만큼 강하게 쥐었다.

“···그런데 이걸 건네받은 직후부터 이상한 일만 자꾸 벌어졌지. 마을에서 더는 작물이 자라지 않아, 뭘 심어도 금방 시들어 버려서 미칠 지경이었소. 먹을 것이 줄어만 가는데 가축들은 수개월에 걸쳐 픽픽 쓰러져서 죽어버리고··· 결국 남은 건 독버섯과 질긴 잡초뿐이었다오.”

“멍청하긴. 마녀의 몸에서 나온 돌 따윌 가지고 있으니 땅이 썩어갈 수 밖에.”

“···우린 최선을 다 했소.”

살아남은 자들은 필사적이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최대한 긁어모은 돈으로 타지의 식량을 구했다.

하나, 불과 며칠 사이 모조리 부패해버리는 이상현상이 벌어진다.

숲에 들어온 순간 고기에선 구더기가 일어나고, 빵에선 어느새 처음 보는 색깔의 곰팡이가 피었다.

그마저도 허기를 참지 못해서 먹기라도 하면, 일주일 내내 복통에 시달리는 게 부지기수···.

다 큰 어른이라면 몰라도, 이는 어린 아이가 견디기엔 너무도 가혹한 것이었다.

“수도에서 온 귀족이 이 모든 게 저주라고 했소. 선조의 악업이라고 떠들었는데··· 당시엔 믿지 않았지. 그런데 계속해서 해괴한 사건이 일어나니, 우리도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더이다.”

“그래서 그들을 팔았나? 수도의 자칭 귀족이라는 작자에게?”

“···효과가 있었소. 사람 한 명당 일주일은 맘 편히 식사를 할 수 있었으니.”

니엘은 한동안 잠자코 사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로선 이해할 수 없어.

안타까움 이상으로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기괴함이 느껴졌다.

왜 도망치지 않았지?

일이 이 지경까지 왔다면 마을을 버리고 달아날 수도 있었을 것을···.

“니엘, 너무 깊게 생각할 것 없다. 결국 이놈들의 본질은 탐욕이었을 뿐이니.”

“탐욕···.”

“재난이 일어난 마을을 다시금 재건한다고 하면 듣기야 좋지. 하지만 저 꼴을 봐라. 혼이 빨려나가는 지도 모르고 붉은 보석을 몇 개나 모가지에 두른 흉측한 모습을.”

“그치만··· 이 아저씨는 우리한테 구해달라고 여기에 데려왔던 게 아니었나요?”

“의외로군. 너도 슬슬 대가없는 이타심에 눈을 뜨기 시작했나?”

“노, 놀리지 말고요! 그래서 사실은 어떤데요?”

“유감이다.”

빅터가 고개를 젓는다.

그는 이미 남자의 마음속을 구석까지 꿰뚫어 보고 있었다.

“놈이 도움을 청하려던 건 진심이다. 하나, 그건 당장 주변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곤란했을 뿐이지. 어린 딸 이야기를 덧붙이면 우리가 순순히 저주를 풀어주길 기대한 모양인데, 만일 그게 잘 해결되었어도 놈들은 결코 인신매매를 멈추지 않았을 거다.”

결국 남자는 요령 좋게 두 사람을 이용할 셈이었던 모양이야.

뒤늦게 열 받은 니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를 노려보았다.

정작 상대는 아직 암시에 빠져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이 새끼, 어디서 감히 사람을 속여먹으려고···.”

“···제물, 마을의 부흥이···.”

“모처럼 내가 좋은 마음으로 착한 일 좀 해보려고 했는데!”

주먹을 쥔다.

그녀는 당장 사내의 면상에다 한 방 갈겨주지 않고선 못 베길 것 같았다.

하지만 니엘의 응징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그 직후, 갑자기 사내의 눈알이 튀어나와 천장에 튀어 올랐기 때문에.

“우, 우왓?!”

“저격이다! 고개를 숙여라, 니엘!”

파팟!

빅터가 도끼날을 치켜들자마자, 불현 듯 창가에서 날아든 여러 개의 조각이 튕겨져 나갔다.

양쪽 끝에 각각 깃털과 금속 촉이 달린 가느다란 나무 막대···.

쇠뇌용 화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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