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조의 장(5)
8.
빅터가 목적지를 향하는 와중에 마녀 사건과 얽힌 사건에 휩쓸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마는 또 다른 마를 부른다.
빅터는 자신의 품속에서 한껏 어둠의 향취를 품기는 어떤 장신구의 존재를 눈치 챘다.
출발 전에 아랑에게서 건네받은 마정석.
바로 마몬의 붉은 돌이 반응하고 있었기에.
‘이번에도 가증스런 인과의 흐름이 나를 유도하는가?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내가 할 일은 정해져있으니.’
항상 그렇듯 마법은 부정하고, 마녀는 죽일 뿐···.
빅터는 자신의 손이 닿는 한, 어떤 형태의 어둠이든 모조리 찢어발길 셈이었다.
한편···.
산길을 나아가는 동안, 빅터의 등 뒤에 선 니엘의 얼굴이 서서히 불안의 빛으로 물들어갔다.
‘뭔가 이상해. 아무 소리도 안 들려. 바람도, 새들의 지저귐도···.’
발목이 납으로 된 족쇄가 달린 것 마냥 무겁고, 지친 것도 아닌데 갈수록 호흡이 힘들어진다.
마치 늪지나 수렁에 몸을 반쯤 잠식당한 기분···.
분명 나무들 너머로 햇볕이 비춰지고 있음에도 어째서인지 지면 아래의 그늘이 평소보다 짙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기분상의 문제일 뿐.
어쩌면 착각인지도 몰라.
세삼 지루할 땐 한없이 시간이 느리게 가고, 즐거울 땐 순식간에 하루가 지날 때도 있지 않은가?
‘맞아. 예전에 동방에서 겪은 지옥도에 비하면 이까짓 거 아무 것도 아니지. 그냥 아주 조금··· 오싹할 뿐이야. 살짝 무서운 정도라고!’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으면서도 두려움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일단 마기의 영향권에 들어서면 일반인이라도 금세 이변을 눈치 채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니엘이 비명을 지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헉!”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녀는 보았다.
마른 나무 사이로 드러난 새하얀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사라진 것을···.
“빅터 사부님! 바··· 바바바바방금 저기에!”
“호오, 망령을 봤나? 소질이 있군, 니엘.”
“아니, 무슨 특이한 동물이라도 본 것처럼 쉽게 말하는 건데요!?”
“감이 좋은 사람은 살면서 몇 번인가 마주할 기회가 있다고 하지. 방금 그건 화살을 등에 맞고 죽은 여인이었다.”
“끔찍한 소리는 좀 참아달라고요.”
“아직 겁을 먹기엔 이르다.”
“예?”
“거기선 직진하지 말고 바위를 돌아서 오도록.”
“그건 또 왜···요?”
“교살당한 아이의 사념이 버티고 있으니까.”
“어, 엄마야아아아!”
화들짝 놀라서 사부의 등에 착 달라붙는 니엘.
하지만 빅터의 발언은 무지한 동행인을 놀려먹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정작 니엘은 몰랐지만, 지금 빅터의 눈에는 온갖 어둠의 존재들이 비춰지고 있었으니.
“···이봐, 혹시 댁들도 뭔가 보이는 게요?”
갑자기 앞장 서 가던 강도가 입을 열었다.
그는 목에 쇠사슬을 감은 채,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다.
단지, 빅터가 그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을 뿐.
“멈추지 말고 계속 걸어라. 우리는 네놈과 할 말이 없으니.”
“너, 너무 그러지 마시오. 나도 알고 보면 그렇게 사람 됨됨이가 나쁜 놈은 아니란 말이오.”
“네 같잖은 사정 따위 내 알바 아니다.”
“믿거나 말거나 하나만 알아주시구려. 나는 지금 감격하고 있소. 아주 다행이라 여기고 있단 말이오.”
“뭐야? 아저씨, 지금 다 큰 어른이 질질 짜는 거야?”
“고마워서 그러는 거외다. 못된 맘으로 댁들 주머니를 털려고 했던 우리들을··· 나와 친구들의 목숨도 빼앗지도 않고, 이렇게 선뜩 나서주었으니 말이오.”
사내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흐윽, 진즉 당신들 같은 사람이 이곳을 방문해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이 순간, 그의 두 눈에선 진흙과 뒤섞인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틀림없이 간절히 구원을 바라는 자의 얼굴이었다.
“마을까진 얼마 안 남았소이다. 조금만 걸으면 곧 도착하지요. 그런데 그 전에··· 그 장소를 지나가야 할 게요 가능하면 우회하고 싶지만 달리 길이 없으니···.”
“그 장소?”
“아무렴, 아가씨. 거길 거치지 않으면 마을에 들어갈 수 없지.”
이 이상 무서운 뭔가가 도사리고 있단 말인가?
니엘은 한층 더 겁먹은 표정으로 빅터에게 밀착했다.
얼마나 들러붙었는지 걸음걸이에까지 지장이 생기자, 빅터는 니엘을 떨어뜨리며 기어이 한마디를 건넸다.
“···너무 허둥댈 필요 없다. 이 주변에 있는 것들은 대부분 무해해. 네가 유령이라 여기는 건 잔존하는 뇌파 신호에 불과하다. 기껏해야 사람을 놀래 키는 것 이상의 해코지는 못하지.”
그게 과연 정말일까?
검을 조금 다룰 수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평범한 사람이나 다름없는 니엘로서는 쉽사리 믿기지가 않아.
그녀는 미심쩍게 주변을 둘러볼 수 밖에 없었다.
여전히 빛의 진입을 방해하는 마른 잎사귀의 천장.
망자의 숨결을 연상시키는 부자연스러운 고요가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고, 서늘한 공기는 노출된 자의 체온을 떨어뜨린다.
사방에서 거림직한 시선이 느껴지는데 도무지 안심이 되질 않았다.
한눈에도 다른 세계야.
이는 마녀의 결계와는 또 다른 형태의 영역으로···.
니엘이 느끼기에 순전히 인간의 원망와 악의로 이뤄진 공간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곧 니엘이 직면하게 될 현실에 비하면 극히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았으니···.
“다 왔소. 마을을 덮친 천재지변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지.”
안내역을 맡은 강도는 뭔가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빅터의 눈에 뭔가가 비춰지길 바라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빅터는 단번에 사태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었다.
“놀랍군. 드러난 것 외에도 훨씬 많이 묻혀있어.”
“오오, 당신! 역시 비범하구려! 바로 알아보시는군!”
“헛소리. 눈을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게 아니라면 이쯤은 누구나 알아챈다.”
그랬다.
처음 보이는 경관만 해도 허물어진 산의 일부···.
여러 채의 부서진 민가가 보인다.
능선에서 내려온 대량의 토사가 마을의 절반 이상을 집어삼킨 채였다.
이 정도라면 희생자가 생기지 않는 게 도리어 이상한 지경···.
하나, 사내가 빅터에게 이해를 구하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알아내셨소? 여기가 어떤 장소인지···.”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오는군. 얼마나 오래 됐지?”
“나도 자세히는 모르오. 오래 전에 돌아가신 촌장님 말론 수 백 년도 더 되었다고···.”
그 발언에 니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산사태가 벌어진 것은 불과 일 년 전쯤의 일이 아니었단 말인가?
다행히 그 수수께끼는 금방 풀렸다.
직후, 산사태의 흔적에 다가간 빅터가 흙무더기 사이에서 뭔가를 집어 들었기 때문에.
기다란 뼈의 일부.
일견 그것은 대퇴골처럼 보였다.
“사부님, 그거 설마?!”
“음, 사람의 넓적다리뼈다. 한참 전에 묻힌 게 산사태로 인해서 드러난 모양이군.”
“맙소사···.”
니엘은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 그들이 목도한 상황은 보통이 아니란 것을···.
빅터의 손에 있는 것 말고도, 주변에 삐죽 튀어나온 회백색의 덩어리들을 쉽게 찾아낼 수 있어.
만약 이 모든 게 매장된 인골이라면···.
“미, 미쳤어. 이건 한 두 구가 아니잖아?”
“그래. 네 말대로다, 니엘. 그만큼 많은 이들이 죽은 거다.”
학살의 현장.
수많은 사람들이 도륙당한 흔적을 믿지 못해.
니엘은 최대한 현실적인 해답을 내놓기 위해 발버둥 쳤다.
“에, 에이··· 말도 안 돼. 그냥 묘지가 아닐까? 이 지방 사람들이 산지에다 늙어 죽은 노인네들을 위해 무덤을 팠던 게···.”
그러나 빅터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의 왼손은 어느새 또 다른 유해를 파내고 있었다.
“이건 젊은 장정의 뼈다.”
“···.”
“그리고 이건 아이의 해골이지.”
계속해서 새로운 희생자의 주검이 나와, 그때마다 니엘은 진저리를 쳤다.
“도, 돌림병 같은 거였겠지.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많이 죽었을 리 없잖아?”
“현실도피는 그만해라, 니엘.”
사고도, 원인모를 역병으로 인한 죽음조차 아니다.
이미 빅터의 암안이 땅에 묻힌 자들의 사인을 하나하나 감지하고 있었으므로···.
저벅.
빅터는 흙이 뭍은 손을 털어내며, 이 자리까지 두 사람을 안내한 강도에게로 걸어갔다.
“아무래도 네놈의 고향은 피의 역사 위에 세워진 모양이군.”
“그, 그렇소이다. 차마 입에 올리기도 무서운 사연이오. 들어주시겠소이까?”
“털어놔 봐라. 숲을 가득 채운 망령들이며, 산사태 속에서 나타난 이 대량의 뼈들이 어떻게 된 건지.”
빅터는 상대의 목에서 쇠사슬을 풀어주었다.
그가 도망칠 사람이 아니란 게 확실해졌어.
오히려 이젠 강도 쪽에서 묵힌 이야기를 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남자는 자국이 남은 자신의 목 언저리를 더듬더니.
“내 집이 이 아래 있소. 먼저 도망친 못난 동생 놈이 숨어있을 지도 모르지만, 자세한 건 거기서 찬찬히 말씀드리리다.”
두 사람은 잠자코 그 뒤를 따랐다.
빅터는 여전히 과묵하게 걸음만 옮겼지만, 니엘은 연신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사내를 쫓아가는 내내···.
마을에서 다른 인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9.
“에게게, 이게 전부?”
“미안하구려. 차라도 내오고 싶지만 당장은 식량 사정이 마땅치 않아서···.”
접시 위에 올라온 것을 보자마자 니엘은 노골적으로 실망했다.
말라비틀어진 나무 열매 몇 개뿐.
수중에 은화를 가지고 있던 것치곤 조졸한 먹거리가 아닌가?
남자의 얼굴은 초췌하기 그지없어.
제대로 영양을 보충한 지 꽤 오래되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마차를 가로막은 나머지 넷도 상태가 영 좋지 못했다.
하나같이 입은 복장이 얼룩과 진흙으로 가득해서 마치 걸인과 같았으니···.
“사람을 팔아먹은 주제에 가정살림 한 번 개떡 같군.”
“하, 하하··· 이거 숨 쉴 틈도 없이 바로 아픈 곳을 찌르시는구만.”
“네놈과 단란하게 수다나 떨고자 여기 온 게 아니다. 본론부터 말해.”
“아, 물론이오. 돌이켜 보면, 나는 운이 좋았지. 오는 길에 봤겠지만, 이 집은 산사태에서 아슬아슬하게 빗겨갔거든. 그래서 나와 딸아이는 무사할 수 있었다오.”
“내가 그깟 시시한 가족사나 듣고 싶어 하는 걸로 보이나?”
빅터의 재촉에 사내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심호흡에 들어갔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과거를 회상하는 것조차, 그에겐 충분한 각오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1년 전이라곤 하지만 아직 생생하오. 하늘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서 문뜩 고개를 들었더니, 산꼭대기에서 무너지는 게 보이더군.”
순식간이었다.
으깨진 바위가 흘러내리며 토양을 휩쓸고 내려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십 수초···.
그 찰나의 사이, 밭에서 일을 하던 열 댓 명의 아낙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개중엔 남자의 아내도 있었다.
“하여간 바보 같은 여편네였소. 곧장 돌아왔다면 목숨을 건졌을 것을, 고작해야 채소 몇 포기를 더 캐보겠다고 욕심을 낸 탓에···.”
남자는 말을 이어가던 중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지만 눈앞에 선 거구의 사냥꾼은 하나하나 감상에 희비를 드러내지 않았다.
“산 위에 뭐가 지나갔지?”
“뭐라니···.”
“방금 하늘에서 굉음을 들었다고 했지 않나?”
“아, 그랬지. 분명 그랬었소. 하지만 원채 순식간이라···.”
“다시 한 번 떠올려봐라. 그게 무엇이었는지.”
“그게, 구름이었던가? 커다란 그림자 같았소.”
“아니, 너는 틀림없이 보았을 거다. 그리고 알고 있을 테지.”
빅터는 사내의 기억에서 선명한 이미지를 잡아내려 했다.
당장 찾아낼 것은 크게 세 가지.
첫째는 이 땅에 잠들어 있던 길고 긴 어둠의 진실···.
둘은 이 어설프고 정 많은 사내가 어째서 행인을 상대로 노상강도와 인신매매를 저질러야만 했었는지에 대한 이유.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하나는 바로···.
“잘 생각해보도록. 그게 네 마을을 덮친 산사태의 진짜 원인이니.”
이때, 사내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고.
다음은 설마하며 이마를 짚었다.
그러나, 그 얼굴은 이내 서서히 굳어갔다.
자신이 도무지 믿지 못할 것을 떠올렸단 사실을 알아차리고서.
“역시 그랬군.”
빅터는 무거운 신음을 흘렸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적중하기 마련이었기에.
‘과연, 마는 또 다른 마를 부르는가?’
빅터의 뇌리 속에 그 형상은 점차 선명한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어.
지금 막, 사내가 떠올린 재앙의 그림자의 정체가 드러났다.
암막이 태양을 가리고.
광활한 산맥마저 덮기에 충분할 만치 거대한 날개가 창공에 펼쳐진다.
전신을 무수히 많은 칼날의 비늘.
신화 속의 묘사를 충실히 따르는 길고 흉포한 주둥이.
그것은 다름 아닌 빅터가 맡은 임무의 조사대상···.
즉, 용Drache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