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조의 장(2)
3.
하루 종일 시장터에서 시간을 보낸 니엘이 돌아온 것은 오후가 훨씬 지난 때였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썩어가기 시작한 시취가 섞인 공기.
방치된 전장에서나 날 법한 냄새가 실내에서 풍겨오자, 니엘은 자기도 모르게 코를 막았다.
손님을 맞이해야 할 테이블 위에 마른 종이로 묶인 두 개의 커다란 덩어리가 보인다.
니엘의 본능이 속삭였다.
그것이 포장된 시체라는 것을.
‘마누엘이란 사내놈이랑 에리히란 여자애가 안보여. 설마···.’
이후, 아이라에게 간략한 사정을 듣고서야 그녀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실내의 모두가 표정이 굳을 만 해.
차마 면담이 예정된 대스승에 대해서 묻는 것조차 어려워보였다.
가뜩이나 집결지의 엄격한 규율을 견디지 못해서 대부분 바깥으로만 나돌던 니엘이다.
그녀는 한층 무거워진 공기가 더 불편하게 느껴졌다.
하나, 아무리 지방 용병 출신이라 해도 추모의 진중한 의미만큼은 알았으니···.
니엘은 그나마 안면이 있는 빅터와 로이드에게 먼저 말을 붙였다.
“유, 유감이야, 형씨들. 어, 음··· 뭐라 해줄 말이 없네.”
“그거면 충분하다, 니엘. 외부인인 네가 마음 써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지.”
“헤, 헤헤···.”
“애꾸 아가씨에겐 미안하게 됐어. 지금 우리한테 그쪽을 신경써줄 여유가 없거든. 네가 사냥꾼 후보가 될지 어떨지는 좀 더 여력이 생긴 다음에 이야기해보자고.”
“아, 아아! 그거라면 괜찮아! 나도 눈치란 게 있다고!”
니엘이 양 손을 흔들며 극구 사양한다.
예정대로라면 사냥꾼의 자질이 있는지 테스트를 받을 계획이었지만, 당장은 도무지 끼어들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어둠과 싸우는 자들도 죽는구나. 그동안 함부로 낮도깨비라고 지껄여댔었는데··· 원래는 이들도 사람이었어.’
가만히 있으니 의기소침하고 멋쩍은 기분이 들어.
이 시점에서, 그녀는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발 벗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
“아이라 언니야! 내가 뭐 도울 거 없을까?”
“미안해요, 니엘 양. 지금은 다들 신경이 곤두서 있으니 얌전히 계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으···.”
사람 좋은 아이라마저 도움을 마다하자, 니엘은 괜히 불안해졌다.
쓸모없는 짐짝 취급은 끔찍해.
용병단 시절, 나이가 어리단 이유로 온갖 외면을 받았던 기억이 저절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니엘은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고 싶었다.
그런 니엘에게 기회를 건넨 것은 막 내실에서 나온 대스승이었다.
“너무 안달하지 말거라, 아이야. 못본 사이에 몸은 커졌어도 마음은 아직 충분히 여물지 못했구나.”
“앗, 당신···.”
“건강해 보이는군. 왼눈의 원한은 이제 잊어버렸느냐?”
“헷, 그 정도로 속이 좁진 않거든요. 아무튼 오랜만에 뵙네요, 대빵 나으리!”
“여전히 말투가 맹랑하구나.”
드러난 몸매만 본다면 성인 여자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을, 대스승은 니엘을 마치 어린 손녀처럼 대했다.
“빅터에게 사정은 들었다. 우리의 일원이 되고 싶다고?”
“예옙! 그··· 앞으론 대스승 크레이그, 라고 불러드리면 되, 될까요?”
“호칭은 네 멋대로 하거라.”
“아앗, 그럼?!”
“어차피 자격을 갖추기 전까진 네 입단은 허락하지 않을 테니.”
“···하?”
니엘에 얼굴에 당혹감이 번진다.
대스승은 쿡쿡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빅터와 로이드의 곁으로 다가갔다.
“빅터여. 앙리를 통해 상부와 의견을 나누었다. 우리는 당분간 기사단의 정황을 살피며 대기하기로 했지. 단, 자네의 파견은 예정대로 진행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대스승.”
“자, 잠깐만요! 이보셔, 노인장! 대체 왜 날 안받아주겠단 건데?”
“이런, 귀청이 다 떨어지겠군. 어디서 이런 말괄량이를 데려왔느냐?”
“나를 보라고요! 왜 딴청부리면서 면전에서 사람을 무시해?”
“엄밀히 말하면 이건 무시가 아니란다, 아이야.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지.”
“아니, 그러니까 왜요?!”
“예의범절.”
언성을 높이는 니엘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대스승의 오른발이 채찍처럼 뻗어나갔다.
초고속의 다리후리기.
그 빠른 움직임은 닿지도 않았는데 니엘의 균형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으, 으앗!?”
외눈의 여인은 반항도 못하고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 이 영감탱이가 사람을 바보 취급해?!”
“성미가 고약하군. 네 버릇을 고쳐주려면 하루 이틀론 한참 부족하겠구나.”
“쿠엑!”
그리고 또 다시 앞으로 나자빠진다.
대스승은 니엘에게 보이지 않는 그림자의 흐름을 이용하고 있었다.
“가능하면 내가 직접 지도하며 기품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싶으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새로운 적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 게 우선이다. ···빅터여.”
“예.”
“이번 임무엔 이 아이를 데려가거라.”
“뭐, 뭐요?!”
“얌전히.”
“꺄악!”
대스승이 기합소리에 니엘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신경에 직접 명령을 내리는 그의 암시는 여전히 건재한 모양이었다.
“굳이 니엘을 말입니까?”
“준비도 안 된 자에게 사냥복을 입히면 우리의 격이 떨어진다. 그리고 우선은 불필요한 식객부터 내보내는 게 맞지 않겠는가?”
대스승의 의사가 전해져온다.
그는 빠른 시일 내에 집결지에 가능한 머무는 인원을 줄일 셈이었다.
“대스승, 이 곳을 비우실 겁니까?”
“아직 정해진 것은 없다. 하나, 어쩌면 나와 레이가 여기에 너무 오래 머문 것인지도 모르니···.”
통상 사냥꾼은 같은 장소에 장시간 머물지 않는다.
거의 항상 방랑하며 지령을 받는 족족 가까운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최근 5년 사이 자잘한 변화가 있었다.
“욕심이 과했던 게야. 자네라는 특별한 영웅이 출현한 이례로, 나는 이 자리에 교육의 장을 만들 생각이었다. 전문적인 사냥꾼 양성기관으로···.”
“학교라도 세우실 계획이셨습니까?”
“일전에 알려주지 않았던가? 내가 사냥꾼의 삶을 살기 전까진 일개 교사에 불과했다는 걸.”
공교롭게도 지리적인 이점은 있었다.
인솔자 토드가 주기마다 방문하며, 이식의 장소인 펜릴의 둥지와 멀지 않기 때문에.
“하지만 그 목표도 이걸로 물 건너갔구나. 제멋대로 남의 땅에서 활개 치던 베가시아 놈들이 드디어 우리 위치를 특정한 모양이니.”
이어서 대스승은 밀고자의 존재를 언급했다.
성국 베가시아의 신앙은 나라와 지방을 가리지 않고 퍼져있어.
그것은 이 외곽의 항구도시 도르프하임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우이길 바라나,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앞으로는 출입을 평소보다 엄격하게 관리할 것이다. 증원이 오기 전까진 섣부른 행동은 금한다.”
“그 말을 들으니 자리를 비우기 더욱 망설여집니다, 대스승.”
“건방지구나. 나는 아직 현역이다. 최근에도 마녀 몇을 도륙했지. 자네가 아무리 뛰어나기로서니 걱정 받을 처지는 아니다.”
이어서 그는 바닥에 늘어진 니엘의 목깃을 잡아 들어올렸다.
“켁!”
“또한 아직 철없는 아이의 재롱 잔치를 즐길 만큼 노망이 들지도 않았지.”
“이, 이거 놔! 누가 아이란 거야?!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망신 주는 거야, 뭐야?!”
“허허, 아직 기가 죽지 않았나? 마치 레이의 어릴 때를 보는 것 같군.”
“마침 레이 사저도 같은 이야길 했습니다.”
“큭큭큭, 그랬느냐? 뭐, 좋다. 다음에 만났을 땐 조금은 성숙해지길 바라마.”
“···최대한 노력해보겠습니다, 대스승.”
“당사자 의견도 묻지 않고 누구 맘대로오오오오!”
“멍청하긴, 사냥꾼이 되는 게 마냥 쉬울 거라 생각했나?”
그리 하여, 니엘은 꼼짝없이 빅터의 동행이 되었다.
4.
어김없이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온다.
도시는 고요했다.
광장에 나타난 시체 사건의 뒷수습은 완만하게 처리되었다.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어.
빅터의 가루가 만들어낸 정신착란과 기억조작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해준 덕분이었다.
그러나 잃은 자는 결코 잊지 못한다.
가혹한 진실에서 눈을 돌리지 못하는 마녀 사냥꾼들이 그러했다.
‘결국 나는 지키지 못했다.’
하늘에 별이 보이는 선착장.
인적이 드문 물목에 앉은 채로 몸집이 큰 사냥꾼은 고독한 고뇌를 이어갔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명백하고 이해하고 있었다.
‘예지를··· 인지를 초월한 힘을 손에 넣었다고 너무 우쭐해있었다. 이것으로도 구하지 못하다니···.’
아무리 강해져도 모두를 구할 수 없다는 건 익히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그 각오마저도 짓누를 만큼 가혹해.
빅터가 짐작하던 것 이상으로 세계가 품고 있는 악의는 거대한 것이었다.
“뭘 혼자서 궁상떨고 있어?”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빅터가 고개를 돌리자 바닷바람에 은과 흑의 장발이 흩날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특유의 날카로운 인상은 틀림없이 레이의 것이었다.
“아직 준비가 덜 끝난 모양이지?”
“아니, 채비는 마쳤지. 그저 니엘이 고집을 부려서 출발을 아침까지 지연시킨 것뿐이다.”
“대스승께서도 많이 물러지셨다니까. 그걸 또 받아주시다니 말이야.”
장갑을 낀 왼손으로 자연스레 옆머리를 쓸어 넘기는 그녀.
빅터는 그간 망설이던 질문을 겨우 건넸다.
자신의 잘못으로 잃어버린 레이의 손가락이 어째서 멀쩡한가에 대해.
“그건··· 아이라의 작품인가?”
“후후, 이제야 물어보는구나? 언제 그 말을 하나 기다리고 있었어.”
“심술을 부리나? 내가 너에게 빚을 지고 있단 걸 뻔히 알면서.”
“보다시피 기계식 의수야. 아이라 언니가 수도에서 배워온 기술로 만들어줬지.”
그러더니 레이는 장갑을 벗고 빅터의 바로 앞에 자신의 왼손을 활짝 펼쳤다.
손실된 약지와 새끼손가락이 온전히 움직여.
말단의 흑단목과 금속 부품만을 제외한다면 감쪽같은 실루엣이었다.
“적응에 시간이 좀 걸렸지만, 지금에 와선 예전처럼 쌍검을 휘두를 수 있게 되었어.”
“정말인가? 그거 다행이로군.”
“그러니 이제 네가 나한테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지. 쓸데없이 예전 일로 신경 쓰지 마.”
레이는 은은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빅터가 과거의 사건으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길 진심으로 바라며.
“그런데 너는 왜 아직 깨어있는 거야? 내일 파견 가느라 바쁠 텐데, 잠시나마 눈이라도 붙이지?”
“레이 사저, 그건 남 말할 저치가 아니다.”
그랬다.
그녀도 잠이 오지 않는 지, 얼굴에 초췌한 기색이 역력했기에.
“괜찮나?”
“글쎄. 네 눈엔 어떻게 보여?”
“많이 피곤해 보이는군.”
“맞아.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거든.”
상태를 묻는 빅터에게 미소를 동반한 농담으로 받아치는 레이.
그녀로서는 매우 드문 능청이었다.
나름대로 살갑게 구는 것이었지만 빅터는 사뭇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레이가 이렇게 대화를 즐기던 성격이었던가?
“놀래긴. 나도 마음먹으면 이렇게 편한 사람한텐 장난칠 수 있어. 네 제자 리리 리나, 왈가닥 니엘처럼은 무리더라도···.”
“그런가?”
“이런 실없는 이야길 하러 온건 아니었는데···.”
“볼일이 있었나?”
“응. 낮엔 고마웠어. 그걸 전해주고 싶었지.”
“뭘 말하는 건가?”
“여러 가지?”
스륵.
레이가 아래를 정돈한다.
자세를 숙이는가 싶더니, 그녀는 곧 빅터의 바로 옆에 걸터앉았다.
“면목이 없네. 결국 네가 내 몫까지 두 아이를 위해 화내주었구나. 정작 마누엘과 에리히의 책임자인 나는 입만 닫고 있었고···.”
“아니, 너는 훌륭했다. 냉정하지 못했던 건 나였지.”
“그만. 네 멋대로 내 잘못까지 짊어지지 마.”
“누구의 실책도 아니다. 이제 와서 무의미한 자책은···.”
“그럼···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해?”
어느새 레이는 자신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한심하지? 직면했을 땐 어찌할 바 모르고 버티다가, 시간이 부쩍 지나고 나서야 겨우 한탄할 수 있다니···.”
그 순간, 빅터는 동방에서 돌아온 이례 처음으로 레이의 감정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내 팔자도 참 기구해. 믿고 따르던 선배들은 모두 죽거나 망령이 됐지. 파문된 토드를 제외한다면 이제 남아있는 사람이 없어. 그마저도 3년 넘게 귀여워했던 아이들을 잃어버렸네? 정말 성심성의껏 가르쳤던 소중한 동생들을··· 그런데”
울지 못한다.
분명 슬픔이 몰아치는데도 도무지 눈물이 나오지 않아.
레이는 심록을 토벌한 이후로 마음의 일부가 고장 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레이 사저.”
“흥. 경고하는데, 날 위로할 생각은 하지 말아 줘. 그건 대놓고 비웃는 것만 못하니까.”
그렇다고 정말로 조소를 꺼냈다면, 레이는 냅다 파쇄권부터 날려버렸을 것이다.
빅터는 레이가 말하는 바와 본심이 다름을 익히 알고 있었다.
‘역시 무리하고 있었나?’
마누엘과 에리히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 레이는 의연한 듯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심의 유파 특유의 능숙한 감정 조정이 아니었으니···.
레이는 소리치려 했다.
사실은 빅터처럼 화를 내고 날뛰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던 것은, 그녀가 무의식 중에 자신의 감정보다도 주어진 직책을 더욱 중시했기 때문이었다.
‘제자들과 대스승의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썼군. 마음을 억누르고 마음을 죽였던 거였어.’
무리도 아니었다.
풍부한 경험에 맞는 중책을 맡았다곤 하나, 레이는 아직 스물다섯에 불과해.
더욱이 선배 사냥꾼들의 죽음 이상으로, 이번 애제자들의 상실은 그녀에 크게 다가왔을 것이다.
빅터는 그것을 고려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만 레이에게 윽박을 지르고 말았다.
차라리 화를 내라며 종용하면서까지.
“역시 내가 경솔했다, 레이 사저.”
“야, 이게 무슨 짓···.”
“마음을 읽는 암안에 너무 의지한 나머지, 너의 진짜 기분을 이해해주지 못했군.”
조심스레 빅터의 오른손이 그녀의 머리를 덮는다.
어색하고도 거친 손동작.
하나, 이것이 최선이다.
차마 아내를 달래던 것처럼 품에 안을 순 없어.
무뚝뚝한 그로서는 이 방법 외에 상대를 진정시킬 방법을 몰랐기에.
“이 멍청이! 그, 그만!”
빅터가 팔을 거두지 않자, 레이의 얼굴이 점차 새빨갛게 변한다.
그것은 지금까지 초연한 모습만 보이던 여인에게서 처음으로 나타난 반응이었다.
“작작 좀··· 해!”
끝내, 레이는 빅터의 손을 내팽개쳤다.
상기된 뺨 아래엔 자기도 모르게 흘린 눈물의 흔적이 보였다.
“미안하군. 내가 지나쳤다.”
“어린애 취급하지 마. 주제에 연상이라고··· 나이가 좀 많다고 거들먹대긴!”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
“아, 물론 그러시겠지.”
레이는 고개를 획하고 돌렸다.
아직 그녀의 화는 풀리지 않았어.
여전히 빅터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레이는 몰랐다.
자신이 지금 막 빅터에게 홀가분하게 화풀이를 했단 사실을.
그건 다른 누구에겐 시도조차 못할, 그녀 스스로의 솔직한 감정 표출이었다.
잠시 후, 마음을 진정시킨 레이가 말을 이었다.
“···기가 막혀. 지금까진 단 한 번도 이런 기분이 느껴진 적이 없었는데. 왜 네 앞에선 이렇게 약한 소리만 늘어놓게 되는 걸까?”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째서?”
“누구든 힘든 시기가 찾아오면 타인에게 의지하고 싶어질 때가 있기 마련이지.”
“듣고 보니 그럴싸한 소리네. 하지만 사실이라 해도 마음에 안 들어. 그게 왜 하필 너였을까?”
레이는 스스로도 혼란스러웠다.
정작 그 상대가 가장 친한 아이라였어도, 그녀는 이런 이야기를 쉽사리 털어놓지 않았을 것이기에.
“내가 상대인 게 문제인가? 그렇다면 나 대신 맞장구를 잘 해주는 로이드와 교대하면 되겠군.”
“하나도 재미없어.”
“앙리는 어떤가?”
“재미없다니까!”
말은 매정하게 하면서도 레이는 실소했다.
농담의 내용보다, 애써 빅터가 우스갯소리를 시도한 것 자체가 우스꽝스러웠기에.
“그래도 애쓴 만큼은 칭찬해줄게.”
어느새 레이는 다시 감정을 추스르고 있었다.
막연한 불안감을 떨쳐내고 평소의 그녀로 돌아온 채로.
“···좋아. 이제 네 능력으로도 내 마음을 읽을 수 없지?”
“그렇군. 꽤 오래 전부터 파동이 전해지지 않는다.”
이때, 레이는 빅터에게 들키지 않게 마음속으로 읊조렸다.
그것은 간곡하게 억눌러 쥐어짠 한 마디였다.
‘이제 내게 남은 건··· 덩치, 너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