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165화 (165/186)

징조의 장(1)

1.

독기에 찬 빅터의 시선을 레이는 피하지 않았다.

그녀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른 채 말을 이었다.

“···두 아이는 언제나 처럼 인근 산에 들어갔어. 지형을 익히기 위한 척후 훈련 때문이었지.”

비가 내리고 사방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렸지만, 빅터는 레이의 목소리를 단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자연스레, 그녀가 읊조리는 내내 울분을 참고 있다는 것도 함께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내 탓이야. 너무 안이했어. 둘 다 이식을 마친 우등생들이라, 하룻밤 정도 소식이 없어도 별일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레이여, 이들은 빅터가 나를 도우러 간 그 밤사이에 봉변을 당했단 것이냐?”

“대스승, 인사를 드리는 게 늦었습니다.”

“괜찮다. 지금은 나에 대한 예우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있지 않느냐?”

“예···.”

말끝을 흐리는 레이.

대스승은 그녀의 곁에 다가가 어깨를 토닥였다.

“죄송합니다, 대스승···.”

“아니다. 너만큼 속상한 이가 또 있겠느냐? 뭐라 위로할 말이 없구나.”

죽은 두 사람은 레이에게 있어서 첫 제자였다.

그들에게 들인 시간과 애정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으리라.

그럼에도 레이는 울지 않았다.

하지만 하늘이 대신 그녀의 슬픔을 대변하듯, 멈추지 않고 마누엘과 에리히의 시신을 적시고 있었다.

지면 아래로 혈흔이 흐른다.

그것은 빗물에 쓸려나가 점차 옅은 빛깔로 변해갔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을 목도한 빅터의 감정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으니···.

“빠득!”

광장에 이를 악무는 소리가 울린다.

이때, 빅터의 두 눈엔 악마마저 몸서리칠 만큼 귀기와 핏기가 서렸다.

‘대체 누구냐? 이 아이들에게 해코지를 한 것은···.’

그가 시체에게서 잔류사념을 감지한다.

빅터는 심상세계에 그려지는 형태를 보다 선명히 보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창칼을 든 무리가 보인다.

그들은 회백색 그림자의 실루엣으로 존재했다.

얼굴만은 포착할 수 없어.

그들 전원이 하나같이 안면을 가리는 투구를 쓴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찾았다. 이 개 같은 새끼들···!’

빅터는 범인의 정체를 깨달은 동시에 한껏 속이 뒤집어짐을 느꼈다.

놈들은 언젠가 동방에서 로이드가 말했던 작자들···.

수개월 전에 패의 유파를 급습하여 전멸시킨 또 다른 세력이자, 성국 베가시아의 무력집단.

그들은 바로 기사Knights였다.

‘어째서냐? 본디 베가시아 근방에서나 주둔하고 있어야할 놈들이 왜 이 최남단의 도시까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

하나, 사실은 그보다 의문인 점이 있었다.

정안을 이식한 마녀 사냥꾼은 강해.

그들의 완력은 일반인의 몇 배에 달하며, 순간의 민첩성은 순식간에 뒤를 잡기에 충분할 정도다.

거기다 이븐 가지의 가루를 흩뿌린다면 무장한 열 명의 장정과 겨루어도 결코 밀리지 않는다.

반면, 제아무리 대인전을 훈련받은 병사라 해도 어디까지나 인간.

전신에 중갑을 걸쳐봐야 느려터진 표적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마누엘과 에리히는 패배했다.

심지어 빅터가 전해 받는 사념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포박당한 채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밤새 사로 잡혀 손발이 뭉개질 정도로 괴롭힘만 당하다 죽임당한 것이다.

“덩치? 너 어딜···.”

“놈들을 추격한다. 새벽에 일을 벌였다면 금방 쫒아갈 수 있을 터.”

“잠깐! 네가 뭘 알아 냈는 진 몰라도, 지금 당장은···.”

“레이 사저. 너는 잘도 참을 수 있군.”

“뭐?”

“내 눈엔 보인다. 아이들의 고통에 찬 혼의 모습이! 그리고 들린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내뱉은 두 사람의 비명소리가! 레이, 너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거냐? 이 꼴을 눈앞에 두고서도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가?”

“···다물어! 네가 내 기분에 대해 뭘 알아?”

“모른다. 쭉 감정을 억누르고 내게서 숨기고 있으니 당연히 모를 수 밖에.”

“너어어···.”

“그래. 차라리 화를 내 다오. 지금만큼은 참지 말아라. 내게 분풀이를 해도 좋으니 그 가면을 벗으란 말이다.”

“큭!”

도발에 슬쩍 레이의 정신이 불꽃을 일으켰다.

빅터는 이런 식으로라도 레이가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길 바랐다.

소중한 사람이 죽었음에도 애써 마음을 다잡는 그녀의 모습이 가혹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스승은 이들의 분란을 허락하지 않았다.

“둘 다 진정 하거라. 빅터, 자네의 기분은 이해하나 지금은 레이가 옳다. 당장 이 자리를 뜨는 것이 급선무다.”

“하지만 대스승, 이대로 물러날 순 없습니다. 이건 우리들에 대한 도전··· 아니, 선전포고가 아닙니까?”

“설사 그렇다 해도 대응은 허락하지 않겠다. 눈을 떠라, 젊은 사냥꾼아. 분노에 사로잡혀 뭐가 중요한 지 잊지 말지어다.”

“···.”

“그래, 덩치. 잠자코 대스승의 명에 따르도록 해. 우린 사람들의 이목을 너무 끌었어.”

그 말 대로 주변에 선 행인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큰 몸집의 사내와 작은 키의 동양 여인, 그리고 초로의 신사가 한 자리에 모인 것과 별개로···.

그들은 죽은 시체들과 같이 사냥꾼 코트라는 통일된 복장을 하고 있으니 눈에 띠일 수밖에 없었다.

슬슬 대스승은 레이에게 눈짓을 건넸다.

“레이 엔쯔이여. 가루를 쓰도록. 목격자가 많으니 조절에 신경 써야 한다.”

“예, 대스승.”

“잠깐, 레이 사저.”

뭔가를 실행하려는 레이의 앞을 빅터가 가로막는다.

그녀는 그것을 시비로 받아들였다.

“뭐야? 대스승의 명령을 어겨가면서 까지 날 방해할 셈이라면···.”

“그게 아니다.”

레이가 평정심까지 버려가며 화를 내기 일보직전.

빅터는 자신의 가슴 언저리에 오른손을 올렸다.

“가루를 쓰는 일이라면 내가 하겠다.”

“무슨···.”

레이가 채 저지하기도 전에, 빅터의 심장부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는 대스승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일찍부터 파악하고 있었다.

“흠!”

이븐 가지의 분말이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그것은 빗줄기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피어오르더니, 광장을 가득 매운 모든 이들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일순간, 가루에 영향을 받는 행인들이 자리에 멈춰서고 멍한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사냥꾼의 비술 중 하나로···.

이븐 가지의 분말을 이용한 기억상실 유도였다.

“덩치, 너 언제 이런 기술까지?”

“사정이 있어서 익혀뒀지.”

임무를 수행하다보면 패닉에 빠지는 민간인과도 자주 만나기 마련.

그렇기에 그들이 끔찍한 기억에 고통 받지 않게 해주어야 한다.

자비로운 망각을 선사해주는 것 또한 사냥꾼의 본분 중 하나였으니···.

“잘 했다, 빅터여. 레이, 그럼 이 틈에 회수를 부탁한다.”

“···알겠습니다, 대스승.”

“나도 돕지.”

대스승이 지시한 회수란, 당연히 죽은 새내기 사냥꾼들의 주검을 수습하는 일이었다.

빅터가 두 사람의 축 늘어진 몸통을 챙기는 사이, 레이는 자신의 애제자들의 잘린 목을 품에 끌어안았다.

2.

눈을 뜬 채, 꿈을 꾸는 사람들 사이로 세 그림자가 스쳐지나간다.

빅터와 레이, 그리고 대스승은 골목을 누비며 최단거리로 집결지에 도착했다.

술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들을 맞이한 것은, 동료들의 놀라움과 탄식이었다.

“세상에··· 그럴 수가.”

아이라는 흐느껴 울었다.

아랑은 사냥꾼의 죽음을 처음 본 탓에 경악했고, 리리 리는 무거워진 분위기가 불편한 눈치였다.

앙리가 착잡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는 사이, 마누엘과 에리히를 선배로 따르던 어린 사냥꾼 지망생들은 거의 통곡했다.

“정신 나간 광신도 자식들, 완전 지들 세상인줄 아는구만. 아앙?”

콰앙!

로이드는 탁자가 박살날 정도로 강하게 주먹을 내리쳤다.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렸는지 그의 어깨의 떨림은 멎지 않았어.

빅터조차 로이드가 격분한 모습은 처음 볼 정도였다.

“대스승 크레이그! 당장 명령해주십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바로 대스승의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제가 가겠습니다.”

“뭘 어쩔 셈이더냐, 로이드여.”

“뻔하지 않습니까? 신앙에 쳐 돌아 눈이 먼 그 놈들에게 이 몸이 직접 마녀 사냥꾼의 무서움을 각인시켜주겠단 말입니다!”

그러나 대스승은 고개를 저었다.

“머리를 식히도록. 지금은 때가 아니다.”

“때라고요?”

“시기가 좋지 않다. 지금 네가 자리를 비워선 안 된다.”

“웃기지 마쇼. 노망이라도 난 겁니까, 대스승?”

“상부에서 지령이 내려왔다. 동부 지방에 용Dragon을 닮은 짐승이 출현했다는 소문이다.”

“하? 그건 불확실한 정보 아닙니까? 무슨 놈의 용은 얼어 죽을··· 찾아가봐야 허탕만 칠 줄 누가 알죠? 예전에 일각수一角獸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도 사기꾼이 퍼뜨린 이야기 아니었습니까? 반면에 마누엘과 에리히의 원수는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지금 나서면 어떻게든···.”

“우리의 목적은 사사로운 복수가 아니다. 마녀 사냥꾼의 본분을 잊었느냐?”

“이 영감이 진짜···.”

자칫 로이드는 대스승의 멱살을 잡을 기세였다.

레이가 검을 뽑아들어 목을 겨누지 않았다면 실제로 그랬을 지도 몰랐다.

“물러서, 로이. 아무리 분개했어도 대스승께 무례를 용서할 수 없다.”

“아니, 레이 아가씨까지 그러기냐고!”

“어린 제자들 앞이다. 감정을 추슬러.”

“웃기지 마! 마누엘, 에리히 꼬맹이가 죽은 마당에 다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뿐만이 아니야. 전에 내가 보고했었지? 패의 유파도 놈들에게 당했었다고! 그런데 왜 꼬리를 내리고 자빠졌냐고!”

“임무를 멋대로 거부할 셈이야? 그렇다면 너는 근신이다. 조사는 빅터에게 맡기고 네 녀석에겐 무기한 주둔지 대기 명령을 내릴 테니까 그렇게 알아둬.”

로이드는 자신의 편을 찾으려 했다.

그의 시선은 어느덧 빅터에게로 향해있었다.

“야, 빅터. 너만은 아니지? 너는 잠깐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애들이랑 대련까지 해줬잖아?”

“그랬지.”

“직접 상대해봤으니 잘 알거 아냐? 마누엘의 주먹엔 내 가르침이 담겨있다는 걸. 그리고 에리히 녀석 자식 발차기는 레이 아가씨 작품이란 것도···.”

“그래.”

“그럼 뭐라고 말 좀 해봐! 잠자코 있지만 말고 우리 둘이서 대스승을 설득하자고! 갑옷 입은 머저리들에게 제대로 복수를···!”

“아니, 그건 곤란하다.”

생각할 시간이 생겼기 때문이었을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로이드 만큼이나 의욕에 차있던 빅터의 태도가 변했다.

그는 어느새 한층 냉정해진 상태에서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젠장할! 너, 이 자식 오늘따라 왜 이래? 답지 않게 빼고 자빠졌냐고!”

“미안하지만, 대스승께선 다 이유가 있어서 우릴 말리신거다. 냉정하게 우선순위를 생각해라.”

“퍽이나, 여기서 기사 새끼들 목따는 것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는데?”

“로이드.”

“칫, 됐어. 정 그렇다면 나 혼자라도 갈 테니까.”

로이드의 반응은 지극히 인간적이었다.

감정이 메마른 대스승 크레이그나, 마음을 다스리는데 도가 튼 레이에 비해 훨씬 정이 넘치는 듯 보였다.

그렇기에 미워할 수 없어.

빅터는 그가 자신의 친구라는 걸 그 무엇보다 다행으로 여겼다.

그러나.

“끝까지 들어다오. 두 아이의 죽음을 허투루 만들 셈이냐.”

“뭐?”

빅터는 술집 가장자리 테이블 위에 방치된 마누엘과 에리히의 시신 곁으로 걸어갔다.

그는 사지가 꺾이고 목이 없는 마누엘의 몸 위에다 손을 올리더니···.

“이걸 잘 봐라.”

흠집.

핏기가 사라진 창백한 피부에 선명하게 남은 칼자국···.

마누엘의 등짝을 시작으로 어떤 문장이 미완성인 채 그어져 있었다.

이어서 빅터는 에리히의 나신도 마누엘 옆에 가지런히 놓았다.

그러자 겨우 메시지가 나타났다.

로이드가 허탈한 표정으로 그것을 읊조렸다.

“···불신자에게 천벌 있으리. 이들 잔당의 은신처를 제보한 이는 성당에서 은화 3닢을 마땅히 내주리라.”

“이제 알겠나?”

“하, 하하··· 지금 나랑 장난 치냐, 빅터?”

로이드는 더욱 속이 뒤집어질 지경이 되었다.

안 그래도 마누엘의 얼굴은 엉망이야.

앞니가 모조리 나가고, 눈알이 터질 때까지 후려갈긴 상처가 있다.

또한 에리히의 가느다란 양 손가락이 뭉개져서 튀어나온 것···.

더 나아가서 둘 다 발꿈치 힘줄이 잘린 상처까지 본다면 열불이 나지 않는 게 이상했다.

그런데 이제는 두 아이의 등판에 칼집까지 남겼다니?

이 순간, 로이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녀가 아닌 적에게 살의를 품었다.

그가 개인적인 원한으로 복수를 실행하는 것을 말릴 자는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빅터는 로이드의 어깨를 잡았다.

그 손가락에는 힘이 실려 있어, 그를 제지할 셈이었다.

“놔. 아무리 너라도 지금 날 건드리면 용서 없어.”

“답답한 자식. 아직 모르는 모양이군.”

“뭘?”

“방금 네가 읽은 그 내용에 숨겨진 진짜 의미를 말이다.”

“미안한데, 난 지금 너무 빡 돌아서 머리가 잘 안 돌거든? 빙빙 돌리지 말고 그냥 본론만 말해.”

“기사들은 아직 우리의 집결지 위치를 모른다.”

“잘 됐네. 그래서 그게 뭐 어쨌···.”

“그건 다시 말해, 놈들이 심문에 실패했단 뜻이지.”

“아.”

로이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그제야 뭔가를 깨달았다.

“마누엘과 에리히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고···.”

그랬다.

그들이 두 아이의 시신에 글귀를 새긴 까닭은, 사냥꾼들의 정보를 충분히 캐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로이드, 두 아이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우리를 지키려했다. 채 다 성장하지 못한 그 작은 몸으로··· 가혹한 고통 속에서도 신념의 끈을 놓지 않고 버텨냈지.”

“지켜? 우리를 지킨다고?”

“마누엘과 에리히가 고문을 견뎌낸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대체 뭘 읽어낸 거냐? 애들이 죽어가면서 어떤 걸 남겼길래?”

“그래. 적어도 너나 내가 다짜고짜 나서면 안 된다는 걸 지금 막 내게 알려주었다.”

빅터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자신이 망자의 목소리에서 얻어낸 정보에 대해서···.

“잘 들어라, 나도 믿기지 않지만··· 십중팔구 기사들에겐 우리의 힘이 통하지 않는다.”

“그게 뭔···.”

“내가 본 게 사실이라면, 어떤 의미에서 놈들은 우리의 천적일지도 모른다.”

“천···적이라고?”

“역시 그랬나? 빅터여, 너의 확인을 통해 불길한 예감이 이윽고 현실이 되고 말았구나.”

“대, 대스승··· 지금 빅터가 무슨 소리를 하는 지 아시겠습니까?”

“이제 어느 정도 수수께끼가 풀린 듯하다.”

대스승 크레이그는 처음부터 뭔가를 짐작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는 빅터가 건넨 말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이따금씩 보고되곤 했었지. 우리가 마와 싸울 수 있는 힘의 근원을 차단하는 적이 있다고. 이븐 가지의 분말을 흩뿌릴 때마다 눈부신 빛으로 태워버린다고 했던가?”

“예? 태운다고요? 그림자를?”

“그땐 신종 사역마의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정안으로 강화된 육체마저도 무력해졌다더군. 하나, 그게 사실이라면 영민하고 재능이 넘치던 마누엘과 에리히가 당한 것도 무리는 아니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가루에는 그 어떤 물리법칙이 통하지 않아.

그래서 사냥꾼들은 이를 통해 치명적 공격을 흘리거나 피해왔던 것이 아니었던가?

“말도 안 됩니다. 수련을 통해서 기술을 익히고, 이식으로 인간의 한계마저 초월한 우리를 어떻게···.”

“이 늙은이도 자세한 건 모른다. 그래도 잘 생각해 보거라, 로이드여. 마녀는 사람들을 제물로 바친다. 그리고 그 마녀를 우리 마녀 사냥꾼들이 응징하지. 오래도록 세계는 이런 구조로 균형을 유지한 적처럼 보였다.”

“그게 아니란 말씀입니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지. 하지만 좀 더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했다. 그게 좁아진 시야에서 비롯된 착각이 아닌가 하는 여지를···.”

드물게, 빅터는 대스승의 목소리에서 어둡고 가라앉은 감정의 색을 보았다.

“어쩌면, 우리 또한 거대한 먹이사슬의 일부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늑대를 쫒던 포수가 등 뒤에서 나타난 곰에게 당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과 같은 이치로···.”

대스승의 말을 들은 이들의 뇌리로 혼란의 아지랑이가 핀다.

빅터나 로이드, 레이와 앙리는 어떻게든 용기로 마음을 부여잡았지만···.

아직 어둠의 존재와 제대로 싸워본 적이 없는 아이들에겐 무리였다.

불안에 한 없이 가까운 망설임이 흘러, 이는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직전의 상태였다.

그러나 빅터는 대스승의 등 뒤에서 흘러나오는 격렬한 파동을 보았다.

그것은 결코 주눅 들거나 움츠려든 기운이 아니었다.

“···재미있군. 죽은 아이들에겐 미안하지만 아주 흥미로워. 말년에 이 나이를 먹고 이토록 가슴이 뛰는 일이 또 생길 줄이야.”

지적 호기심으로 가득한 탐구자의 미소.

그는 어느새 세상의 새로운 일면을 발견한 학자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로이드, 자네의 건의를 일부 수용하마.”

“대스승, 그러면?”

“당장 추격대를 보내진 않는다. 너도 알다시피, 정확한 전력도 모르는 적에게 함부로 나서면 곤란하니까.”

“크윽, 결론이 달라진 게 없지 않습니까?”

“안심하라. 이대로 우리에게 검을 겨눈 상대를 방치하지도 않을 것이다.”

대스승은 앙리에게 손짓 했다.

그녀의 능력, 대규모의 지령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앙리여, 상부에 증원을 요청하라. 더불어 지금까지 네가 들은 모든 내용을 보고해다오. 특히 베가시아의 기사들에 대한 정보를 빼놓지 말도록.”

“예, 대스승 대스승 크레이그. 기꺼이···.”

“그리고 빅터, 마음이 무겁겠지만 이번 임무는 자네가 단독으로 맡도록 하게.”

용이 나타난 동부 지역으로의 파견을 종용한다.

빅터는 대스승의 지시에서 은근한 염려와 걱정을 눈치 챘다.

너무나 노골적인 피신이었다.

“저를 떼어 놓으실 생각이십니까?”

“빅터여, 너는 우리의 최대 전력이나 다름없다. 미지수의 능력을 가진 적들을 상대하기엔 아직 일러. 초장부터 내놓을 패로 적합하지 않다.”

“외람되지만, 대스승. 다시 생각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이건 명령일세. 거절은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빅터는 더 이상 고집 부리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대스승의 의도가 미심쩍긴 마찬가지였으나, 그렇다고 마녀 사냥꾼으로서의 규율을 어겨서는 곤란했다.

거기다···.

‘다시 머리가 아파오는군. 동쪽 지방에서 또 무슨 재앙이 일어난단 말인가?’

확실한 장면이 떠오르지 않는 흐릿한 예지.

두 아이의 죽임 당한 새벽에 빅터가 느꼈던 감각이 다시 되살아났다.

그는 예감했다.

이어지는 다음 여행길도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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