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장(6)
11.
빅터는 대스승에게 동방에서 자신이 겪은 모든 사건의 전말을 털어놓았다.
엑조틱 마르와의 만남.
자신이 시간의 벽을 넘은 사실.
마기를 빨아들이는 성질을 지닌 붉은 돌의 정체는 물론.
그리고 청람이 다른 육망성과 공조하여 활동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전부···.
“···이상이 제가 보고 들은 것들입니다.”
그들의 대화는 황혼이 찾아올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하나하나가 결코 가볍지 않은 정보들이야.
대스승 크레이그는 한참을 생각하다,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과연, 그런 일이 있었던 게로군. 앞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겠구나,”
마녀가 된 딸의 근황을 들었으니 동요할 만도 했으나, 그는 청람에 대해 일언반구의 언급도 하지 않았다.
당장 대스승의 관심사는 주어진 조각들로 하나의 퍼즐을 완성하는 것뿐이었다.
“재미있군. 우연치곤 정황이 딱딱 들어맞아. 마침 알베르트가 찾아낸 연구소의 주인도 육망성과 관계된 자였으니.”
빅터는 바로 대스승이 떠올린 생각을 읽어냈다.
“빙의의 마녀입니까?”
“그렇다. 살덩이를 주무르던 그 계집이야.”
하지만 묘하다.
빅터는 살짝 위화감을 느꼈다.
“이상한 점을 눈치 챘느냐, 젊은 사냥꾼아?”
“예. 제가 아는 한, 빙의의 특기는 생체를 증식 시키는 게 아니었습니까?”
“그렇지. 더불어 그 이름처럼 정신을 자기가 만들어낸 고기인형에 담는 재주도 있었음이다.”
“그런데 어디서 공간 전송 같은 짓거리를···.”
“큭큭. 언제부터 그년이 자기 전공을 버리고 다른 마법에 관심을 기울였나··· 그것이 의문인가, 빅터여?”
대스승의 물음에 빅터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마녀의 세계관이 쉽사리 변하지 않는 단 걸 익히 알고 있었다.
“너무 이질적입니다. 성질이 완전히 다르지 않습니까? 그것들이 추구하는 것은 왜곡된 극한일 터···.”
“간단한 이야기란다, 빅터여. 단지 예외가 있었을 뿐이지.”
“예외?”
“가능성은 두 가지다. 공동의 연구자로서 다른 마녀에게 조력했거나, 혹은 거부할 수 없는 외력이 작용하여 연구를 종용 당했겠지. 나는 후자 쪽에 가깝다고 추론하고 있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감이다. 하나, 거기엔 내 연륜만큼의 경험이 기반으로 깔려있지.”
대스승 크레이그의 얼굴이 확신에 차있다.
그는 단언하며 좋은 성과가 있을 것이라 말했다.
“우리가 때때로 틴달로스의 사냥개라 불리는 이유를 아느냐?”
본디, 마녀의 은신처를 발견해낼 때마다 집요하게 탐사를 하는 데엔 이유가 있다.
이는 단순히 마녀들이 연구한 기술과 지혜를 찾아내기 위해서만이 아니었으니···.
“너도 경험했다시피, 마녀의 마기는 각자 고유한 흔적을 남긴다. 그건 결코 바꿀 수 없는 지문이면서 뻔히 알아도 지우지 못할 족적과도 같지. 나와 알베르트는 그 곳에서 최소 둘 이상의 발자취를 찾아냈다.”
하나는 의심의 여지없이 빙의의 마녀의 것.
그렇다면 또 다른 인물은 자연스럽게 좁혀진다.
육망성의 일원이면서, 동시에 빙의의 마녀와 가장 밀접한 연관이 있는 자라고 한다면?
“공교롭게도, 그 계집은 최근까지 자네의 원수와 깊이 얽혀있었지.”
“클라리스···.”
“축하한다, 젊은 사냥꾼아. 네 복수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되었으니.”
세상사는 모를 일이다.
빅터는 세삼 기구한 인과의 흐름을 느끼고 있었다.
설마하니 5년 전에 놓쳤던 마녀의 존재가 지금에 와서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할 줄은···.
“빅터여, 이 늙은이에겐 내세울만한 사소한 자랑거리가 둘 있다네. 첫째는 기억력이지. 한 번 맡은 마기의 성질은 결코 잊지 않음이야. 그리고 다음은···.”
바로 집요함, 가히 편집증에 가깝게 물어뜯는 끈기.
대스승 크레이그는 그렇게 말하며 빅터의 옆 어깨를 잡았다.
“안심하라. 내 약속하지. 이 몸에 숨이 붙어있는 한, 반드시 자네를 그 계집의 코앞까지 인도해줄 터이니.”
자신의 목숨을 건 처절한 맹세에는 전율의 기백이 스며있어.
잠깐이었지만 빅터는 그 목소리에 압도당했다.
사냥꾼의 힘이 강렬한 감정에서 나온다고 한다면···.
그의 정신은 앞으로 십 수 년 이상 싸우기에 충분하고도 남았으리라.
이 정도 각오라면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빅터는 성심성의를 다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저는 항상 당신께 은혜만 받는군요.”
“아니다. 내겐 자네를 어둠의 길로 끌어들인 책임이 있지. 복수를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스승은 넉살좋게 웃어보였다.
그 미소가 돌아가신 친부의 입 꼬리와 은근히 비슷해, 빅터는 오랜만에 그리운 감각을 떠올릴 수 있었다.
“고집불통 베누다는 쉽사리 인정하지 못했겠지만···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 빅터여. 몰라보게 듬직해졌어. 표정에서 관록이 다 전해져오는군. 이젠 애송이라 막 부를 수만도 없게 되었다. 필시 너의 5년은 범상치 않은 일들로 가득했겠지.”
그가 손으로 더듬은 빅터의 팔뚝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단단해.
그것만으로도 대스승 크레이그는 자신의 제자가 견딘 가혹한 시련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우리가 담소를 나누기엔 조금 이른 것 같구나. 마녀들의 장난질이 얼마나 큰 파란을 일으킬지 상부에 보고하는 게 우선이니 말이다.”
“그렇습니다, 대스승. 레이 사저가 걱정하며 밤을 지세우고 있을 지도 모르니까요.”
“큭큭큭, 레이는 여전히 여린 성품을 가지고 있지. 중책을 맡은 지 슬슬 1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 아인 아직 외로움을 많이 탄다네.”
가벼운 이야기로 화제를 끌어가는 대스승.
그러나 그의 시선은 쭉 며칠간 자신을 가두었던 이계의 배에 고정되어 있었다.
단시간에 지표 위로 끄집어냈기 때문이었을까?
표류자의 유적은 외부 공기에 의해 빠른 속도로 부식되는 중이었다.
입구는 허물어지고 내부가 녹아간다.
안쪽을 조사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보였다.
“빅터여, 혹여 묻겠는데···.”
“말씀만 하십시오.”
“자네라면 이 유적을 어떻게 다룰 수 있지 않겠나?”
대스승 크레이그가 눈독을 들이는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기능을 잃어버렸다고 해도 이 유적에는 표류자의 정수가 담겨있다.
손실된 부분만 제외해도 가공할 양의 제노리움 원석 덩어리···.
심록 토벌전에선 어쩔 수 없었다고 쳐도, 같은 기회를 한 번 더 날려먹는다면 너무 아쉽지 않은가?
당장 눈앞에 보이는 모든 질량을 유성의 파편으로 가공할 수만 있다면, 분명 앞으로의 싸움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었으니···.
“시도해보죠.”
빅터는 자신의 의식을 도끼에 온전히 집중했다.
‘가능하다. 이 표류자의 유체로 만들어진 무구라면···.’
사념을 흘려보내 조종한다.
유적을 지하에서 끌어올릴 때와 같은 요령이었다.
“이거 놀랍군. 전에도 내 두 눈으로 봤었지만, 빅터 자네는 정말이지 대단해.”
“대스승, 안타깝지만 이걸 온전한 상태로 가져갈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역시 보이는 대로 파손이 심각한가?”
“동력로가 마모된 모양입니다. 부상시키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런가? 아쉽게 되었구나. 모처럼 유성의 파편을 대량으로 실어나갈 수 있나 싶었더니.”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죠.”
“호오, 무슨 좋은 수가 떠올랐느냐?”
그래도 방법은 있었다.
빅터는 유일한 해결책을 그대로 실행했다.
위이이잉!
빅터의 도끼가 푸른빛을 발하며 진동한다.
그러자, 동시에 표류자의 유적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분해.
쪼개지고 갈라진다.
덩어리가 파편이 되고, 파편은 가루로···.
그것은 어느새 입자 단위까지 줄어들었다.
배는 부피가 서서히 작아지더니, 곧 마술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어느새 그 자리엔 유적이 자리 잡고 있었던 패인 흔적만이 남았다.
“빅터여, 대체 어떻게 한 거지?”
“전부 압축했습니다. 이 도끼에···.”
“가능한 일인가? 그 가공할 부피를 한 곳에 담았다라?”
“저도 표류자가 가진 모든 기술의 원리를 파악하진 못합니다. 그저 이 안에 모두 들어있다는 것만 알죠.”
물리 법칙을 무시한 현상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무게가 늘어난 것만 제외한다면, 도끼의 외견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 나이를 먹고도 아직 놀랄 게 남아있다니, 역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로군.”
대스승이 바라던 결과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낭비는 없다.
어떻게든 표류자의 유적을 회수하는데 성공했기에.
이제 두 사람이 할 일은 한 가지.
그들을 기다리는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12.
짙은 어둠이 깔린 밤.
달은 뜨지 않았다.
비를 어금은 흑운이 별빛마저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두 명의 사냥꾼들이 탄 말은 거침없이 무역로를 달리고 있었다.
땅을 박차는 발굽 소리가 지나치게 경쾌해.
당장 말의 눈동자에 격한 흥분이 엿보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빅터는 고삐를 능숙히 다루었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대스승이 칭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로.
“기마술이 보통이 아니구나. 또한 가루를 다루는 솜씨가 늘었어.”
“과찬입니다.”
“하지만 너무 서두르는 것이 아닌가?”
“조금이라도 빨리 쉬셔야 합니다.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며칠이나 갇혀 지내지 않았습니까?”
“큭큭, 내가 주책맞은 제자를 두었군. 고작 서넛일 정도 고립된 것을 가지고 이렇게 유난을 떨다니···.”
사실, 빅터는 레이에게 대스승의 얼굴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녀의 성격을 미루어볼 때, 밤새 대스승에게 받은 지령에 신경 쓰며 갈팡질팡하고 있을 게 뻔해.
유일한 해결책은 마음의 지주인 대스승이 무사히 귀환하는 것뿐이었다.
더욱이···.
‘···뭐지? 이 가슴을 옭죄는 것만 같은 답답함은?’
간헐적인 기시감과 인식의 뒤틀림.
혹시나 싶어 몇 번인가 미래시의 능력을 발현 시켰지만, 끝내 만족할만한 정보를 얻어낼 순 없었다.
이 순간, 빅터는 뒤늦게 자신의 한계를 깨달았다.
맹점.
일견 무적처럼 보이는 고차원 예측에도 하자가 있었다.
결국 예지란, 인간의 관측에 불과한 것.
어디까지나 자신이 직접 처한 상황까지만 타파할 수 있는 편법에 지나지 않았으니···.
13.
하룻밤이 지나 거의 정오에 가까워질 무렵.
빅터와 대스승 크레이그가 도르프하임의 항만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진 뒤였다.
툭, 투두둑.
두 사람이 말에서 내리자, 두 시간 전부터 내리던 빗줄기가 한층 더 거세졌다.
그럼에도 마을 광장에는 적지 않은 수의 인파가 몰려있었는데···.
하나같이 그들의 이목은 중심부의 어떤 것에 꽂힌 상태였다.
“빅터여, 어쩐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구나.”
“대스승,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사방에 경악과 공포가 감돈다.
그러면서도 안도감과 혐오가 뒤섞인 감정이 풍기고 있었다.
빅터는 급히 행인들 사이를 헤치며 나아갔다.
앞을 가로막는 사람이 열 명도 채 남지 않게 되자, 경악스런 풍경이 그의 눈동자에 들어왔다.
수많은 목격자들에게 관측된 하나의 사실···.
그렇기에 개변할 수 없다.
반항하기도 전에 확정되고만 미래가 빅터에게 잔혹한 현실을 들이밀었다.
심하게 찢겨나간 사냥꾼 코트가 꼬챙이에 꿰뚫린 채 깃발처럼 날린다.
그 아래에는 목을 잃은 남녀의 몸통···.
그리고 빅터가 겨우 알아볼 수 있을 두 얼굴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마누엘, 에리히···.”
비참한 시신이었다.
둘 다 양팔이 꺾이고, 두 다리가 분질러진 채로 참수 당했다.
불과 하루하고도 반나절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살아있었던 신입 사냥꾼들···.
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숨어든 마녀.
암살전문의 사역마.
혹은 중합체의 기습에 살해당했나?
아니, 어느 쪽이든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만에 하나 그런 것이 시내에 나타났다면 레이와 로이드, 앙리가 잠자코 내버려뒀을 리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무엇이?
제아무리 어리다 해도 마누엘과 에리히는 둘 다 이식을 받은 정식 사냥꾼들이다.
마의 존재가 원인이 아니라면···.
감히 어떤 존재가 통상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자들을 이토록 처참하게 죽일 수 있단 말인가?
“···레이 사저, 설명해라.”
“덩치, 너···.”
빅터는 레이가 자신의 배후에 다가온 걸 눈치 채자마자 대뜸 대답을 요구했다.
“말해, 지금 당장!”
인내심이 바닥났어.
그의 분노는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에 놓인 마누엘과 에리히의 주검에는, 선명한 고문의 흔적이 엿보였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