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163화 (163/186)

인도의 장(5)

9.

불길한 전조는 이른 새벽에 돌연 찾아왔다.

그것은 레이에게로 전달된 메시지.

바로 대스승 크레이그가 보낸 지령이었으니.

레이는 채 날이 밝기도 전에 빅터를 불러내어, 그 자세한 내용에 대해 설명했다.

“대스승께서 너를 지목하셨어.”

“그분께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 건가?”

“잘은 모르지만, 또 다른 별세계의 유물을 찾아내셨다고···.”

목소리에 그림자를 둘러 멀리 떨어진 장소나 인물에게 전달하는 사냥꾼들의 비술, 지령.

그 특성상 많은 이야기를 담기 힘들기에, 대스승 크레이그는 언제나 필요한 정보만을 건넸다.

그리고 그의 짤막한 지시는 이번에도 간결하지만 무거운 내용이 담겨있었다.

‘하늘에서 온 자의 흔적을 발견. 빅터의 도움이 필요. 그를 아일론 외곽으로 보내라. 좌표는···.’

여기서 말하는 외곽이란, 인접한 다른 국가와의 경계를 말하는 게 틀림없다.

하나, 어째서인지 레이가 읊조린 좌표는 대스승 크레이그가 방문한 북쪽의 베가시아와 정반대 방향이었으니···.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게 아닌가?”

“그럴 리 없어. 대스승께서 뭔가 고려해서 이런 지령을 내리셨을 거야.”

레이는 알았다.

대스승 크레이그의 지시가 내리는 의미는 가장 뒤에 꺼낸 말이 진실에 가깝단 사실을.

즉, 좌표를 따른다.

그러하여 빅터의 목적지는 지도에 적나라하게 드러났으니.

“그렇다면 프로스트 공국인가?”

현재 빅터가 머물고 있는 도르프하임은 중앙정부 아일론의 소속이다.

프로스트 공국은 남쪽에 위치한 강대국의 이름이었다.

거리상으론 그다지 멀지 않다.

거의 산 하나를 넘어가면 닿을 정도다.

하지만 레이는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베가시아 국경으로 향한 대스승이 어째서 남단에서 지령을 내린단 말인가?

“왠지 이상한 예감이 들어.”

“우리의 싸움은 언제나 그랬다. 맞서보기 전까진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지.”

“그건 그렇지만··· 가주겠어, 빅터?”

“당연한 소릴.”

빅터가 망설임 없이 답한다.

그는 당장 여행길에 나설 기세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때.

“잠깐만 덩치.”

“뭐지?”

“잠깐만 기다려.”

레이는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들어 가더니, 펑퍼짐한 옷가지를 가져왔다.

“이걸 가져가. 심심풀이로 만들어봤어. 네 몸집이 그 사이에 변해서 치수를 다시 제야 했지만···.”

그녀가 건넨 것은 새 코트였다.

크로이 가의 문장 외엔 별다른 장식 없이 투박한 형태였지만, 그에 재료로 쓰인 가죽은 한 눈에 보아도 양질의 고급품이었다.

빅터는 그것을 받아들이자마자 몸에 걸쳤다.

“멋진 매무새다. 전문 봉제사가 만든 것보다 명품이야.”

“그렇지? 꽤 공들여서 만든 거야.”

“고급스런 선물을 받았으니 그만큼의 밥값은 해야겠군.”

“이젠 제법 기특한 말도 할 줄 아네? 뭐, 마음에 든 것 같아 다행이야.”

레이는 내심 빅터에겐 흑빛 코트가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고?”

빅터는 왼팔을 슬쩍 들어 올리더니.

“어째 어깨부분이 좀 묵직하군.”

“견장에 철판을 추가했거든. 그밖에 여기저기 급소 부위에 체인도 조금 추가했어. 어지간한 날붙이쯤은 막아낼 수 있을 거야. 지금은 어색해도 자주 움직이다보면 알아서 길들여지겠지.”

“그런가? 고맙다, 레이사저. 잘 입도록 하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미덥지 않다.

그도 그럴 게, 빅터가 이전에 입던 동양의 옷은 여기저기가 헤져있었어.

그 손상이 빅터가 지금껏 얼마나 살벌하게 싸워 왔는지를 있는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으니···.

공격을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맞서는 그의 성미만큼은 수년이 지나도 변치 않은 듯 보였다.

레이가 아이라의 도움까지 빌려서 갑옷의 구조를 빗댄 코트를 만든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조심 좀 해. 험하게 굴리지 말라고.”

“음.”

순간, 레이는 자신의 입 주변을 급히 가렸다.

빅터와 대화하는 중에 자신도 모르게 입가가 벌어져, 그만 물결치듯 곡선을 그릴 뻔했기 때문에.

마음이 틈새가 벌어져선 곤란하다.

레이는 애써 다른 핑계를 찾아야만 했다.

“아, 아니! 누가 너더러 그래? 옷 말이야! 옷!”

“음.”

“다시 만났을 때 찢어져있으면··· 반 죽여 버릴 거야.”

“무서운 협박이군. 가능한 상하지 않게 최대한 노력해보겠다.”

“뭘 노력씩이나? 어차피 별로 멀지도 않잖아.”

말 그대로였다.

이동에 몇 주가 소요될 만치 거리가 있는 북방의 베가시아와는 달리, 집결지가 위치한 도르프하임은 지리상 남방에 훨씬 가까웠기에.

무엇보다 국경을 따라 교역로가 잘 만들어져 있어.

말을 탄다면 아무리 늦어도 하루만에 도착할 정도였다.

“알겠다. 최대한 서둘러서 다녀오지.”

빅터는 별다른 채비도 없이 곧장 나서려 했다.

그가 준비한 것은 고작해야 약간의 식량, 그리고 아이라가 만들었을 새 쇠사슬뿐이었다.

“애들은 데려가지 않을 거야?”

“어떤 돌발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 임무다. 혼자가 편해.”

“또 그런 식으로 혼자 다 짊어지려고···.”

“레이 사저. 혹여 사정이 생겨 늦어질지 모르니, 리리 리와 아랑을 부탁한다.”

“흥, 쓸데없는 걱정은 접어둬. 미덥진 않지만 허풍쟁이 로이를 포함해서 이 집결지엔 베테랑 급 사냥꾼이 셋이나 대기 중이니까. 거기다 애들 돌보는 게 특기인 아이라 언니도 있고.”

“그렇군. 그럼 안심하지.”

가볍게 인사를 건넴과 동시에 빅터는 걸음을 옮겼다.

술집 정문을 나서자, 어느덧 산등성이 너머로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10.

세상은 넓다.

그리고 복잡하다.

빅터는 5년 동안 그 진리를 뼈에 사무치게 경험했다.

바로 인간이 살아가는 한, 역사는 끝없이 혼란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그건 서양이라고 해서 그 사정이 크게 다른 것도 아니지.’

남의 프로스트와 북의 베가시아.

그리고 자잘한 연합 나라가 여럿 모여 이뤄진 중앙국 아일론.

최근 들어, 인접한 위의 세 개의 나라는 온갖 이해관계가 뒤섞여 풍파가 벌어지고 있었다.

종전이 일어난 지 불과 백 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다시금 서로의 입장이 충돌한 것이다.

빅터는 말을 몰고 가는 내내 로이드에게서 전해들은 서양의 정세를 떠올렸다.

‘대스승 베누다가 말씀하시길, 새로운 마녀를 낳는 것은 시대의 혼란이라고 했던가? 자칫하면 또 악순환이 반복되겠군.’

무역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아일론을 압박하는 프로스트 공국의 태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노골적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 의도가 종교를 앞세워 중앙국에 정치 개입을 시도한 베가시아에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건, 이미 널리 퍼진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양측의 군비 경쟁은 나날이 거세져갔고, 그에 따라 무기를 파는 크로이 상단의 일도 여러모로 바빠졌다.

그렇기에 귀를 막아도 저절로 소식이 들려와.

세상이 이런 식으로 돌아가면 가까운 시일 내에 전쟁이 발발할지도 몰랐다.

속세에서 벗어난 마녀 사냥꾼들에겐 의미 없는 이야기였지만···.

남과 북을 경계에 둔 약소국가 출신인 빅터로서는 현 상황이 그리 달갑지 만도 않았다.

‘마르가 이 꼴을 본다면 인간을 혐오하고도 남지.’

지금 빅터의 눈앞에는 바스라지기 일보 직전인 타들어 간 백골이 있다.

덩치를 보아 아이 같았다.

그 외에도 주변에 널브러진 유해는 네 명···.

나머지는 토막 난 채로 보란 듯이 방치되어 있다.

가족의 것인가?

필시 산적에게 당한 것이리라.

고오오오···.

어느새, 음험한 사념이 빅터에게로 흘러들어왔다.

‘일방적으로 당했군. 불쌍하게도···.’

이는 마치 마귀들의 행패.

흡사 복마전을 연상시키는 지옥의 연회였다.

국경을 넘으려던 부부는 자신들의 아이가 도적패에 의해 산 채로 불태워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이유는 달리 없어.

이들 가족에게서 돈이 될 만한 물건을 빼앗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사람이 서로를 보듬고 지키며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다수가 반대의 입장을 취해.

약자가 강자에게 약탈당하는 일이 훨씬 자주 벌어진다.

이는 자연의 이치인가?

잔혹한 현실이야말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진리라고?

그렇다면 사냥꾼들로 하여금, 목숨까지 걸어가며 필사적으로 어둠과 싸워야 할 이유란 무엇이지?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 피의 복수만이 그들의 말로란 말인가?

‘···아니, 인정할 수 없다. 나는 사람의 고결함을, 용기를 믿는다.’

빅터가 불현 듯 찾아온 고뇌에 이를 악물며 견디는 사이···.

말의 발굽이 무역로로 이어지는 끝자락에 도달했다.

그는 어느새 대스승이 남긴 좌표 위에 있었다.

직후, 빅터는 눈앞에서 일렁이는 마기의 흔적을 포착했다.

‘빅터여.’

지령.

대스승 크레이그가 짧은 신호와 함께 자신의 위치를 알려왔다.

‘이쪽이다.’

가깝다.

그것은 약 이 백 걸음 정도 앞에서 전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당장 빅터의 눈앞에 대스승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래인가?”

달리 입구가 존재하는가?

빅터는 정안의 힘을 최대한 끌어올려, 지면 밑에 깔린 무언가에게 시선을 향했다.

그러자 드디어 비춰진다.

깊은 지하에···.

우우웅!

빅터의 머릿속이 공명한다.

그는 과거 동방에서 심록의 마녀와 싸웠을 때와 비슷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오랜만이군.”

틀림없다.

이 파장은 오직 표류자만이 보낼 수 있는 별 세계의 것···.

빅터는 그제야 대스승이 자신을 부른 이유를 깨달았다.

‘갇혀 계신 겁니까, 대스승?’

대답을 요구하는 지령을 보내니, 그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 대스승이 신호했다.

그 내용은 구조요청.

의도치 않게 빠져나가지 못할 상황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이형의 도끼가 하늘을 향한다.

빅터는 급속하게 오른팔에 유성을 조종하는 사념의 농도를 집중시켰다.

쿠구구궁!

그러자 즉각 반응이 온다.

약진을 동반한 균열이 지면에 나타났다.

이윽고 갈라진 틈 사이로, 푸르스름한 금속 덩어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추락한 지 오래되었나?’

허름한 것을 넘어서 뭉개지기 일보 직전의 유적.

견고한 내구성을 자랑하는 표류자의 구조물이 비참하게도 겉면이 부식된 채 반파되어 있었다.

그것은 동방에서 발견했던 배와는 다르게, 까마득하게 오랜 시간에 걸쳐 침식된 상태였으니···.

‘내가 아직 저걸 다루는 기술을 기억하고 있어야 할 텐데.’

다행히도 단 몇 번의 시도만으로 금방 요령을 잡아낸다.

예전처럼 추진 장치를 이용해 배를 하늘 높이 띄울 필요도 없어.

그저 가까운 땅 위에 올려놓는 정도라면 간단한 명령어만으로 충분했다.

쿠웅!

착륙과 동시에, 빅터는 내부로 이어지는 통로의 문을 열었다.

주둥이처럼 튀어나온 입구가 벌어지며, 눅눅한 세월의 숨결을 토해냈다.

잠시 후, 그리운 은사가 뿌연 안광과 함께 그늘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 늙은이가 번거롭게 만든 모양이구나.”

가라앉은 목소리.

빅터는 그 음성에 모자를 벗고 고개부터 숙였다.

“대스승···.”

“잘 와주었다, 빅터여. 오랜만에 자네 얼굴을 다시 보니 반갑군.”

5년 만에 다시 만난 잿빛 늑대의 위상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조금 전까지 외계의 건조물에 갇혀 있었단 사실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대스승 크레이그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정하신 듯 보여 다행입니다.”

“큭큭, 내가 노쇠하길 은근히 바라고 있었더냐?”

“그럴 리가. 꿈에라도 그런 생각은 추호도···.”

“농담이다, 빅터여. 오랜 자식을 만난 것 같아 장난 한 번 쳐본 것이니.”

우아하게 나이를 먹은 자가 있다고 한다면, 그건 대스승 크레이그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는 자신의 노화마저 즐기기라도 하는 것 마냥, 빅터와의 재회를 일말의 동요 없이 마주했다.

“자네와 다시 만난 것을 기념하려면, 돌아가는 길에 좋은 와인이 구해야할 것 같군. 하지만 당장은 직면한 일부터 마무리해야 하겠지.”

“대스승, 어째서 이런 곳에 계셨던 겁니까?”

“주책이었지. 나잇값도 못하고 호기심을 발동시킨 탓이야. 그만 마녀가 자기 보금자리에 깔아둔 조잡한 덫을 건드리고 말았네.”

“덫이라니, 그건 대체?”

“표류자의 기술을 흉내 낸 장난질이지. 일종의 전송장치라고나 할까?”

“전송··· 말입니까?”

대스승 크레이그의 말은 이러했다.

그는 몇 주 전, 대스승 알베르트와 함께 베가시아 인근에서 발견된 옛 마녀의 연구소를 조사했다고···.

“처음 일 주일간은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수 십 년 전에 방치된 곳이라 대부분은 폐기된 것투성이였으니까. 결국 성과 하나 없이 발굴이 끝나려던 찰나였지.”

그런데 있었다.

복층 구조로 된 마녀의 연구소 지하 맨 아래에는 숨겨진 비밀이 밝혀진 것이다.

바로, 기이한 기계의 존재.

그것은 여러 개의 붉은 돌이 담긴 수조에 납으로 된 파이관이 잔뜩 박힌 장치였다.

이는 현존하는 어떤 학자도 그 원리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무엇인가였으니···.

“며칠간은 조심스럽게 지켜보기만 했지만, 시험 삼아 가루를 흘려보내자 갑자기 작동되더군. 강렬한 섬광에 덮쳐졌나 싶더니, 정신을 차려보니 이 모양이었지. 나는 이곳 표류자의 배 안에서 눈을 뜬 게야.”

“공간을 뛰어넘었단 말입니까? 거의 한 달 가깝게 걸리는 베가시아에서 여기까지··· 단 한순간에?”

“그렇다네. 그것 말곤 달리 설명할 길이 없지.”

본디 별세계 기술을 빌려 만든 것이라 자연스레 표류자의 배로 보내진 것일까?

하나, 엄밀히 말해서 전송 장소가 어디로 정해져있던 가는 현 시점에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대스승 크레이그는 그보다 끔찍하고 위험한 가정을 하고 있었기에.

“상상해 보거라, 빅터여. 마녀들이 이 전송 기술을 온전히 손에 넣었다고 한다면?”

이때 빅터는 반사적으로 떠올렸다.

동방에서 홍련과 청람의 처치하기 직전, 하늘을 가르고 내려와 마녀들을 피신시킨 사역마의 모습을···.

땅거미 거인으로 찢어발겼지만, 어느새 자취를 감춘 그 불가사의한 현상에 대해서.

“설마, 그때 그게···.”

빅터의 뇌리에 최악의 결론이 만들어진다.

즉, 마녀들의 공간도약은 이미 한참 전에 완성되어 있었을 지도 모른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