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161화 (161/186)

인도의 장(3)

4.

“나 왔어, 언니.”

“레이! 왜 이렇게 늦었니? 아이들이랑 로이드 씨는 한참 전에 도착했는데···.”

“곰 같은 녀석이 미적거려서 말이야.”

“어, 설마 빅터··· 씨?”

집결지.

빅터가 선술집으로 위장된 사냥꾼들의 은신처에 들어서자, 그의 귀환을 오래도록 기다린 또 다른 지인이 반갑게 맞이한다.

돌아본 고개를 따라 짙은 남색의 검은 머리칼이 흔들렸다.

천 재질의 원피스 위에 가죽 앞치마를 두른 온화한 표정의 여인.

그녀는 몰락한 크로이 가문의 영애이자, 든든한 무기장인인 아이라였다.

“세상에! 지금 막 돌아오신 건가요?”

“예.”

“좀 전에 로이드 씨가 반가운 손님이 있다고 했는데, 그게 바로 당신일 줄이야!”

예전과 달라진 점이라고 한다면, 살짝 얼굴이나 몸매에 살이 붙었다는 정도일까?

5년 전에도 친절한 외모의 아이라 였지만, 지금의 그녀는 한층 더 다가가기 좋은 인상이 되어 있었다.

“정말! 조금만 더 늦게 오셨으면 얼굴까지 잊어버릴 뻔 했어요!”

다행히 그 정도로 오래 자릴 비우진 않은 모양이라 속으로 생각하며.

빅터는 상대에게 조용히 웃어 보였다.

“5년 만에 다시 신세를 지겠습니다. 저 외에도 일행이 또 한 명 늘었는데, 숙소 사정은 괜찮습니까?”

슬쩍.

실례합니다, 라고 덧붙이며 빅터의 좌측에서 얼굴을 내미는 니엘.

“와, 전혀 몰랐어. 자주 들린 항구도시였는데, 이런 구석진 곳에 낮도깨비들 기지가 있을 거라곤···.”

왠지 모르게 잔뜩 긴장한 표정이다.

그녀는 사냥꾼들의 소굴이 얼마나 위험한 곳일까 바짝 긴장한 채였다.

하나, 정작 니엘이 내부에서 처음 마주한 인물은 그 누구보다 활달한 성품의 소유자였으니.

“어서 오세요! 손님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랍니다. 최근 식구가 많이 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집결지에선 앞으로 열 명은 더 모실 수 있다구요?”

“그거 다행입니다. ···니엘, 얼른 인사해라. 이쪽은 아이르레아 루 크로이. 지금까지 네 봉급을 챙겨준 크로이가의 직계 혈통이시다.”

“뭐, 뭐어?! 이 여자가 우리 물주라고?!”

“쇠퇴했다곤 하나 귀족의 앞이다. 말을 더 곱게 할 순 없겠나?”

“아, 그런가? 어, 음··· 처, 처음 뵙겠습니다, 크로이 부인?”

“어머, 남자 같은 말투를 쓰는 분이시네요. 당신도 사냥꾼이 되기 위해서 오신 건가요?”

“아, 네네! 그렇슴다! 멋진 인생을 살기 위해서 이렇게 배를 타고 먼 길까지···.”

“잡설이 길다, 니엘. 허튼 소리 할 거면 입을 닫아라.”

“괜찮아요, 빅터 씨. 너무 그러지 말아주세요. ···음, 당신은 니엘이라고 했죠? 절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 작위가 있었던 건 다 오래 전 과거의 일이고, 지금은 일개 상인의 딸에 불과하니까요. 그러니까 편하게 레이라라고 불러주세요. 네?”

“어···.”

니엘이 눈만 움직여 눈치를 살피자, 빅터는 이마부터 짚었다.

마지못해 허락하니, 니엘은 금방 평상시의 붙임성 있는 말투로 돌아갔다.

“그럼··· 뭐, 앞으로 잘 부탁해! 아이라 언니야!”

“저도요, 니엘 양.”

“히히, 귀족 출신이라길래 꽉 막힌 사람일 줄 알았는데, 첫인상이 좋아서 마음에 들어!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멋대로 상대의 손을 잡고 붕붕 흔드는 니엘.

내버려두면 소란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아, 결국 빅터가 나섰다.

“버릇없는 짓은 거기까지다. 이쯤에서 너도 안으로 들어가라.”

“앙? 내가 새 친구를 사귈 틈도 안 주는 거야?”

“니엘, 너는 적당히를 모르는군. 초면에 선을 너무 넘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흥! 이제 보니 완전 꼰대 아냐? 조금은 융통성이 있는 형씨인 줄 알았는데, 어떤 면에선 니코 형보다 더 하시구만!”

“뭐라···.”

“네네! 이 미숙한 제자는 이만 꺼져줄게! 칫, 저자세로 사부님이 되어 달라며 매달렸을 적엔 이상한 취급만하더니, 이제 와서 사사건건 참견하기는! 뭔 말을 못해요! 이거 억울해서 살겠냐고!”

“···.”

“흥이다!”

설마하니, 리리 리가 버릇없이 자라면 이렇게 성장하고 마는 것일까?

빅터는 돌연 막연한 불안감이 들어, 잠자코 내실로 들어가는 니엘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후픕!

뒤늦게 레이가 실소를 뿜었다.

빅터가 휘둘리는 꼴이 어지간히도 우스웠는지, 그녀는 입가를 가린 채 연신 어깨를 들썩였다.

“빅터, 너도 못 보던 사이에 꽤 둥글어졌구나? 애가 꺼낸 시시한 농담에도 일일이 반응해 줄 정도로···.”

“너까지 나를 놀리는 건가, 레이 사저?”

“멍청아, 나는 칭찬한 거야. 예전처럼 인상만 쓰고 있던 시절에 비하면··· 지금의 네가 훨씬 사람 같아. 여유가 느껴져서 좋다고.”

“어째서인지 만나는 사람마다 비슷한 소릴 지껄이더군.”

“후후, 너는 여러모로 날 놀라게 만드는구나? 하지만 다음은 내 차례야.”

“무슨 뜻이지?”

“마녀들의 장난질이 거세진 지금이지만, 그 사이에 우리에게도 좋은 소식이 생겼거든. 그렇지, 언니?”

두 여인은 서로 눈을 맞추며 능글맞게 웃었다.

빅터는 그 움직임에서 어렴풋하게 행복의 파장을 느꼈다.

“···경사가 있었군.”

마음을 읽는 힘까지 쓸 필요도 없이, 전말은 의외로 쉽게 밝혀졌다.

왜냐하면, 그녀의 앞치마 아래로 살짝 부풀어 오른 복부가 보였기 때문에.

아이라의 뱃속엔 새로운 생명이 잉태해있었던 것이다.

“슬슬 티가 많이 나죠? 앞으로 조금만 있으면 5개월째랍니다.”

아이라의 미소에, 빅터는 진심을 다한 한 마디를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후후, 감사해요.”

“이건··· 레이 사저의 말대로 정말 좋은 일이군요.”

빅터는 자연스레 과거를 떠올렸다.

아직 행복하던 시절.

자신의 아내 그레이스가 딸 아델라이드를 처음 임신했던 그때를···.

“아이의··· 아버지는?”

빅터는 무심코 실례되는 것을 묻고 말았다.

배려가 부족한 행동에 급히 그가 고개를 저으려는 찰나···.

아이라는 여의치 않고 미소를 띤 얼굴로 답했다.

“그냥 알려드리면 재미없으니까, 수수께끼를 낼게요.”

그녀는 힌트를 제시했다.

“우선 하나, 그이는 사냥꾼이에요.”

암안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 받아들인 그 정보는 빅터를 동요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럴 수가?

정안을 이식받은 자는 생식 능력이 극도로 저하되는 게 아니었단 말인가?

“둘, 빅터 씨도 아는 사람이랍니다.”

사냥꾼이면서 빅터와 안면이 있는 남자···.

짐작도 안 가.

만에 하나라도 로이드일리는 없으므로, 빅터의 궁금증은 더욱 미궁으로 빠졌다.

결국 그는 아이라가 세 번째 실마리를 제공하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셋, 투박한 손의 소유자이고요.”

이것은 단서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사냥꾼은 오래도록 무기 술을 연마하기에.

그래서 당연히 손에 물집의 흔적과 굳은살로 가득할 수밖에 없다.

“넷, 그이는 우리가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을 가지고 있어요.”

결정적인 정보에 빅터가 무거운 신음을 흘렸다.

비로소 이미지가 그려지기 시작했기에.

거의 확신하며, 빅터는 속으로 정답을 읊조렸다.

‘토다르드, 인솔자 토드인가?’

그는 과거 심의 유파를 책임지던 유망주였으며···.

또한 빅터를 이식자 도리스에게로 데려가준 선배 사냥꾼.

지금은 모종의 이유로 전선에서 이탈해 인솔자 임무를 수행 중인 자였다.

“정말인가? 그가 아이라의···.”

“너도 못 믿겠지, 덩치? 하지만 그게 진짜야.”

빅터의 짐작이 맞았는지, 옆에 서 있던 레이가 말을 거든다.

“한참 전에 파문당한 주제에, 최근 몇 년간 잊을 만하면 여기를 방문하곤 했거든.”

그녀는 언니의 임신에 기쁜 듯하면서도 살짝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애 아빠에게 쌓인 감정이 많은 듯 보였다.

“칫, 정작 애가 생기니까 밖으로 나돌기나 하는 몹쓸 놈이.”

“에이이, 너무 그러지 마, 요즘은 그이도 일하느라 바쁜 걸. 가뜩이나 이식을 지원하는 사람들이 늘었으니까.”

“언니는 그 작자를 너무 좋게만 보고 있잖아? 사실은 방심할 수 없는 남자야. 분명 그 불한당은 처음부터 언니한테 흑심을 품고···.”

“아! 그렇담 역시 토드 씨는 낭만파셨구나? 수년에 걸쳐서 나한테 몰래 추파를 보낼 정도로!”

“···아이라 언니, 완전히 콩깍지가 쓰였구나.”

“그도 그럴게, 고백은 내가 먼저 했던 걸.”

“하아, 대체 그런 나쁜 자식의 어디가 좋은 건지···.”

레이는 이내 달관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 어쩌겠는가?

당사자인 본인이 충분히 만족해하는 것을···.

사실 레이도 겉으론 불만스럽게 잔소릴 늘어놓으면서도, 내심 아이라를 축복하고 있었다.

이미 어머니나 다름없는 표정으로 자신의 배를 소중하게 감싸는 그녀를, 같은 여자인 자신이 어찌 비난할 수 있겠는가?

이 순간, 빅터는 모자의 챙이 만들어낸 그늘 속에서 눈을 가늘게 떴다.

실로 오랜 만에 느끼는 감격···.

가혹한 싸움 속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죽음만을 경험해온 그로서는 굉장히 드문 창생의 순간이었다.

“레이 사저, 이건 기적이군.”

“그렇지? 나도 같은 의견이야. 대스승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어.”

본디, 사냥꾼은 자식을 잘 가지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채 그들이 후손을 만들길 바라지 않는 경향도 있으나···.

드물게 사랑하는 이가 생긴다 해도, 아이가 무사히 태어난 경우가 굉장히 드물기 때문이었다.

매우 높은 빈도로 임신 초기에 사산.

대부분은 몇 개월도 채 견디질 못한다.

설사 운 좋게 살아남는다 해도 장애를 가진 미숙아가 되기 마련···.

그렇기에 지금까지 성공적인 출산은 오직 ‘도리스’의 사례뿐이었다.

“혹시나 싶어 여쭙습니다만, 아기의 상태는 건강합니까? 이렇게 서 있어도 괜찮은 지···.”

“그건 걱정 없어요. 오히려 적당한 활동이 좋다고 해요. 거기다, 제 곁엔 당대 최고의 의사 선생님이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나 계신 걸요?”

빅터의 염려에 아이라는 자신 있게 답했다.

“경험 많은 산파가 이웃에 항상 대기 중이시고··· 대스승 알베르트, 도리스도 여유 날 때마다 교대로 왕진해주고 있어요.”

“그렇습니까?”

“아참! 그러고 보니 그 아이들도 빅터 씨가 돌아온 걸 알면 아주 기뻐할 텐데! 얘, 레이! 이번 기회에 두 사람을 부르는 거 어떻겠니? 그··· 멀리 신호를 보내는 기술 같은 걸로!”

“거절할게.”

“모처럼이니까, 응?”

“규율에 어긋나.”

아이라는 레이에게 매달려 지령의 사용을 부탁했지만, 고지식한 그녀가 사적으로 이븐 가지의 가루를 쓸 리는 추호도 없었다.

“빅터 씨는 어떠세요?”

레이가 단호히 귀를 막아버리니 이번엔 아이라의 표적은 덩치 큰 사냥꾼에게로 향했다.

“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궁금하진 않으시고요? 특히 클라르테가 어떻게 지내는지?”

쏟아지는 질문공세에 빅터는 그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난처하기보다는 꺼림칙하다.

간절히 만나길 바라면서도, 한편으론 지금껏 떠올리길 거부해온 얼굴이 그의 의식 저편에서 떠올랐기에···.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앗, 빅터 씨?”

그 말을 끝으로 빅터는 안쪽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홀에 남겨진 것은 아이라와 레이, 두 사람 뿐이었다.

“어쩜, 많이 피곤하셨던 걸까?”

“그런가보네.”

레이는 팔짱을 낀 채로, 문 너머로 사라지는 빅터의 등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수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어색한 것인가?

그것은 어둠과 마의 존재를 찾아내는 정안으로도 볼 수 없는 마음의 심연.

하지만 레이는 간파하고 있었다.

돌아선 그의 뒷모습에 오랜 과거의 망령이 끈질기게 들러붙어 있단 사실을···.

“···적어도 아직은 내 쪽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을까?”

“응? 레이, 방금 뭐라고 했었니?”

“아니, 아무 것도 아냐. 그냥 혼잣말이었어.”

“아하! 알았다! 방금 지령인지 뭔지를 보낸 거구나? 말로는 싫다면서 몰래 도리스랑 클라르테에게 전달한 거 맞지?”

“뭐, 착각은 자유니까.”

“너도 참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별 생각 없이 뱉어낸 아이라의 발언.

그러나 딱 한 가지만큼은 적중했다.

‘솔직하지 못하다, 라···.’

짤막하게 지나치는 그 말에, 레이는 더욱 자신의 감정을 옥죄였다.

심의 유파가 자랑하는 평정심을 유지하며, 그 누구보다 빅터에게 본심을 들키지 않도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