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160화 (160/186)

인도의 장(2)

3.

포르투나 호와 선착장을 잇는 널빤지 위로 사람들이 오간다.

짐을 나르는 상인들을 재치고 제일 먼저 육지를 밞은 것은 리리 리였다.

“내가 일등! 이번에도 네가 졌어!”

“준비할 틈도 안주고 다짜고짜 먼저 뛰어나갔으면서···.”

“그래도 이긴 건 이긴 거거든?”

“네, 네. 사탕은 리리 누나 혼자서 다 먹어.” “어예에에!”

사방에서 이목이 집중되었지만, 소녀는 여전히 시시한 자신만의 승부에 심취해있었다.

리리 리가 뒤따라오는 아랑에게 으스대는 사이, 항구에서 대기 중이던 누군가가 소년소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기운이 넘치는 아이구나. 너희가 제자들이니?”

리리 리도 알아들을 수 있는 동양의 말.

반사적으로 소녀는 그 부름에 답했다.

“응! 그런데 언니는 또 누구?”

“후후, 나 말이니? 어디보자, 일단 나는··· 네 사부의 옛 선배라고 할까?”

빅터의 선배.

그 한 마디에 아랑은 쏜살같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더니.

“시, 실례했습니다! 면목 없게도 저희 리리 누나가 소란을···.”

양팔을 펼치며 잔뜩 긴장한 채 고개를 숙인다.

자신이 어려워하고 경외하는 빅터 보다도 높은 위치에 있는 상대라면, 당연히 그에 맞는 격례를 갖추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란다. 네 또래엔 이 정도가 보통이니. 그런데 오히려 너는 지나칠 정도로 눈치를 보는구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예의 바른 소년아, 너는 이름이 뭐라고 하지?”

“저, 제 이름은 아랑입···.”

“아랑, 좋은 울림이구나.”

“저요! 저도요! 나는 리리 리! 날붙이를 다루는 여자아이란 뜻에서 ‘리리 리釐利 娳’라고 사부가 그랬어요! 신기하죠? 발음은 같은데 뜻글자가 전부 다른 리리 리래요!”

“그래. 둘 다 잘 부탁해. 리리 리, 아랑.”

챙이 긴 모자 아래로 부드럽게 휘어진 입 꼬리가 보인다.

다정다감한 눈빛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는 이 상대의 정체는, 놀랍게도 레이였다.

“···5년만이군. 려연희 사저.”

자연스레 끼어드는 또 다른 동방의 언어.

어느새 선착장에 내린 빅터가 레이의 본명을 온전한 발음으로 말한다.

그가 내뱉은 것치곤 드물게 살가운 인사.

심지어 빅터는 살짝이나마 목까지 숙였다.

그 움직임에는 반가움과 더불어 약간의 걱정, 그리고 어울리지 않는 걱정 또한 담겨있었다.

‘몇 대 얻어맞는 건 각오해야하겠지.’

그도 그럴 것이 레이의 입장에서 본다면 빅터는 5년전 심의 유파에서 이탈한 변절자이기에.

“그래, 빅터. 지령을 통해 전해들은 그 순간부터, 네가 오기만을 나도 학수고대했지.”

“···.”

“뻔뻔한 얼굴을 잘도 내비치는구나.”

그 말 그대로였다.

비록 강해지기 위해서 라곤 하나, 지극히 이기적인 독단이었다.

마녀와 싸울 기회, 새로운 삶을 준 것이나 다름없는 대스승 크레이그와 레이 사저에게서 떨어지기로 한 것은 누구도 아닌 자신이다.

따라서 호의를 기대하기란 어려워.

배신자라며 날선 비난을 받는 건 물론, 다짜고짜 전력을 다한 파쇄권이 날아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레이는 오히려 가볍게 웃더니.

“후후, 어색하게 굴긴.”

놀랍게도 당장 그녀의 표정은 온화하기 그지없어.

원망은커녕 오랜만에 가족을 마주하는 다정한 목소리였다.

“내 본명을 불러주다니···. 동방에서 오래 생활했다고 티내는 거야? 아니면 날 기쁘게 해주려고 굳이 내가 알아듣게 말해준 걸까?”

레이는 옷깃으로 입가를 가리며 기쁜 듯 말했다.

그 장난스런 반응에 빅터는 사뭇 당황했다.

“설마 너에게서 그 이름으로 불리게 될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

“마음에 안 드나?”

“그냥 예전처럼 편히 불러줘. 나도 그쪽이 편하니까.”

스륵.

레이가 흰색 장갑을 낀 왼손을 들어올렸다.

그 사이로 존재할 리 없는 손가락의 굴곡이 보여, 의수나 그와 비슷한 무언가를 착용한 모양이었다.

손끝이 향한 곳은 레이의 머리 두 개보다도 높은 위치, 바로 빅터의 뺨이 있었다.

“···얼굴에 잔 흉터가 늘었네. 턱선도 많이 수척해졌고. 고생을 한 만큼 몸은 더 탄탄해진 것 같지만.”

다소곳한 목소리에 애처로운 눈빛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가라앉은 분위기.

마치 사람이 바뀐 것만 같은 인상에 빅터는 재차 놀랐다.

정신감응능력으로도 간파할 수 없는 속내.

감정을 숨기려는 기색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건, 단지 그녀가 마음을 다스리는 유파의 실력자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이것이야말로 레이가 빅터에게 드러낸 있는 그대로의 본심?

어느 쪽이든 레이는 크게 변모해있었다.

보다 성숙하고 요염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잔잔히 흔들리는 버드나무와 같은 여인으로···.

‘대체 그 사이에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익히 로이드에게서 들은 바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성격이 바뀔 수 있는 지도 의문이다.

빅터는 그저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길러준 가족이자, 동시에 원수인 심록을 쓰러뜨린 이후, 레이의 마음에는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으리라고···.

“뭘 그렇게 잠자코 있어? 혹시 너무 오랜만이라 고향의 말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거야?”

“아니,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슬슬 해줘야 할 말이 있을 텐데?”

“음.”

“뭐야, 너? 예전보다 더 과묵해진 거 아니지?”

그래도 눈꼬리를 올리며 재촉하는 모습에서 살짝 예전의 모습이 보여.

5년에 걸쳐 성장했다고 해도, 레이는 여전히 레이였다.

빅터는 그제야 겨우 자신의 귀환을 알렸다.

“다녀왔다, 레이 사저.”

“그래. 어서와, 덩치.”

사뭇 감격스런 재회.

두 사람은 한 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조금 더 시간이 있었다면 자연스레 가벼운 포옹이라도 했을지 모른다.

그 모습을 관찰하던 짓궂은 제 삼자가 훼방을 놓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워워, 거기까지. 오랜만에 동문간의 회담도 좋은데 말이야. 나머지는 집결지에서 하는 게 어때?”

지켜보는 눈이 많다.

가뜩이나 레이의 뒤에 선 앳된 얼굴의 사냥꾼들도 한참동안 부동자세로 서 있었기에.

하나, 레이는 매정하게 슬쩍 눈길을 주더니.

“그러고 보니 너도 있었구나, 로이. 아직 살아있었니?”

“너무하시네, 레이 아가씨. 모처럼 몇 달 만에 만났는데 덤처럼 부르지 말라고. 왜 나만 이렇게 대우가 다른데?”

“변함없이 경박한 걸 보니 안심이야.”

“하! 이번 임무에서 내 활약상을 듣고나서도 그런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어머, 그거 참 기대되네.”

그리곤 무시.

레이의 시선은 이제 다른 인물에게로 향해있었다.

어느새 기척 없이 일행의 곁으로 다가온 어떤 여인에게로.

“당신은 분명 앙리··· 라는 성함이셨죠?”

“네. 심록 토벌전 이후로 처음이군요. 다시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검희 려연희시여.”

“너무 격식을 차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는 모두 대스승을 모시는 입장, 거기다 한때 같은 전장에서 공통의 적과 싸운 동지가 아닌가요?”

“아뇨, 그럴 수는···.”

앙리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상대에게서 존경의 의사를 거두지 않겠다는 것치곤 어색한 태도.

이 순간, 앙리는 조심히 빅터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것은 사소한 질투였다.

어째서 그는 수 년 간 곁에 함께했던 자신이 아니라, 한참 동안 바다 건너에 떨어져있던 여인에게 더 큰 관심을 두는지···.

혹여 먼저 만난 사이이기 때문일까?

그 순서가 인연의 농밀한 깊이에 이토록 큰 격차를 만들어낸 것인가?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빅터가 직후 다른 주제를 입에 올렸기에.

“레이 사저, 한 가지만 묻지.”

“언제부터 네가 내 허락까지 구하면서 질문했지? 괜히 점잖은 척 하지 말고 그냥 말해.”

“대스승께선 어디에 계신가?”

“응. 나도 슬슬 그걸 물을 거라고 생각했어.”

레이는 즉답했다.

“대스승께선 자리를 비우셨어. 3주 전부터 단독 임무를 수행 중이시지. 아일론과 베가시아 사이 국경에서 마녀의 연구소가 발견됐거든.”

“가능하면 그분부터 뵙고 싶었다.”

“너도 돌아온 타이밍이 참 절묘하게 엇나갔어.”

“이상하군. 왜 평소처럼 네가 보필하지 않았나?”

“···5년은 짧은 듯 보여도 사실은 꽤 길어, 덩치. 보다시피, 이젠 나에게도 책임지고 이끌어야할 아이들이 있어. 집결지를 지키는 것, 그게 당장 내게 주어진 명령이니까.”

“음.”

“자세한 이야기는 안에서 해줄게. 설명이 좀 길어질 거 같거든.”

손끝으로 집결지 쪽을 가리킨다.

빅터는 5년 간 잊고 있었던 사냥꾼의 은신처를 다시금 떠올렸다.

“보다시피 너에게 소개시켜줄 애들이 많아. 특히 아이라 언니도 널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거 반가운 소리군. 아이라는 잘 지내나?”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게 어때?”

“알겠다. 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않겠나?”

“왜? 합류할 다른 일행이라도 있어?”

“아직 배에서 내리지 못한 녀석이다. 뒤처리나 짐을 챙기느라 바쁜 모양이더군.”

“누군데? 지령으론 달리 보고를 받은 적이 없는데.”

“보면 깜짝 놀랄 거다. 너도 잘 아는 얼굴이니.”

“그래? 그 상대는 일반인이야? 신뢰할만한 자인가?”

“딱 잘라 말하긴 어렵군. 마를 상대한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라서.”

“이런 시기에 사냥꾼 지망이라? ···뭐, 아무튼 좋아. 동지가 늘어나도 나쁠 건 없으니.”

레이는 박수를 짝 치더니.

“미안하지만, 다들 먼저 돌아가도록. 나는 빅터와 잠깐 할 이야기가 있다.”

“예? 하지만 레이 사부, 그건···.”

“뭐지? 내가 자리를 비우는 게 걱정되나?”

“아뇨, 그게 아니라···.”

“그럼 소문으로만 듣던 그 전설의 사냥꾼이 무용담이라도 해주길 바래?”

···끄덕.

일동이 동시에 천천히 고개를 움직인다.

자세히 보니, 레이의 뒤에 선 제자들의 얼굴이 묘하게 들떠 있었다.

빅터에게 동경의 시선을 감추지 못하는 듯 했다.

“영웅 나으리의 화제는 해가 진 다음에 실컷 나누도록. 지금 대스승 크레이그의 대행자는 나다. 모두 집결지로 돌아가도록. 이 이상 한심한 불만은 듣지 않겠다.”

“···존명.”

“그리고 마누엘, 에리히. 두 사람은 언제나 처럼 후미에서 미행이 없나 확인해라.”

“예. 레이 사부.”

“알겠습니다.”

레이의 지시에 따라 사냥꾼의 무리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그들은 절도 있는 움직임으로 자리를 떴다.

또한 레이는 빅터의 어린 두 제자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으니.

“그럼··· 아랑, 리리 리. 너희도 곧장 저들을 따라 가도록 하렴.”

“엥? 우리도요?”

“선배들이 앞장서고 있잖니? 얼른 쫒아가야지?”

“에이, 방금 도착해서 귀찮은데.”

“그만해, 리리 누나! 저분은 손윗사람이잖아? 예의를···.”

“흥! 쫄지 마, 아랑. 우린 애초에 저 언니야 제자도 아닌데!”

“이크, 이 꼬마 아가씨야! 그 고약한 말버릇 좀 고치라니까. 입을 놀릴 땐 상대를 좀 봐가면서···.”

“생각보다 다루기 어려운 악동들이구나. 그간 빅터가 교육을 시키지 않은 걸까?”

“레이 아가씨, 조금만 아량을 베풀라고. 이 아이들이 낯가림이 있어서 그래. 처음 와보는 이국의 땅이라 긴장했을 거야. 그러니···.”

“왜 그러지, 로이? 내가 언제 애들더러 뭐라고 했었나?”

“어, 어랍쇼?”

레이가 버럭 화라도 내지 않을까 마음을 졸인 로이드였다.

연장자, 스승의 관계에서 누구보다 엄격한 기준을 두는 레이의 앞이야.

자칫하면 첫 대면부터 손찌검을 당할 수도 있었으니···.

하나, 아이들을 대하는 레이의 태도는 여전히 점잖았다.

오히려 리리 리의 철없는 행동에서 그리운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는 표정이었다.

“자자, 꼬맹이들아. 저 무서운 여자가 돌변해서 화 내기 전에 얼른 자리를 뜨자.”

“아직 마을 구경도 못 했는데?!”

“그건 이따가 실컷 하셔. 내가 나중에 빅터한테 말해서 용돈도 두둑하게 챙겨주라고 전해둘 테니까, 응?”

“앗, 진짜죠? 약속한 거예요! 나중에 딴 소리하기 없기!”

“꼬마 아가씨가 착하게 굴면 말이야.”

“들었죠? 앙리 언니가 증인이야!”

“···응? 아, 그거 잘 됐구나. 리리 리.”

“뭐에요, 언니까지 넋 놓긴! 중요한 부분인데!”

앙리는 쭉 빅터와 레이의 대화에만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앙리 누님, 죄송한데 저 좀 도와주시렵니까? 아무래도 혼자서 요놈들을 다룰 자신이 없걸랑요. 꼬마 아가씨는 저보다 누님이 잘 다루시니 부탁드립니다.”

“네, 로이드 씨.”

그것을 끝으로 로이드와 앙리를 두 아이와 함께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빅터와 레이, 두 사람 뿐이었다.

“의외로군. 네가 아이들에게 다정한 면도 있었나?”

“딱히 네 앞에서 어린 애를 싫어한다고 말한 기억은 없는 걸로 아는데?”

레이는 숨길 것도 없다는 듯, 스스로의 어린 시절을 고백했다.

“나도 처음엔 그랬지. 대스승 크레이그께 매일 같이 반항하곤 했어. 아주 사소한 것부터···.”

“네가 그랬다니, 상상이 잘 안 된다.”

“후, 처음부터 완성된 인간이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나도 다 가르침을 통해서 성장한 거야.”

마냥 모두에게 가혹하게 예우를 강요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빅터는 레이가 가진 또 다른 일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람은 언제나 변하기 마련이지. 나는 물론, 너도 마찬가지고.”

“그건··· 동감이다.”

빅터와 레이는 수 분간 별 말없이 자리를 지켰다.

둘 사이에 긴 시간의 공백은 큰 의미가 없어.

한때의 동문을 다시금 마주하는 일이란, 어쩌면 미움보다도 애환이 앞서는 것일지도 몰랐다.

잠시 후···.

기다림을 동반한 침묵에 익숙해질 무렵, 요란한 기척과 함께 드디어 니엘이 배에서 내려왔다.

“미안, 미안! 다들 오래 기다렸지? 선장을 설득하느라 생각보다 시간이 좀 더 오래 걸렸··· 어, 어라?”

“호오, 합류자가 누구인가 했더니···.”

피식 웃으며, 레이는 빅터를 올려다 보았다.

“놀랄 거라고 했잖나?”

“정말이야. 이건 예상치 못했어. 설마하니 그 용병단의 코흘리개가 벌써···.”

“언니야아아아아!”

또 다시 만나는 반가운 얼굴.

니엘은 당장에 달려가 자신보다 작아진 레이의 몸에 거친 포옹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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