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침의 장(1)
1.
그 뒤로도 몇 번인가 빅터는 강풍을 일으켰다.
그것만으로도 상선은 마녀의 영역을 벗어났어.
어느새 다시 태풍의 영향권에 진입해 비바람을 맞이했다.
이제 니엘의 조타 실력이 빛을 발할 차례였다.
“나머지는 부탁한다, 니엘.”
“그래, 형씨! 맡겨두셔! ···선장님! 어서 선원들한테 명령해 줘!”
“으어, 앗!?”
“정신 차리라고! 책임자인 댁이 멍하니 있으면 어떻게 해? 다 큰 어른이 정신 놓고 뭘 하는 거냐고!”
“그, 그래! 알겠다! ···전원 위치로! 모두들 돛에 집중해! 한시도 눈을 떼지 마라!”
그러나 가속도가 붙어 명렬히 나아가는 와중에도, 바다 괴물은 끈질기게 뒤따랐다.
풍랑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수면 아래에 숨어 추격해오는 것이다.
“쳇, 아직도 따라오나? 다리 좀 지졌다고 뿔이라도 난 건가?”
“아니다, 로이드. 아까도 말했지만 놈은 아랑의 붉은 돌을 노리고 있을 뿐이다.”
이제 의심의 여지가 없어.
거대한 중합체는 처음부터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빅터 일행이 탄 배를 습격한 모양이었다.
기이한 형상을 가진 수중의 그림자가 따라오는 모습을 후미에서 지켜보며, 빅터는 아주 짧은 상념에 빠졌다.
‘해협을 보금자리로 삼는 마녀라··· 그런 건 들어본 적도 없다.’
그랬다.
애초에 수면 위는 마녀들이 활동하기엔 적합한 환경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본디 기류처럼 떠다니는 마기가 물아래에서도 잔존하진 않기에···.
하지만 존재했다.
그저 사냥꾼들이 오랜 시간 동안 동과 서의 대륙에서만 활동의 초점을 맞춘 탓에,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을 뿐.
사실은 대양에 숨어든 마녀가 있었던 것이다.
‘맹점이었군. 하긴, 이만큼 넓은 반경이라면 찾아내지 못할 만도 하지.’
바다.
그것은 7대 3의 비율로 육지보다 압도적인 면적을 차지하는 영역.
태초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생명이 머물렀던 원시의 요람일지니···.
육지에서 한참 떨어진 이 물의 세계에서도 여전히 생태계는 존재한다.
배 위에선 보이지 않지만, 인근 해저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산호 군집이 지상보다 훨씬 넓은 규모의 숲을 형성하고 있었기에.
···하나, 그 풍족한 환경이 도리어 무서운 존재를 낳았다.
마녀가 터무니없는 크기의 중합체를 탄생시킬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것이다.
“징하다, 징해. 어째 너랑 같이 있으면 별별 일이 다 생기는 지 원···.”
“차라리 잘 된 일이다.”
“오잉?”
“그렇지 않나? 고향의 땅으로 돌아가기 전에 마녀의 목을 하나 더 벨 수 있을 테니까.”
“의욕 한 번 끝내주시네. 아주 사냥꾼의 귀감이시로구만?”
“좋은 쪽으로 생각해라. 보고되지 않은 사냥감을 처리하면 네 명성도 한층 올라가겠지.”
“뭐, 후대에 들려줄 이야기 거리가 늘어나는 건 좋은데 말이야···.”
로이드는 난색을 표하더니, 모자챙을 튕기며 가장 본질적인 의문부터 표했다.
“저거 잡을 수 있긴 하겠냐?”
제아무리 베테랑 사냥꾼이 셋이나 모여 있다 해도 배 위에서는 압도적으로 불리해.
상대는 대처할 수 없는 바다 속에서 접근하는데다, 심지어 적의 크기부터가 한 입에 대형 상선마저 삼킬 수 있을 정도니···.
“겁먹었나, 로이드?”
“솔직히 말하면 완전 쫄았다고. 예전에 바다를 건너면서 봤던 배만한 고래도 장난 아니었지만··· 이건 그보다 열 배는 더 거대하잖아?”
대체 얼마나 많은 생물들의 피와 살이 필요로 했을까?
혹여 저 속에는 수 세기 간 바다에서 사라진 어부나 선원들의 목숨 또한 포함된 것은 아닐까?
잘은 몰라도, 어중간한 숫자로는 턱도 없을 게 분명했다.
“이름 없는 바다의 마녀 녀석, 잘도 저런 미친 괴물을 만들어 주셨구만···.”
이 시점에서 로이드는 욕이 섞인 찬사를 내뱉었다. 그간 온갖 크기의 마물들을 목격한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진저리가 나.
이렇게까지 부피가 차이가 난다면 대체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오거 급 중합체가 시시하게 느껴질 정도의 육중함···.
그 위에 레기온이라는 상위 등급이 존재하지만, 당장 눈앞의 적은 그마저도 뛰어넘은 듯 보였다.
“이거, 어쩌면 중합체의 위험도를 새로 갱신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괜찮다면 자네가 지어보겠나? 전통적으로 최초 발견자에겐 허락되는 권리이니.”
“뭐, 임마? 너도 참 별종이야. 이런 상황에서 잘도 내게 작명 요청 같은 걸···.”
그러나 투덜거리면서도 로이드는 단 번에 좋은 이름을 떠올렸다.
“···레비아탄Leviathan 급. 레비아탄 급 중합체. 어때?”
“나쁘지 않군. 돌아가서 정식으로 대스승께 보고하도록 하지.”
“야야, 그것도 무사히 돌아간 다음의 이야기 아니냐?”
“그렇지. 우선은 놈과 놈을 조종하는 마녀를 끝장낸 다음이다.”
달리 계획은 있고?
로이드가 그렇게 묻자, 빅터는 대뜸 웃더니.
“홍련에 비하면, 이번 적은 별 것도 아니지.”
“오, 대단한 자신감인 걸? 맘 놓고 믿어도 되냐? 무적의 빅터 님?”
“조건만 갖춰지면 우리의 승리는 정해진 거나 다름없지.”
어찌 보면 가혹한 태풍 속을 헤매며, 동시에 미지의 적에게 쫒기고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
그런데도 빅터는 평상심을 유지하고 있어.
예지 능력으로 어디까지의 미래를 보았는지는 몰라도, 확신에 찬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 혼자서는 무리지.”
“응?”
“모두의 도움이 필요하다.”
빅터는 고개를 뒤로 돌리더니.
“아랑, 리리 리. 너희도 이쪽으로 모이거라.”
“네, 사부!”
“어예에에! 기다렸다고요!”
무장한 채, 저 마다 전투 준비를 마친 소년소녀가 달려온다.
두 아이 모두 의욕에 찬 표정이었다.
설마하니 두 제자까지 동원할 셈인가?
“지금 얘들을 불러서 뭘 어쩌게?”
“모두 함께 간다.”
“그것도 승리를 위한 과정이냐?”
“그래.”
“영 불안불안한데···.”
“괜찮을 거다.”
그렇지만 실전에서 어린 애들까지 지키며 싸우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더욱이 아무리 로이드가 발악한다 해도, 앞으로 거대한 촉수에게서 배를 보호하는 건 잘 해도 다음이 마지막···.
걱정을 하지 말라는 게 이상한 상황이었다.
한편, 하필 이상한 부분에서만 민감한 리리 리가 로이드의 염려를 눈치 채곤···.
“왜요, 로이드 사부? 저한테 뭐 불만 있어요?”
“있다마다. 신종 중합체를 상대로 귀여운 꼬마들까지 참전시키는 게 영 마음에 안 들거든.”
“너무해요! 어린 아랑은 몰라도,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저까지 못 미더운 건가요? 네?”
“아니, 꼬마 아가씨야. 지금은 네가 제일 불안하거든.”
“인정 못해요! 간만에 잔뜩 날뛸 수 있는 기회인데!”
리리 리는 잔뜩 흥분한 채 링 블레이드를 분리해 쌍수로 들었다.
자신이 언제든 싸울 수 있음을 보여줄 셈인 모양이었지만···.
날붙이를 든 소녀가 짠득 상기된 표정이라면 오히려 지켜보는 쪽에서 미덥지 못할 뿐이었으니.
“리리 누나, 진정 좀 해! 출항 전에 빅터 사부께서 하신 말씀 다 잊어버린 거야?”
“기억하고 있어! 쿠왕, 파파팟! 아자잣, 해서 보이는 대로 다 베어버리면 된다고!”
“완전 개판이군. ···야, 빅터.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게 났지 않냐?”
“이대로 간다.”
“나중에 잘못 되도 난 모른다?”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네가 있으니까.”
“왜 이러셔? 아무리 치켜세워도 난 못한 다니까?”
“네 녀석이 그럴 놈이 아니란 건 그 누구보다 내가 잘 알지.”
“혹시 네 예지 속에서 내가 무진장 활약하는 미래라도 있냐?”
“물론이다.”
“쯧. 그렇다면, 뭐··· 어쩔 수 없지.”
미심쩍지만, 익살꾼은 못이기는 척 받아들이기로 한다.
사실, 당장 로이드는 빅터가 리리 리나 아랑을 끌어들인 사실 보다도···.
스스로의 힘만으로 부족하다는 걸 인정한 전우의 고백이 더 놀라웠기에.
덩치로서는 드물게 약한 소리.
그것은 자신을 동료로써 의지해준다는 의미일까?
멋쩍은 기분을 숨기고자, 로이드는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그런데 그 순간.
“···로이드란 개체. 이게 다 무슨 소란이야?”
“마르? 너, 언제 일어난 거냐?”
“응, 조금 전에.”
“캬아! 마침 잘 등장해주셨어. 위대하신 초월종 님의 지혜를 좀 빌리고 싶었거든.”
“뭐야, 갑자기?”
“그래, 그래서 인체 탐구는 다 끝냈고?”
“대충은···. 그런데 조금 전에 뇌 혈류의 압력은 뭐였어? 육체에 심상치 않은 과부하가 일어났었는데.”
“아, 그거···.”
분명 은 안개를 사용한 반동을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로이드란 개체. 누누이 말했지? 네 몸은 너만의 것이 아니라고. 내가 인간의 신체 구조를 완벽히 파악하기 전까진 무리해선 안 돼.”
“세상만사가 다 계획대로 쉽게 돌아가면 얼마나 좋게? ···저길 봐. 우리가 처한 상황이 참 끝내주거든.”
로이드는 또 다른 육체의 공유자에게 자신이 보는 광경을 있는 그대로 직시시켜주었다.
마르는 그것을 인식하자마자 감탄하더니.
“아주 흥미로워! 이 시대에 저런 초대형 해양생물이 존재할 줄이야! 하지만 이상한 걸? 저 질량은 비효율적이야. 이 별의 대기와 환경을 고려하면 지나치게 비대한데···.”
“아니, 마르 여사님. 여지없이 학문적 견해를 배신해서 미안하지만, 저 놈은 자연스러운 동물이 아니거든?”
“그러면?”
“사역마야. 마녀가 만들어낸 수하라고.”
그 말에, 마르는 즉각 동굴에서 빅터와 로이드가 들려준 사냥꾼들의 지식을 떠올렸다.
“···어설프고 조잡한 생물공학의 피조물. 즉, 생체병기란 거구나.”
“전문용어는 좀 빼주라. 이 미천한 인간은 그렇게 말하면 못 알아들거든.”
“괜찮아. 나는 이해했으니까. 저 생물은 수중전에 특화된 형태로 처음부터 구상된 모양이야. 아마 심해까지 잠수가 가능하도록··· 엄청난 수압에도 견딜 수 있게 튼튼하고 두꺼운 몸체로 이뤄졌겠지. 동시에 표면에서도 활동하려면 유연한 재질도 필수불가결하고··· 원자 구조는 어떻게 배치해뒀을까?”
나름의 분석을 시작한 마르.
하나, 그녀가 사고를 끝마치기도 전에 빅터가 끼어들었다.
“좋아. 마침 마르도 깨어났군. 그럼 슬슬 움직이지.”
“응? 빅터란 개체, 설마 날 기다리고 있었어?”
“이 싸움은 네가 로이드를 곁에서 보조해주어야만 이길 수 있다.”
“체, 마르가 없는 나는 전력이 반절에 불과하다 그거냐?”
“온전해진 너의 힘을 기대하지.”
“오냐, 어디 두고 보라고.”
이상하게도, 로이드는 마르의 존재와 빅터의 확신으로 한껏 가벼운 마음이 되었다.
이마저도 예정된 절차인가?
그렇다면 미래를 보는 자의 눈동자에 비춰지는 것은 무엇?
어쩌면 그는 로이드의 상상 이상으로 저편의 경지를 그리고 있는 듯 보였다.
잠시 후, 빅터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아랑과 리리 리의 뒤를 따라 다가오는 또 다른 사냥꾼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앙리, 찾아냈나?”
“네, 전부 빅터 씨의 말씀대로였어요.”
“과연, 조심성이 많은 계집이군.”
“하지만 단순하기도 하죠. 결국 숨을 곳은 한 곳 밖에 없으니까요.”
“정확한 위치는?”
“그게, 너무 빠르게 움직이는데다 바닷물 속이라 신호가 약해요. 그래서 단언할 정도로 특정은 안 되지만··· 아읏!”
“괜찮나?”
“거, 걱정 마세요. 너무 오랜만에 감지Detektion를 써서 살짝 지끈거린 것뿐이에요. 그보다···.”
두통이라도 느끼는 것일까?
앙리는 떨리는 왼손을 옆머리에 붙인 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마녀가 저 안에 있는 건 확실해요.”
“음.”
“조금만 더 가까워지면 바로 끌어낼 수 있어요. 어디에 숨는다해도 반드시···.”
“그런가? 그렇다면 우리가 몸소 놈의 뱃속으로 들어가야겠군.”
“잠깐만···. 야, 빅터? 지금 뭐라고? 들어가? 중합체의 몸속에 들어간다고?”
“어수선 떨지 마라, 로이드. 어차피 우리가 할 일은 정해져있다.”
빅터는 알았다.
아마 바깥에서의 공격이 통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물밑의 적을 총이나 칼로 상대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궁여지책으로 해적의 습격을 대비한 대포를 쏜다고 해도···.
레이아탄 급 중합체는 물의 보호를 받고 있는데다, 운 좋게 적중시켜도 외피를 뚫을 수 있단 보장은 없다.
결국 방법은 한 가지뿐···.
“직접 내부로 파고들어가 마녀를 친다.”
빅터는 도끼의 손잡이를 부여잡았다.
이미 결정을 내린 눈치였다.
“젠장, 또 축축하고 좁은 곳으로 돌입해야 하나?”
“동굴 때와는 다르지.”
“아무렴. 이게 더 개 같을 테니까!”
“그래도 우리는 이긴다.”
승리를 단언한다.
너무도 당당한 그 위용에, 로이드는 달관의 한숨을 쉬었다.
“···후우, 괴물이 순순히 내부로 들어갈 입구를 열어주진 않을 거 같은데?”
“알아서 아가리를 벌리게 만들면 된다.”
“어떻게?”
“다 방법이 있지.”
“읊어보셔.”
“로이드, 낚시에 필요한 준비물이 뭐라고 생각하나?”
“그야, 뭐···. 우선은 낚싯대겠지.”
“그리고?”
미끼.
로이드는 간단히 정답을 맞혀버렸다.
“밑밥은 이미 준비됐다.”
이어서 빅터가 나머지 계획에 대해 설명하자, 로이드는 옳다구나 탄성을 내질렀다.
“오호라, 그거라면!”
“이제 흥미가 생기나?”
“재미있겠는데, 당장 해보자!”
직후, 사냥꾼들은 작전을 실행에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