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의 장(7)
10.
헤일을 비롯한 거대 파도의 범람은 그 자체만으로도 천재지변이지만, 반대로 고요할 뿐인 바다도 재앙이긴 마찬가지였다.
무리도 아니야.
동력선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시대이기에···.
아직 인류는 순풍과 너울에 의지할 뿐, 자력으로 바다를 해쳐나가기에 기술력이 한참 부족했다.
“틀림없어. 악마다. 이건 악마의 바다야···.”
이 배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부선장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오래 전에 전해지는 심연의 괴담을 떠올린 듯 했다.
“왜 그러나? 버트?”
“아재, 뭐 짐작 가는 거라도 있어?”
선장과 니엘이 급히 묻자, 대대로 뱃사람으로서 살아온 중년의 남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유년기 시절의 기억을 토해냈다.
“···허황된 옛날이야기라고 생각했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자주 말씀하셨지. 때때로 보이지 않는 바다 밑 바닥에는 요사스런 존재들이 올라온다고!”
“요사스런··· 뭐?”
“세이렌Sirene, 스킬라Scylla, 카리브디스Charybdis···. 배를 타는 사내를 홀리는 사악한 마물!”
“하?”
“오래도록 육지를 밞지 못한 이들을 유혹해온단 말일세! 요망한 노래와 음란한 몸짓으로!”
“···취한 게로군. 자네, 눈이 완전히 풀려있는 거 아나?”
“그 표정은 뭐지? 날 믿지 못하겠나? 평생을 바다에서 보낸 이 버트의 말을?”
터무니없는 소리에 선장이 난색을 표했지만, 니엘은 진지한 태도의 빅터를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마녀의 결계에 들어갔다 겨우 살아 돌아온 니엘이기에 더욱 뼈저리게.
“그럼 이 현상을 어찌 설명할 텐가?!”
버트란 이름의 사내는 입에 거품을 물면서 필사적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거기엔 해시계의 기능을 겸하는 최신형 나침반이 들려져 있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금속의 바늘이 저절로 회전하고 있었으니···.
“이건 저주다! 신성한 배에 여자들을 태웠기 때문에 질투심 많은 포르투나가··· 아니, 해신께서 노하신 게야!”
“정신 차려, 아저씨! 그딴 건 전부 신화나 전설에 나오는 이름들이잖아?”
“아아, 용서해주십시오! 자비를 베풀어 은혜로운 바람을 다시 우리에게···. 맹세코 저는 몸가짐을 정갈하게 했습니다. 저에겐 가족이 있으니까요! 지금도 저의 귀환만을 기다리는 어린 세 자식이!”
“버트···. 크로이 가에 고용될 때 자네도 충분히 들었잖는가? 사냥꾼 복장을 한 자들을 태우면 때때로 묘한 일에 휘말릴 수도 있다고 말일세.”
“아그르, 운그르라이, 셉테···.”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부선장은 목걸이의 기이한 삼각형 문양의 장식물을 부여잡더니,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 마냥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헤이그체, 압생··· 나가마하, 엔도!”
이는 사실 버트가 태어난 서방의 작은 어촌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수호 주문으로.
본인조차 그 진짜 의미를 잃어버렸지만, 간절히 애원하는 모습으로 대충이나마 짐작하건데···.
신에게 잘못을 빌며 도움을 청하는 기도의 목적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헛수고는 그쯤 하시지.”
“힉, 히이익!”
“댁의 행동으로 선원들이 겁을 먹었다. 맹목적인 두려움은 놈들의 먹이가 될 뿐이야.”
지켜보는 이가 미신에 사로잡혀 있을수록 마녀의 마법은 큰 효과를 발휘한다.
간청은 의미가 없어.
배는 여전히 나아가지 않았다.
유일한 변화라면, 구겨진 돛이 가리키는 하늘의 형태가 일그러지기 시작한 정도뿐이었다.
스스스···.
지평선 너머에 위치한 구름의 무리가 육안으로도 확인이 될 만큼 격하게 꿈틀거리더니···.
이윽고 맹렬한 기세로 창공을 검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우운으로 흐려진 게 아니다.
밤이 만들어내는 은은한 어둠과도 달랐다.
이를테면 새카만 오로라···.
그 흐름이 마치 살아있는 것 같아.
누가 보아도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갑판 위의 모든 이가 동요하는 가운데···.
오직 한 명의 사냥꾼만이 입가를 실룩였다.
“본색을 드러냈나? 시덥잖게 자연현상을 흉내 내는 건 그만둔 모양이군.”
한껏 혐오감이 담긴 조소.
빅터는 노골적으로 자신의 앞에서 벌어지는 괴악한 이변을 비웃었다.
“참, 기가 막히는구만. 이번에도 네가 말한 대로 이뤄지다니···.”
그리고 또 한 명.
이 사태에 전혀 주눅이 들지 않은 사냥꾼이 배의 후미에서 나타났다.
그는 오히려 지겨운 듯 짜증 섞인 투정을 부렸다.
“제기랄··· 하여간 빌어먹을 직업이라니까. 설마 했지만 귀향길에서조차 제대로 쉬질 못하고!”
“로이드, 내가 출발 전에 당부했던 건 잊지 않았겠지?”
“아, 그야 물론이지. 네가 몇 번이고 강조해서 아주 머리에 쥐가 날 정도였으니까.”
“불평은 나중에 듣겠다.”
“그럼 후딱 끝내버려야겠지!”
외침과 동시에, 로이드는 양팔을 최대한 위로 들어올렸다.
그러자 그림자를 머금은 은사가 번쩍이는 안개처럼 흩뿌려졌다.
사방으로 얽히고 뻗어나가는 형태는 거미줄···.
그것은 십 수 미터나 되는 대형 선박을 감싸기에 충분한 규모였다.
“자, 이게 내가 낼 수 있는 최대 범위다! 어디든지, 얼마든지 와보시라고!”
그의 장담에 자극이라도 받은 것일까?
바다를 침묵하게 만들고, 배를 멈춰 세운 장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어어어?!”
바닥이 요동친다.
한동안 파문 하나 일어나지 않던 바다에 동시다발적인 균열이 퍼졌다.
그림자가···.
상선을 아득히 넘어서는 거대한 물체가 수면 위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단순히 크기를 비교한다면···.
손가락만한 송사리와 산만한 고래의 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선장이 경외 섞인 비명을 질렀다.
“이, 이럴 수가! 저것이 실존했단 말인가! 해수의 어미, 하프구바Hafgufa라고?!”
때때로, 뱃사람들은 지도에 존재하지 않는 암초를 목격했다.
그리고 그것이 눈 깜빡할 사이에 자취를 감췄다는 경험담을 입에 올리기도 한다.
그것은 섬으로 착각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몸집을 가진 괴물의 전설···.
하프구바란, 배와 인간은 물론 향류고래마저도 한입에 처먹는 전설 속 마수의 이름이었다.
“미친···. 야, 빅터! 이 정도라고까진 말 안 해줬잖아?!”
로이드가 질겁한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짙은 그늘이 여러 개나 덮쳐와.
흡사 기둥을 연상케 만드는 가시투성이 흡반이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족류의 촉각을 통상의 수 천, 수 만 배 확대시킨 그 덩어리는···.
제아무리 아수라장을 거쳐 온 마녀 사냥꾼이라 할지라도 움츠려들게 만들기 충분했다.
하나, 여기서 빅터는 여유롭게 로이드의 신경을 건드렸다.
“혹시 겁먹었나?”
“···너, 임마! 내가 놀라자빠지는 걸 보고 싶었던 거냐?”
빅터는 마침 턱을 치켜들었다.
그 끝이 가리키는 방향에는 어린 제자들이 있어.
로이드의 두 눈에 링 블레이드를 뽑아든 리리 리와 라이플을 막 장전하는 아랑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 아이들은 미리 빅터가 말한 대로 지정된 위치에서 착실히 대기하고 있었다.
“모범을 보여주시지. 로이드 사부.”
“젠장! 이게 다 네 잘난 예지대로라면, 어떻게든 잘 풀리는 거겠지?!”
“그건 너 하기 나름이다.”
좀 더 자신감을 북돋아 줄 수도 있건만···.
빅터는 끝내 말해주지 않았다.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이가 오직 로이드뿐이라는 걸.
“내 자존심을 건들면 성공 확률이 팍 늘어나기라도 하나 보지?”
“아니, 이 쪽이 좀 더 재미있는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키가 큰 사냥꾼은 예리하게도 친구의 의도를 바로 파악해냈다.
빅터에겐 꿍꿍이가 있다.
그는 이형의 도끼에 힘을 응축하며 휘두를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동료를 전적으로 신뢰하기에 가능한 준비···.
이 정도로 의지 받는다면 기대에 따라줄 수밖에 없어.
로이드는 숨을 한계까지 들이 마셨다.
“개판이 되도 난 모른다!”
두려움따윈 오기로 덮으면 그만.
불안을 느낄 여유가 있다면 행동으로 내지른다.
배의 용골보다 묵직한 촉수가 대기를 가르며 내려박히는 순간···.
로이드는 전력을 다해 은안개의 농도를 한 점으로 집약시켰다.
“으랴아앗!”
원리는 간단하다.
고정된 날카롭게 덫으로 적의 질량과 속도를 온전히 이용할 뿐···.
로이드의 손끝에 이어진 무기는 부피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기에 물리법칙을 초월하는 가루의 효과를 최대한 발휘할 수 있었으니···.
‘강도가 충분할까? 탄성의 반동은? ···아니, 고민하긴 너무 늦었지. 에잇, 될 대로 되라!’
아주 짧은 일순간, 로이드의 은사는 세상에서 가장 예리고 촘촘한 그물망이 되어 배를 보호했다.
퍼어어엉!
배의 몸체가 해수면 아래로 움푹 들어간다.
그러나 가라앉을 정도는 아니다.
반면, 바다에서 기어 나온 다섯 가닥의 촉각이 요란한 폭발과 함께 튕겨나갔다.
“사, 사라졌다!”
“괴물이 촉수를 거둬들였어?!”
“저, 저들이 한 건가?”
산산조각으로 찢긴 파편이 아래로 빗발치자, 공포에 질려있던 선원들이 감탄한다.
아직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도 아니건만, 그들은 이미 사냥꾼들에게 희망을 걸고 있었다.
“역시 해냈군. 믿고 있었다.”
“자식이, 남 일이라고 간단하게 말하긴··· 크읏!”
가공할 압력이 손끝을 통해 전해져왔다.
그래도 힘의 배분이 잘 된 모양인지 찢겨지거나 부러지진 않았어.
요행치곤 너무도 세련되고 능숙한 조작이었다.
“봤냐? 나도 지난 싸움에서 성장했다고.”
“그래. 훌륭하다. 이걸로 놈도 섣불리 같은 공격을 하진 못하겠지.”
다음은 내 차례로군.
그러더니, 빅터는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니엘.”
“어? 왜, 왜에?”
“키를 잡아라. 배를 조타할 준비해둬.”
“뭐? 하지만 당장은 바람이···.”
“그건 불게 만들어야지.”
하나만 남은 니엘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친다.
이 남자가 뭐라고 한 거지?
바람을 일으키겠다고?
“후우우···.”
니엘의 당혹감은 신경 쓰지도 않고서, 빅터는 도끼를 쥔 채 자세를 크게 잡았다.
선원들의 눈에는 그것이 별로 특이할 것도 없어 보여.
사냥꾼이 허세를 부릴 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정안을 가진 자들만은 알았다.
그들의 시선은 상선의 돛대보다 높은 곳을 향하고 있었으니.
“언제 봐도 장난이 아니구만. 체의 유파의 비기란 건···.”
땅거미 거인.
깊은 바다임에도 수 백 피트나 되는 키를 드러낸다.
이븐 가지의 분말을 집약시킨 빅터의 분신이 지금 막 몸을 일으켰다.
“흡!”
부우우우웅웅!
빅터가 도끼를 휘두르자 그와 같은 몸짓으로 불가시의 거체가 허공을 갈랐다.
풍압이 반대편에서 생겨나.
이윽고 돛이 부풀어 오르고, 순식간에 배가 가속하기 시작했다.
“오, 오오오오?!”
여자답지 않은 목소리와 함께 니엘은 급히 양손을 올렸다.
자칫 균형이 어긋날까 버릇처럼 키를 쥔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엄밀히 말해 조타가 아니야.
선박의 아랫면이 살짝 공중에 떠 있었다.
행해가 아닌 비행에 가까웠다.
그 움직임은 마치 물수제비···.
수면 위를 몇 번인가 튕기며, 포르투나 호는 바다괴물과의 서서히 거리를 벌려나갔다.
“히야, 이거 끝내주네. 역시 무적의 빅터님이시구만. ···아, 그런데 도망친 거 까진 좋은데 이 다음은 어떻게 하려고?”
언제까지고 달아날 수만은 없다.
바다 괴물이 쫒아오는 기세도 장난이 아닌데다, 도착지까진 아직 한참 멀지 않은가?
“이거 어쩜 좋냐? 내가 아무리 대단해도 은 안개를 연속으로 쓸 자신은 없단 말이다!”
호들갑 떠는 로이드의 반응에, 빅터는 오히려 냉정하게 답했다.
“걱정할 필욘 없다. 당장 저 놈이 우릴 수장시키진 않을 테니.”
“엉? 대체 무슨 근거로 그 따위 낙관론을?”
“로이드,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지금이 수수께끼 따먹기 할 때냐? 답답하니까 얼른 말이나 해!”
“저 중합체의 몸집을 봐라. 이 배를 가라앉힐 생각이었다면 진즉 얼마든지 했을 거다. 애써 번거롭게 촉수를 뻗을 필요가 있을 거라고 보나?”
“음, 듣고 보니···. 그럼 굳이 뭐 하러?”
“바라는 게 있는 거다. 바다에 빠뜨리면 곤란한 무엇인가가 이 배안에···.”
단순한 우연인가?
그저 마에 대한 증오가 새로운 사냥감에게로 인도한 것뿐일까?
이 넓은 대양에서 유독 빅터 일행이 탄 배가 마녀의 사역마와 마주칠 확률이란 과연?
···아니, 사실은 달라.
모든 현상엔 이유가 있다.
그것이야말로 빅터가 믿어 의심치 않는 불변의 이치이자 진리였으니.
따라서, 이번 일에도 예외는 없었다.
“어쩌면 우리가 아랑을 데려온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시점에서 왜 꼬마 이야기를 하··· 어, 설마?”
“그래. 바로 그거다. 마기를 가득 담고 있으니, 놈이 침을 흘릴 만도 하지.”
빅터의 확답에 로이드는 이해하고 말았다.
이 망망대해에서 마녀가 탐낼만한 물건이란 바로···.
“이거 완전 애물단지구만, 빌어먹을 맘몬의 적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