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152화 (152/186)

유혹의 장(6)

8.

미래의 관측이 이뤄진 시점에서 운명은 정해진다.

빅터가 마주본 것들은 가까운 시일 내에 반드시 이루어져.

이는 피할 수도, 외면하지도 못하는 절대적 경과였다.

그렇기에 빅터는 안다.

일행이 승선하면 이 배는 침몰한다는 사실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이는 필연적인 현상으로 나타날 것이다.

도망쳐야만 하나?

사정을 말해 출항이 며칠 늦춰지도록 설득할 것인가?

하지만 빅터는 이 예지를 피하지 않아.

오히려 정면에서 맞서줄 생각이었다.

‘재미있군. 간단히 보내주진 않는단 건가?’

불필요한 지체는 없다.

빅터 일행은 예정대로 승선을 마칠 셈이었다.

“잠깐 쉴 틈도 주지 않아서 미안하지만, 다들 들어다오.”

빅터는 선실에 도착하자마자 동료들의 주목을 요청했다.

그가 전한 것은 곧 이어 닥쳐들 또 하나의 위기···.

대략 삼일에서 나흘 사이에 벌어지는 모종의 사건에 대해서였다.

“모두가 해줘야 할 일이 있다.”

빅터는 어떤 계획에 대해서 논했다.

9.

검은 하늘 아래, 높은 파도가 친다.

바람이 실어온 거센 물줄기가 배의 몸통을 칠 때마다 시야가 기울어졌다.

폭풍.

항구에서 떠난 지 불과 이틀 만에 빅터 일행은 열대성 저기압에 휘말렸다.

“좌현으로 30도!”

“서둘러! 식량 창고를 사수해!”

“승객들도 도와! 이건 비상사태라고!”

거대한 대양이 펼쳐지는 가운데, ‘포르투나’의 배위는 분주했다.

50여명에 달하는 베테랑 선원들이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전력을 다 하고 있었기에.

대자연의 힘은 무시무시하다.

하나, 오랜 시간 동안 그에 공존하고자 한 인간의 근성도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야.

용기 있는 뱃사람들은 곧 질풍과 파랑의 세기에 맞서는 방법을 찾아냈다.

파앗!

배는 정면에서 파도와 충돌한다.

조타수는 거의 신기에 가깝게 매번 아슬아슬한 각도를 계산해냈다.

옆이 너울의 흐름에 닿으면 아무리 큰 배라도 견디지 못해, 뱃머리가 뾰족한 까닭은 여기에 있었다.

“후, 갑작스럽긴 하지만··· 이까짓 풍랑쯤이야!”

어금니를 꽉 깨물며, 선원 중 하나가 기세 좋게 일어선다.

그리곤, 과거에 이보다 더 큰 폭풍에서도 살아남았다며 당당히 입을 턴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별것 아니라고.

한 해에만 마주하는 태풍만 해도 최소 둘 이상.

이 규모는 비교적 약한 편에 속한다.

정신만 차린다면 어떻게든 된다.

혼자서는 무리더라도, 인간의 지혜가 밀집된 이 구조물이 간단히 넘어가진 않을지니···.

하물며, 여기엔 그녀가 있지 않은가?

비교적 안전한 돌파구를 찾아내는 일은 재능과 경험 양쪽 모두가 충분하기에 가능한 기술이었다.

놀랍게도 이 과정을 행하고 있는 역할은 선장이나 나이 많은 선원이 아니라···.

이 중에서 가장 앳된 외모를 가진 갈색 피부의 여인이 전적으로 도맡아하고 있었다.

노련한 조타수의 정체란, 다름 아닌 니엘이었던 것이다.

머지않아 구름이 걷힌다.

놀라울 정도로 바다가 잔잔해지고 있었다.

폭풍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것인지···.

조금 전의 소란이 거짓말처럼 멈췄어, 구름 너머로 빛줄기가 내비치기 시작했다.

“체엣, 태풍의 눈에 들어왔나? 그럼 한 동안은 조용하겠네. 시시하긴! 간만에 즐길 거리가 생기나 했더니만···.”

“역시 니엘 아가씨! 덕분에 살았어! 나나 행해사의 지시도 없이 그 정도라니··· 언제 봐도 신들린 조타 솜씨야.”

“뭘! 그렇게 띄워줘도 선장님 도박 빚은 탕감 안 해줄 거거든? 겨우 이 정도로 무슨 감사야? 간담이 조금도 서늘해지지 않는데!”

“하하하! 어지간한 바다 사나이도 여장부인 아가씨 앞에선 명함도 못 내밀겠군!”

“알았으면 이따 럼주나 내놓으라고! 난 모셔야 할 손님도 있으니까!”

겨우 비바람이 수그러들 무렵.

니엘은 다른 선원과 교대하고 선실로 돌아왔다.

마른 천으로 얼굴을 거칠게 닦아내고, 그녀는 안대의 각도만 조금 바꾼 채 문을 열어젖혔다.

“···휴우! 어? 형씨, 이런 곳에서 뭐해?”

한 손에는 망치, 다른 손에는 두꺼운 판자.

빅터는 여태 파손된 선체의 보수작업을 하고 있었다.

“아차! 귀빈 승객까지 신경 쓰게 할 줄이야! 쾌적한 여행이 되지 못해서 미안하네, 사냥꾼 형씨!”

“아니다. 날씨가 변덕스러운 건 당연한 일이지. 오히려 이쪽에서 신세를 졌군. 너야말로 배를 움직이는 게 쉽진 않았을 텐데.”

“흥, 바다에서 생활하는데 이 정도야 익숙해! 그보다 형씨도 고생 많았어. 몸집만 큰 줄 알았는데, 의외로 손재주도 있나 보네?”

“음.”

물이 새는 곳을 집중적으로 교체하며, 그는 보이지 않는 장소에서 나름대로의 도움을 주는 중이었다.

“솜씨가 제법인데? 전에 목수 일이라도 했어?”

“성질 나쁜 늙은이 곁을 돕긴 했지.”

“흐응? 어중이떠중이 인부들보단 났네. 나중에 시간나면 갑판 쪽도 부탁할까?”

“그건 좀 참아줬음 좋겠군. 그런데···”

옷이 다 젖었는데 갈아입지 않는 것인가?

빅터가 그렇게 묻자, 상대가 살짝 혀를 내밀어 보였다.

니엘은 속이 내비쳐 보이는 셔츠를 가릴 생각조차 하지도 않고서···.

“왜? 망측해 보이기라도 하시나? 불끈불끈해지셨어?”

“눈을 둘 곳이 없어서 곤란하긴 하지.”

“오? 형씨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네. 사냥꾼들은 모두 고자인줄 알았는데?”

“전부 다는 아니다. 거기다 딸뻘 되는 계집애에게 얼굴을 붉힐 정도로 궁하진 않으니까.”

“치, 그건 자존심 상하네! 뱃사람들은 전부 날 공주님처럼 모시거든? 누구든 눈웃음만 좀 해주면 깜빡 죽는단 말이야.”

“이젠 상스러운 시선마저도 즐기게 되었는가?”

“뭐, 여자라는 입장을 강조하는 게 때때로 이점도 있거든.”

천박한 농담이었지만 빅터는 피식 웃었다.

로이드를 통해서 익숙해진 탓에 이 정도는 가볍게 넘길 수 있게 된 모양이었다.

“그런데, 형씨··· 어쩐지 좀 변했네?”

“그런가?”

“예전보다 꽉 막힌 구석이 좀 사라진 거 같아.”

“그러는 너도 말이다.”

“내가 많이 바뀐 거야 새삼스러운 일이고. 엄청 쭉쭉빵빵해지긴 했지?”

“···칭찬이 아니다. 그 꼴을 볼 때마다 나도 고리타분한 잔소리를 할 수 밖에 없으니.”

“뭐야, 갑자기? 우리 형이 되기라도 한 것 마냥···.”

“그 말 그대로다. 니코가 한탄하겠군.”

빅터가 이어간 그 한 마디에, 니엘은 아주 잠깐이지만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살짝 주눅이 든 것 같은 태도.

떨어진 가족이 생각났는지, 니엘은 갑자기 얌전한 자세로 의자에 앉았다.

“···음, 그래. 아직 형씨한텐 내 사정을 말해주지 않았었지?”

서로 기회가 없었으니까, 라고 빅터는 턱을 슬쩍 들었다.

그 끝은 잠든 리리 리와 아랑에게로 향해있었다.

여행길에 오른 소년소녀를 진정시키는 것은 그로서도 쉽지 않았다.

들뜬 아이들의 체력에 맞춰주는 부모 열학을 해주기엔, 사냥꾼의 체력으로도 한참 여유가 모자랐기에···.

반면, 폭풍우가 몰아치자 이번엔 니엘 쪽에서 곤란해졌다.

결국 여유가 출항 이후에 여유가 생긴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계속 묻고 싶었지. 왜 너는 이런 곳에 있나?”

“이런 곳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 여기도 훌륭한 집이거든?”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다.”

“흥, 어울리지 않는 단 뜻이야?”

“네가 등에 짊어진 대검이 장식은 아닐 텐데?”

수 초간의 텀.

니엘은 쓰고 있던 두건을 벗더니, 옆머리를 거칠게 긁었다.

“아, 아아! 이걸 어디부터 설명해야해? 우선 결론부터 말하면··· 나 짤렸거든. 뭐라더라? 가녀린 여자의 몸으로 용병에 적합하지 않다면서 말이야.”

“가녀리다? 그건 의외로군.”

“거짓말! 위로하려고 적당히 맞장구치지 말라고! 형씨도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는 거 다 알아!”

니코는 여동생을 지극히 생각하던 남자였다.

언제까지고 위험한 전장에 소녀를 동반할 순 없어.

거기다 한쪽 눈이 불편한 아이에게까지 검을 쥐여 줄만큼 냉혈한은 더더욱 아니었기에.

“5년 전에, 동방에서 괴물 놈들에게 왼쪽 눈을 잃은 이후로 모든 게 변했지.”

“음.”

“아! 물론 지금은 댁들을 원망하는 게 아냐! 이제 와서는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여기고 있어. 험하긴 해도 매 끼니는 넉넉히 때울 수 있고··· 선원 아저씨들은 다들 친절한데다, 크로이 상단에서 주는 봉급도 어마어마하거든? 목숨 걸고 싸우던 시절에 비하면 천국이라니까?”

전쟁터에서 피 튀겨가며 칼부림을 하는 것보단 훨씬 나은 생활···.

어느새 소녀는 바다생활에 자부심마저 느끼고 있었다.

“또 말이지, 누가 알았겠냐고? 이 몸이 배를 다루는데 천재적인 재능이 있을 줄은!”

“그건 잘 됐군.”

“근데 사람 몸이란 게 말이야. 정말 신기해. 이 눈을 배에서 치료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갑자기 정신이 엄청 또렷해지더라고. 파도나 바람의 흐름이 당연스럽게 느껴 진달까?”

“흠, 그건 보상 기관에 대한 이야기인가?”

빅터는 언젠가 대스승 베누다에게 흘겨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두 눈을 잃으면 귀가 밝아지거나 후각이 예민해지는 현상.

이는 생존을 위한 인체의 발버둥으로···.

인간의 뇌에는 특이한 보상 체계가 있어, 특정 부분을 잃은 만큼 다른 감각이 발달한다는 식의 이론이었다.

“글쎄? 잘은 몰라도 그거랑 비슷한 거겠지, 뭐. 아무튼··· 딱히 신경 쓰지 않아도 바다의 모든 게 피부로 와닿았는 것도 그렇고, 특히 무게 중심이랑 균형이 끝내주게 됐어. 배 멀미도 싹 사라졌지.”

이런 걸 하늘이 내려준 소질이라고 하는 거겠지?

···라고 니엘은 가볍게 말했지만, 빅터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과연 그럴까?

단지 그것만으로 평범한 소녀가 혀를 내드를 정도의 우수한 선원이 될 수 있다고?

‘설마 이것은 심록이··· 그 마녀가 죽기 직전 니엘에게 건 마법의 영향인가?’

그랬다.

심록을 토벌한 그 마지막 순간, 분명 니엘은 자칫 아스트랄의 권속이 될 뻔했었다.

세상을 저주하는 순수한 여자아이야말로 그 그릇이 되기 충분한 조건이었으니···.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심록은 스스로의 종말을 받아들였다.

마녀의 탐욕은 기이하고도 왜곡된 방향으로 나아가, 다른 소녀에게 자신의 주인이 깃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던 모양이야.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지금 니엘의 몸은 미약하게마나 마기의 가호를 받고 있었다.

“뭔데? 사람을 왜 그렇게 쳐다봐?”

“···아니, 대견해서 그런다.”

빅터는 적당히 말을 얼버무렸다.

이제 와서 5년 전에 벌어진 일을 언급해서 뭐할 것이며···.

한편으론, 현상을 낙관적인 방향으로 해석할 이유가 없었다.

만에 하나 심록이 죽기 직전 인간의 마음을 되찾았다느니···.

그나마 니엘을 지켜주기 위해 희생했다는 식으로 포장하고 싶지 않아.

빅터는 가능한 그쪽 가능성을 머리에서 지웠다.

“대견? 아, 역시 그렇지? 보다시피 난 사내들에게도 안진다고! 땀내 나는 아저씨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당연히 나도 가능해! 해적들? 선상 위에서 백병전이라면 나도 안 져! 이 팔뚝 보이지? 이래 봐도, 한때 전쟁터에서 굴러먹던 짬이 있으니까!”

하지만 사실, 이 모든 수다는 과장에 불과했다.

니엘은 한 동안 웃었지만, 이내 곧 억지로 버티고 있던 웃음을 얼굴에서 지웠다.

“그런데··· 니코 형은 끝내 내가 싸우는 걸 허락해주지 않았지.”

허탈하게 한숨을 쉬는 니엘.

기가 죽은 그녀의 태도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자세한 사정을 유추하는 데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신경 쓸 수밖에 없더라. 가뜩이나 해가 지날 때마다 가슴이 커져왔는데···.”

이미 압박 붕대로 숨기지 못할 만큼 성장했을 무렵엔···.

어릴 때부터 용병으로 참가하며, 전장의 어른 병사들에게 얕보이지 않기 위해서 남장을 해온 소녀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

이름 난 여자 용병이 역사에 없었다고 단언하진 못하지만, 그것도 애꾸인 전사는 전무했다.

“···칫, 이래서 맨 정신으로 이야기하는 건 싫어. 말할 때마다 감정이 쓸데없는 실리잖아.”

여담으로 니엘이 한창 어린 나이부터 술에 절여진 것도 그러한 이유···.

어떤 인간이라도 주정뱅이가 되는 까닭은 다 사연이 있었다.

“흥이 깨졌어. 이젠 형씨 이야기나 좀 해봐.”

“뭘 말이지?”

“그 어여쁜 여자 사냥꾼은 댁의 마누라?”

“잘못 짚었다.”

“에이, 그래도 그냥 보통 사이는 아니지? 그 여자가 바라보던 눈빛이 심상치가 않던데···.”

“너도 로이드 녀석이랑 다를 게 없군.”

“뭐어? 그 멀대 형씨 이야기가 왜 나오는데?”

아니나 다를까, 니엘의 말투는 로이드가 앙리를 보고 꺼낸 이야기와 완벽히 일치했다.

“그런 주제라면 더 해줄 말은 없다.”

“치사하네. 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다 해줬잖아?”

니엘은 툴툴거리며 불평했지만, 빅터는 등을 돌릴 뿐이었다.

“와, 이렇게 일방적으로 대화를 끝내기야? 형씨, 진짜 못됐다! 존댓말 해주는 것만이 예의는 아니란 것도 몰라?”

“···그게 아니다.”

“그럼 뭔데? 좀 살갑게 성격이 달라졌나 했더니, 이런 식으로 사람 쪽 팔리게 만들고!”

“니엘, 검을 들 준비를 해라.”

“···엥?”

빅터는 손아귀의 공구를 내려놓은 지 오래였다.

대체 언제 잡은 것인가?

어느 순간, 괴상한 날의 형상을 한 도끼가 그의 오른손을 차지하고 있어.

그것은 쭉 지켜보던 니엘조차 눈치 채지 못했다.

“카, 칼은 왜? 여긴 바다 한 가운데라고!”

뒤따르며 니엘이 물어왔지만, 빅터는 갑판으로 향하는 나무 계단을 오르는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겨우 입을 연 것은, 이변이 생긴 하늘을 여인의 눈이 목격하고 난 다음이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선원들이 동요하고 있었다.

무리도 아니다.

배경의 움직임이 멈춘 채···.

닻을 내린 것도 아닌데 배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으니.

공기가 가라앉았다.

파도는 잔결도 없이 잔잔한 상태야.

망망대해인데도 불구하고 순풍조차 일절 불지 않는 것은 명백히 이상한 일이었다.

“대, 대체 뭐야? 몇 년간 바다에 살면서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음, 역시 이 태풍은 덫이었나?”

“사냥꾼 형씨, 이거··· 이거 설마?!”

“그래. 그 설마다. 이곳은···.”

마녀의 영역이다.

···라고 빅터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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