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148화 (148/186)

유혹의 장(2)

2.

여인의 몸엔 오랜 고문의 흔적이 엿보였다.

족쇄가 박힌 양손은 접촉면이 썩어 문드러져, 오물과 상흔이 뒤섞인 몸뚱이는 비참하기 짝이 없다.

아물지 않은 안구에서 쉼 없이 검붉은 줄기가 뺨을 따라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혈흔은 자신의 머리카락과 같은 색···.

창백하리만치 새하얀 살결과 대비되는 생명의 빛깔이었다.

“···더는 저편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여선 안 돼. 그들의 우리의 파멸만을 바라고 있어요.”

“너 아까부터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니?”

“당신도··· 사실은 아무도 미워하고 싶지 않잖아요?”

“으응? 영 대화가 이어지지 않네.”

“이제 그만 해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그러니까···.”

이는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가?

아니면 이 장소에 존재하는 다른 육망성들에게 건네는 것인가?

용혈은 이 시점에서 상대의 양쪽 귀가 허물어져있다는 걸 파악했다.

겉은 물론, 고막을 비롯한 안쪽의 대부분 기관들이 심각하게 망가진 채였다.

이 상태로 멀쩡히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리 없어.

적발의 여인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 것도 듣지 못하면서도 쭉 무모한 설득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아하, 약을 써서 재생력을 한계까지 낮춘 거구나? 쓸데없이 공을 들이긴···.”

“면목이 없습니다.”

“흐응, 그런데 이 지경이 되고도 용케 자아를 유지하고 있네?”

머리카락에서 손을 떼자, 클라리스의 고개가 힘없이 아래를 향했다.

이미 목을 치켜들 기력조차 없는 듯 보였다.

“···해서, 모두를 구해야···.”

뭔가에 홀린 듯 쉴 새 없이 읊조리는 그녀를 바라보며, 용혈의 마녀는 혀를 찼다.

“쯧, 이거 자색의 유희용 인격이지?”

“예, 일단은···.”

“이상한 걸. 길어도 고작 십 수 년. 찰나밖에 안 되는 기억주제에, 천 년 넘게 살아온 자색의 정신을 침식했다고? 어떻게 그게 가능해?”

“저도 도통···.”

“쭉 이랬던 거니? 5년 내내?”

“아닙니다. 반 년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시간을 스승께서 주도권을 잡으셨어요. 그런데···.”

최근 들어 이변이 생겼다.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분명 소거되었어야 할 존재가, 형체가 있을 리 만무한 클라리스의 인격이 불현듯 고개를 치켜든 것이다.

“···그분께서는 실험이란 명목으로 그녀의 정신 활동을 허용해버리셨죠. 재미있을 테니 지켜보자고, 어디서 설정 값이 잘못되었는지 파악해야 한다면서요.”

빙의는 자세한 설명을 굳이 덧붙이진 않았다.

들켜서는 곤란하기에.

스스로 불리한 정보를 제공할 이유는 없었다.

“흐응, 그랬구나?”

다행히도, 용혈은 그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녀의 관심사는 자색이 아닌 클라리스가 내뱉는 호소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 아이의 정신력은 굉장하네?”

“망가진 인형일 뿐입니다.”

“아니, 내가 보기엔 아주 갸륵해. 보아하니 꽤 오랫동안 감금당한 것 같은데, 아직도 이렇게나 웅변을 토해내고 있잖아? 누가 듣는지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야.”

“그건···.”

“그러니까 보통이 아니지. 보려무나. 자기 아픔보다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잖니?”

인간의 일생보다 긴 시간을 살아온 용혈은 알았다.

인간은 궁지에 몰렸을 때, 본연의 진짜 모습을 보인다는 걸.

그런 의미에서 눈앞의 적발 여인은 어떠한가?

남겨진 건 사슬에만 의지한 채 지탱할 뿐인 상처투성이의 몸···.

그럼에도 뭔가를 필사적으로 외친다.

“제발, 부디 사람의 마음을 되찾아요. 사실 인간은··· 다른 이를 해치고 싶지 않아. 우리들은 서로를 지키며 보듬기 위해 살아가는 동물이에요···.”

목이 쉴 정도로 감정에 호소하는 설득.

그 목소리에는 울음 섞인 애환이 담겨있다.

“얘 정말 웃긴다!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을 것만 같아. 응, 달리아? 이거 내가 데려가 될까? 언제까지고 괴롭히고 싶어!”

···하지만 닿지 않는다.

클라리스의 외침은 칠흑만큼 어두운 심연에 가로막혀, 청자의 가슴 속까지 이르지 못했다.

그것은 마녀들에게 있어 단순한 주파수···.

그저 귓가에 맴돌기만 할 뿐인 성가신 공기의 파동에 불과했다.

“흥, 잘도 성가신 짓을 하네. 자기 몸까지 동원하다니. 난 상상도 못해.”

잠자코 듣고 있던 홍련이 입을 열었다.

지루한 모양인지, 자신의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말아가며 입을 삐죽 내민 채 투덜거린다.

“자가 분석 좋아하시네. 번거로운 일은 질색이야. 하여간 진리니 이치니 어쩌고 입에 올리는 미치광이들은 못 말려.”

“홍련··· 연장자의 앞입니다. 최소한 말은 가려서 하시죠?”

“아니, 이건 칭찬인데? 나 같으면 지겨워서라도 당장 집어치웠을 거야. 만약에 다른 인격이 내 머릿속을 차지한다면, 당장 뇌수부터 새척할 거라고. 왜 이런 간단한 해결책이 있는데 헛짓거릴 하는 거람?”

“그 입 닥치세요! 제가 그 정도로 아무 조치도 안했을 것 같나요?”

홍련의 구시렁거림에 참다못한 빙의가 폭발했다.

그 울화는 성격이 드센 홍련마저 살짝 움츠릴 정도로 강렬한 것이었다.

“뭔데? 갑자기 왜 화를 내고 그래?”

“몇 번이나 해봤다고요! 제가 할 수 있는 시도는 샐 수도 없이···.”

“실례의 말씀이지만, 그 부분은 저도 의문이에요.”

빙의가 반론을 하려는 순간, 이번엔 푸른 머리의 여인이 끼어든다.

홍련 이상으로 청람도 미적지근한 설명에 슬슬 지쳐가고 있었다.

“비록 동등한 입장이라 해도, 명목상 자색의 마녀는 이 무리의 우두머리입니다. 저도 그 명성에 이끌려 육망성에 들어온 거고요. 그녀가 쭉 저런 상태라면 막내인 저도 간단히 넘어갈 수 없겠는데요.”

“···.”

“솔직히 말해 실망했어요. 가장 오래된 원로 마녀라는 작자가 사실은 고작 정신분열에 시달리는 불안정한 병자라뇨?”

예리하고 이지적인 하늘색의 눈빛이 날카롭게 쏘아보고 있어.

빙의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건 눈치 챈 모양이었다.

“어차피 만들어낸 인격 따위, 뇌 피질에 새겨진 잔흔일 뿐 아닌가요? 그렇다면 전부 잘라내 버리면 그만일 터.”

“청람, 당신까지 그런 답답한 소릴···.”

“납득이 가질 않아요. 육체의 재구성과 정신의 조작은 빙의··· 그쪽의 전문 분야 아니었나요?”

청람의 질문에 빙의는 고개를 저었다.

“청람, 당신은 두 가지를 오해하고 계신 듯합니다.”

“제가 무얼?”

“하나는 제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있단 거고. 둘째는 우리 마녀들의 재생, 저나 여러분이 목숨에 부여받은 가호에 대해 착각하고 있단 거죠.”

“착각이라고요? 그건 당신의 능력이 아니었던가요?”

“아뇨. 제가 나눠드릴 수 있는 생명이란, 어디까지나 결국 그 분께 전수받은 지혜입니다. 유구하고도 은밀한 생명의 비밀을 풀어낸 모든 지식은 바로 제 스승, 자색의 마녀에게서 나온 거죠.”

그랬다.

육망성의 마녀들이 몇 개나 되는 목숨을 부여받은 까닭···.

죽음을 넘어선 소생이 가능한 것은 전부 자색의 마녀가 부여한 마법 덕분이었으니.

“···그 분의 마법은 완벽해요. 그러니 유희를 위해 꾸며놓은 인격조차 결함 없이 작동하는 거겠죠.”

육체를 배양하고, 정신을 새로 주입한다.

빙의는 자색의 마녀가 행한 일연의 모든 과정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몸을 직접 실험대에 올리다니··· 그런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가 어디 있나요?”

“천재의 사고방식은 보통 사람이 이해하지 못한 답니다. 그건 제자인 저도 마찬가지죠. 항상 그래요. 끝내 저는 그분의 영역에 도달하지 못했어요. 스승님께서 일궈낸 수많은 성과들에 비하면, 제가 만들어낸 영양액 따윈··· 어린 애들 장난에 불과해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의기소침.

빙의는 한 가지 가정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과연 자신이 자색과 같은 세월을 연구해도 그 발끝만큼 따라갈 수 있을까?

‘불가능하지. 흉내조차 낼 수 없어. 이토록 오래, 스승이 남긴 자료들을 아무리 탐닉해도··· 나는 아직 그 원리조차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가히 자학에 가까운 고찰이었지만, 그녀는 격차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색의 마녀가 올린 절대적인 연구 성과···.

그 기술이 있기에, 비로소 제멋대로인 육망성 마녀회가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 아시겠나요? 저주받은 우리의 몸뚱이를 부작용 없이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건 전부 그분의 은혜란 걸···.”

청람은 입을 닫았다.

단순한 사역마의 창조를 넘어, 인간의 생명을 가지고 노는 수준에 이른 마녀의 연구란···.

그만큼이나 차원이 다른 영역에 있음을 깨달았기에.

“진정하렴, 달리아. 너는 스승의 이야기만 나오면 너무 흥분하는 경향이 있어.”

“하나 용혈이시여. 이건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당신도 잘 아시지 않나요? 그대의 능수능란한 육체의 기변도 전부···.”

“오호, 그렇게 나오시겠다? 감히 내 앞에서 유세를 부린다고?”

“···이 문제에서 만큼은 성을 내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용혈도 딱히 부정하진 않아.

앳된 모습을 유지한 고령의 마녀는 홀가분하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였다.

“후후후, 장난이야. 물론 잊지 않았어. 그 덕분에 이 몸도 무사히 아리따운 젊음을 유지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응. 네 말이 맞아. 내가 너와 자색에게 진 빚은 여전히 유효하단다.”

진정한 강자는 쉽사리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자칫 용혈이 화를 낼까 조마조마했던 빙의였지만, 그녀는 상대가 의연하게 넘어가 줄 것 또한 믿고 있었다.

하지만 해결된 것은 아직 아무 것도 없어.

여전히 스승의 육신은 다른 마녀들에게 노출된 상태···.

빙의의 마녀는 좀 더 적극적으로 대처해야만 했다.

“···아무튼 보시다시피 가호가 그녀에게도 이어지고 만 것입니다. 몇 번을 죽여도··· 제아무리 고통을 줘도 되살아나고 말아요.”

그러면서 빙의는 자신의 스승과 같은 얼굴을 가진 이방인을 노려보았다.

한껏 경멸과 혐오로 가득 찬 표정이었다.

“하필이면 이깟 위선 덩어리 계집애의 인격이···.”

“···아윽!”

“망할 년! 가뜩이나 심란한 때에, 가증스럽기도 하지!”

기본적으로 온화한 빙의가 주변 눈치도 보지 않고 독설을 뱉어냈다.

심지어 클라리스의 얼굴을 발로 걷어차면서까지 욕보인다.

실로 급격한 돌변이었다.

“그 분을 돌려줘! 너 같은 건 얼른 사라져버리라고!”

하나, 사실 이것은 연기.

자신이 먼저 나섬으로서 다른 마녀들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상황을 조율하기 위해서였다.

이내, 빙의는 양손을 휘감아 클라리스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윽··· 끄윽!”

“괴롭죠?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죠? 그러면 어서 뒈져버리라고요. 익숙하잖아요? 질식사하는 것도 몇 번이나 경험했을 테니까!”

···아니.

어쩌면 이것은 진심일지도 모른다.

빙의의 눈빛에 미움이 드리워져 있어, 보다 복합적인 감정의 응어리가 스민 듯 보였다.

그런데···.

“앗!”

푸슛!

순간, 붉은 궤적과 함께 양손목이 사라졌다.

“히, 힉!?”

토막 난 손가락이 땅을 구르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빙의의 마녀가 뒤로 나자빠졌다.

“그쯤하지? 아무리 다른 인격이라도 말이지. 그거 내 오랜 친구 자색이랑 같은 얼굴이잖아? 지켜보기 영 불편하거든?”

“죄, 죄송합니다. 그만 흉한 꼴을 보여드려서···.”

“아냐, 아냐. 네 심정도 충분히 이해해. 존경하는 스승의 몸뚱이에 저런 게 들어가 버렸으니··· 교살시키고 싶을 정도로 미울 만도 하지. 손을 자른 건 미안했어. 나중에 붙이는 거 도와줄게, 그러니 마음 풀어. 응?”

토닥토닥.

어울리지 않게도 어린 아이가 쓰러진 장신의 여자를 보듬는다.

양손을 잘라버린 상대치곤, 지나치게 살가운 태도였다.

그래도 노고를 알아주는 상대가 생겼기 때문이었을까?

빙의는 다소 감정적으로 반응했다.

“···그치만 바라보기만 해도 화가 나요. 저 여자는 마냥 방치하면 언제까지고 같잖은 설득을 시도하죠. 찌꺼기 주제에 저를 동정하면서 허울 좋은 말만 늘어놓고···”

“그래, 그래. 너도 힘들었지? 그게 자색의 못된 버릇이야. 네 처지는 고려하지도 않고 또 변덕이 발동한 모양이야. 그 아이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딴 시시한 장난질을 하는 걸까?”

“이젠 저도 그 분과 가장 가까운 저조차도 본의를 모르겠습니다.”

“너도 참 고생이지. 제멋대로인 스승을 모시는 게 여간 쉽지 않겠구나. ”

“알아주시는 건가요?”

“암. 그렇고말고. 너니까 이 정도로 버텨내는 거지, 다른 애였으면 어림도 없어.”

“하아아···.”

허심탄회하는 빙의의 한숨에, 용혈의 양쪽 눈이 각자 다른 크기로 실룩였다.

‘이물질. 근본도 없는 가짜 혼백··· 그래도 이건 썩 재미있는 작품인 걸.’

약간의 흥미와 약간의 거북함.

그것은 있을 수 없는 현상에 대한 탐구자의 특유의 관심이었다.

하지만 위로의 말을 건네면서도, 용혈의 눈초리는 단 한 번도 빙의에게로 향하지 않았다.

사실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무겁게 가라앉은 시선, 결코 좋지 않은 감정이 담긴 금색 눈동자가 주시하는 것은···.

“그건 그렇고, 얘. 전부터 말해주고 싶었는데, 너는 은근히 무른 면이 있어.”

“예? 용혈이시여, 또 무슨 말씀을···.”

“방식이 미적지근하다고. 너무 다정한 것 아니니?”

빙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설마하니, 클라리스에게 행한 모든 조치가 시시하다고 말하는 것인가?

“달리아, 너는 고문에 대한 일가견이 부족하구나. 이런 완강한 아이는 아픔 정도로 패배시킬 수 없단다.”

눈을 도려내고.

귓속을 헤집어 놓고.

얼굴 거죽을 집어 뜯고.

성대마저 제거한 채, 사슬에 묶어 어둠 속에 방치하는 것이 미적지근하다고?

“그러니 내가 시범을 보여줄게.”

용혈의 입가가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못된 장난을 계획하는 아이의 얼굴이었다.

“종종 이런 부류가 있지. 육신의 자유를 빼앗는 것 정도로 무너지지 않아. 아마 발정 난 사내들 사이에 던져놔도 언제까지고 듣기 좋은 말을 지껄일 테지. 유린당해도 상대를 용서하고, 숨통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인간의 존엄을 논할 거야. 어리석게도, 자기가 그렇게 만들어진 것조차 모르고 말이지.”

“그러면···.”

“어찌해야 하냐고? 그건 간단해. 이 계집애의 정신이 무너지도록 잘 조리해야지. 진짜 두려움을 알려줘서 말이야.”

순간,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퍼석, 혹은 콰드득.

살을 파헤치고 그 속의 뼈를 함께 가르는 울림이었다.

“일단 이렇게 강렬한 자극을 준 다음.”

“···아아아아아악!”

경련.

이어서 고통을 참지 못한 비명이 울려 퍼진다.

어둠이 똬리를 튼 심연의 그늘 속에서 클라리스는 발버둥 치며 울부짖었다.

그 잠깐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자세히 보니 그녀의 우측 옆구리가 비어있어.

비참하게도, 12개나 되는 흉골이 통째로 도려 나가진 채였다.

“달리아. 이제 이 아이의 귀를 재생시켜주렴. 기왕이면 속박도 좀 풀어주고.”

“하, 하지만···.”

“재미있는 게 떠올라서 그래. 조금만 이 언니를 도와줄래?”

타원으로 일그러진 금안이 요동친다.

어느새 소녀의 입술엔 선혈의 연지가 흘러내리고 있어.

함박미소와 함께 살짝 벌어진 입안에는 빼곡한 송곳니들로 가득했다.

대체 이 영악한 마녀는 무엇을 노리는 것인가?

불안감을 애써 억누른 채 빙의는 그 지시에 따랐다.

형광색 약물을 풀어 클라리스의 고막을 회복시키자, 용혈은 바로 입가를 가져다댔다.

그리곤···.

“안녕, 이제 내 말이 들려?”

“아, 으···.”

“네 진심 어린 설교는 감명 깊었어.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좀 닥쳐줬음 좋겠네? 지금부터는 내가 말할 차례거든.”

사람의 것이 아닌 거대한 손아귀가 적발 여인의 입을 틀어막는다.

키득키득.

용혈은 조소와 더불어 잔인한 눈빛을 흘렸다.

이윽고 소녀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빅터!”

요동친다.

지금까지 무력하게 늘어져있던 클라리스의 몸이 들썩였다.

“어쩜, 반응이 즉각 나오는 걸?”

“읍··· 으으읍!”

“그이는 너에게 어떤 사람이니? 인간으로 살던 시절 붙어먹은 남자? 낭만적인 장밋빛 미래라도 약속했어? ···후후, 어느 쪽이든 좋아. 곧 만나게 해줄 테니까. 그런데 과연 알아볼 수 있을까?”

“으, 아으···.”

“내가 그 놈을 형체도 없이 찢어발겨서 데려올 텐데!”

직후, 클라리스의 머리가 으깨졌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진 않아.

오히려 숨이 끊어진 시점에서 초고속의 재생이 이뤄진다.

조금만 지나면, 붉은 머리의 여인은 완전히 상처가 치료된 채 되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용혈이 바라는 바였다.

“응! 지금이야, 달리아! 어서 이 계집애을 다른 공간에 처넣어버리렴!”

“용혈이시여. 어째서···.”

“별 거 아니야. 나는 단지 고뇌를 안겨준 것 뿐.”

“네?”

“몽롱한 아픔이나 자비로운 망각에 취하게 두진 않아. 모름지기 인간은 맨 정신으로 궁리해야 더 괴로운 법이지. 안 그래?”

그녀의 속내는 이러했다.

스스로의 아픔을 마땅히 견뎌내는 영혼에게 징벌은 의미가 퇴색되어.

더욱이 고통에 혼탁해진 정신은 그 이상 괴롭게 만들어봐야 의미가 없다.

그렇기에 현실적으로 와 닿는 두려움과 걱정거리를 제공한다.

자신보다 타인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이에겐 이 이상 특단의 조치가 없었으니···.

“기대되지 않니? 다음에 얼굴을 봤을 때 그녀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어보일까?”

아이의 목소리로 수다를 떨지만, 그것에 배려는 찾아볼 수 없다.

오직 즐거움만을 위한 놀이···.

이는 단순한 가학성이 아니야.

보다 심층적인 의미에서 상대의 고통을 즐기는 것이었다.

“뭘 꾸물대고 있어? 어서 치우라니까?”

“알겠···습니다.”

양손이 있어야할 자리가 지끈거렸지만, 빙의는 마지못해 클라리스를 원래 있던 장소로 격리시켰다.

“후후후, 설레는 걸. 앞으로는 즐거운 일들만 가득하겠지. ···뭐, 여흥은 여기까지 하고. 슬슬 제대로 움직여보실까?”

“용혈이시여. 뭘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어쩌긴? 주제도 모르고 버릇없이 날뛰는 사냥꾼 패거리에게 본때를 보여줘야지. 생각해보니까 그간 너무 풀어줬어.”

수단이나 방법 따윈 논하지 않는다.

용혈은 당당하게도 정면 돌파만을 상정하고 있었다.

“내가 최전선에 서지. 지휘도 겸해서 맡을게. 당장 자색이 저 모양이니까 누군가는 나서야지 않겠어?”

“하지만···.”

“왜 그래, 달리아? 이 몸이 대표자를 맡는데 무슨 불만이라도 있니? 정 맘에 안 든다면 다들 어때? 투표로 결정하자! 우선 나는 나를 추천해!”

의견을 피력하는데 재미가 들린 것인가?

용혈은 오른팔을 번쩍 들어 허공에 흔들어보였다.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들뜬 분위기가 거슬렸는지, 홍련은 팔짱을 낀 채 이를 갈았다.

“바보 같아. 그딴 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홍련아, 혹시 네가 대장이 되고 싶어?”

“싫거든? 난 그런 거 딱 질색이야.”

“역시 내가 적임자는 나뿐이네!”

“멋대로 하던가?”

청람의 경우, 시선을 피했다.

미간에 일그러짐이 나타나, 조금 전에 벌어진 참극에 거부감을 내비치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표를 던지진 않는다.

“···연장자의 의견에 따르도록 하죠.”

나머지는 어떠한가?

흑접의 마녀는 형체가 흐려지더니 온데간데없이 모습을 감췄다.

부이의 마녀도 말없이 등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반기를 들지 않는 것은 무언의 동의를 의미해.

이는 육망성이 결성될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암묵적인 규율이었다.

“결정된 거지? 자색을 대신해서 내가 계획을 앞당겨 추천하는 걸로?”

짝!

쐐기를 박는 단호한 선언과 함께 박수소리가 퍼졌다.

“자, 그럼 시작할까? 수 세기만에 맛보는 즐거운 사냥꾼 사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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