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145화 (145/186)

회환의 장(5)

6.

앙리는 꽤 오랫동안 빅터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삼각모를 썼음에도 머리 두 개 만큼이나 차이가 나는 키.

전반적으로 마른 몸은 연약해 보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신비한 기품이 흘러.

어깨를 살짝 넘는 잿빛의 장발.

얌전하고 다소곳한 인상이 드러난다.

이 앙리라는 이름의 여인은, 어쩐지 모르게 얕볼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 증거로, 그녀의 접근을 눈치 챈 이는 없어.

빅터조차 앙리가 배후에서 나타났음을 겨우 마주보고서야 깨달았다.

이처럼 그녀에겐 사소한 몸짓 하나까지 한계까지 억누른 절도가 스며있었다.

“앙리, 이제 좀 떨어져주겠나? 애들이 보고 있다.”

“아, 내 정신 좀 봐. 너무 오랜만이라 저도 모르게 그만···.”

그러고 보니 처음 보는 방문객이 많아.

명목상 은거지인 만큼, 외딴 곳에 이렇게 북적이는 인파가 몰린 것은 드문 일이었다.

다소 의아한 상황.

심지어 빅터와 동행한 키가 큰 서양인 남자 외엔 대부분이 앳되고 어린 아이들 뿐이 아닌가?

“앙리 언니이이이이!”

여성 사냥꾼이 낯선 손님들을 주시하는 사이, 작은 그림자가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앙리가 빅터와 떨어지자마자 리리 리가 덮쳐 든 것이다.

“나도! 나도 안아줘!”

“앗, 리리 리. 어서오렴.”

“응! 다녀왔어!”

앙리의 허리춤에 얼굴을 비벼대는 리리 리.

상대가 어지간히도 반가웠던지, 소녀는 연신 어리광을 멈추지 않아.

앙리도 그런 리리 리를 다정한 손길로 보듬어 주었다.

“못 본 사이에 머리가 많이 길어졌구나, 리리 리. 조금만 더 자라면 숙녀가 다 되겠는걸?”

“정말? 나 이제 다 컸어? 언니만큼 큰 거야?”

“음, 아직 그렇게 까진··· 아닌가?”

“에이, 그럼 언제?”

“아마? 그다지 멀지 않은 미래에.”

“치, 그게 뭐야?”

“···괜찮아. 리리 리는 아직 어른이 되기엔 이르단다.”

이어서 안타까움이 서린 쓴웃음.

한때 마녀였던 과거가 있는 리리 리로서는 이 이상 육체가 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루빨리 어른이 되기만을 기대하고 있는 꿈이란, 그야말로 비극의 운명이 약속된 것이나 다름없어.

빅터에게 리리 리의 사정을 전해들은 앙리로서는 모호하게 얼버무리는 것이 유일한 선택지였다.

“리리 리, 잠깐 떨어져주겠니? 아쉽지만 인사는 나중에 하자. 언니는 지금 빅터 사부와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하거든.”

“우리 도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차마 억지로 떼어놓진 못한다.

그녀의 성품이 지나치게 온화한 탓이었다.

여기서는 단호하게 엄포를 내려줄 이가 필요했으니.

그 역할은 언제나 빅터의 몫이었다.

“리리 리. 너는 아랑을 데리고 먼저 안으로 들어가 있거라.”

“또 저만 애보기에요?”

“안뜰은 넓다.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안내해줄 사람이 필요하지.”

“그게 왜 하필 저에요? 이 집결지엔 수발 드는 사람 많잖···.”

“이야, 나는 길잡이에 누구보다 꼬마 아가씨가 제일 제격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네?”

“로, 로이드 사부님?”

“아랑 꼬마도 말이야, 나이대가 비슷한 누나가 이끌어주는 편이 덜 불편할 거라고. 네가 귀찮겠지만 그게 어른으로 가는 첫 걸음이니까 어쩔 수 없어.”

“···뭐, 그런 거면 어쩔 수 없네요.”

“그렇지? 아랑이 헤매지 않게 옆에 착 붙어있어 주라고.”

“네에에에···.”

설득이 통했는지, 리리 리는 툴툴거리면서도 일단 지시에 따랐다.

‘네가 고생이다, 꼬마. 하지만 참는 자에게 복이 올지니···.’

한편, 로이드는 리리 리가 돌아선 틈을 타 아랑에게도 눈짓을 했다.

정말로 고생하는 입장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무언의 신호였다.

다행이 어른스런 소년은 나잇값을 못하는 소녀를 따라 자리에서 피해주었다.

“그럼···.”

어린 아이들이 사라지자, 앙리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녀는 살짝 난처한 표정이었다.

“빅터 씨의 의도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이 장소에 이 만큼 많은 외부인들을 데려오시면 제가 곤란해져요.”

“미안하군. 하지만 괜찮을 거다.”

“그래도···.”

“책임은 내가 질 테니.”

그 단호한 대답에 물러날 낌새는 없어 보여.

이렇게 나오는 빅터는 설득할 수 없다.

앙리는 빅터에게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짐작할 뿐이었다.

“···모처럼의 재회였는데, 요란한 소동이 되고 말았네요.”

“면목이 없다.”

“맞아요. 빅터 씨가 이탈한 이후로 저만 혼자 이 곳을 책임지게 되었으니까요.”

“그 건에 대해선···.”

“후후, 장난이에요. 사실 그 부분에 대해선 아무런 불만도 없답니다. 오히려 전령 임무에만 집중할 수 있는 지금이 좋아요. 아무래도 저는 참살 임무에는 거부감이 들어서···.”

모든 사냥꾼이 호전적이고 마녀를 죽이는 데에만 혈안이 된 것은 아니야.

사람에 따라선 비교적 후방지원이 더 체질에 맞는 사람도 있다.

더욱이 앙리의 경우, 그녀만이 가진 대체 불가능한 재능 때문에 최전선으로의 투입이 오히려 곤란했기에···.

“대변자Sprecher 앙리, 이제 그 별명에도 익숙해졌나?”

“부끄러워요, 빅터 씨. 어디 가서 자기소개를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면··· 어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어진단 말이에요. 기껏해야 잘 전달하는 재주가 얼마만큼 잘 났다고···.”

하지만 앙리의 힘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모든 사냥군을 통틀어 그녀만큼 지령을 확실하게 받아들이고, 또 전달할 수 있는 자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5년 전, 외우주에서 온 표류자와 신경이 직접 이어진 이후로···.

본래부터 우수했던 앙리의 지령 수신 능력이 대폭 상승했다.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바다 건너의, 그것도 동시에 수많은 사냥꾼에게 같은 지시를 내리는 것도 가능해.

이 시점에서도 그녀는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는 모든 사냥꾼들의 보고를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다루기 나름에 따라 전세를 뒤집고도 남을 정도의 정보력.

이 능력은 한 개인이 가지기엔 너무나도 무거운 것이기도 했으니···.

“돌이켜보면 꿈같은 이야기죠. 별 세계에서 온 자를 대변한 걸 계기로 저에게 이토록 큰 변화가 생길 줄은···.”

“누가 알았겠나?”

“그것도 이젠 예전일이네요. 벌써 5년 전이라니.”

“이젠 기억도 모호하군. 아득할 정도다.”

“후후, 빅터 씨도 이상한 농담을 다 하시네요? 그 정도로 옛날 일은 아니잖아요?”

“역시 그런가?”

“그럼요. 저나 빅터 씨는 아직 젊으니까요.”

분명 대화는 성립한다.

하지만 당장 앙리가 생각하는 관념과 빅터의 감상은 긴 시간의 공백이 존재했으니···.

5년.

앞서 앙리는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일그러진 굴레 속에서 빅터의 어긋난 시간은 거의 천일에 가까워.

웃자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빅터는 진정으로 그 당시의 기억이 멀게 느껴졌다.

“참, 그런데 빅터 씨? 못 본 사이에 복장이 많이 변하셨네요?”

“전에 입던 코트는 임무 중에 넝마가 됐다. 그렇다고 벗고 다닐 수도 없어서, 급한대로 동방의 복식이라도 걸쳐야 했지.”

“아하?”

“매무새가 많이 이상한가?”

“아뇨. 단지, 빅터 씨가 이쪽 땅의 옷을 입는 게 생소해서···.”

“그런데 저 친구는 어색하다며 징하게도 놀리더군.”

빅터는 엄지를 뒤로 향해 로이드 쪽으로 가리켰다.

“이제야 날 소개해줄 생각이 든 거냐?”

“그래. 인사해라, 로이드. 이쪽은 앙리··· 체의 유파, 대스승 베누다의 제 1제자다. 내게 보법의 기초를 알려준 선배이기도 하고.”

“오우! 반갑습니다, 앙리 누님! 지금 막 들으신 것처럼 저는 로이드라고 합니다. 유파는 심이고, 빅터보다 한 해 일찍 사냥꾼이 된 몸입죠. 사람들은 입을 모아 이 몸을 마술사 로이라 부르···”

“내가 아는 한 그딴 별명으로 불러주는 사람은 없지만 말이야.”

“아, 아니··· 있거든, 임마?! 네가 몰라서 그렇지. 이 몸은 나름 꽤 유명한 선수시다 이거야. 중동의 대도시 문토아에서 내 이름을 모르면 그야말로 간첩이라고!”

“···보다시피 로이드는 이런 놈이다, 앙리. 경박하고 가벼운 사내야.”

“후훗, 어쩐지 첫인상부터 좋은 분 같은데요.”

“나쁜 자식은 아니지.”

“맞습니다, 누님! 전 사실 겁나게 괜찮은 놈이거든요?”

“그래요. 잘 부탁드릴게요. 마술사 로이드 씨. 이 앙리, 동방의 사냥꾼을 대표해 손님께 예를 올립니다.”

앙리가 점잖게 고개를 숙이며 로이드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건넸다.

하나, 그 짧은 사이에 잠깐 상대를 훑어 본 것만으로···.

앙리는 빅터와 로이드가 겪은 지난 임무가 쉽지 않았음을 읽어낼 수 있었다.

로이드 쪽이 입은 사냥꾼용 코트의 손상도와 더불어, 손질한 지 한참이 지나 잔뜩 마모된 가죽 부츠.

이어서 드문드문 보이는 상처까지···.

몇날 며칠을 전장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의 행색이었다.

“여러분은 상당히 험한 싸움을 하셨던 모양이에요.”

“음, 가혹했다.”

약한 모습을 잘 보이려하지 않던 덩치였지만, 그는 드물게 씁쓸한 탄식을 읊조렸다.

그 사실이 놀라워.

앙리의 차분한 얼굴에서도 의외의 감정이 드러났다.

“빅터 씨가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정도라니?”

“말하자면 길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주지. 아니면 대스승에게 보고할 때 같이 들어주겠나?”

“네. 안 그래도 대스승 베누다께서 빅터 씨의 귀환을 학수고대하고 계셨습니다.”

“그 영감탱이는 여전한가?”

“네. 안타깝게도···.”

앙리의 긍정은 좋지 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말인 즉···.

대스승 베누다는 빅터가 집결지에서 떠난 이후로도 쭉 병치레를 하고 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고집부리면서 요양을 거부하는 모양이군.”

“···천하의 대스승 베누다께서 남이 하란다고 들을 양반이 아니죠. 괜찮다며 애써 무리를 하시지만···.”

“망할 노인네같으니. 자기가 아직도 전성기인줄 아나?”

“어쩔 수 없죠. 그 분은 평생 그런 삶을 살아오셨으니.”

“말년만큼은 편하게 보내는 정도의 융통성도 없단 말인가?”

“당신께서 말하길, 전사는 전장에서 죽는 게 가장 좋다고 하시더군요.”

“그 늙은이답군.”

“그래도 빅터 씨가 무사히 돌아와 주셔서 다행이에요. 그분은 자기 몸 상태보다··· 얼마 남지 않은 제자인 저나 당신을 더 신경 쓰고 계시니까요.”

“괜한 걱정을···.”

“그거 아세요? 두 분이 굉장히 닮은 꼴이라는 걸? 대스승 베누다께서도 빅터 씨랑 완전히 같은 말씀을 하셨거든요.”

그러면서 앙리는 빅터의 손을 잡았다.

거의 크기나 굵기가 두 배 이상이나 차이 났지만, 여인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어차피 제 말이 통하지 않을 건 알지만··· 빅터 씨도 너무 자신을 몰아붙이지 말아주세요.”

“노력해보지.”

“부탁할게요.”

보통 반갑다고 이렇게까지 남녀 사이에 달라붙던가?

빅터와 아주 가깝게 얼굴을 마주한 채, 앙리는 한껏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거리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아.

상대에 대한 호의가 있는 그대로 전해지고 있었다.

“오호, 이것 봐라?”

로이드는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그 미묘한 기운을 바로 알아차렸다.

“어쭈, 빅터 이 자식··· 너도 제법하는데?”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로이드.”

“이런 아리따운 누님이랑 격식 없는 사이라니 말이야.”

“뭘 생각하는 진 모르지만 네 짐작은 틀렸다.”

“어허? 그게 정말인가요, 앙리 누님?”

“저,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도통···.”

“이 덩치랑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니신지?”

“입 다물어라, 로이드. 내 선배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군.”

“하하하! 이 기회가 아니면 널 언제 놀리냐? 그래서 진실은 어느 쪽인데?”

빅터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대답할 가치조차 없어, 쓸데없이 로이드의 농간에 휘말릴 바에 우선 볼일부터 해결하는 편이 현명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앙리, 나는 이쯤에서 실례하도록 하지. 갑자기 돌아온 주제에 일방적인 부탁만 해서 미안하지만, 로이드와 나머지 아이들은 부탁한다.”

“네, 손님들 안내는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마침 대스승 베누다께서 별체에서 기다리고 계시니, 빅터 씨께선 모쪼록···.”

“모쪼록?”

“···재회를 고대하던 사제지간끼리 치고 박는 불상사는 없기만을 바랍니다.”

“그건 그 영감탱이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빅터 씨도 참···.”

“농담이다. 다 죽어가는 노인네에게 시비를 걸 정도로 나는 분별없는 놈이 아니니까.”

하지만 빅터는 각오해야만 했다.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것을···.

그도 그럴게, 대스승 베누다는 아무리 늙고 약해졌다고 할지라도··· 그에게 있어서 여전히 맹호나 다름없는 무시무시한 존재였기에.

돌다리를 건너, 흙길을 지나 빅터는 곧 별체의 입구에 발을 들였다.

이곳은 오직 한 사람만이 생활하는 장소···.

그것은 대스승이라는 직위에 어울리지 않게 불과 스무 평 남짓의 자그마한 집이었다.

그래도 건축은 허투루가 아닌지, 세밀한 장식이 들어간 고풍스런 기와가 지붕을 장식한다.

주변을 장식하는 대나무들이 한껏 경관을 돋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스륵.

빅터가 문을 열자, 손님의 출입을 기다리고 있던 이가 고개를 든다.

마르고 홀쭉한 그림자다.

그는 정리된 이부자리 위에서 정좌한 초로의 노인이었다.

“···왔느냐, 못난 놈.”

“죽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대스승 베누다.”

“몰골이 엉망이군. 또 주제 넘는 힘에다 손을 댔나? 그러니 꼬라지가 그 모양이지.”

“그건 대스승께서 하실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오냐! 웃으라고 한 말이다! 이건 내가 지껄여야 비로소 가치가 생기는 입담이지! 크하하하!”

호쾌한 폭소.

이 우렁찬 목소리는 분명 대스승 베누다의 것이었다.

그러나 작다.

빈약한 모습이야.

빅터의 눈앞에 비추는 노인은 과거의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

그것은 마치 해골에 수염이 달린 거죽을 입혀놓은 꼴.

자신보다 우람한 근육을 자랑하던 그 사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

극한으로 단련되어 있던 양팔과 다리는 뼈가 보일 정도로 비참하게 마르고, 터질 듯 부푼 가슴은 온데간데 없이 피골이 상접한 상태였다.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전혀 다른 사람마냥···.

대스승 베누다는 급격히 노화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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