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환의 장(4)
4.
싸움이 일상인 전사에게도 휴식은 필요한 법이다.
특히나 가혹한 전투에서 돌아온 두 사람에게 안락이란 중요한 것이었다.
강인한 사냥꾼의 체력으로도 견뎌내질 못한 피로감.
리리 리가 평소처럼 하루 종일 시끄럽게 떠들어댔지만, 그 와중에도 로이드는 마차 안에서 거의 기절해버렸다.
그가 눈을 뜬 것은 해가 저물고 깊은 새벽이 되었을 무렵···.
“허억!”
깊이 눌러쓰고 있던 모자가 벗겨질 정도로 로이드가 격한 기세로 몸을 일으켰다.
그는 거의 십 초 가까이 마차의 천장을 올려다봐야만 했다.
몽롱한 정신이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있을 때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로이드 사부. 몸은 괜찮으세요?”
걱정스런 소년의 목소리.
악몽에서 이탈한 로이드를 맨 먼저 반긴 건 아랑이었다.
“어, 뭐야? 내가 얼마나 정신을 잃었던 거지?”
“대충 열여덟 시간 정도···?”
“이크, 잠깐 눈만 붙인다는 게 이렇게···.”
“음, 출발하자마자 쭉 주무셨던 것 같아요.”
“잠깐 깨워주지 그랬어?”
소년은 답한다.
많이 피곤해보여서 깨우지 않았을 뿐이라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아랑은 배려심이 깊었다.
눈치 없는 리리 리는 몰라도, 소년만은 두 사람의 노고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기에···.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
그러나 엉망진창인 복장의 로이드이나, 빅터의 변모한 미루어 짐작하건데···.
두 사람은 그 잠깐 사이, 소년으로선 상상도 못할 고난을 헤쳐 나왔을 것이 틀림없었다.
“쳇, 오늘은 애들한테 구해지고 돌봄 받고··· 참 나도 가지가지 하는구만. 어른이 돼서 면목이 없어. 교대를 못해줘서 미안하구나. 너도 하루 종일 고삐만 잡고 있느라 고생했을 텐데 말이야.”
“아뇨, 그건···.”
아랑은 흘깃 마부석을 바라보았다.
“반나절 이후부턴 저도 쉬기만 한 걸요.”
로이드는 그제야 누가 마차를 몰고 있는 지 알아차렸다.
“이제 일어났나, 로이드?”
마부에 어울리지 않는 큼직한 덩치가 뒤를 돌아본다.
새카만 동방 복식의 면 옷, 산발에 가까운 머리칼 아래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야, 빅터. 너 지금 뭐하는 거냐?”
“보다시피 마차를 다루고 있지.”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왜 안 쉬고 있느냐고.”
“충분히 쉬었다.”
3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이라며 빅터는 덧붙였다.
서로 시간을 대하는 감각이 어긋난 것을 감안해도 기가 막혀, 로이드는 한숨부터 쉬었다.
“야, 아랑. 저 자식 언제부터 저러고 있었냐?”
“그··· 빅터 사부께선 계속 깨어계셨어요. 쭉 이요.”
“아앙?”
“관군이라던 형 누나가 대신 맡겠다고 해도 도통 말을 안 들으시더라고요.”
한 번도 잠을 청하지 않았다?
아랑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로 초인이야.
하나, 로이드는 그 상대가 빅터라면 그러고도 남을 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허, 너도 참 답답한 자식이야.”
“로이드. 네가 하루 종일 입을 닫고 있으니 조용해서 좋았는데, 눈 뜨자마자 핀잔인가?”
“알기는 해, 임마? 이 중에서 네가 제일 상태가 나쁘다고. 누구보다 잠을 청해야 하는 게 너란 말이야. 엉?”
“나는 괜찮다.”
“아, 그러셔? 그게 괜찮다고 말하는 놈의 몰골이냐?”
얼굴은 여전히 험상궂지만, 동시에 조금 초췌하게 비춰지기도 한다.
달빛 아래서 드러나는 피로의 기색만은 결코 숨길 수 없었다.
“척 봐도 가루를 너무 쓴 나머지 아슬아슬한 상태잖냐? 아무리 무적의 빅터님이라도 정도껏 해야 할 거 아니야?”
“내 몸 상태는 내가 잘 안다.”
“까고 있네. 내 눈이 장식인줄 아나?”
그 말마따나, 빅터는 이븐 가지의 분말을 지나치게 소모했다.
몸이나 마음이 멀쩡할 리도 만무해.
그럼에도 애써 고집을 피우다니···.
“무리하면 멋있어 보일 거라 생각했냐?”
“아닌가?”
능청스러운 빅터의 대꾸에 로이드는 말문을 잃었다.
그래도 농담을 할 정도로 심적 여유는 있다는 것인가?
“···쳇, 사실 좀 폼 나긴 하네. 큰 형님이라고 불러주고 싶어줄 정도야.”
“그럼 어디 한 번 불러보겠나? 나도 아우라고 해주지.”
“물론 내가 죽기 전까진 어림도 없어. 잘도 애들 앞에서 모범을 보여주셨구만. 그게 스승님의 자세라는 거냐? 내 질투심을 어지간히도 자극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모자를 다시 눌러쓰며 로이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달리는 마차의 문을 열어젖히고 지붕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비켜, 짜샤. 넌 잔말 말고 꼬마들이랑 같이 꿈나라에나 가라고.”
느닷없는 곡예에 마차를 호위하던 요마 멸살단의 소년소녀들이 깜짝 놀랐다.
“선생님, 무슨 일입니까?”
“꼬마들은 신경 꺼.”
“네?”
“너희도 참 징하다. 좀 쉬어가면서 가라고.”
그러더니 로이드는 곧장 빅터를 밀어내고 마부석 옆 자리에 앉았다.
“비켜, 짜샤. 이 다음은 이 로이드님 차례니까.”
“뭘 이런 것까지 경쟁하려고 그러나?”
“야야, 나도 슬슬 바깥 공기 좀 마시고 싶거든? 아직 갈 길이 먼데 계속 저 나무 궤짝 속에 있을 순 없잖아?”
“그런가? 그럼 뒤는 부탁하지.”
“오냐.”
하지만 마차 안으로 들어설 기미는 없다.
빅터는 팔짱을 낀 채 조금 더 등을 뒤로 기울일 뿐.
살짝 고개 숙여 눈을 감지만, 표정은 여전히 근엄하기만 했다.
“그 상태로 잠이 오냐?”
“참견마라.”
“예이, 예이.”
반면, 사람 좋게 실실 웃으면서도, 로이드는 속으로 염려하고 있었다.
빅터가 지쳐있다는 게 지금 막 증명되었기 때문에.
‘빌어먹을 자식, 특기인 독심술조차 발동되지 시키지 못할 정도였던 거냐?’
로이드는 알았다.
게슈펜스트, 망령화가 진행되어가는 사냥꾼의 증상에 대해서.
보통, 인간은 잠을 통해서 마음의 힘을 회복한다.
뇌가 기억의 불순물을 걸러내는 과정이 필수불가견한 것이다.
그러나 너무 지나치게 이븐 가지의 분말을 소모한 이들은 대게 수면을 취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잔존하는 그림자에 머릿속이 절여진 채 항상 깨어있어.
즉, 그들은 애써 잠을 안 자려는 게 아니다.
정신세계마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놓이는 탓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안쓰럽다.
그렇기에 처절하다.
어쩌면 앞으로 빅터가 인간성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는지도 몰라.
로이드는 그를 막지 못한 것에 한이 맺혀, 당장이라도 스스로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리고픈 충동을 느꼈다.
‘제길, 지원해주러 온 내가··· 빅터의 변질을 막기 위해 찾아온 이 몸이 도리어 도움을 받다니. 이딴 부조리가 어디 있냐고···.’
하나, 이미 벌어진 일.
뒤늦게 따져봐야 별 수 없다.
당장 로이드가 할 수 있는 일은, 빅터가 이 이상 무리하지 않도록 조치하는 것뿐이었으니···.
“그런데 로이드.”
“엉? 왜?”
“길은 알고 고삐를 잡은 건가?”
“그야 당연히··· 아.”
“그럴 줄 알았지.”
“뭐, 대충 나가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바보같은 소리 하지마라. 초행길을 네가 무슨 수로?”
로이드의 염려는 기우였던가?
빅터가 굳이 고집 부려가며 마차를 몰았던 까닭은 여기에 있었던 것인가?
“이 중에서 대스승 베누다의 거처를 아는 건 나뿐이다.”
그의 말이 맞았다,
아랑의 경우, 나아갈 방향을 모르면 어쩔 수 없어.
리리 리는 말을 흥분시키지 않고 모는 방법을 모른다.
시안과 그 무리들은 그저 빅터 일행의 뒤만 쫓기만 할 뿐이니···.
“너에게 기대한 내가 어리석었다. 아무래도 내가 마음 놓고 잠들기엔 아직 상황이 여의치 않는 것 같군.”
“쳇! 그래, 너만 잘났다 이거지?”
“왜 화를 내나?”
“괜히 뻘쭘해서 그런다, 자식아!”
솔직하지 못하게도.
로이드는 자신이 안심했다는 걸 빅터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 내 착각이라고. 아직 녀석은 자아를 잃지 않았어. 여전히 사람의 마음을 유지 중이야.’
인간 사이에선,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를 나눠야지만 겨우 알 수 있는 어떤 분위기가 존재한다.
어지간한 연기의 달인이 아니라면 본심을 숨기는 것은 매우 힘들어.
그런 의미에서 지금 빅터는 있는 그대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하지만, 최소한 망령 특유의 무기질한 표정이나 공허한 눈빛은 아니야.
다행히도 그는 아슬아슬하게나마 경계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마··· 다음은 없겠지.’
기적은 몇 번이고 일어나지 않는다.
세상이 그렇게 인간에게 형편 좋게 돌아갈 리도 만무하다.
‘이 이상 녀석을 강적과 대면시켜선 안 돼. 하루 빨리 본토로 돌려보내야···.’
빅터는 분명 강해졌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은 대가또한 치러야만 했다.
로이드는 불안함을 억누르려 부단히 애를 썼다.
어쩌면, 빅터의 폭발적인 성장은 꺼지기 일보 직전의 촛불이 가장 밝게 빛나는 찰나의 순간이 아닌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음 임무에서 빅터를 제외한다. 이제 더는 지연시킬 수 없어.’
여차하면 때려 눕혀서라고 막으리라.
로이드는 빅터에게 척을 지더라도 그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이는 대스승 크레이그가 당부한 ‘미래의 싸움’에 대비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레이 엔쯔이의 개인적 부탁이나, 추후에 있을 도리스의 매서운 징벌 따윈 애초에 신경 밖의 일이었다.
그저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가혹하기만 한 이 사냥꾼의 삶 속에서, 그나마 마음을 놓고 대할 수 있는 친구의 상태가 악화되지 않기만을 간절히···.
5.
그로부터 이틀.
길고 길었던 회환回還이 결국 목적지에 도달했다.
요마 멸살대의 호위를 대동해, 어린 제자들과 두 명의 사냥꾼이 다다른 장소는···.
탁한 초록빛의 처음 보는 식물들의 군집이었다.
“···오, 이건 또 놀라운 걸? 빅터, 저건 뭐라고 부르는 거냐?”
로이드가 마부석에서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는 길게 뻗어 자란 대나무 숲을 가리키고 있었다.
승객석에서 빅터는 팔짱을 낀 채 입을 열었다.
“죽림竹林을 처음 보나?”
“당연하지. 줄기로만 이뤄진 나무 같은 걸 이 동방 대륙 말고 어디서 또 접하겠냐고. 어쭈, 이거 막대기처럼 생긴 주제에 잎까지 나 있네?”
서양인의 눈으로 보기에, 이건 호수 안에서 봤던 포자의 숲만큼이나 신기하다.
어딜 가나 새로운 경관을 목도한 로이드였지만···.
이만큼 특이한 식물이 현실 세계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확실히 동방은 기후가 달라서 식생이 우리가 있던 곳과는 많이 다르더군.”
“저기에는 어떤 열매가 맺히려나?”
“음, 아쉽게도 대나무 열매는 아직 나도 본 적이 없다. 아주 드물게 꽃이 피고 난 다음 맺힌다곤 하는데···.”
“하는데?”
“그건 이 나무의 마지막 생명이 다 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더군.”
“죽기 전에 최후의 열매를?”
“하지만 그것도 보기 힘들지. 마지막으로 보인 게 약 60년 전이라니 말 다 한 거다.”
“켁. 아무리 내가 느긋해도 그렇게까지 오래는 못 기다리지.”
“생명력이 강한 나무다. 환경만 잘 조성되면 100년도 더 살아간다고 하지. 그러니 동방에서도 일종의 전설처럼 치부하고 있다.”
“꽃 피는 거 한 번 보는 게 어지간한 인간의 목숨보다 더 길다라···. 뭔가 멋지군.”
종종 동양의 신비나 전통을 설명해주던 빅터의 영향을 받은 탓일까?
로이드는 자기도 모르게 내면의 탐구심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풍류.
먼 훗날, 더 이상 마녀와 싸울 일이 없게 되면···.
단지 순수한 지적 호기심만을 위해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아.
시시한 꿈이지만, 성을 가진 부자가 되거나 천지에 퍼질 정도의 명예를 얻는 것보다는 간단한 일.
사실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실행 가능한 목표였다.
적을 찢어발기는 은사나, 파공음을 내는 가죽 채찍이 아니라.
현을 감아 다루는 악기만을 하나 챙겨,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방랑한다.
익살꾼이자 광대를 자청하는 이에게 있어서 그 이상의 꿈은 없으이라.
“그것도 나쁘진 않지.”
“엉?”
“너에겐 방랑 악사도 어울린다. 음유시인이라, 좋지 않은가?”
“···너, 멋대로 사람이 감상에 젖은 틈을 타서 머릿속을 읽지 말라고.”
“미안하군. 그 정도는 이미 표정에 다 드러나서 말이다.”
“그렇다면 잘못 짚었네. 사실 나는 식도락 여행 쪽이 더 끌리거든.”
“호?”
“이국에만 나는 과일이며, 지역마다 온갖 진귀한 식재료들이 많잖아? 그게 진짜 여흥인거지.”
“식욕에 충실하군.”
“핫, 먹는 재미라도 없으면 마녀 잡이를 어떻게 하냐?”
하지만 이 일행 중에서 가장 먹성이 왕성한 이는 따로 있었으니.
“뭐에요? 사부, 우리 뭐 먹어요? 벌써 점심··· 읍!”
졸고 있던 리리 리가 번쩍하고 깨어나자, 빅터는 소녀의 모자에 커다란 손을 올려 일어나지 못하게 막았다.
“아직 멀었다. 더 자고 있거라.”
“그치만 배고픈데!”
“···그러게 어젯밤에 좀 아껴 먹으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
“그래도 로이드 사부님이랑 공부할 땐 입이 심심한 걸요!”
“리리 누나, 동화를 듣는 건 공부가 아니···.”
“아랑! 너는 조용히 하고 있으렴!”
“···.”
자신에게 불리한 정보는 원천 차단한다.
이미 빅터가 모든 전말을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숙녀의 비위를 맞춰주느라 고생이 많구나, 아랑 신사.”
“로이드 사부, 놀리지 말아주세요.”
“하하, 지금은 네가 이해해줘라. 저 꼬마 아가씨도 언젠간 네 노고를 알아주겠지.”
“···글쎄요.”
이쯤에서 아랑은 리리 리를 지적하는 게 무의미함을 깨달았다.
어제도 그래.
소녀는 마차로 이동하는 내내, 마을에서 받아온 곡물의 씨앗을 연신 입에서 놓지 않았다.
로이드에게 옛날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물거리는 못된 버릇이 생겨버렸어.
주머니 속이 완전히 빌 때까지 무모한 군것질은 계속되었다.
빅터가 혼을 냈지만, 로이드 쪽이 괜찮다며 어리광을 받아준 탓에 흐지부지.
그때 편을 들어주어서 일까?
소녀가 로이드를 부르는 호칭은 어느새 사부를 넘어서 사부님으로까지 격상되었다.
마차에서 울린 소리가 꽤나 떠들썩했는지, 창문을 통해 말이 접근해온다.
시안이 슬쩍 얼굴을 내밀었다.
소란을 줄이라고 한 마디 할 셈인가?
아니, 의외로 지금 소녀의 표정에 고압적인 기색은 없었다.
“미안하군. 우리가 너무 시끄럽게 했나?”
“아닙니다. 빅터 선생님. 로이드 선생님. 그보다··· 괜찮으시다면 저희의 비상식량이라도 드릴까요? 변변찮게 말린 새고기지만···.”
“괜찮다.”
“네?”
“너희 음식은 너희 것이야. 우린 우리대로 알아서 하겠다.”
“실례했습니다. 괜한 참견이었을까요? 하지만 저는 2일째 두 분께서 뭘 드시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빅터는 말없이 피식 웃었다.
이식을 받은 사냥꾼의 신진대사는 보통 사람과 완전히 달라.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시안이 보기에 비범한 경지처럼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슬만 먹는 신선같이 보진 마라. 우리도 필요하면 식사는 충분히 하니까. 단지, 지금은 배가 고프지 않을 뿐이다.”
“그러면 그 쪽의 아이들에게라도···.”
“우와앙! 관군 언니야, 고마워! 잘 먹을게!”
“이놈, 리리 리!”
뒷목을 낚아챈 아기 고양이처럼 리리 리를 빅터의 손아귀에 제압당했다.
“조금만 더 참지 못할까! 집결지가 코앞인데 경거망동 하지마라!”
“피이···.”
그 말대로 도착은 머지않았다.
마침 대나무 숲 너머로 시냇물이 보여.
그 너머와 이어지는 돌다리도 눈에 들어왔다.
대스승 베누다의 거처.
죽림의 은신처였다.
“어? 빅터 사부, 저기보세요!”
“안 속는다, 리리 리.”
“아이, 그게 아니라요! 저기 있잖아요! 다리 위쪽에 저기요!”
“위험하니까 고개 내밀지 마라.”
발버둥 치면서도 삿대질을 멈추지 않는 리리 리.
대체 뭘 보고 저러는 걸까?
아랑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앗, 색목인···.”
멀찍이서도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신비한 빛깔의 머리색이 보여.
하얀 피부색은 분명 동양인의 것이 아니었다.
그 인물은 여자.
빅터나 로이드처럼 사냥꾼 복장을 한 여인이었다.
“야야, 빅터. 뜻밖의 미인이 우리 앞에 나타났는 걸?”
그 순간, 시기좋게 리리 리가 상대의 이름을 외쳤다.
“제 말이 맞죠?! 앙리 언니가 마중와 있다니까요!”
“알고 있다.”
“거짓말!?”
“그녀에게 앞서 지령을 보낸 게 나였으니까.”
이윽고 마차의 바퀴가 멈춘다.
맨 먼저 내린 것은 빅터였다.
이어서 리리 리와 아랑이 땅을 밟았다.
소년이 고개를 들어 로이드가 고삐를 정돈하려는 걸 도우려는 찰나, 언제 접근했는지 여자 사냥꾼이 바로 앞까지 와있었다.
“오랜만이에요, 빅터.”
“앙리, 반년 만인가?”
순식간이었다.
이들의 재회는 갑작스럽게 이뤄졌어.
소년이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여인이 거한의 몸에 안긴 뒤였다.
휘유, 로이드가 짓궂은 휘파람을 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