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환의 장(2)
2.
위도 아래도 짐작할 수 없는 어둠 속···.
암흑 천지의 기이한 세계에 근심어린 여인의 목소리가 속삭인다.
“무단으로 아란듀라를 불러들이더니! 이번엔 약속된 신호도 주지 않고 이쪽 영지로 들어설 셈인가요? 귀환 한다면 최소한 약속한 시간을 엄수해서···.”
쿠우우웅!
이어서 삐걱임이 들려온다.
수많은 태엽의 톱니바퀴가 동시에 움직이는 것만 같은 소음···.
그것은 분명 거대한 기계장치가 만들어내는 울림이었다.
한참이나 요란한 소란이 지나가고 나서야, 암막에 숨은 여인은 겨우 가슴을 쓸어내렸다.
“···겨우 진정된 모양이군요. 예정에도 없던 전송이라 모든 게 엉망이에요. 관리자인 제가 없었더라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졌을 지도 모르는데···.”
노골적인 불평.
하지만 그 음성에는 깊은 걱정에서 겨우 벗어난 자만이 보일 수 있는 안도감이 스며있다.
“역시 당신인가요? 제멋대로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군요, 홍련···. 그쪽 때문에 제가 매번 얼마나 곤란해지는 지 알기나 아나요?”
“···.”
“무계획하고 무책임해. 이미 백 년이나 넘게 산몸이면서, 어쩜 이렇게 나 철딱서니가 없을 수 있죠?”
“끄···.”
“네에? 뭐라고요? 제대로 입을 놀리세요. 설마 이젠 말하는 법까지 잊어버렸나요? 아, 그래요. 당신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죠. 천박하고 멍청한 빨간 머리니까.”
상대가 반론을 하던지 말던지 전혀 개의치 않는 악담.
이 비난에는 명백한 혐오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대답을 하지 않은 게 아니야.
사실은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아직 발성기관이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기에.
부들···.
순간, 그늘이 드리워진 암막 사이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그 형상은 마치 어둠이 실체를 가지고 똬리를 뜬 것만 같아.
마녀의 파편은 끈질긴 생명을 온전한 채, 기이하게 뒤틀린 몸뚱이를 증식해나가고 있었다.
“킥, 주제에 수치는 아는가 보죠? 흉측하게 변한 젖가슴을 애써 숨기려 하다니.”
어림없어요, 라고 여인의 목소리가 조소를 흘렸다.
짝!
요란한 박수와 함께 주변이 밝아오기 시작한다.
그러자 비로소 허공에 광원이 나타난다.
은은하면서도 안정적인 조명.
촛불처럼 일렁이지 않아, 심지어 횃불의 맹렬한 뒤틀림조차 없다.
자연계에선 존재할 수 없는 전혀 다른 불빛···.
그래서인지 살짝 빛의 파장이 흐리다.
가까스로 눈앞의 물체를 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나, 당장은 이 정도로 충분해.
그래도 예의 없는 손님의 모습을 드러내기엔 충분했다.
조명 아래에는 하얀 살결과 흉측한 내장이 뒤섞인 고깃덩이가 나뒹군다.
어쩐지 사람의 머리칼 같은 것이 달려있어.
그 틈새로 짓눌린 눈깔의 형태도 엿보였다.
“닥···쳐라, 빙의憑依! 뚫린 입이라고 언제까지··· 망할 샌님 주제에, 감히 이 몸을!”
가까스로 토해낸 힘겨운 신음이 흘러나온다.
젖 먹던 힘을 다해 겨우 성대를 재생시킨 것인가?
의사소통이 가능해지자, 이 공간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여인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어쩐지 기가 막혀하는 눈치였다.
이 지경이 되고서도 상대를 위협하다니?
“처참한 몰골이군요. 이건··· 잔여 목숨이 바닥났나보죠? 그런데 이상하네요. 당신을 누가 이렇게까지?”
“시끄···러워, 그보다 얼른··· 소생의 술을!”
“새삼, 피차 공짜가 아니란 건 잘 아시죠?”
“어서!”
“네, 네. 부탁하는 태도가 영 글러먹었지만, 당신은 처음부터 그랬으니 제가 이해해드리죠. 어차피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니까요.”
저벅.
영역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여성이 한 걸음 걸어 나오자, 그녀의 금색 머릿결이 빛을 발했다.
두 눈을 감은 온화한 생김새···.
살짝 휘어진 입술이 그려내는 미소는 부드러운 곡선이었지만, 그 속에 남긴 것은 독사의 송곳니처럼 표독스런 것이었다.
그 얼굴과 마주하자마자,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린 홍련의 잔해가 경련한다.
이쪽도 상대에게 좋은 감정이 없긴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하나, 금발 여인은 나름대로 냉철해.
그녀는 개인감정과는 별개로 자신의 의무를 다 할 생각이었다.
“어쩔 수 없죠. 일단은 하는 데까지 해보기로 할까요?”
“실수하면··· 죽여 버린···다.”
“당신이 괜히 발버둥만 치지 않는다면 다 잘 풀릴 거예요. ···어디보자, 혈관이 어디 숨어 있을까?”
사람의 형태를 잃고 지렁이처럼 변해버린 홍련의 몸을 왼손으로 더듬으며, 금발 여인은 겨우 박동이 일어나는 붉은 실선을 찾아냈다.
다음으로 그녀가 끝이 번뜩이는 뭔가를 집어 든다.
여인의 가녀린 손아귀에 쥐여진 것은 내부가 투명하게 훤히 들여다보이는 주사기였다.
“살짝 따끔할 지도 몰라요. 아니···.”
푸우우욱!
많이 아파도 어쩔 수 없죠.
그렇게 말하며 금발 여인은 주사기의 바늘은 있는 힘껏 홍련의 살덩이에 박아 넣었다.
“···키, 키악! 끼야아아악?!”
“좋아요. 통각은 정상인 것 같군요. 추가로 신경까지 손볼 필요는 없겠네요.”
꺼림칙한 대량의 초록 형광빛 물질이 실린더에 밀려 내부로 들어갔다.
그러자 곧 이변이 생겼다.
마녀의 초재생.
이치나 상식을 아득히 넘어선 무시무시한 회복속도···.
뼈대가 만들어진다.
혈관이 나무뿌리처럼 허공에 자리잡는다.
편충과도 같은 기이한 형태가 탈피한다.
점차 늘어나고, 사지가 자라나.
이윽고 손가락을 비롯한 섬세한 말단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기까지 긴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어느새 그 자리에는 찐득한 막에 둘러싸인 여체남이 남았다.
붉은 머리의 주근깨투성이 얼굴···.
홍련이었다.
“헉, 허억! 하아··· 헉!”
“어떤가요? 목숨 세 개 분의 특제 영양액의 효과는?”
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회복된 자신의 양 어깨를 부여잡았다.
급속도로 성장한 몸에서 끝없이 땀이 흘러나와.
뜨거워진 육체를 냉각시키기 위한 과정에 들어간 것이었다.
“다시 묻지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악명 높은 당신이 이 꼴이 될 정도라니···.”
“···넌 입 다물어! 이 돌팔이 년아! 바깥 세계의 일 따위 알거 없어! 너는 네 역할에만 충실하란 말이야! 진즉 치료했으면 됐을 걸, 우물쭈물 꾸물거리긴···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잖아!”
말문을 트자마자 악담.
그 여전한 모습에 시술을 마친 은인은 키득하고 웃었다.
“생명의 은인에게 못하는 소리가 없군요? 감사의 말은 어디 갔나요?”
“흥, 일단 예의상 고맙다고는 해두지. 100번 죽일 거, 99번 죽이는 걸로 차감시켜줄게.”
“입을 터는 걸론 부족해요. 왜 이래요? 우리 사이에? 계산만큼은 확실하게 해야죠.”
칫, 하고 혀를 차더니.
홍련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쳤다.
손금 사이로 균열이 지고, 그 틈에 맺힌 핏방울이 순식간에 굳어간다.
그야말로 순수한 의미에서의 혈석血石.
맘몬의 적석이 만들어지는 과정이었다.
“나머진 알아서 줍던가.”
돋아난 붉은 돌 몇 개를 집어 아래로 내팽개친다.
보이지 않는 투명한 바닥을 뒤지면서도, 금발 여인은 딱히 불만의 뜻을 보이지 않았다.
홍련이 건넨 이 조각들에겐 그만한 가치가 있었기에···.
“···뭐, 나쁘진 않네요. 농축된 마기는 없지만, 새로 만들어진 몸이니 만큼 순도가 높은 물건이니까.”
“됐지? 그럼 나는 이만···.”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고 싶지 않아.
홍련은 조금이라도 빨리 모습을 감추고 싶었다.
그런데···.
“잠깐만요. 어디로 갈 셈이죠?”
“그야 뻔하지. 내게 할당된 방으로···.”
“사정이 변했어요. 그건 저의 허락이 있어야 출입이 가능하답니다.”
“너··· 언제부터 영지의 주인처럼 거들먹거릴 수 있게 된 거지? 육망성의 일원도 아닌 주제에!”
“물론입니다. 저는 육망성이 되기엔 무력한 마녀죠. 하지만 이 공간의 관리는 제 스승이자 은사이신 자색의 마녀께서 일임하신 임무입니다. 그 분께서 자리를 비운 순간만큼은 제가 대리인 거나 다름없죠. 덩달아 당신들의 건강과 수명에 대해서도···.”
“흥, 내 몸속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다음으로 해. 난 지금 기분이 개 같단 말이야. 건수만 생기면 모조리 다 불태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야 당신은 언제나 그런 충동에 사로잡혀 있잖아요?”
“···.”
“후훗, 죄송해요. 사실 신체 검사정도는 나중이라도 상관없죠. 제가 검증되지 않은 시약을 당신에게 투여했을까봐요? ···그보다 이제 슬슬 털어놔 봐요. 평소보다 인상이 더 더러운 걸, 무슨 문제를 벌인 건가요? 왜 당신 혼자뿐이죠? 뒤쫓아 간 청람의 행방은?”
“알게 뭐야.”
“혹시, 만에 하나 여쭙 건데··· 죽인 건 아니죠? 소중한 육망성의 일원을? 그 분의 지시를 어기고?”
“그렇다면 어쩔 건데?”
그때였다.
빙의의 마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것은 화가 났다기보다, 공포에 사로잡힌 얼굴···.
계획이 틀어지는 것이 자신의 목숨에 직접적 위협이 된다고 여긴 것인가?
다행히도 그 동요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가 염려하는 일은 벌어진 적이 없었기에.
“···저는 여기 있어요.”
그러자 조명 아래에 또 한 명이 나타났다.
하늘빛의 머리칼과 단정한 얼굴의 여자.
청람의 마녀였다.
“흥, 굼뜨긴. 뭘하다 이제 나타난 거지?”
“몸단장은 숙녀의 당연한 의무니까요.”
그녀는 지금껏 모습을 감춘 채 몸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추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자기 딴에는 부단히 노력한 것이다.
“전부터 느낀 건데, 귀족 집안 딸년들의 이상한 사고방식 중에서 너는 특히나 별종이야.”
“언니에겐 기대도 안했어요. 하기야 천한 혈통이 뭘 알겠냐만은···.”
“이게! 잘 쳐 먹어서 살집만 오른 그 몸뚱이가 그렇게 잘난 거냐? 너는 영양이 다 가슴으로 간 모양이지?”
홍련이 알몸의 하얀 피부를 가리키자, 청람은 양팔로 흉부를 가렸다.
마녀가 된 이후로도, 그녀에겐 보편적인 수치가 남아있단 말인가?
“···실례지만, 걸칠 것을 좀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홍련과는 다르게 예절을 갖춘 목례.
같은 마녀를 대하는데도 이렇게까지 차이가 나는가?
그 다소곳함에 반했는지, 빙의의 마녀는 바로 손가락을 튕겨주었다.
그러자 청람의 몸을 잿빛 망토가 가린다.
“···겸사겸사 홍련, 당신에게도 드리죠.”
“겉치레 따윈 아무래도 좋은데.”
“제가 보고 있기 괴로워서 그래요.”
“그거 무슨 의미야?”
“갈비뼈가 다 드러난 그 빈약한 몸··· 애처롭기까지 하네요.”
“이년이고 저년이고···. 날 씹는 게 그렇게 재미있냐?”
성을 내거나 말거나, 홍련과 청람은 새옷으로 갈아입혀졌다.
이제 남은 것은 빙의의 마녀가 품은 의문 뿐···.
“이제 설명해주실까요? 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싸운 건가요?
소중한 마기를 소모해가면서, 어린애들처럼 치고 박고?
아이를 대하듯 묻는 그 태도에, 청람은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제가 홍련 언니 따위에게 당할 리 없어요.”
“아, 청람! 그러고 보니 그쪽은 상태가 괜찮아 보이네요? 제가 따로 조치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당연하답니다. 어리석은 누구랑은 다르게, 저는 목숨이 많이 남아있거든요.”
“역시나, 과연! 제가 추천해서 영입된 당신은 근원부터가 다르다니까요. 멍청한 누구와는 비교도 안 되게 고귀해요.”
“···너희, 그거 나 들으라고 대놓고 말하는 거야?”
“그나마 아직 눈치는 있어서 다행이네요, 홍련 언니.”
“아직 안 갔었나요? 존재감이 없어서 몰랐네요. 당신의 전용 공간은 이미 열어 두었으니, 이제 그만 꺼지는 게 어때요?”
“이것들이···.”
“그렇다면 승자는 청람 쪽이겠군요. 서열이 역전됐나요? 이 기쁜 소식을 모든 마녀들에게···.”
“그게 아니라고!”
주먹을 쥐며 다시 광원 속으로 들어오는 홍련이었지만, 이미 빙의의 마녀는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혼잣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래도요, 청람. 이번엔 장난이 너무 심했어요. 어느 정도 하극상이 용납되긴 하지만··· 약간의 실력 겨루기라면 몰라도 서로 죽고 죽이려 하다니요? 아무리 그래도 공통된 목적을 위해 모인 동지인데, 같은 편끼리 너무 한 것 아닌가요? 저렇게 보여도 홍련은 우리의 원대한 계획을 이루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존재입니다. 자칫하면 체벌을 받을 지도 몰라요. 그 분은 누구보다 우리들의 화합을 중시하니까···.”
청람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조리있게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건 오해입니다, 자색의 대리자··· 빙의의 마녀여. 제가 아무리 홍련 언니와 사이가 나쁘다 해도, 최소한 사리분별 없이 날뛸 만큼 경솔하진 않아요.”
“네? 저는 틀림없이 당신이 참다못해서 폭발했을 거라고···.”
금발, 빙의의 마녀는 의외라는 듯 감고 있던 눈을 살짝 떴다.
“···유감이지만, 홍련 언니를 저렇게 만든 건 제가 아니에요. 심지어 우리 둘은 싸우기는커녕 협력했답니다. 공통의 적을 상대로요.”
“아?”
“그러고도 이 꼴인 거죠. 치욕스럽지만···.”
농담이 아니다.
청람은 진심으로 분해하고 있었다.
손톱을 세워서 망토 속의 생살을 후벼 팔 정도로, 그녀의 수치심은 엄청났다.
어여쁜 옷을 잃고 속살을 드러내는 것 이상으로, 자신의 철저한 패배를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하지만 알 수 없다.
믿기지가 않아.
빙의의 마녀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야만 했다.
어떻게?
뇌격을 자유자제로 사용하는 청람의 마법이 아니라면···.
같은 육망성급의 마녀가 상대하지 않는다면···.
최강의 칭호를 가진 홍련을 제압할 수 있는 자가 달리 이 세상에 존재한단 말인가?
청람이 들려준 이야기는 황당무계한 것이었다.
단 한 명의 사냥꾼.
고작해야 단련한 인간에게···.
“청람, 당신의 말은 즉···.”
“그렇습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우리가 졌어요. 이렇게 추하게 퇴각한 걸로 겨우 목숨을 건진 거죠.”
“홍련, 그게 정말인가요?
“치잇···.”
진지한 청람이 거짓말을 할 리도 없거니와.
자존심을 빼면 시체인 홍련의 마녀가 차마 변명을 꺼내지 못해.
두 사람의 태도가 보통 일이 아님을 반증하고 있었다.
빙의의 마녀는 이 사태가 심각하다는 걸 눈치 챘다.
“···대리에 불과한 제가 어디까지 개입할 자격이 있을 진 모르겠지만.”
잠시 후, 금발 여인이 무거운 한마디를 내뱉었다.
“비상소집을 하죠.”
육망성 마녀의회의 소집.
그것은 수 세기만의 집결을 의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