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습의 장(2)
2.
‘너희 요마멸살대의 힘을 빌리고 싶다.’
시안은 반신반의했다.
사냥꾼 빅터란 자의 비범한 변모에 압도되어 반쯤 휘둘린 감이 없지 않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갑작스러운 지시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정된 자리를 사수하라! 신호가 떨어질 때까지 대기다!”
시안은 부하들에게 명령하고서 자신도 덤불투성이의 수풀 사이에 몸을 숨겼다.
2인 1조.
여럿이서 언덕 위의 사당을 둘러싼 포진.
화약을 가득 채우고 포구 방향을 중심으로 향한다.
요마멸살대는 언제든 사격이 가능하도록 만전의 준비를 갖추었다.
‘정말일까? 서방의 사냥꾼들이 하는 말이···.’
빅터는 머지않아 마녀라 불리는 적이 온다고 했다.
계획 없인 모두가 힘을 합쳐도 당해낼 수 없는 재앙이라 지레 겁을 주면서···.
뜬금 그것이 이 마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태운다며 얼토당토 않는 이야길 늘어놓은 것이다.
“시안 대장, 언제까지 저 남자가 말하는 대로 순순히 따를 생각인가요?”
한 살 아래인 부관 소년이 묻자, 시안은 무거운 한숨을 흘렸다.
그녀 또한 영 탐탁지 않은 눈치였다.
요마멸살대의 지휘관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말조심해. 우리는 칙명을 따를 뿐이다. 괜한 불평 말고 경계에나 집중하도록.”
“하지만 이건 멍청한 짓인 걸요. 아무리 봐도 저 사냥꾼은 제정신이 아니에요. 아까부터 멍하니 하늘만 보고 있는데···.”
“···.”
“처음부터 이상했어요. 기껏해야 퇴마사 주제에··· 병법에 대해 알면 뭘 얼마만큼이나 알겠냐고요? 그런데도 우릴 무시하고, 따돌리기나 하고···.”
시안은 침묵으로 일관했지만, 사실은 그 의견에 대부분 공감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게, 빅터 일행에겐 영 미심쩍은 부분이 많아.
수상한 행동거지.
시안이 보기에 이해가 되지 않는 요구와 언변부터 시작해서···.
얼빠진 멀대 색목인까진 그렇다 치더라도, 자기네들보다 어린 아이를 둘 이나 대동하다니?
‘진융 전하께선 대체 저들에게서 무얼 배우라고···.’
겉으로만 화려한 술법따윈 압도적 화력 앞에선 무의미하다.
최신의 화포 수십 정으로 무장한 숙련된 사수들이 있는데, 어찌 도깨비나 귀신 따위를 겁낸단 말인가?
‘요괴란 본디 보이지 않기 때문에 두려운 존재. 그렇다면 우리들만 있으면 충분한 것을···.’
요사스럽게 여겨진 눈, 귀신을 볼 수 있는 재능을 처음으로 인정받은 순간부터 소녀의 인생은 변했다.
노예였던 시안이 소금상인에게서 벗어나 진융의 소유가 된 지 어연 4년째···.
그녀는 어서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루 빨리 자격을 갖추어 자신의 주군을 호위하는 생활.
수도의 정규군이 되어서 가치 있는 무인이 되는 것을···.
오직 은인만을 위해 갈고 닦은 무술을 한껏 발휘하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이 꼴이 뭐란 말인가? 허깨비 따윌 쫒는데 일생을 바치는 머저리들에게 배움을 청해야만 하는 신세라니···.’
한심한 지고.
내색하진 않았으나, 시안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이후에 벌어질 사건에 대해서···.
머지않아, 지금껏 자신이 봐온 그 어떤 것보다 놀라운 초현상이 벌어지리라는 걸.
“···아, 아니?!”
뿔뿔이 흩어진 요마멸사대 전원이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허공답보虛空踏步라고? 아니, 능공허도凌空虛道인가?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녀는 기가 막혔다.
아무런 장치도 없이 하늘을 나는 붉은 머리칼의 여인.
그리고 그 배후를 노려 날아오르는 커다란 까마귀가 도끼를 휘두르는 모습까지···.
무공武功이란, 오래된 전기 속 망상이라 치부했던 것.
어디까지나 철지난 우스갯소리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것이 지금 시안의 눈앞에서 그대로 펼쳐지고 있었다.
사냥꾼이 적에게 뛰어든다.
그리고 맹렬하게 벤다.
검은 그림자의 사슬을 얽어 마녀를 응징하는 모습까지 본 시점에서, 소년소녀들은 인간을 초월한 강함이 무엇인지 확실히 목도할 수 있었다.
빅터는 하늘에서 나타난 적을 시종일관 몰아붙였다.
죽어도, 죽여도 되살아나는 마녀의 환생은 끔찍해.
하지만 그마저도 신경 쓰지 않고 도끼를 내리치는 사냥꾼의 단호함도 무시무시한 건 마찬가지···.
겉모습만 그럴싸한 게 아니야.
빅터가 일격을 내지를 때마다 느껴지는 절도와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에는···.
익히 무예를 배운 경험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을 정도의 가공한 위력이 담겨져 있었다.
감탄과 경악.
요마멸살대 소년소녀들은 어느새 넋을 잃은 채 그의 싸움을 바라봤다.
은연중 품고 있던 의심을 거둬버릴 만큼···.
여태껏 사냥꾼들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시안조차, 빅터의 처절한 전투에 일종의 전율까지 느끼고 있었다.
쿠콰광!
기어이 마녀의 발악이 절정에 달했다.
기묘한 요술로 스스로의 머리를 터뜨려 분열한 적발의 여자.
사방으로 튀어나가는 알몸의 여체를 보고 모두가 경악하는 그 순간···.
“지금이다!”
앗!
우렁찬 외침에 시안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곤 깨닫는다.
빅터가 앞서 말했던 대로라는 걸.
마치 모든 일을 미리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이···.
마녀가 자신들이 숨어있는 방향으로 달아났다.
“절대로 놓치지 마라!”
재차 울려 퍼지는 빅터의 목소리.
시안은 마침 마녀가 자신의 사정거리에 들어온 것을 확인한다.
“조, 조준!”
사격 훈련의 성과가 빛을 발해, 총구를 들어 올리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초···.
머리를 겨냥한 조준까지는 채 3초도 걸리지 않았다.
“어, 어라?”
“발사!”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안과 부관은 동시에 방아쇠를 당겼다.
화포에 장전된 것은 산탄.
멧돼지나 큰 물소도 일격에 머리를 날려버릴 수 있는 대구경이었다.
투과아아앙!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마녀의 얼굴이 사라졌다.
머리를 잃은 몸이 뒤로 튕겨져 나가, 비참하게 나뒹굴었다.
이어서 사방에서 총성이 흘러나온다.
그것은 빅터가 미리 배치시킨 위치에서 어김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에잇!”
한편, 같은 순간 리리 리도 막 언덕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갑작스레 앞을 막아서는 자그마한 소녀의 등장에, 홍련의 분신은 적지 않게 놀랐다.
“꼬, 꼬마야. 잠시 비켜주련? 이 언니를 보내줘. 약속할게. 그럼 너만은 살려주···.”
“흥, 싫지롱! 너는 나쁜 마녀잖아!”
“뭐, 뭐야앗?!”
“빅터 사부가 말씀하셨어! 여긴 내게 맡긴다고! 아무도 여길 통과시키지 말라고!”
문답무용.
땅을 박차고 날아 오른 리리 리의 양손이 번쩍 빛났다.
링 블레이드의 표면이 태양에 반사되어 광체를 발한 것이었다.
소녀가 지면에 착지했을 때, 홍련의 목에서 거센 피의 물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다음! 똑같이 생긴 빨간 머리가 하나, 둘, 셋··· 으, 너무 많아! 그래도 절대로 안 보내줄 거네요!”
소녀가 신이 난 듯 보이는 것은 착각이었을까?
천진난만하게 벌어진 입가는 묘하게 잔인해.
리리 리는 오래도록 날뛰지 못해 억눌린 폭력성을 이런 식으로 풀고 있었다.
“···기가 막히네. 빅터 자식, 애한테 참 좋은 거 가르친다.”
자신의 위치를 지키던 로이드가 입술을 깨문다.
그는 칼부림을 펼치는 리리 리의 모습을 먼 발치에서 걱정스레 지켜보고 있었다.
하나, 이것은 한눈을 팔거나 긴장을 푼 행동이 아니었으니···.
“뭐, 나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닌가?”
로이드는 이미 자신의 몫을 해치웠다.
바닥에 토막 난 사지가 아무렇게나 퍼져있어.
마법을 쓸 수 없게 되어 무력화된 홍련의 분신은 그가 풀어둔 은사의 덫에 찢긴지 오래였다.
“있을 수 없어! 이만한 병력들이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어떻게 내가 도망칠 곳을 전부 파악하고 있는 거냐고?!”
“이크크, 어딜!”
“갸악!”
이것으로 다섯 명 째···.
빅터는 처음부터 가장 많은 분신이 몰려드는 장소에 로이드를 배치했었다.
“홍련··· 최강의 마녀가 이렇게 허무하게 최후를 맞이할 줄이야.”
로이드는 모처럼 감상적인 여운에 빠졌다.
그의 은사이자 사냥꾼의 길로 인도한 스승인 빌헬미나의 얼굴을 그리며···.
‘누님···. 대신 원수를 갚는 꼴이 돼서 우습게 되고 말았습니다. 가능하면 당신의 손으로 해치웠으면 좋았겠지만,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복수도 살아있는 놈에게나 가능한 일이니···.’
죽고 또 죽는다.
홍련의 분신들은 광장에서 이탈하는 족족 목숨을 잃었다.
상황은 끝나가고 있었다.
“일단락 됐군. 의심할 여지가 없어. 우리의··· 승리다.”
어쩐지 허탈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로이드는 이 이상 좋은 결말을 떠올릴 수 없었다.
모두의 협력이 있었다곤 하나, 결국은 빅터의 공로.
가히 최악이라 불리는 홍련을 단신으로 상대해서 단 한 명의 희생자도 내지 않고서 이뤄낸 압도적 승리···.
믿을 수 없는 성과에 로이드는 히죽거리며 사당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도끼를 짊어진 채, 마지막 남은 홍련의 분신에게 다가가는 빅터가 있었다.
“다 했나? 이걸로 만족스러운가?”
“으, 으으···.”
“더 이상 빠져나갈 길은 없다. 너는 여기서 끝장이다.”
빅터는 차분하게 상대에게 종말을 고했다.
홍련의 남은 목숨의 잔량은 하나···.
아니, 그마저도 모자랐는지 유일하게 남은 마녀의 몸뚱이는 흐물흐물하게 녹은 반신뿐이었다.
그녀에겐 하반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죽어? 이 몸이 죽는다고? 이딴 외진 곳에서 내가?”
지방질과 핏물이 뒤섞인 체액을 흘려보내며, 젖가슴이 드러난 상체가 들썩인다.
마녀는 헛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위기에 봉착했다는 걸 끝내 인정하지 않으려는 듯···.
“부족해! 한참 모자라! 나는 아직 충분히 놀지 못했어!”
뿌득!
흙바닥을 격하게 쥔 홍련의 손톱이 뒤집어졌다.
“태울 것이 많단 말이야. 세상에는 불사질러서 정화해야할 것들로 넘친다고! 그런데 왜 방해하는 거야? 어째서 내 앞을 가로막는 거지?”
“···놀이는 언젠가 끝난다.”
“아니야! 그분께선 약속하셨어! 언제까지나 이어질 유희를! 나는 홍련! 셀러멘더의 숨결! 모든 걸 잿더미로 만드는 자란 말이야!”
“같잖은 불장난을 거창하게도 표현하는군.”
빅터는 마녀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그리곤 절반만 남은 몸뚱이를 들어 올려 일부러 두 눈을 맞추었다.
“잘 들어라. 마지막 순간만큼은 제대로 속죄하란 말이다! 네가 여태 빼앗아온 목숨들··· 인간의 생명은 장난감이 아니다!”
“장난감이야. 살아있는 모든 건 내 불쏘시개라고··· 하면 좀 간절해 보여?”
“···.”
“아, 무서운 척 연기하는 것도 쉽진 않네. 이봐, 사냥꾼 씨? 슬슬 마무리해주지 그래?”
구제불능.
이 태도는 시간을 끌려는 것조차 아니다.
생명의 마지막 순간을 앞에 두고서도 긴장하는 전혀 낌새가 없었다.
빅터는 이 시점에서 상대의 머릿속을 읽고 있었다.
홍련이 저질러온 죄의 역사를···.
수십 년에 걸쳐서 이어진 모든 참극에 대해서도···.
과연, 육망성이라는 칭호가 달린 만큼 사악함의 수준이 다른가?
완전히 이질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어.
빅터가 근 5년간 처단해온 마녀들은 적어도 최소한의 죄책감 정도는 가지고 있긴 했었다.
세상만물을 저주할 정도의 독기에 찬 증오란, 대게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었기 때문에···.
그렇기에 동정한다.
정신감응능력을 가진 빅터이기에,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세상의 이면은 때론 특정 누군가에겐 지나치리만큼 가혹하다.
이계의 존재에게 혼을 바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깊은 절망도 있는 법이다.
고독.
부조리한 학대.
혹은 상실감.
사랑을 기대할 수 없고, 희망을 완전히 빼앗기고 말았을 때···.
인간의 삶은 끝 모를 어둠으로 이어진다.
이 모든 걸 단순히 그녀들의 잘못으로 치부하기엔 무리가 있어,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라며 가볍게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무리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 발악해도, 그 결과가 언제나 좋으리란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필사적으로 공을 들인 농사에도··· 흉년은 찾아오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이 녀석은 다르다.’
순수한 악의.
그저 열기를 갈망하며 불타는 걸 지켜보고 싶을 뿐이라는 소박한 희망.
홍련의 정신에는 단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불구덩이만이 존재했다.
그녀의 잠재의식은 화염의 세계관이다.
타인의 모습은커녕, 자신의 형상화된 자아조차 보이지 않는다.
마치 세계의 끝, 남단에 있다고 전해지는 불꽃의 나라 ‘무스펠하임Muspelheim’···.
빅터는 느꼈다.
숨김없이 전해지는 사악한 기운을···.
홍련이 계약한 아스트랄 자체도 작열하는 무언가와 한 없이 닮아있던 것이다.
“너에겐··· 사람의 마음이 조금도 없는 건가?”
“마음? 그거 어디서 파는 건데?”
“
“아아, 크투가Cthugha! 위대하신 나의 주인!”
일순간 홍련의 눈동자가 사라졌다.
핏발이 선 흰자만이 드러났다.
마녀의 몸속에서 갑자기 마기가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무슨 짓이지?”
“글쎄?”
또 무슨 수작을 부릴 생각인가?
어차피 남은 목숨도 없는데다 마법조차 사용하지 못하는 주제에···.
설마하니 자폭이라도 하려는 걸까?
“···쓸데없는 짓이다. 네가 뭘 하든 중화시켜 줄 테니.”
당연히 빅터는 마녀에게 어떤 기회도 주려하지 않았다.
끝내 소통도, 이해도 불가능하다면···.
앞으로 있을 지도 모를 또 다른 비극을 막기 위해 마녀를 망설이 없이 단죄할 뿐!
이것으로 마지막 참수다.
이형의 도끼는 그대로 홍련의 목을 향해 직행했다.
그런데···.
“···키킥!”
웃었다.
죽음을 앞둔 순간에 지어보인 불길한 미소.
빅터는 날이 닿기 직전 가까스로 오른팔을 멈출 수 있었다.
아슬아슬했지만, 지극히 현명한 판단이었다.
“아까워라. 조금만 더 했으면 됐을 텐데!”
“이것은···.”
“그대로 내리쳐줬다면 내 모든 걸 바쳐서 아주 잠깐이라도··· 그 분의 일부나마 현신 시킬 수 있었을 것을!”
압력 때문에 살짝 찢어진 마녀의 목 언저리 피부 사이로, 섬뜩한 시선이 번뜩였다.
투명하지만 검고 붉은 눈동자.
그것은 마몬의 적석과는 비교도 되지 않아.
가득 응축된 어떤 것···.
아주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주홍빛의 무엇인가였다.
빅터는 얼어붙었다.
숨이 막히고 오한이 든다.
마주봄과 동시에 뇌로 이어지는 신경이 어긋났기 때문이었다.
초인적인 정신력을 지닌 그가 아니었다면, 잠깐 사이 졸도했을 지도 모를 정도의 위압감이었다.
과거의 어떤 적에게서도 느껴본 적 없는 기이한 감각.
빅터가 짐작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뿐이었다.
‘아스트랄!’
살아있는 화염이 홍련의 몸속에서 꿈틀거린다.
그것은 분명한 의지를 지닌 채, 살짝 드러난 일부로 이쪽 세상을 눈으로 핥듯 관찰하고 있었다.
그리고···.
‘표류자의 유산이···.’
도끼날의 표면이 흘러내린다.
붉게 달아올라 농포가 지더니, 이내 액체로 변해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몇 번이나 수 천도의 불꽃을 막아주었던 제노리움이, 잠시 닿은 것만으로 융해되고 말다니···.
물리 법칙을 아득히 넘어선 고열이었다.
“우후훗, 알겠어? 궁지에 몰린 건 내가 아니란 걸. 기왕 저 세상으로 간다면, 길동무는 왕창 만들어두는 게 좋겠지!”
안타깝게도, 예지의 힘으로도 여기까지 간파할 순 없었다.
마녀가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던 것과 별개로···.
그만큼 아스트랄이 뿜어내는 기운이 강력해, 빅터가 돌파해낸 운명에 직접 개입해올 정도였던 것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쭉 일관적이었다.
놀고 있었을 뿐···.
자신의 생명을 걸고 재미난 장난을 친 것에 불과했다.
“자, 얼른 죽여 보라고. 어서!”
보란 듯이 마녀는 하반신을 재생시키기 시작했다.
천천히 둔부에서 골반이 만들어지고, 이내 허벅지와 무릎이 재구성되었다.
마녀가 곧 자리에서 일어날 만큼 회복했다.
“못하겠어? 그럼 내가 스스로 할게. 그럼 사냥꾼 씨가 원하는 대로지? 내가 자살해서 주인님의 일부를 살짝 끄집어내는 걸로 모든 걸 끝내자고. ···아, 이 일대가 녹아 사라지는 걸 지켜보지 못하는 건 좀 아쉽지만!”
“그래. 실로 유감이다.”
“···뭐야?”
홍련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빅터가 여전히 평상심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그는 가볍게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이제야 알겠군. 예지가 보여주는 미래가 불안정했던 까닭을···.”
“응? 뭐라는 거야? 예지가 뭐가 어쨌다고?”
“아무래도 아직은 너를 쓰러뜨릴 시기가 아닌 모양이다.”
“당연하지. 어느 누구도 날 해치진 못해! 내게 주인님의 가호가 머물고 있는 한!”
“하지만 오늘은 아무도 죽지 않는다.”
“하?”
“방금 그렇게 정해졌다.”
찌푸려지는 홍련의 표정과는 반대로, 빅터는 홀가분해진 얼굴이었다.
깊은 뜻이 담긴 또 다른 예지를 본 직후, 이 이상 싸울 필요가 없음을 깨닫고 그는 무장을 해체했다.
빅터가 쇠사슬을 풀고 도끼를 던졌다.
홍련이 서 있는 방향과는 전혀 다른 쪽으로···.
그때였다.
주변이 순식간에 밝아진 것은···.
파지지지직!
청뢰靑雷.
지면이 파해 쳐질 정도의 강렬한 전격.
갑작스레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그것은 지금 막 빅터가 날린 도끼에 정확히 명중했다.
“···언제까지 놀고만 있을 건가요? 장난은 그쯤하시죠, 홍련 언니.”
이어서 속삭이는 것처럼 낮은 목소리.
차마 숨기지 못한 짜증 섞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공중을 부양하는 마법은 홍련만의 것이 아니었던가?
또 하나의 불청객이 사당 지붕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빅터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이질적인 색깔이었다.
왜냐하면, 본디 자연계엔 존재할 리가 없는 하늘빛의 장발이 흔들리고 있었기에.
“하여간, 또 경솔한 짓을···. 언제나처럼 멋대로 구는 건 상관없지만, 여기서 염신의 숨결을 뿜어내면 우리들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는 걸 왜 모르나요?”
허리를 넘어 등을 완전히 덮을 만큼 긴 머리칼.
그 아래로 여인의 얼굴이 게슴츠레 눈을 뜬다.
전체적으로 차갑고 냉정해 보이는 인상의 미녀야.
여러모로 홍련과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곱슬이 아닌 직모.
주근깨대신 티끌하나 보이지 않는 회색빛 피부.
눈초리마저 떨림 없이 차분하기만 했다.
새로운 마녀의 등장에 홍련이 치를 떨었다.
상대와 사이가 좋지 않은 듯, 적발의 여인은 즉각 경멸이 담긴 이명을 내뱉었다.
“청람晴嵐···!”
어디선가 들어온 이름.
빅터는 바로 기억을 편린에서 그 정체를 찾아낼 수 있었다.
바로 5년 전, 심록 토벌전에서 잠깐 흘려들었던 명칭···.
‘분명 대스승 크레이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