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격의 장(7)
7.
돌아온 빅터가 마을에 들어서자, 길에서 마주친 모든 주민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시, 시안 대장! 기이한 자가 나타났습니다!”
“화격포를 준비할까요?”
“겉만 봐선 거렁뱅이 같은데···.”
“웃기는 소리! 저런 근육질의 거지가 어디 있나? 잘 봐라, 옆에 멀대같은 자도 함께 있지 않나? 그는 우릴 내팽개쳤던 그 덩치 큰 사냥꾼이다!”
“네? 하지만 시안 대장, 저 모습은 대체?”
“마치 수년은 더 나이를 먹은 얼굴인데요?”
“그럴 리가··· 우리가 구해준 지 얼마나 지났다고!”
돌연 나타난 잿빛의 거구.
시안을 비롯한 요마멸살대들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서, 외견만으로 압도당했다.
빅터는 총포를 겨눈 소년소녀들 앞까지 걸어가더니.
“···마침 잘됐군. 너희도 따라와라.”
“무슨···.”
“사당이다. 곧 저 위에서 적이 나타날 것이다.”
그것도 강적.
모두가 힘을 합치지 않으면 쓰러뜨릴 수 없는 무시무시한 것이.
“시안. 너희가 바라는 대로, 우리 사냥꾼이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겠다. 그 대신, 내 지시에 따라서 진형을 만들어라. 내가 부르기 전까진 나서지 말고 대기하도록.”
“하! 저는 당신의 명령 같은 건···.”
“순순히 들어라. 소중한 동료들을 잃고 질질 짜고 싶지 않다면.”
“뭐, 뭐라고요?”
“비켜라. 지나가는 데 방해된다.”
“이, 이··· 또 우릴 무시하다니! 당신이 잘나봐야 얼마나 잘났다고!”
“시안 대장! 그냥 쏴버리죠! 상부엔 사고라고 둘러대고···.”
“안 된다! 우린 그들의 기술이 필요해! 전하의 칙명에 따라 어둠과 싸우는 지혜를 배우기 전까진 돌아갈 수 없단 말이다!”
“이런 취급을 받고도 참자고요?!”
“큭, 어쩔 수 없지. ···쫒아라! 저들을 따라가! 무슨 꿍꿍이인진 몰라도 절대 놓쳐선 안 된다!”
빅터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무언으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뿐.
무장한 소년 소녀들을 거느린 채.
무시무시한 기운을 사방에 흩뿌리며, 덩치 큰 사내는 계속 앞으로 걸어 나왔다.
뚝.
그 비범한 모습에 말문을 잃었는가?
빅터가 인파 속으로 들어서자 떠들썩한 곡조가 멈춘다.
자연스레 사람들의 흥도 자취를 감추었다.
“저 지저분한 이방인은 누구지?”
“설마 어제 방문하신 서방의 요격사분이···.”
“돌아오신 건가? 호수에서?”
“아니야. 저분의 존안을 봐!”
“설마 명왕明王님···.”
“어찌 현세에 강림하셨나이까?”
그들은 하나같이 길을 트며 옆으로 물러났다.
빅터의 그림자조차 두려워하며 서둘러 뒷걸음까지 칠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장 상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빅터의 모습은, 흡사 동방의 무신武神···.
금강역사金剛力士와 닮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멋대로 자라난 회색의 장발이 바람이 휘날렸다.
그 아래로 드러나는 것은 머리칼 사이에서 일렁이는 사냥꾼의 눈···.
그리고 고집스레 다문 입이 보인다.
왼팔에는 깨지고 녹이 쓴 사슬이 본연의 형태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고.
잘 벼려진 오른손아귀의 도끼는 닿는 모든 것을 베어낼 것처럼 흉흉했다.
“저, 저희를 몸소 명계로 인도하시려고···.”
“희나 님의 예언대로야. 오늘, 우린 이 분을 통해서 진정으로 구원 받는다!”
“나우마쿠 산만다! 바사라단 센다!”
“아아, 부디! 이 긴 고통에서 저희를 해방시켜 주시옵소서!”
“마카로샤타 소와타야! 운 다라타 함 맘!”
경악의 외침과 양손을 포개는 기도가 이어진다.
마을에는 징벌의 두려움, 그리고 희망 섞인 기대가 공존했다.
얼핏 상반된 것 같은 모순된 감정이나···.
사람들에겐 익히 이 현상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경외.
신이나 초월적인 존재에게나 느낄 법한 감상이었다.
빅터를 향하는 눈동자에는 예외 없이 그런 마음이 스며있다.
“야, 빅터··· 사람들이 맛이 가버린 거냐?”
꺼림칙한 이국의 토속신앙에 로이드는 난색을 표했다.
“하, 하하. 이거 봐고, 빅터. 전부 널더러 무슨 화신이라면서 치켜세우는데?”
“···.”
“신이 된 기분이 어떠냐?”
그랬다.
이 시점에서 빅터는 이미 숭배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럼에 불구하고, 빅터는 조금도 움츠려들지 않았다.
자기가 남에게 어떻게 비춰지든, 일말의 거리낌조차 없는 듯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야말로 부동不動.
몸도 마음도 꿋꿋하다.
홀로 세월을 등진 자의 나아감에 망설임이나 흔들림은 없다.
땅을 딛는 차분한 걸음이 신묘하다.
크고 묵직한 기세에도 발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 보법···.
그러면서도 절도가 느껴져, 만인이 그 움직임에 압도되었다.
‘···이젠 말도 안 나오네. 흔히들 우스게소리로 득도得道라던지, 해탈解脫 어쩌고 지껄이지만··· 이 녀석 앞에선 전혀 농담같이 느껴지지가 않은데?’
로이드는 속으로 질색했다.
그 정도로 빅터가 크게 변모했기에.
돌이켜보면, 본래부터 빅터에겐 초연한 면이 있긴 했었다.
우락부락한 덩치와 무뚝뚝한 가면으로도··· 마음 속 깊은 곳에 감춰진 뜨거운 분노와 애절함을 채 숨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나, 지금의 그는 그마저도 한참 넘어선 신비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달관한 얼굴.
고요하고 음침한 무표정.
그러나 동시에 바닥모를 슬픔이 풍긴다.
누군가에겐 불굴의 전사.
또 어떤 이에겐 방랑하는 성자처럼 비춰지기 충분하리라.
흡사 동양의 신화 속에나 나오는 선인仙人.
신통력의 실존여부에 대해선 둘째치더라도, 기백만큼은 이미 평범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오래 알고 지낸 로이드마저도 움츠려 들 정도의 기백···.
그만큼 변모한 빅터의 위세는 압도적이었다.
‘빅터, 그간 너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내겐 불과 수초 남짓에 불과한 사이에··· 뒤틀린 시간 속에서 무엇으로 하여금 널 이렇게까지···.’
극한까지 단련된 전신···.
대체 이만한 경지까지 오르기까지 얼마나 큰 대가가 필요했을까?
어떤 희생을 치루었기에, 이 정도로 인간이 격변할 수 있단 말인가?
마음을 읽을 수 있는 힘이 없는 로이드로선, 그저 빅터의 등진 모습을 통해 처절한 세월의 흔적만을 짐작해볼 뿐이었다.
‘제길, 역시 내가 억지로라도 녀석을 따라갔어야 했던 건가! 최소한··· 적어도 말리기도 했어야 하는데!’
웃는 것에 어설프고, 요령 없이 우직하기만 하던 그 덩치가 일말의 인간미마저 잃고 말다니?
오직 타인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내팽겨 친다면···.
그렇게 해서 최흉의 적을 쓰러뜨린다고 해도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런 승리에 뭐가 남는단 말이지?
‘게슈펜스트Gespenst에 한 없이 가까워져있어···.’
빅터의 망령화.
그것만은 막고 싶었어.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지 않게 하려고 이 먼 바다 건너의 동양까지 따라온 것을···.
‘크레이그 영감탱이··· 열 받지만, 당신이 염려하던 대로 되고 말았어.’
로이드는 본토를 떠나기 전, 마녀 사냥 이상으로 가장 우선시 할 임무를 받았다.
그를 보호하라.
무슨 일이 있어도 빅터를 지켜내라.
종막으로 치닫는 싸움이 찾아오는 그 날까지.
유성의 파편과 이어진 사냥꾼이 마음을 전부 소진하기 전에 구해내라고···.
‘하지만 만에 하나, 그 계획이 틀어져서 빅터가 변질되고 만다면···.’
로이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만 말미에 대스승 크레이그가 남긴 당부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로이드, 그가 완전히 탈피하기 전에 네 손으로 끝을 내야할 것이다.’
안다.
어느 누구보다 잘 아는 뻔한 해답.
그 외엔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도, 로이드는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애써 고개를 돌린다.
망설이며 현실을 외면하고자 했다.
내키지도 않거니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기에···.
‘아니지? 빅터, 너는 임마··· 영웅이잖냐? 나 같은 허당이랑 다르게, 뭐든 할 수 있는 진짜배기 아니었냐고?’
로이드가 답답한 기분에 고뇌하는 사이.
어느덧 빅터의 걸음이 멈추었다.
언덕길로 향하는 길가 옆의 골목.
그 앞에는 동양의 복식이 가득 매달린 상점이 하나 있었다.
“주인장, 거기 있는 코트 같은 겉옷과 바지 하나만 내주겠나?”
“겉옷··· 이라하면, 이 도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검은색이 좋겠군.”
값은 충분히 치르리다.
빅터는 바지 주머니 속을 뒤지더니, 이내 왼손을 활짝 펼쳐들었다.
후두둑.
그러자 굵은 알갱이의 번쩍이는 뭔가가 아래로 흘러 내렸다.
“사, 사금砂金?! 빅터, 너 어디서 그걸···.”
“내가 건너간 시대에선 썩 흔한 것이었다. 발길에 치일 정도로 많았지.”
“대체 어떤 곳을 다녀 온 거야?!”
로이드가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옷가게의 주인도 입을 크게 쩍 벌렸다.
“며, 명계의 사자시여! 제가 어찌 감히 이런 세속적인 제물을···.”
“부족한가?”
“가당치도 않습니다! 필요 없습니다, 이런 것은!”
가게의 주인은 겁에 질렸다.
그 가치를 아는 상인이라면 눈이 뒤집히기에 충분한 양이건만···.
오히려 비현실적인 광경에, 저승에서 온 자가 자신의 탐욕을 시험하는 게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명왕님, 저는 현생에 이 이상 복을 원치 않습니다. 그저 온전히 해방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렇다면 안심하게. 내세 따윈 없으니.”
“그런··· 명왕님께서 하실 말씀이 아니지 않습니까?”
“···날 그렇게 부르지 마라.”
“예?”
“나는 명왕 따위가 아니다.”
하물며 부동명왕無動明王따윈 더더욱 아니지.
제 딴엔 농담이라고 했던 것일까?
마을에 들어서고 나서 처음으로 빅터의 입가가 웃었다.
그것만으로 다가가기 힘들었던 인상이 반전되었어, 감정이 있는 그대로 드러났다.
어쩐지 허탈한 미소.
옆에서 지켜보던 로이드가 다 벙 쪄버릴 정도의 시원스런 곡선이었다.
하나, 그 얼굴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인간이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라고.
“···헷, 선인은 얼어 죽을.”
“로이드, 방금 뭐라고 했나?”
“아무 말도 안했다, 짜샤!”
다행히, 여기서 로이드는 어느 정도 마음을 놓았다.
다소 모습이나 분위기가 변하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알던 빅터였다.
사냥꾼이 스스로를 인간이라 믿는 상태라면, 아직 희망의 길은 남아있었기에···.
“서두르지. 앞으로 반각도 안 남았다.”
“우선은 아랑부터 보호해야지?”
“음.”
“그럼 그 산적 같은 면상부터 어떻게 좀 해보셔. 꼬맹이들이 보면 식겁할 테니까.”
“···그도 그렇군.”
건네받은 옷가지를 아무렇게나 걸치며, 빅터는 다시 등을 돌렸다.
이번에는 도끼날을 새워서 앞머리와 수염을 다듬기 시작했어.
거친 손놀림으로 지켜보기 불안한 이발과 면도를 이어나갔다.
물론, 그러면서도 벅터의 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쭉 직시하고 있었다.
“···내가 겪은 일이 그렇게 궁금한가, 로이드?”
“뭐? 아, 아니··· 별로.”
“그런가? 하지만 뒤통수가 따가울 정도로 네 감정이 전해져 오고 있는데?”
“야, 너 또 멋대로 내 머릿속을···.”
“미안하군. 사람을 만나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조절하는 게 좀 힘들었다.”
능청을 떠는 빅터.
하지만 거기 담긴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자칫 어색해질까봐, 로이드는 평소처럼 그를 대하기로 했다.
“아씨, 네가 그렇게 감상적으로 나오면 분위기상 갈구기 힘들어지는데···.”
“···절친한 개체가 의기소침 하는데 잘도 그런 농담이 나오는구나, 로이드란 개체!”
“우와앗!?”
파직!
로이드가 허튼 소리를 하자 제지가 들어왔다.
지금껏 침묵을 지키던 마르였다.
“···빅터라는 개체. 기어이 너는 괴리된 시간에서 살아 돌아왔구나.”
“음.”
“어땠어? 너는 어떤 시대를 경험하고···.”
“으, 마르··· 너야말로 막 귀환한 녀석한테 너무하는 거 아니냐? 다짜고짜 시덥잖은 질문질이나 하고!”
“어리석긴, 나는 그의 건강상태를 살펴보려는 거야! 우린 빅터란 개체가 어떤 시간대에서 생존했는지조차 몰라! 장시간 유해한 대기조성 상태에서 지냈다면 혈관의 확장은 물론, 기압차에 따른 내장 상태에 이상이···.”
“괜찮다.”
“어?”
“그건 염려할 필요 없다. 오히려 몸이 날아갈 듯 가벼우니까.”
“···빅터란 개체, 정밀한 검사를 해보길 권할게. 내게 1200초만 시간을 줘. 그럼 네 몸을 투사해서 완벽하게 내부 상태를···.”
“진료는 나중에 부탁하지.”
“하지만! 나는 장치를 가동시킨 자로서 네가 어떤 시간대를 거쳐 왔는지 알아야 할 권리가!”
“···그건 용龍의 시대였다.”
“아?”
“빅터, 너 방금 용Dragon··· 이랬냐?”
“그런 반응이 나올 거라 생각했지.”
“하늘을 덮는 날개를 가지고, 입에서 불을 뿜는 그거?”
“아니. 전설로 듣던 것처럼 날아다니거나 불을 뿜거나 하진 않더군.”
“하, 하하··· 역시나 그렇지. 용 같은 게 있을 리 없잖아? 깜짝 놀랐네. 임마, 너 언제 허풍을 부릴 수 있게 된 ··· 어, 뭐라고?”
저벅.
바닥을 파내고 화강암으로 덧씌운 돌계단 위에 오른발이 오른다.
층계를 순서대로 밞으며, 빅터는 피식하고 웃었다.
“어딜 가나 산만한 몸집을 가진 지룡들이 북적이더군. 날개만 없을 뿐, 두 발로 걷는 놈··· 네 발로 기는 놈까지 가지각색이었다. 상대하기 쉽지 않았지.”
“싸, 싸워 본거냐? 신화 속의 괴물들이랑?”
“한 놈, 한 놈이 중합체만큼 거대하고···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했다. 샐 수 없을 만큼 잡아먹힐 뻔 했어. 한 번은 내 다리보다 길고 굵은 이빨을 가진 놈의 입안에 들어간 적도 있었을 정도니.”
빅터는 계속해서 설명을 이었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정말로 믿기 어려운 것들뿐이었다.
거목보다 거대한 파충류들이 지배하는 공포의 세상···.
그 세계는 지금처럼 털을 가진 동물들이 기를 펴지 못하고 있었다.
빅터 또한 마찬가지였으니, 그는 언제나 약자의 입장에서 필사적으로 맞서야만 했다.
“길었지. 겨우 눈치 채는 데 1년 가까이 걸렸을 거야. 막연히 여기저기를 쏘다니던 끝에야 깨달았다. 이 시대엔 인간이 없다는 걸.”
지상에 사람의 흔적은 존재하지 않아.
그렇기에 빅터는 오래도록 고립된 채 지냈다.
“대화할 상대가 없으니 혼잣말이 늘더군. 그래도 짐승들에게 위치를 들키게 될지언정, 떠드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입을 닥치게 되는 순간, 말하는 방법을 잊어버릴 것만 같았거든.”
“아, 알지. 나였으면 답답해서 뒈져버렸을 거야.”
“네 수다가 그리울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로이드.”
“그러게 날 데려가지 그랬냐?”
“후, 너에겐 그 외에도 들려주고 싶은 말이 아직 잔뜩 남았지만···.”
“아, 그건 이따 밤에 술 안주거리로 남겨두자고.”
하나, 담소의 여유는 이걸로 끝이 났다.
두 사람은 머지않아 홍련이 나타날 장소까지 도달했기 때문에.
빅터는 갑자기 손을 들더니.
“아랑···.”
“빅터 사부?”
“이쪽으로 오거라.”
사당 앞마루에 앉아있던 소년이 반응했다.
아이는 지시에 따라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
거리가 좁혀지자, 아랑은 스승의 복장과 인상이 바뀐 것에 위화감을 느꼈다.
가죽 코트 대신 펑퍼짐한 동방의 옷감을 걸친 건 그렇다 치자.
하지만 험상 굳던 빅터의 얼굴이 묘하게 온화하게 변한 까닭은 대체···.
‘두 사람이 떠난 지 몇 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 걸까?’
코앞까지 다가갔지만 역시 뭔가 달라.
로이드 쪽은 평소처럼 가볍게 실실 거리지만.
빅터에게선 평소 같은 엄격함이 내비치지 더 이상 내비치지 않았다.
지금까지 선뜩 다가서기 어렵던 벽이 허물어진 것 마냥···.
소년의 얼굴에 불안의 빛이 나타날 세라, 빅터가 입을 열었다.
“약속하마.”
“네, 네?”
“무슨 일이 있어도 너와 리리 리 만큼은 내가 지키겠다.”
펄럭.
벌어진 소매의 사이에서 크고 투박한 손바닥이 아랑의 머리를 감싼다.
다정한 손길.
처음 당해보는 애정 어린 토닥임에 소년의 얼굴이 급격히 새빨갛게 변했다.
“뭐, 뭐에요? 빅터 사부, 갑자기 왜···.”
“잘 듣거라, 아랑. 지금부터는 너의 역할이 중요하다.”
“역할···요?”
아랑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기대 받고 있음을.
동경하는 어른이 자신에게 뭔가를 부탁하려 한다는 걸.
“그래, 오직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부탁.
그것은 신뢰한다는 증거.
아랑이 가장 바라마지않던 인정으로 이어지는 길···.
“나와 함께 싸워줄 테냐?”
빅터가 건넨 그 한마디에, 소년은 울고 싶어질 정도로 가슴이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