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입의 장(5)
6.
“실험··· 이라고?”
생소한 단어.
마법사나 연금술사가 휘젓는 아궁이의 모습만이 떠올랐다.
빅터는 어떻게든 엑조틱이 하는 말의 의미를 파악하려 애썼다.
“맞아. 약 3억 5천만 년 전의 대기 환경에 최대한 가깝도록 조성했지. 최대한 생물군의 생장활동을 극대화하고, 산소농도도 극단적으로 증가 시켰단다. 처음부터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이 별의 석탄기를 재현시켰어. 덕분에 기문昆蟲을 통해서 호흡하는 종이 충분히 거대화할 수 있는 환경에···.”
난해하다.
들어본 적 없는 전문적인 용어만을 늘어놓는 태도.
청자의 지식수준을 고려해서 알아듣기 쉽게 풀어내는 클라리스의 설명과 다르게 불친절해.
같은 언어로 소통하는 중인데도 어째서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것인가?
“음, 내 말이 이해하기 어려운가?”
빅터가 인상을 쓰자, 엑조틱 ‘마르’는 겨우 지껄임을 멈췄다.
표정이 존재하지 않는 존재였지만, 왠지 모르게 쩔쩔매는 기색이 역력했다.
“원한다면 상세하게 설명해줄게. 어디서 어떻게 어렵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다. 네 모든 발언이 헛소리처럼 느껴지니까.”
“그런가? 아무래도 너희는 탐사가 목적인 연구원이나 학자는 아닌 모양이네. 하필이면 이런 무지한 시대의 개체들과 마주할 줄은···.”
“요점만 말해라.”
“빅터, 굳이 너라는 개체의 기준에 맞춰서 이야기하자면··· 나는 이 수목원의 주인이야. 마당에 화초를 심고, 씨앗을 뿌려둔 다음 과실이 커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거지. 하지만 추수하는 게 목적은 아니야. 어지간해선 개입하지 않거든. 단지 멀리서 바라만 볼 뿐···.”
빅터는 암안의 힘을 총동원했다.
하지만 그 머릿속을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
근본적인 사고의 구조가 달라.
그 복잡한 의식을 쫓아갈 수조차 없었다.
마르가 스스로를 고차원적 존재라 칭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거기엔 원숭이와 인간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었다.
가까스로 빅터가 읽을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그 목적···.
그나마 실험이란 단어가 가지고 있는 본연의 뜻 정도였다.
“이 거대한 공간이··· 네 녀석에겐 한낱 마당에 불과하단 말인가?”
“제한된 물리적 세계에서 살아가는 너희가 보기엔 넓어 보일 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야, 빅터! 넌 알아듣겠어? 이놈이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미안하다, 로이드. 조금만 입을 닫고 있어다오. 나중에 따로 설명해주마. 나도 최선을 다해 이해하려고 노력중이니.”
“으음, 로이드란 이름의 개체는 아둔하구나? 나는 이미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해. 그쪽이 이해하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어.”
“···아주 쌍으로 등신 취급해 주시는구만, 젠장!”
로이드는 초조했다.
적과 화목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자기만 빼놓고 멋대로 대화가 진행되는 것이 고까웠던 것이다.
빅터 또한 못마땅한 것은 마찬가지.
하지만 당장 죽일 방법이 없다.
은연중에 이븐 가지의 분말이 섞인 살기를 흘려보냈지만.
적이 펼치고 있는 기이한 파장은 그마저도 길을 잃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마르가 지나치리만큼 순진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
‘정말로 나와 로이드에게 해코지할 마음은 없는 듯하다. 아니, 오히려···.’
빅터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마르가 사용하는 어휘나 지식의 수준은 놀라워.
분명 빅터가 살아가는 시대를 훨씬 초월하는 지식의 기반이 엿보였다.
그러나 어쩐지 모르게 느껴지는 위화감은 도대체···.
“빅터, 그리고 로이드. 나는 육신을 가진 너희 지성체와 동등한 입장에서 교류하고 싶어. 성심성의껏 궁금증을 채워줬으니, 이번엔 너희가 내 물음에 답해줄 차례야.”
“···뭐지?”
“벌써 잊은 거야? 나는 처음부터 일관된 질문을 했었는데.”
엑조틱이란 이름을 어디에서 들었는가?
마르는 그걸 물어오고 있었다.
“내가 아는 한, 우리는 아직 너희 문명과 접촉할 수 없어. 규칙에 어긋나. 상부로부터 허락이 내려지지 않았지. 그런데도 인간에게 우리를 지칭하는 단어가 따로 있다니··· 뭔가 이상해.”
“···.”
“그러니까 들려주길 바라. 너희는 과거에 우리를 관측한 적이 있었던 건가?”
“그렇다면 어쩔 거지? 입막음이라도 할 셈이냐?”
“아니, 오해하지 마.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에게도 나름대로 질서라는 게 있으니까. 나는 너라는 개체보다 우수해. 영리하고 우월하지. 그렇기에 하위 종을 보호해야할 책임도 있어. 독단으로 죽이진 않아. 비록 네가 날 없애려고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다 해도 말이야.”
“건방진 소릴··· 그 말인 즉, 마음만 먹으면 날 언제든 끝장낼 수 있단 것처럼 들리는군.”
“자꾸 그러지 말아. 너희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지적생물체를 대할 때 얼마나 호전적이고 사나운 지는 나도 배워서 잘 알지만, 너무 주제넘게 나서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마음씨가 넓어서 망정이지···.”
“이번엔 협박인가?”
“배려라는 거야. 나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도록 교육받았거든. 아무리 하찮은 개체라도, 함부로 해치진 않을 거야.”
빅터는 점점 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어디까지가 진심인가?
괴물이 하는 말을 어느 지점까지 곧이곧대로 믿어야 하지?
“말꼬리는 충분히 잡은 거 같은데···. 이제 시원하게 대답해주는 게 어때?”
둥실거리는 몸뚱이가 지친 듯 가라앉는다.
지치기라도 한 것인가?
한편으론 지루한 칭얼거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순간, 그 묘한 움직임에서 빅터는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렇군. 이제야 알겠다.’
상대에게서 과거에 한 번 느껴본 적 있는 감정의 흐름을 읽었기 때문에.
‘이 녀석은 어떤 의미에서 내 딸, 아델라이드와 닮았다.’
어째서일까?
갑자기 빅터는 자신의 고향이 온전하던 시절을 회상했다.
그것은 분명 딸아이에게 성을 냈던 때.
다섯 살이 된 아델라이드를 처음으로 혼낸 날···.
‘예전에··· 아델이 엄지로 개미 행렬을 찌부러트리며 놀던 적이 있었지.’
제아무리 자신의 몸무게의 스무 배를 들어 올리는 일개미라 해도, 작고 연약해서 어린 아이의 손장난조차 당해내지 못해.
빅터는 당시의 아델라이드가 순수하게 장난치며 놀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연하게도, 벌레는 최후의 순간에서도 비명 따위 지르지 않는다.
인간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작고 나약하고 하찮기 그지없는 미물.
악의 없는 소녀의 손끝에 실린 압력에 깔아뭉개지는 작은 목숨.
남은 것은 핏자국 대신 지면에 새겨진 투명한 습기 뿐···.
‘무슨 짓이냐고 묻는 내게, 아델은 놀라운 발견을 한 것처럼 들떠서 설명했지. 일렬로 쭉 늘어 선 개미들 중 하나를 죽이면··· 뒤 따르던 행렬이 그대로 무너져서 우왕좌왕한다는 걸.’
아이는 순수하다.
그렇기에 그 행동에도 악의는 없을 터.
빅터는 천사의 얼굴을 한 아델라이드를 기억한다.
세상 그 무엇보다 선한 표정으로, 너무도 해맑은 웃음을 보이던 딸아이의 모습···.
그것은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유린하고 있단 자각조차 없는 무지함 그 자체였다.
빅터는 반사적으로 고함부터 쳤고.
아델은 놀라서 순식간에 울음을 터뜨렸다.
‘아내는 고작 벌레 몇 마리 때문에 무슨 요란스런 짓이냐고 했었지.’
뒤늦게 그레이스가 달려와 남편을 탓했지만, 요령 없는 아버지는 고민해야 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어찌해야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줄 수 있을 지를.
그저 윽박지르는 것만으론 부족해.
자칫하면 무엇이 잘못인지도 모른 채로 끝나버린다.
당시의 빅터는 최대한 지혜를 짜내어, 어떤 가상의 이야기까지 지어냈다.
‘정말로 얼토당토 않는 허술한 비유였지.’
···저 하늘 너머에서 거대한 손가락이 내려온다고 치자.
그것이 엄마와 아빠를 꾸욱 눌러서 영원히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다면 어떤 기분이 들겠느냐고.
그 참혹한 광경을 떠올려보라는 아버지의 말에, 상상력이 풍부한 아델이 또 다시 울어버렸다.
깨달은 것이다.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했단 사실을.
흙바닥에 뭉개진 개미의 주검은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은 벌레와 마찬가지란 이치까지 알려주진 못했지만···.’
가능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는 것.
자신이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은 어느 누구에게도 해선 안 된다.
그것이 사람의 도리.
다행히 어린 딸은 빅터의 교육을 온전히 받아들였고, 생명의 존엄을 마음속에 깊게 품었다.
먹기 위해서가 아닌 재미 위주의 살육과 괴롭힘이 나쁘다는 걸 한 시도 잊지 않았어.
심지어 그게 너무 심한 나머지 쥐덫에 걸린 생쥐마저 풀어줄 정도가 되었다.
···결국 아델라이드는 비극의 최후를 맞이하기 전까지, 착한 딸로 빅터의 기억 속에 남아있을 수 있었다.
‘···망할, 쓸데없이 옛날 생각에 빠졌었군. 덕분에 확신이 든다. 마르··· 이 녀석은 어린애라는 걸.’
틀림없다.
최소한 성숙한 부류는 아니야.
그렇다면 지금까지 보인 은근히 허술한 부분이나 철없는 면모가 설명이 된다.
마르가 빅터와 로이드를 대하는 모습은, 아이가 신비한 동물을 볼 때 나타내는 호기심과 다르지 않았으니.
“···말해주지. 엑조틱이란 이름은 5년 전에 마공작 올비우스라는 놈에게서 들은 것이다.”
“야?! 왜 갑자기 순순히 털어놓고 자빠졌냐?”
“괜찮다, 로이드. 이제 야단 떨 필요가 없어졌어.”
“뭐?”
“쪽팔리지만, 우리가 너무 쫄았던 거다.”
빅터는 경계를 풀었다.
심지어 도끼의 날을 내려두며 허탈하게 웃어가면서.
“안심해라. 저 외래종은 어른인 척 하는 꼬마에 불과하니까.”
“잠깐! 그 말은 가볍게 넘길 수 없어. 거기 빅터라는 개체, 어째서 나를 어리다고 판단하는 거지?”
“질문은 한 번에 하나씩이 아니었나? 이번엔 우리 차례다.”
“그건 이기적이고 편협한 해석이야. 나는 충분한 대답을 듣지 못했어.”
갑자기 마르의 몸이 탄력 있는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참으로 알기 쉬운 반응.
지켜보던 로이드마저 헛웃음을 내뱉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로이드, 아무래도 이 마르라는 녀석은 우리가 아는 도플갱어 놈들과 다른 모양이다.”
“네 잘난 정신감응능력이 그렇게 말하든?”
“암안을 쓸 필요조차 없었지. 생긴 것처럼 마음속까지 투명 했으니까.”
“호모 사피엔스, 그건 나를 비꼬는 의미로 말하는 건가?”
어쩐지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아, 마르는 점점 더 몸집이 커졌다.
어느새 그 색깔이 연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니, 이건 칭찬이다. 너는 순수한 녀석이야. 지금까지 함부로 대해서 미안하군.”
지금까지 날이 선 반응만 보이던 빅터가 고개를 숙이자, 마르는 갑자기 입을 닫았다.
순식간에 원래의 크기로 돌아와선 주변을 배회한다.
시각 기관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닐 것을, 마치 빤히 쳐다보기라도 하듯 맴도는 것이다.
“···격분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과까지 할 정도의 객관적 사고가 가능하구나? 인간이란 종에 대한 내 개인적 평가를 좀 더 올려야만 하겠는 걸. 기대했던 것보다 높은 수준의 소통이 가능하겠어.”
“그거 고맙군. 나도 너희 외래종을 다시 봐야겠다.”
“그럼 좀 더 자세히 말해줄 수 있겠지? 마공작 올비우스라는 자는 누구? 너희는 어떤 환경에서 우리 동족과 마주했는지 알고 싶어.”
“물론이다. ···로이드.”
“어, 엉?”
“다음은 너에게 맡기마.”
드디어 그가 나설 차례.
상세한 설명은 전문 수다쟁이가 제격이었다.
한동안 로이드는 얼빠진 얼굴로 빅터와 마르를 번갈아 보더니.
“···어쩔 수가 없구만.”
될 대로 되라.
로이드는 바닥에 주저앉아 특유의 입담으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7.
“···그렇게 해서 우린 여기까지 당도하게 된 거야.”
인간이 아닌 관객을 앞에 둔 공연은 거의 세 시간 넘게 이어졌다.
청취가 끝나자마자, 마르의 촉수가 일제히 위를 향했다.
일종의 환호처럼 보였다.
“재미있어. 아주 흥미로워. 역시 너희는 놀라운 개체들이로구나!”
“하, 뭘 그렇게까지···.”
“마음 같아선 그 모험담을 고향에 있는 내 우호개체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을 정도야.”
“아니, 임마. 그건 부끄러우니까 좀 참아주라.”
“자신을 가져도 좋아. 나는 감격하고 있으니까. 인간, 그리고 마녀. 사냥꾼의 일대기까지··· 전부 중요한 역사적 기록이 될 거야. 이건 상세히 기록해서 널리 알렸으면 좋겠어. 내게 접근 권한이 없는 게 아쉽구나.”
어느새 사람이 아닌 자를 대하는 로이드의 반응도 많이 누그러졌다.
빅터는 이미 아는 줄거리였기에 맞장구만 쳤을 뿐이지만, 마르 쪽의 반응이 격했어.
이야기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게 사이가 가까워진 것이었다.
“···하지만 역시 그 올비우스란 이름은 처음 들어봐.”
같은 엑조틱이어도 알 수 없단 말인가?
하나, 적어도 로이드가 공들여 설명한 만큼의 성과는 있었다.
“그래도 짐작 가는 부분은 있어. 다수의 하위종과 함께 동행 하는 자칭 마공작··· 그들은 아마 작위를 빼앗기고 추방당한 유배자Exile들일거야.”
“유배?”
“맞아. 규율을 어기고 시간의 저편으로 추방당한 이들이지. 보통은 크게 영향이 없는 시대로 흘러들어가기 마련인데···.”
“하지만 우리와 마주한 걸 보니 뭔가 오차가 있었던 모양이군.”
“그들은 골칫거리야. 언제나 문제를 일으켜.”
“마르, 그런데 너는 괜찮은 건가?”
“내가 뭘?”
“우리 인간과 접촉하는 게 금지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
“음··· 아마 괜찮을 거야. 이건 어디까지나 불가항력이었으니. 내가 찾아간 게 아니라 너희가 멋대로 들어온 거잖아? 거기다 어차피 이 시간대는 나만의 소유물. 나만 함구한다면 어떻게든 될 거야.”
“꽤나 기준이 허술한 편이군.”
“그렇지만도 않아. 반대로 말하면, 나 자신이 너희 시대를 방문하는 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으니까.”
“만에 하나, 우리와 마주친 게 발각된다면?”
“···더 이상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겠지. 나도 유배자 신세가 되고 말거야.”
시간과 시대.
규율과 법칙.
추방과 유배.
지금까지 얻어낸 정보로 짐작컨대, 엑조틱이란 빅터나 로이드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존재들 일지도 몰랐다.
“마르, 설마 우리 때문에 곤란해진 건가?”
“너희를 알 수 있게 된 만큼 위험 부담은 충분히 감안할 만 했어.”
“그렇군. ···미안한 말이지만, 이왕 금기를 어긴 김에 네 종족에 대해서 가르쳐줄 수 있겠나?”
빅터의 조심스런 물음에 마르는 공중에 뜬 몸을 거꾸로 뒤집더니.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해. 이제 와서 정보 제공을 멈춘다고 내 형량이 줄어드는 것도 아닐 테니까.”
“뭐 어떠냐, 마르! 안 들키면 그만이지, 암!”
“로이드, 너란 개체가 그렇게 말하니 괜히 불안해지는데···.”
빅터는 새삼스럽게 로이드의 친화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