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입의 장(3)
4.
세계의 이치란 가혹하다.
그러나 진리는 누구에게나 공평히 적용된다.
특히나 시간이라는 법칙은, 이 시대의 인간이 아무리 발악해도 넘을 수 없는 경계였다.
하지만 익히 그것을 알고 있다 할지라도···.
끝이 보이지 않는 고행의 길을 한 없이 나아가는 건, 강인한 육체와 정신을 지닌 초인마저 견디기 힘든 정신적 고문이었다.
“···빅터, 우리가 여기에 떨어진 지 얼마나 지났지?”
“글쎄.”
“대략적이라도 좋으니까 말해 줘 봐.”
빅터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깨어있는 동안 거의 항상 걸음을 옮겼어.
그 동안 날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따위는 중대사가 아니게 되었다.
“체, 하다못해 평범하게 배가 고팠으면 그걸로 짐작이라도 했을 텐데.”
개인의 차이는 있으나, 식후에 포만감이 가라앉기 시작하는 것은 약 서넛 시간 후···.
하지만 그들의 몸은 허기가 지지 않아.
공복의 체감을 통해 현실을 파악하는데 무리가 있었다.
심지어 이 장소는 통상적으로 밤낮의 경계를 가르는 기준조차 전무했기에···.
출구는 어디인가?
이 기이한 공간이 탄생하게 된 경위는?
처음엔 이와 같은 의문과 호기심이 두 사람을 나아가게끔 만들었지만, 어느덧 그 마음도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다.
정신이 피폐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
보통 사람이라면 일주일도 못 버티고 주저앉아 차라리 아사를 택했을 지도 모른다.
단, 빅터와 로이드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야.
그들이 백기를 들기엔 아직 시기상조였다.
“아, 혹시 내가 카르나스 사막에서 활약했을 때의 이야길 했던가?”
“그래. 한 세 번은 들은 것 같군.”
“그 시절에 오아시스를 찾아 일주일 내내 해멘 경험도?”
“그 소리도 며칠 전에 했지.”
“오잉? 그랬나?”
“농담이다. 사실은 나도 몰라.”
“야, 임마···.”
“네 이야기는 절반 이상 적당히 걸러들었으니까.”
“제길, 이젠 환청이 들리나보다. 무뚝뚝의 대명사인 빅터 님께서 내 헛소리에 사사건건 대꾸해주고 있으니 말이야.”
“나도 지루하다는 감정이 있다.”
“아무튼··· 너도 나도 미쳐가는 모양이야.”
“정정해라. 넌 언제나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하하, 이번 건 좀 웃겼는데?”
그나마 다행인 점은, 최소한 이들이 혼자 고립된 것이 아니란 사실이었다.
때때로 로이드의 짜증이 성가시긴 했지만, 빅터는 그 특유의 입담까지 미워할 수 없었다.
제아무리 시덥잖은 잡담일지라도.
지루함을 견디는데 수다의 상호작용은 놀라운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아직 이 둘이 여유를 가지고 피식거릴 수 있었던 까닭은 따로 있었으니.
“야, 아무 말하면서 걷는 것도 지겨운데, 슬슬 밥이나 먹을래?”
“누가 들으면 우리가 식도락 여행이라도 하는 줄 알겠군.”
“어쩌겠어? 당장 이거 말고 달리 낙이 없잖냐?”
그렇게 말하면서 로이드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곤 코트의 안주머니에서 검붉은 덩어리를 하나 꺼내들었다.
갑각류의 집게발처럼 생긴 뭔가.
그는 그것을 껍질째 베어 물었다.
수 시간 전에 잡아서 손질해둔 나름의 보존식.
재료는 깊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이 인근에서 사냥한 거대 절지동물의 고기였다.
“그건 좀 먹을 만한가?”
“아니, 여전히 개떡 같은 맛이야.”
“그런 것치곤 잘도 씹는군.”
“내가 양념을 챙겨 와서 망정이지.”
“동감이다.”
“너도 빼지 말고 배나 채워둬. 여기서 나가려면 언제든 만전의 상태를 유지해야해.”
빅터는 로이드가 건네는 꼬치를 받아들였다.
표면이 살짝 타 있는 외골격의 마디.
이전 휴식 시간 때 모닥불로 조리해둔 덕에 언제든 먹을 수 있는 상태였다.
키틴질과 큐티클의 갑옷으로 둘러싸인 껍데기를 파내자, 은근히 먹음직 스러운 속살이 드러났다.
생김새는 흉물스러우나, 향취만큼은 그리 나쁘지도 않아.
특히 소금 간과 로이드가 가져온 중동의 향신료를 곁들인 것만으로도 요리라 불리기에 충분했다.
거의 한달 가까이 동굴 속에 고립된 상황이었지만.
다행히도 두 사람이 식량을 구하는 데엔 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먹을 것 자체는 풍족할 지경.
사방에 큰 몸집의 벌레가···.
걷고 걸어도 끝이 나질 않는 거대한 지하 동굴 속에 서식하는 다양한 종의 생물들 덕분에, 그들은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그 동안 계속 봐와서 이젠 새삼스러운 일이지만··· 이곳은 바깥 세계와 격리된 완전히 다른 생태계를 가지고 있다.’
빅터가 속으로 읊조리는 것과 같이.
이 땅은 지상과 별개의 형태로 자연을 정착시켰다.
‘땅 아래에는 은은한 온기. 천장에선 이슬이 흘러나온다. 최소한 생명이 살아갈 조건은 다 갖춰졌군.’
여담으로 공기도 바깥보다 훨씬 농도가 높은 상태.
처음 며칠간 빅터와 로이드는 폐에 극심한 통증을 느낄 정도였다.
‘숨쉬기에 적응하는데 며칠이나 걸린 게 흠이지만··· 지금은 여유가 생겨서 더욱 많은 걸 볼 수 있게 되었지.’
사실 오래도록 빅터와 로이드는 정안의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
동굴에는 이미 광원이 존재하고 있어.
천장 위로 드문드문 보이는 소수의 자광석이 실내등과 같은 효과를 만들어냈기 때문이었다.
‘상식에서 벗어난 식생이다. 아버지가 보신다면 까무러칠 정도로 신비하군.’
푸른색의 형광물질을 받아들여 성장한 결과물인가?
동굴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은 크던 작던 하나같이 묘한 색깔을 발하고 있었다.
대기가 머금은 지열과 풍부한 습기의 영향으로, 이 일대는 이끼나 균사류가 풍부했다.
사람의 키보다 두 배, 세 배는 되어 보이는 버섯들이 여기저기에 보인다.
가지처럼 뻗어나간 거대한 포자덩어리들 사이로 여러 개의 마디를 가진 벌레들이 매달려있는가 하면···.
거목 속에 구멍을 파서 둥지를 만드는 새처럼, 팔뚝만한 날벌레들이 드나든다.
본디 나무가 차지해야할 역할을, 이곳에서는 연분홍빛 진핵생물眞核生物이 대신하고 있었다.
“먹다말고 웬 딴청이냐, 빅터?”
“다소 해괴하지만 이 정도면 절경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 싶어서 말이다.”
“뭘, 이젠 질릴 때도 되지 않았어? 나는 역겹기만 해서 끔찍하기만 한데.”
“복숭아꽃이 만개한 신선들의 계곡이라···.”
“갑자기 또 무슨 소리야? 어울리지 않게 이젠 시까지 읊냐?”
“무당 여자가 말했다. 이곳은 과거에 도원경이라고 불렸다고.”
나름의 수수께끼가 하나 해결된 기분.
빅터는 정말 오랜만에 철학적인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나, 로이드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알게 뭐야. 난 얼른 여기서 빠져나가고 싶다고.”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것도 동방의 풍류다.”
“어떤 미친 변태 새끼가 이 상황을 즐기냐? 설마 빅터, 너···.”
“···.”
“웃자고 한 소리니까 정색하지 마, 임마. ···그보다 말이야, 여기가 바깥에서 이상향이니, 무릉도원이니 불리는 건 좀 이상하지 않냐?”
“왜지?”
“평범한 인간은 애시 당초 이딴 곳에 들어오지 못할 테니까.”
“···그도 그렇군. 네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묘하다.”
“이제 알겠냐? 이 망할 동굴 속이 내장 속같은 도색桃色인 것도 그냥 우연이라고.”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여전히 이질적이면서도 놀라운 지저세계.
그 압도적인 광경이 빅터가 가진 학자의 기질을 자극해, 그의 정신을 들뜨게 만드는 동력이 되는 건 변함이 없었다.
‘며칠씩이나 보냈지만 계속해서 의문만 늘어나는군.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고··· 어째서 여기엔 그게 보이지 않지?’
사실 그들은 지금껏 벌레류를 제외한 다른 동물을 찾지 못했다.
모피가 있는 뭍짐승은 물론, 깃털을 가진 날짐승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다.
짐작컨대, 분명 어류를 비롯한 물짐승도 마찬가지.
즉, 이곳에는 오직 외골격을 가진 절지동물뿐···.
빅터는 조물주의 존재를 가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만에 하나 굳이 누군가가 이 생태계를 조성했다고 한다면···.
‘···의도적으로 벌레들을 위한 낙원을 꾸린 것일까?’
그러나 빅터는 이내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낙원이라니, 가당찮은 표현이었기에.
사실은 정반대다.
왜냐하면 이곳은···.
“기야아아악!”
귀청이 떨어질 것만 같은 울림.
동물 내부가 진동할 정도로 큰 소리였다.
“또 시작이구만.”
“음.”
하지만 두 사람은 반응하지 않는다.
빅터와 로이드는 소음에도 불구하고 식사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그게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단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내기할래? 나는 저 기다란 놈한테 한 표 줄련다.”
“집어치워. 밥맛 떨어진다.”
“뭐, 어떠냐? 싸움 구경은 언제든 즐거운 법이잖아. 안 그래?”
“누구한테라도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지.”
저 너머, 자광석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지대에 무시무시한 그림자 두 개가 나타났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모양새임에도 모두 100척(약 33미터)을 넘는 높이···.
하나는 정원용 가위처럼 생긴 큰 턱을 가진 지네와 같은 것.
다른 한 놈은 딱정벌레와 비슷한 둥글고 검은 표피로 둘러싸인 벌레였다.
놈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들어, 서로의 몸을 감싸고 물어뜯기 시작했다.
“오, 시작했다! 얼른 결정해. 그래서 할 거야, 말거야?”
“뭘 거냐에 따라서 다르겠지.”
“금화 두 닢.”
“돈이 썩어 넘치나?”
“크레이그 영감한테서 두둑하게 받아왔거든. 단지 여태 쓸 기회가 없었을 뿐이고.”
“···좋다. 난 저 검은 놈에게 걸지.”
“하! 두 말하기 없기다.”
거수들의 살육전.
높이 우뚝 선 버섯들이 으깨지고 무너져 내렸지만, 이 흉포한 생물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랬다.
이곳은 낙원이나 이상향과는 거리가 없어.
야생이 그 본질이었다.
모든 것이 서로를 죽고 죽이도록 되어 있는 약육강식의 세계.
집체만한 독충들이 흉물스런 주둥이로 서로의 갑주를 깨부수고 내장을 파먹는 일이 일상다반사인 지옥이었다.
쿵!
쿠구궁!
몸을 둥글게 만 딱정벌레 쪽이 뒤집어졌다.
지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날카로운 턱을 펼쳐서 적의 배를 찢어발겼다.
지저분한 녹빛의 체액이 튀어 올라, 수 초 만에 빅터가 있는 장소까지 비처럼 떨어졌다.
“승부가 난 거 같지?”
“그건 아직 모른다.”
“저 꼴로 뭘 더 할 수 있겠냐?”
빅터는 검은 광택의 등껍질을 가진 벌레에게서 승기를 읽었다.
놈은 내장들이 절반 이상 흘러나온 상태였음에도 아직 투지를 잃지 않았기에···.
아니나 다를까.
딱정벌레의 꽁무니가 갑자기 전개되었다.
끄트머리가 갈라지더니, 크고 뾰족한 공격 기관의 모습을 갖춰지는 것이 아닌가?
“어어? 뭐야, 저게?!”
“풍댕이가 아니라 전갈이었군.”
푸욱!
지네의 대가리에 촉각이 때려 박혔다.
중요한 신경 깊숙한 곳까지 파고 들었는가?
아니면 독이라도 주입한 것일까?
몸통과 돌출된 다리들을 바들바들 떨기 시작해.
지켜보는 쪽이 다 애처로울 정도로 경련하고 있었다.
“장난치나!? 여기서 역전패?”
“내가 이겼다.”
“아냐, 저길 보라고!”
로이드가 갑자기 손가락을 뻗었다.
그 방향을 본 빅터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이건 반칙이군.”
“내 알바냐?”
지네의 마디가 분열되었다.
꿰뚫린 머리만 그대로 떼어내 버렸을 뿐.
멀쩡히 건재한 모습이었다.
이것은 한 마리가 아니야.
어떤 이유에서인지 여러 개체가 이어붙어진 채로 위장 행렬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승부의 행방은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두 사람은 어느새 식사마저 잊고 그 이형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나, 그들의 내기는 끝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훼방꾼이···.
빅터와 로이드만큼이나 이 세계와 어울리지 않는 존재가 불현 듯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에.
“어?”
“잠깐, 기류가··· 변했다?”
콰아앙!
두 괴물들이 몸을 얽히는 전장 인근의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갑작스레 한 점으로 압축되었다.
군체로 분열된 지네도.
딱정벌레로 위장한 전갈도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남은 것은 거짓말 같은 고요.
그리고···.
“···아니?!”
로이드가 경악했다.
예고도 없이 빅터의 등 뒤에 나타난 불청객과 마주쳤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것.
허공에 부유하는 불투명한 해파리와 같은 존재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어떤 단어를 중얼거리고 말았다.
“외래종Exotic···!”
로이드의 오른손이 잔상을 그린 것과 빅터가 고개를 숙인 것은 거의 동시였다.
검은 뱀이 먹잇감을 향해 덮치듯, 채찍의 끝은 적에게 정확히 닿았다.
그러나···.
“커···헉!”
표적의 바로 앞에 물결의 파장이 생겨났어.
그것은 로이드의 배후에도 똑같이 나타났다.
심지어 놀랍게도 휘두른 절편이 적중한 건 로이드의 등짝···.
‘공간을 일그러뜨려서 공격을 되돌린 건가?’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빅터는 서둘러 거리부터 좁혔다.
왜곡된 공간이 형성되기 전에 베어낼 셈으로,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판단은 정확해 보였다.
빅터의 속공이 외래종이 짜둔 함정의 발동보다 빨랐어.
채찍에 영향을 준 파문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이대로라면 적의 몸통을 짓이기는데 충분하고도 남는다.
빅터는 그렇게 확신했다.
“···이거 놀랍군. 설마 너희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인가?”
갑작스레 외래종이 입을 놀리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분명 수 만 년 전에 멸종했을 선주민족이··· 어째서 이 시간대에 돌아다니고 있지?”
고풍스러운 말투는 그렇다 지차.
적개심이 느껴지지 않는 온건한 태도마저도 도끼의 끝을 돌릴 정도의 이유는 되지 못한다.
하나, 멸종이란?
수 만 년 전?
선주민족이라는 단어에는 또 무슨 뜻이 담겨있지?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어.
무의식과 본능이 오싹한 위험을 예고했다.
그 망설임 덕에, 빅터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아주 현명한 선택이야. 조금만 더 그 원시적인 무기에 힘을 줬으면, 그대로 목이 날아갔을 테니까.”
그 말처럼, 빅터의 뒷덜미에 날카로운 감각이 파고 든다.
처음부터 공간을 틀어둔 것일까?
도끼를 휘두른 방향 전체가 왜곡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