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입의 장(2)
2.
빅터는 베었다.
초인적인 근력이 더해진 참격으로, 폭포에 이변을 만들어내는 마기의 근원을 정확히 갈랐다.
하지만 어째서인가?
그것은 소멸하기는커녕 그들의 눈앞에서 폭발을 일으켰어.
자욱한 검은색 안개가 두 사람의 시야를 가리기 시작했다.
“아니?!”
갑자기 흩어진 마기가 사지를 조여 와.
마치 몸을 포박하듯, 신경과 근육 사이에 끼어들어 경직시켰다.
함정인가?
설마 유성의 파편이 닿을 것을 미리 상정한 터무니없는 덫이었단 말인가?
‘이 반응은 전에도···.’
과거, 빅터는 이와 흡사한 현상을 겪은 적이 있었다.
바로 5년 전.
로이드와 함께 클라르테를 만났던 그 빈민가에서···.
“빅터, 이건 엑조틱의···?!”
“그래, 그때 그 놈이 쓴 기묘한 술법이랑 닮아있다!”
심지어는 이전보다 더욱 강력해.
두 사람을 착지조차 못하도록 허공에서 낚아챌 정도의 압력이 작용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갑작스런 기류에 휘말려, 마기가 흐트러진 중심부로 빨려 들어갔다.
나선 방향으로 휘감기는 어둠의 소용돌이.
혹여 의지라도 가지고 있는가?
살아있는 자의 존재를 감지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그것은 폭포수를 역류시키는 와중에도, 빅터와 로이드만큼은 달아나지 못하게끔 아래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환각? 그게 아니라면···.’
떨어지는 자잘한 파편들이 공중에서 부유한다.
빅터가 보기에, 그것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번쩍!
간헐적인 점멸.
정안조차 견디지 못할 정도의 번쩍임이 그들을 덮쳤다.
잠시 후 빅터와 로이드가 눈을 떴을 때, 그들의 눈에 비춰진 것은···.
“···빅터, 혹시나 해서 묻는데, 내가 정신이 나간 거야? 아니면 헛거 라도 보는 거냐?”
“나한테 묻지 마라. 이쪽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니까.”
이제 고개와 손끝이 움직여.
어느새 몸을 죄이던 압박감은 사라져있었다.
동굴.
거대한 동공이다.
지하수가 오래도록 침식되서 만들어진 공간인가?
거기다···.
“야, 나도 경거망동하긴 싫은데. 하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음, 흡사 그곳 같군.”
“그래, 바로 그거! 하필 끔찍하게도 우리의 두 번째 고향이랑 비슷하잖아.”
빅터는 주변을 둘러보며 로이드의 의견에 동의했다.
사방이 어둡지 않은 것은 발광하는 푸른빛의 돌들 때문.
이는 그가 오래 전에 봤던 지면 아래의 구조물에 박혀있던 요석妖石과 완전히 같은 것이었기에.
그것은 모든 사냥꾼이 새로 태어나는 장소.
시술자의 의해 정안을 부여받으며, 어둠 속에 사는 존재와 싸우는 힘을 얻는 대가로 사람의 길을 포기하는 청색의 요람.
바로 펜릴의 둥지였다.
“이거 장난이지? 어쩌다 우리가 이런 곳에···.”
로이드가 유난을 떠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먼 바다 건너, 동방의 호수 아래에 기이한 세계로 이어진 통로가 있는 건 둘 째치고···.
하필 마주한 것이 자광석의 푸른 불빛이라니?
치이이익!
조금 걸음을 옮긴 것만으로도, 찢겨진 옷 너머로 드러난 빅터의 살갗에 기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괜찮다. 그래도 아직까진 버틸만한 수준이야.”
그나마 두 사람은 정안을 이식받은 육체이기에 견뎌낼 수 있어.
인간을 초월한 재생능력 덕분에 상처는 금세 가라앉고 원상태로 돌아오지만···.
“으··· 났는 게 더딘 걸 보니, 역시 진퉁 자광석이야. 효과 한 번 끝내주는데? 저 망할 놈의 광선이 내 피부를 녹이고 있어.”
부상을 입은 로이드 쪽에겐 독이 되는가?
원래대로라면 수 시간 안에 나았을 찰과상일 것을···.
‘자광석의 유해한 빛이 혈관과 뼛속까지 파고 들었군.’
항상 온몸을 두 동강낼 정도로 강대한 젓들과 맞서왔기에 금세 잊어버리고 말지만.
거죽은 어디까지나 몸속을 보호하는 1차적 방어선이다.
제아무리 사냥꾼이어도 그 구조는 사람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로이드에겐 떨어져나간 신체 말단을 회복하기 위한 휴식이 불가피해보였다.
“···잠깐 쉬도록 하지.”
“뭐?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장소.
이 이상 어떤 이변이 생길지 확실치도 않은데 무슨 소리인가?
“괜한 배려라면 집어치워. 날 얕보지 말라고.”
로이드는 애써 무리하며 품속에서 검고 긴 뭔가를 보란 듯이 꺼내들었다.
그것은 채찍.
지금은 목숨을 잃은 선배의 유품이었다.
“나한텐 이 스네이크 하트가 있어. 설사 손이 이래도 문제없단 말씀이야.”
“···.”
“날 약해빠진 놈이라고 여길 생각 마라.”
억지 미소.
쓸데없는 근성 하나만큼은 끝내줘.
이 고집을 끊으려면 빅터 쪽에서 한 걸음 물어나야 할 지경이었다.
“네 멋대로 해라. 나는 주변을 좀 둘러보고 올 테니.”
“뭘 찾으려고? 출구?”
“들어온 길이 있다면 나갈 구멍도 있지 않겠나?”
“그러면 참 좋겠는데 말이지.”
중얼거리면서도 로이드는 고개를 위로 들었다.
일렁이는 청광에 눈이 멀 것만 같아, 그의 표정에 막연한 걱정의 기미가 서렸다.
‘천장에 있어야 할 게 보이지 않아. 우리가 떨어졌을 구멍이 사라져있어.’
여전히 의연하기만한 빅터의 뒷모습은 든든하지만, 아무래도 이 장소는 꺼림칙하지 않은가?
···그리고 로이드가 염려한 대로, 두 사람은 한동안 미지의 공간을 더 헤매어야만 했다.
3.
걸음을 옮긴 지 약 세 시간 남짓.
빅터와 로이드는 여전히 한 방향으로만 나아가고 있었다.
“이거 끝이 없는데?”
“음.”
상상 이상으로 내부가 넓어.
길은 일직전이지만, 대략적인 규모조차 짐작할 수 없을 정도다.
자연이 만들어낸 신비한 구조물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길게 펼쳐질 수 있단 말인가?
“어째 불길하지 않냐, 빅터?”
“또 뭐가 말이지?”
“생각해봐. 살을 태우는 빛이 나오는 수정투성이의 동굴이 언제까지고 이어진다고. 평범한 놈이었으면 이미 죽었어. 이건 마치···.”
“마치?”
“어떤 망할 자식이 악의를 잔뜩 품은 것 같은 배치 같지 않냐?”
“···.”
황당한 주장.
지나친 생각이다.
빅터는 그렇게 말하려 했다.
하나···.
“···뚜둑!”
기이한 소리.
그리고 묘한 기척에 빅터가 발을 멈추었다.
마침 건너편엔 어둠이 도사리고 있어.
드디어 지긋지긋한 자광석에서 벗어난 구역이 나타났다.
“하, 그늘이 그리워질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조심해라. 뭔가가 있다.”
“알아, 임마. 내 눈도 옹이구멍은 아니거든?”
괜한 말꼬리를 잡는 듯이 보였지만, 로이드는 긴장의 끈을 풀지 않았다.
손의 상태가 완치되지 않았기에 전투에 들어서기엔 곤란한 상황.
결국 그가 당장 의지할 건 빅터 밖에 없었다.
“젠장, 이런 곳에도 살아있는 것들이 있을 줄이야.”
심지어 그들이 상대해야할 적은 다수···.
반사되는 푸른 불빛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모습들은 분명 북적이는 무리의 그림자였다.
“어떻게 되먹은 벌레 새끼들이야?”
“어째 위에서 봤던 놈들과는 다르군.”
“엉?”
그랬다.
크기도 작은 데다, 자세히 관찰해보니 이놈들에게 날개가 없어.
전반적인 눈의 구조와 가로로 벌어진 입이 비슷하지만, 어디까지나 땅을 기는데 적합한 모습이었기에.
전날 쓰러뜨린 것들이 천둥새라 부리기에 충분한 거대한 새라고 한다면.
이것들은 늑대나 하이에나를 닮은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입구를 막고 있군.”
“···이게 전부 다 몇 마리지?”
“얼추 백은 넘어보인다.”
“망했어. 무슨 수로 이걸 다 걷어 내냐?”
그나마 다행인 것은, 놈들이 빅터와 로이드에게 대뜸 덤벼대지 않는 단 정도.
“아무래도 자광석의 영역까진 밀고 들어오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저것들이랑 대치만 할 수도 없고. 개 같은 상황인데···. 야, 빅터. 이제 어쩔 거야?”
혀를 차는 그 물음에, 빅터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도끼를 쥔 손을 앞으로 들이밀며 한 걸음 나아갔다.
“돌파해야지.”
“아니, 좀 임마! 그건 아니지? 언제나 다 쳐 죽이는 게 능사는 아니잖아? 뭔가 다른 수는 없냐?”
“준비해라.”
후퇴해봐야 기약은 없어.
언젠가 자광석이 내뿜는 광선에 말라죽을 뿐···.
차라리 기력이 남아있을 때 맞서 싸우는 것이 최선이었다.
“후우···.”
깊은 호흡과 함께, 빅터는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븐 가지의 분말을 한계까지 끌어 모아···.
이윽고 일그러진 거인의 형상이 덧씌워지기 시작했다.
몇 배로 부풀어 오른 그림자의 마수.
이는 어설픈 반쪽짜리 후케바인으로, 이름조차 없는 실패작.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기술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대스승 베누다의 비기를 절반씩 섞은 빅터의 전력.
비축한 사념을 가루 대신 다룰 수 있는, 오직 그만이 사용가능한 특별한 오의奧義였다.
“···젠장, 될 대로 되라!”
그 모습에 자극이라도 받은 것일까?
이어서 로이드도 그 뒤를 따르며 땅을 박찼다.
“빅터, 너랑 어울리면 무엇 하나 계획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구만! 이건 나중에 기회가 될 때 보여주려고 아껴둔 건데!”
로이드는 아직 유파의 비전을 전수받지 않았어.
대스승 알베르트에게 특별한 시술은 받은 것도 아니야.
대스승 크레이그나 레이가 보여준 후케바인의 경지까지 도달하진 못했다.
그렇지만 그에겐 특유의 잔머리와 편법으로 이뤄낸 독자적인 기술이 존재했으니···.
“사실 나도 마음만 먹으면, 너한테 안 꿀린다고!”
로이드는 겁이 많아.
그렇기에 빅터처럼 몸속에 이븐 가지의 분말을 흘려 넣는 무모한 짓까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그의 접근은 훨씬 안전한 천재적인 발상으로 이어졌다.
‘로이드식 괴뢰술 극형, 춤추는 꼭두각시Tanzende Marionette···.’
로이드는 자신의 몸을 은사로 휘감았다.
그리고 손끝을 통해 가루를 흩뿌려, 전신을 감쌌다.
우연인가?
로이드의 등 언저리에 삐져나온 검은 아지랑이가 마치 위로 뻗은 수사슴의 뿔 같아.
가루가 스며든 은사가 기묘하게 그런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림자를 흘려 넣은 실로 스스로의 전신을 조종하는 참신한 시도.
긴 사냥꾼의 역사에서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전대미문의 영역이었다.
“···따라올 수 있겠나?”
“감히 누구한테 하는 소리야? 이 마술사 로이님의 전력이 우스워 보여?”
“든든해 보이는군.”
“당연한 말씀.”
두 개의 그림자가 기세 좋게 튀어 나갔다.
그들은 사방을 둘러싼 무수한 적의 중심으로 파고들었다.
부웅!
빅터가 도끼를 휘두르자 충격파가 만들어졌다.
별다른 재주나 무기술 조차 아닌 단순한 참격에 불과했지만, 이것만으로도 수 십 마리의 몸뚱이가 분쇄되었다.
파앗!
그에 밀릴 세라, 로이드로 채찍을 꺼내들었다.
가루로 강화된 괴뢰술이 몸의 탄력을 극대화.
음속을 아득히 돌파한 스네이크 하트의 절편이 1초에 서넛 번 이상 왕복했다.
그 위력은 말할 필요도 없어, 끄트머리에 닿은 벌레의 외골격은 가루가 되어 으깨졌다.
학살.
일방적인 돌파.
단 두 명이 벌인 수 분 사이의 맹공에, 벌레의 무리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동족이 무수히 죽어나가면 군체를 이루는 절지동물마저 공포를 느끼는가?
빅터와 로이드는 놈들이 뒷걸음질 치는 걸 확인하고서야, 겨우 그림자를 벗어던졌다.
“대충 정리된 것 같군.”
“하, 봤지? 잘 단련된 사냥꾼만 뜨는 게 아니야. 요령도 중요한 법이라고.”
“···기본이 된 몸이 있기에 그 장난질도 통한 거다. 약한 육체였다면 억지로 가루를 받고 그 실뜨기의 도움으로 증폭되어도 못 견딜 테지.”
결국 로이드도 그에 못지않은 노력파란 이야기.
“여전히 꽉 막힌 자식. 으스댈 기회 정도는 줘도 좋잖아? 그냥 천재라고 불러주면 어디가 덧나냐?”
“나는 네 노고를 그렇게까지 폄하하고 싶진 않다.”
위기는 일단락되었다.
전투 중에 벌레들의 체액을 대량으로 뒤집어써야만 했지만.
그 덕분에 두 사람에게선 농축된 죽음의 향취가 풍기기 시작했다.
이제 땅을 기는 것들은 좀처럼 접근할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되어, 한 동안은 쾌적한 여정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 장소는 명계라 불리는 기이한 세계.
염마에게로 인도되는 저승의 통로의 여정은 그들의 상상을 초월했다.
앞으로 그들이 겪을 일들에 비하면 좀 전의 싸움은 아주 작은 사건에 불과해.
그도 그럴 것이···.
이후 빅터와 로이드는 무려 28일이나 더 동굴 속을 표류해야 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