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지의 장(2)
2.
“앗! 빅터 사부! 저기, 저기요!”
리리 리가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소녀의 눈은 산길 너머, 적란운에 가려진 어떤 불길한 것을 비추고 있었다.
“뭔데? 리리 누나? 이 앞에 뭐가 있다고?”
“아참. 평범한 네 눈엔 안보는 거였지? 우훗, 우후후···.”
“아니, 왜 누나가 우쭐대는 건데?”
마부석에서 분한 표정을 짓는 아랑이었지만, 그가 정안을 갖추지 못한 것은 오히려 다행일지도 몰랐다.
지금 그들의 앞길에 펼쳐지는 이변의 흔적이 너무나도 기이해.
보통사람이 보았다면 한 동안 떠나지 않는 오싹함을 느낄 것이 분명했기에.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검은 아지랑이.
빅터와 로이드는 그것의 정체를 단 번에 알아차렸다.
“이게 동방의 마기란 말이지?”
“음.”
“하지만 그런 것치곤···.”
흐름이 이상해.
묘하게 농도가 짙은 느낌.
로이드가 보기에, 이 형상은 지금까지 봐왔던 마녀의 영역과는 사뭇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본디 마기의 기세는 맹렬한 폭풍과도 같아.
온갖 부정적인 감정으로 이뤄진 소용돌이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 경우는 달라.
느리고, 조용하며···.
심지어···.
“···안정되어 있다?”
그 말 그대로, 마기가 가라앉아있어.
마치 검게 물든 무거운 안개가 지면 아래를 기는 것처럼 보였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 이쪽 지방은 죄다 이런 거냐?”
“아니.”
그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오래도록 동양에서 활약해온 빅터에게도 생소한 것이었기에.
듣도 보도 못한 현상.
명백히 로이드가 기존에 알던 상식에서 벗어나 있어.
순서가 반대이지 않은가?
“···기가 막히네. 마녀가 있어야 마기가 퍼지고, 그래서 결계가 만들어지는 거 아니었냐?”
“원래라면 그게 보통이지. 하나, 나도 마기가 이렇게까지 자연스럽게 안착한 대지는 처음 본다.”
“체, 이건 이미 영역이라 부를 정도가 아니잖아?”
자세히 보니 마기가 땅 속 깊숙이까지 스며들고 있어.
이 기세라면, 이미 인근에 있는 호수나 강까지 오염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예상보다 커다란 기현상에 로이드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현실과 비현실을 뒤섞는 기이한 물질이 오래도록 한 자리에 잔류한다면···.
동식물은 물론, 인간에게까지 영향이 미칠 것이 당연했으니.
거기다···.
“이곳은 대대로 신수의 땅이라고 불렸다고 하지.”
“대대로? 예전부터 이랬다고?”
그렇다면 지금까지 동방에 주둔하는 사냥꾼들 대체 뭘 했단 말인가?
로이드가 경악하며 묻자, 빅터는 팔짱을 끼더니.
“물론 그들도 손을 놓고 있진 않았다.”
“그럼?”
“이번 파견이 기록상 일곱 번째다.”
“허?”
“이곳은 아직 마기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빅터는 떠올렸다.
이 땅에는 숙련된 사냥꾼들조차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영토의 주인이 몇 번인가 바뀌었을 정도의 세월이 지났지만, 어김없이 수 년 주기로 묘한 일이 벌어진다고 하더군.”
“묘한 일이라···.”
“마녀들의 속임수와 흡사하지만 조금 궤다 다르다.”
“요컨대?”
“드물지 않게 이능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지.”
“거기에 ‘미래를 내다 볼 수 있는 여자’도 포함되고 말이야?”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어째 그저께 우리가 떨어뜨려놓은 요마 어쩌고 꼬맹이들이랑 비슷한 느낌인데?”
“···괴력난신이란 의미에선 어느 정도 일치하지.”
이쯤에서 로이드는 대충 감을 잡은 듯했다.
“그렇다면 이 임무는 낙승이겠구만?”
“로이드,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다.”
“왜? 말만 들으면 마녀의 소행이 아닌 거 같은데?”
“그걸 조사하기 위해서 우리가 온 거다.”
“하지만 몇 번이나 방문해도 진전이 없었다며?”
어쩌면 아직 규명되지 않은 신비한 자연현상일 뿐인지도 몰라.
모든 것이 사악한 존재들의 음모일 거라 생각하는 것도 그다지 건전한 추론은 아닐 터.
그렇게 로이드의 낙관론이 이어졌다.
“마녀가 처음부터 없을 수도 있지. 우리도 가끔은 편하게 일해야지 않겠냐? 아, 사실 난 즐거운 동방 관광 같은 느낌으로도 이번 여행을 즐기고 싶었거든.”
“불성실한 놈.”
“나야 항상 그렇지.”
“그보다 계속 들어라. 아직 내 이야긴 안 끝났으니.”
그러나 빅터는 이미 이전에 투입된 사냥꾼들이 남긴 기록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약 십 오년 전의 일.
“사실 이능이라고 해도, 처음에는 살짝 보통 사람보다 직감이 뛰어난 정도에 불과했다.”
“흐음?”
“그런데 세대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특별한 힘을 가진 아이가 태어났다더군.”
“얼마나 특별한데?”
“저번 조사 때는 짐승과 대화가 가능한 여섯 살짜리 소녀도 있었다.”
“오? 흥미롭긴 하지만 그게 뭐 대수람?”
“로이드.”
“아니, 그걸로 뭘 할 수 있는데?”
돼지랑 농담 따먹기라도 하나?
로이드는 경박하게 웃으며 빅터의 말을 가볍게 넘겼다.
“초능력이라니 좋잖아? 어린 애들이 꿈으로 꿀 법한 귀여운 힘이네.”
언제 숨겨온 것인지 사과까지 베어 물면서 싱글벙글.
하지만.
“···그 소녀가 자기 손으로 동생을 산에 사는 곰에게 가져다 바쳤다.”
“···켁, 쿠억?!”
“아씨, 더러워어어! 무슨 짓이에요!?”
빅터의 돌발 발언에 과육이 목에 걸렸는지, 로이드가 뱉어낸 조각 몇 개가 리리 리에게 튀었다.
당연히 리리 리는 곧장 일어나서 반격.
마차에 앉아있던 로이드는 일방적으로 정강이를 걷어차였다.
“리리 누나! 말들이 놀라니까 그러지 마!”
“하지만 이 꺽다리 아저씨가 나한테 씹던 걸 뱉었단 말이야!”
“로이드 사부!?”
“아가씨, 멈춰!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폭력 멈추라고!”
결국 로이드는 자신이 숨겨둔 간식을 모두 상납하고 나서야 리리 리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체면이 말이 아니야.
욱신거리는 다리를 어루만지며, 그가 빅터에게 다음 이야기를 종용했다.
“···야, 빅터. 그거 좀 더 자세히 말해 봐.”
“음.”
빅터의 설명은 이러했다.
동물과 교류하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란, 사정을 모르고 보면 무슨 동화 속 이야기 같아.
하나, 사실 조금만 파고 들어가도 끔찍한 전말이 숨겨져 있었다고.
“하필 발현된 능력이 여자애의 인생을 망친거지.”
“설마하니, 특별한 힘을 가진 아이는 어디서든 배척당하기 마련이다··· 그런 뻔한 소린 아니겠지?”
“아니. 오히려 사람에게 당하는 따돌림 따윈 그 소녀 입장에선 별 것 아니었을 거다.”
“동물들이 놀아주니까?”
“엄밀히는··· 딱히 그게 아니어도 아이란 혼자서 잘 논다.”
철이 덜 든 어린애에게 있어서 숲이란 놀이터.
호기심이 한참인 시기엔, 외로움조차 잊어버리고 하루 종일 뛰어다닐 수도 있어.
자신도 그랬고, 빅터의 딸인 아델라이드도 그랬다.
문제는 달리 있었다.
“말 못하는 짐승에게도 악의란 존재하는 법이야. 곰에게 속은 거지.”
“곰 따위가··· 악의를 품는다?”
“동물이 순진하다는 건 편견일 뿐이다.”
짐승이란 영악하다.
사냥꾼으로 자라난 빅터는 누구보다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뒷걸음질을 쳐서 발자국을 위장하고, 배후에서 포수를 노리는 범의 이야기는 유명하지.”
“난 처음 듣는데···.”
“들개가 사냥감을 추적하는 과정이 얼마나 악독한지 아나?”
무리를 이루고 협력 사냥을 하는 생물일수록 영리한 특징을 보여.
그 짐승들은 달아나는 표적에게 가장 치명적인 급소가 어디인지 이해하고 있었다.
바로 학습을 통해서.
“사람 수준이 아닐 뿐이지, 놈들에게도 머리는 있다. 표출되지 않아도 감정까지 존재하지. 검은 대륙에 존재하는 커다란 엄니와 긴 코를 가진 네발 동물은 심지어 장례식도 할 줄 안다고 하더군. 그리고 또···.”
“아니, 임마. 난 이국의 생소한 동물 탐방이 궁금한 게 아니라고. 잡설은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
아쉽게도 로이드에겐 생태계를 탐구하는 학자로서의 소양은 없었던 모양이다.
빅터는 잠깐 텀을 두더니.
“정황상 그 갈색 곰은 인간을 어지간히도 미워했던 것 같다.”
과거에 사람에게서 새끼를 잃은 암컷.
그 개체가 동물과 대화하는 소녀와 접촉했던 것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다.
“믿기 어렵지만, 교묘하게 속았다고 하더군. 몇 주에 걸쳐서 귀여운 사람의 아기를 보고 싶다며 꼬셨다고.”
그리고 그 결과는 앞서 빅터가 설명한 대로였다.
“부모의 눈을 피해서 몰래 데려온 동생이··· 친구라 믿었던 짐승에게 산산조각으로 찢겨서 죽은 거지.”
“···세상에.”
“썩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지.”
결말까지 음울하기 그지없어.
가까스로 도망친 소녀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
사람을 해친 곰은 마을의 사냥꾼들에게 사살당했다.
하지만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 뒤로도 태어나는 아이들은 점점 능력이 강해졌어. 천리안, 산 너머의 목소리가 들리는가하면··· 끝내는 미래까지 볼 수 있는 예지자 마저 태어날 지경이 이르렀지.”
“끄으···.”
“전부 마기의 영향 탓이다.”
빅터는 이어서 자신의 가설을 추가했다.
곰에게 영악한 지혜를 준 원인도 어쩌면 마기의 잔류 때문이 아닌가 하고.
“빅터, 너 아주 조금이지만 무슨 학자 같았어.”
“비꼬는 건가?”
“당연하지. 네 추리엔 너무 비약이 많아.”
“흠.”
“물론 그 여자애의 일은 큰 비극이긴 하지만··· 역시 그 능력 자체는 별 것 아니야. 오히려 나는 안심될 정도라니까.”
로이드는 말한다.
마녀가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이번 임무에서 목숨이 위협받을 일은 없을 거라고.
“그도 그럴게. 이만큼 길게 떠들었지만, 여전히 마녀 이야기는 코빼기도 없잖아?”
“그건 지금부터 나올 거다.”
“···뭐?”
“이 대지에 마기가 흘러나온 게, 수 백 년 전, 어떤 마녀가 방문한 이후부터였으니까.”
“그럼 그걸 먼저 말 했어야지!?”
그래서 그 마녀의 이름은?
로이드가 재촉해, 빅터는 어깨를 들썩였다.
“양손이 없는 마녀라지. 잘려나간 손목을 통해 끊임없이 노란 피를 흘리는 요물이었다고 한다.”
“어, 그거 설마···.”
“그 설마다. 순황純黃의 마녀. 전 세대의 육망성에 속한 최악의 계집이지.”
다른 이름은 황산黃酸의 마녀.
그것은 사역마를 거느리지 않는 대신, 전신에 흐르는 고농도의 강산을 흩뿌리며 닿는 모든 걸 녹여 버리는 성가신 적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녀가 현재 시점에선 이미 퇴치당한 상태라는 것···.
“여러 사냥꾼의 희생 끝에 이 땅에서 쓰러뜨렸다더군. 하지만 그로부터 수 년 뒤부터 이상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무슨··· 저주라도 남았단 말인가?”
“아니길 바라야지.”
정말인가?
오히려 빅터는 다른 것을 기대한다.
무찌를 가치가 있는 강적을.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상대를.
“제길, 네가 쓸데없는 소릴 하니까··· 괜히 나까지 불안한 기분이 들잖아?”
하나, 그것은 빅터도 마찬가지.
매개체가 죽어도 마기가 남는 것은 드물어.
심지어 백 년 단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친 정도라니···.
소문에 의하면 해가 이어질수록 벌어지는 현상들이 더욱 더 기괴해지고 있다고 한다.
뭔가 이유가 있다.
인간의 힘으로는 아직 밝혀낼 수 없는 어떤 까닭이···.
“솔직히 말해, 빅터. 여기 뭐가 있는 지 벌써부터 짐작하고 있는 거 아니냐?”
“앞서 거쳐 갔던 조사원들이 흥미로운 의견을 냈었지.”
“뭐라고?”
“순황의 마녀가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뭔가를 낳았을 지도 모른다고.”
“···.”
“불완전하게나마 태어난 그것이 여기 어딘가에 묻혀 있을 수도 있다더군.”
아스트랄.
그 섬뜩한 울림에 로이드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너, 날 놀리는 거지?”
무언.
빅터는 가뜩이나 과묵한 입을 더욱 굳게 닫았다.
30초에서 1분 사이의 짤막한 고요.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그러나 이내···.
“훗.”
빅터가 코웃음을 쳤다.
그가 드물게 보이는 삐딱한 미소가 로이드의 눈앞에서 드러난 것이다.
“야, 이··· 망할 자식!”
“미안하군. 네가 너무 진지하게 나와서 장난 좀 쳐봤다.”
“···아니, 남들은 다 그래도 너는 그러지 마. 아무리 허황된 소리라도 그 입에서 내뱉으면 진짜 같단 말이야.”
“만에 하나라도 그럴 리 없다는 걸 너도 잘 알지 않나?”
“하기야··· 이게 별 세계의 침략자와 조금이라도 관련되었다면, 나를 심부름꾼으로 보낼 게 아니라. 애초에 대스승들이 맨 먼저 달려왔겠지.”
“모른다. 이 땅에선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으니.”
“또 그러기냐?! 빅터, 임마··· 나한테 겁주면 너는 대체 무슨 이득이 있는데?”
“글쎄.”
“하필 뻥을 쳐도 아스트랄을 입에 올리다니···.”
“대스승 크레이그께서도 기왕이면 좀 더 의지가 되는 선배를 보내줬으면 좋았으련만.”
“그래, 나는 쓸모가 없다는 거지? 앙?”
말은 그렇게 하지만, 빅터는 대스승 크레이그가 그를 보낸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신뢰.
그리고 실력.
특히나 로이드는 도리스에게서 배운 마기의 추적술에 능통해.
틀림없이 이 여행에서 큰 도움이 되리라.
“아랑.”
“네, 빅터 사부.”
“마차를 멈춰라.”
그때였다.
빅터는 마차가 향하는 방향에서 어떤 기척을 눈치 챘다.
아랑이 고삐를 당겨 말의 뜀박질에 제동을 걸 쯤···.
“···이미 마중 나와 있었던 건가?”
저 멀리, 길목을 막고 있는 행렬이 보인다.
하나같이 젊어 보이는 이들 뿐.
하지만 중요한 것은 구성원의 나이가 아니야.
문제는 그들이 입은 화려한 복장이었다.
대체로 화려한 붉은 빛에 오방색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동방 특유의 복식인 꽃갓과 펄럭일 정도로 넓고 펑퍼짐한 외투가 눈에 띠었다.
마차의 바퀴가 멈추자, 무리에 중심에 선 한 여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백발.
핏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
눈동자에도 검은자위를 찾아볼 수가 없다.
그녀의 얼굴에 드러난 유일한 색체란, 오직 입가에 발린 검은색 연지뿐이었다.
“환영합니다.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의외로 맑고 고운 목소리.
그 음성에 아직 적대적인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언제부터 우리가 올지 알고 있었나?”
“일주일 전, 신탁을 전해 들었습니다.”
이어서 여인은 싱긋 웃었다.
“어서 오세요. 저희 무당촌巫堂村에···.”
번들거리는 새카만 입술에 그려지는 미묘한 곡선.
더할 나위 없이 섬뜩한 인상을 풍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