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104화 (104/186)

권위의 장(2)

2.

“···야, 빅터.”

“왜 그러지?”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마차에 오른 것까진 좋았다.

그러나 계획이 어긋나 버렸어.

분명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산길을 따라 숲을 가로지르고 있어야 할 터.

하나, 현재 빅터 일행은 번화가로 향하고 있었다.

관군의 호위와 함께···.

정확히는 감시와 연행에 가까운 대우를 받으면서.

“그 작자는 뭔 생각으로 우릴 끌고 가는 건데?”

“너도 방금 전에 들었지 않나?”

“아아, 초대 말이지? 오래도록 만나지 못한 친구가 마침 이 도시에 나타났다고 하니까, 반가운 마음에 몸소 대접을 하시겠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일국의 정점이 직접 말이야!”

“음.”

“뭔가 꿍꿍이가 있어.”

“곤란하군.”

“그래, 정말 그렇다! 아니, 우리는 어떤 권력에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초법적 조직이 아니었단 말이야?”

“출발이 좀 지연되겠군.”

“지금 그 딴 게 문제냐?!”

모자를 눌러쓴 채 고개만 끄덕이는 빅터의 반응에, 오히려 로이드만 팔짝 뛰었다.

아까는 반사적으로 ‘황태자’라는 칭호에 주눅이 들어서 자세를 숙였지만.

본질적으로 권위에 대한 반감을 가진 로이드로서는, 그것이 큰 굴욕이었던 모양이었다.

“진정해라, 로이드.”

말을 모는 아랑을 몰라도, 잠을 청하고 있는 리리 리가 깨어날 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게 되면 마차 안은 두 배로 시끄러워 질지도 몰랐다.

그러나 로이드가 그 배려를 떠올리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진정 좋아하시네! 오히려 난 네가 더 섬뜩하다, 자식아! 대체 5년간 뭔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차분해? 묘하게 분위기까지 크레이그 늙은이랑 닮아서 더 기분 나쁘다!”

“호오, 내가 대스승과 비슷하다라?”

“아니, 기뻐하지 말라고오오!”

로이드의 발광에, 결국 마차 바깥에서까지 제지가 들어왔다.

“에잇, 시끄럽다! 망할 코쟁이 놈들! 분위기 파악도 못하나?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떠들어대는가?”

“미안하군. 이 친구가 동방 여행이 초행이라 살짝 들뜬 모양이오.”

“크으··· 전하의 깊은 자비 덕에 목숨을 구한 줄 알아라!”

조금 전 수색을 명령했던 감독관은 여전히 빅터 일행을 못 마땅해 하고 있었다.

굳이 말이 아니더라도 적개심이 마차 밖에서 흘러들어와.

할 수만 있다면 당장 끌어내 처단하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역할.

빅터는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관리자를 나쁘게 보지 않았다.

“빅터, 저 꼰대가 지금 뭐라고 한 거냐?”

“소란스러운 걸 항의한 거다. 네 목소리가 좀 커야지.”

“아, 이것마저 내 탓이다?”

“아니까 다행이군.”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로이드는 슬쩍 마차의 창밖을 보았다.

그곳에는 눈에 띠게 화려한 백마를 탄 남자···.

빅터가 황태자라고 소개했던 진융이 의기양양하게 말의 고삐를 쥐고 있었다.

“···아직 믿기지가 않아. 왕족이라니, 그런 게 정말 있었던 거군.”

“동화 속 이야기라고 생각했나?”

“누굴 애 취급 하는 거냐? 내 말은··· 그러니까 저게 이 나라에서 가장 좋은 집안의 잘나신 종마라는 거잖아?”

“흠.”

표현이 좀 과격하지만, 깊게 따지면 틀린 말이 아니었다.

동방의 왕위는 수 천 년째 혈통을 중시한 세습으로 이어지고 있었기에.

“설마하니 너한테 이런 인맥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인맥···이라.”

“꽤나 친한 척하던데, 어떤 작자냐?”

“황태자가 마음에 안 드나?”

“귀족조차 질겁하는 이 로이님이 왕족을 좋아할 리가 있냐?”

“흠.”

“내 후배가 국가 권력의 개로 전락한하다니···.”

못마땅한 눈치.

설마하니 신분이나 계급을 넘어서, 아예 빅터와 친분이 있는 것까지 반감을 느끼는가?

“너무 그러지 마라, 로이드. 아까도 말했지만, 저 분과 왕가의 배려 덕분에 우리는 이 땅에서 싸울 수 있다. 병사나 용병을 대동해서 마녀의 본거지를 치는 대규모 작전이 허용되는 것도··· 전부 이 나라의 사람들이 우리 사냥꾼을 호의적으로 봐주기 때문이니.”

단체 행동을 즐기지 않는 빅터에게 해당되진 않으나.

가끔씩 동방의 정부와 협력하여 공동전선을 이루는 경우도 있었을 정도라고.

“그리고 역시 말은 조심해라. 바깥에 맴도는 자들이 서국의 언어를 모른다 해도, 지금 네가 입에 올리는 것들 하나하나가 불경죄에 속하니까.”

“후, 동방은 특히 예우를 중시한다며? 그 출신자를 내가 아주 잘 알지.”

“···레이 사저를 이 나라의 사법관들과 비교하면 어떻게 하나?”

“아무튼 간에, 그래서 넌 무슨 약점을 잡힌 거냐?”

아무래도 로이드는 오해를 하는 모양이었다.

크로이 상단과 빅터가, 황태자 진융에게 일방적인 압박을 받고 있는 게 아닌가?

···라는 식으로.

하지만 실상은 반대에 가까웠다.

“아까 그 분이 내게 이렇게 말했지. ‘맹우’라고.”

“앙?”

“그는 어디까지나 나를 친구로 여기고 있다.”

“···왕족이랑 연이 생겼다고 자랑하는 거냐?”

“끝까지 들어라.”

빅터는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전에, 진융 전하가 거느리는 패거리와 시비가 붙은 적이 있었지.”

그것은 빅터가 리리 리를 거둬들이기도 전의 이야기.

“그는 괴짜다, 로이드.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주 신분을 숨기고 여행하지.”

“흥, 왕족이 서민 놀이를 하는 게 뭔 의미가 있냐?”

“다양한 시점에서 세상을 보고 식견을 넓힐 셈인가 보더군. 왕위에 오르기 전에 최대한 놀아보려는 것인지도 몰라.”

때로는 상인의 아들, 언젠가는 타지에서 온 관광객···.

그리고 진융은 하필 빅터를 만났을 때, 철없는 무뢰배의 젊은 두목을 흉내 냈었다.

“우리는 이따금씩 이 머리색과 눈 때문에 시비가 걸리기도 하지. 그 시절엔 마침 거리에서 주먹패거리가 심심풀이로 건드리더군.”

“···무사했냐?”

“물론이다.”

내가 보통 인간에게 당할 것 같은가?

빅터의 대답은 그런 의미였지만, 로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너 말고, 임마! 그 자식들 말이야.”

“심하게 다루진 않았다.”

“퍽이나.”

“내 나름대로는 힘 조절을 했지.”

“그래, 반쯤 죽인 거라고 쳐주마.”

사실 빅터의 우직한 성격을 고려한다면, 그가 무의미한 분쟁을 즐기진 않겠지만.

걸어온 싸움까지 마다할 정도로 만만한 자는 아니었기에.

“그래서 황태자 나리는?”

“흠, 모두 때려눕힌 다음 나한테 슬그머니 다가오더군. 위병들을 거느리면서.”

빅터는 슬쩍 웃었다.

그 시절을 떠올린 것으로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 것이다.

그제야 진융은 자신의 진짜 정체를 드러냈다.

자신은 황태자.

먼 미래에 황제가 될 것이 예정된 이라고.

“너무도 당당한 패기라 어이가 없었다.”

대뜸 자신을 왕족이라 소개하는 이가 있다면 의심부터 하는 것이 정상이야.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빅터의 암안은···.

그 말이 진실임을 단 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내 폭력을 사겠다고 꼬시더군. 두둑하게 챙겨 주겠다면서.”

“하? 그래서 고용된 거냐?”

“그럴 리 있나.”

사냥꾼은 돈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 어떤 대우나 명예로도 그들을 길들일 순 없다.

특히나 고집스런 빅터를 사금으로 매수하는 건 하늘이 두 쪽 나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중엔 사병들로 협박을 하기에 또 다시 힘의 차이를 직접 보여줘야만 했지.”

“···너 관군한테까지 손을 댔던 거냐?”

“그땐 혈기 왕성한 시절이었다.”

“너나 나나 당시에도 그닥 젊진 않았을 텐데?”

“후, 그게 문제였지.”

빅터는 체포에 불응했다.

자신의 몸에 손을 대는 자들을 모두 쓰러뜨리고서, 다시금 황태자에게 거절의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그의 날카롭고 거대한 도끼 앞에서, 인간 스스로가 부여한 사회적 계급 따위 의미가 없었으므로.

‘···어느 누구도 나에게 목줄을 채울 순 없다.’

그 순간, 빅터의 풍모는 틀림없이 사자와 닮았으리라.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언제나 권력을 앞세워 하고 싶은 유희를 즐겨왔을 황태자에게, 그것이 일생일대의 충격으로 다가왔을 만큼.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나았다.

“결론만 말하면··· 통하지 않았다. 성가시게도, 내가 마녀를 토벌하는 여정에도 따라오더군.”

“이거··· 생각보다 이야기가 흥미롭게 굴러가는데?”

“지금에서야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그 시기엔 사소한 것 하나까지 짜증났었지.”

“그래, 다음은 어떻게 됐냐? 황태자랑 함께하는 마녀 사냥의 행방은?”

황태자는 사병을 대동하며 빅터를 쫓았다.

그리고 끝내, 그가 어둠의 존재와 처절하게 맞서는 장면까지 목격했다.

결계 속의 마녀.

뒤틀린 사역마.

그리고 온갖 형태의 마물들의 존재까지···.

비명.

아비규환이 벌어졌다.

그런 세계는 제아무리 일국의 황태자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하지만 역시 왕가의 인간이라고 해야 할까? 이상하리만큼 담이 커. 황태자는 보통 인간이 아니었다.”

“그건··· 무슨 의미냐?”

“실실 웃더군. 브루트급 중합체 서넛 마리랑 육박전을 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으, 응?”

“써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야. 사냥꾼의 무력을 자기네 군대에 활용할 수 있을지 따위로.”

진융은 함께 결계로 들어온 병사들이 죽어나가는 것 이상으로···.

빅터의 초인적인 힘에 매료되었기에.

“결국 그는 내가 마녀의 숨통을 끊는 순간까지 동행했다. 그런데···.”

“계속 말해. 한참 재미있는데 끊지 말고!”

“···서로를 알아보더군.”

“뭐?”

“하필 그 마녀와 황태자는 면식이 있었던 거야.”

꿀꺽.

로이드는 빅터에게 어쩌면 이야기꾼의 소질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난 세월 동안 그가 말하는 요령까지 손에 넣은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예전에, 그가 자주 찾아가던 기방의 여식이었다. 그 마녀의 이명은 ‘비연飛鳶’. 심지어 황태자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왠지 뒤끝이 느껴지는 결말인데···.”

“하지만 절대로 이어지지 못하는 연심이나, 결코 메꿔지지 않을 계급의 갈등 같은 순진한 이야기는 아니야.”

“또 뭐가 있었냐?”

“마녀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사실은 황태자와 만나기 이전부터 아스트랄과 계약을 맺고 있었지. ···어쩌면 수 천 년 전에 제국을 몰락시킨 요녀처럼, 뭔가를 저지를 셈이 아니었을까 한다.”

“음··· 그 설화 속의 요녀도 하층민 출신이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그래, 네 말이 맞다. 하나, 이번만큼은 사뭇 다른 사연이 있었지.”

처음부터 마녀는 진융의 신분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대로 내버려뒀다면, 과거의 인연을 핑계로 삼아 황태자에게 접근했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비연의 마녀가 노리고 있던 다음 계획이란···.

궁녀로 자원하여 다시금 황태자와 대면하는 데에 있었으니.

“인간은 운명이라는 단어에 설레어, 때론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기도 한다.”

“그게 마녀의 노림수였냐?”

“음.”

“미래에 있을 지도 모를 재앙에서 황태자를 구한 사냥꾼이라··· 그래서 그 작자가 널 좋게 보던 건가?”

“그 뒤로도 이것저것.”

“뭐? 또 있다고?”

“···원치 않게 황태자와는 일주일 정도 함께 더 있었야만 했거든.”

한 번은 빅터가 진융을 노리던 살수로부터 목숨을 구한 일이 있다.

종이로 만들어진 암막 너머에서 날아온 화살을 코앞에서 낚아채는 것으로···.

“암살이라니, 살벌하구만.”

“대스승 베누다께서 지시를 내렸다. 마기의 동향을 지켜볼 겸, 어쩔 수 없이 한동안 황태자의 경호 임무를 맡았지.”

왕위계승을 노린 암투는 현재도 진행 중이야.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진융에겐 그 아래로 피가 섞이지 않은 동생이 스무 명이 넘는다고 했다.

“캬, 대단한 정력일세. 결국 선대 황제가 벌인 음행이··· 후대의 족보를 엉망진창으로 만든 건가?”

“왕가의 사정 따윈 아무래도 좋은 문제였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구하고 있더군.”

거기다 아무리 싫은 인간이라 하더라도, 속내를 들여다보면 어느덧 정이 들기 마련.

특히나 사람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빅터에겐 더욱 그랬다.

“황태자라는 껍질 아래엔 고독한 사내가 있다. 외로웠겠지. 친족으로부터도 노려지는데, 평생 어느 누구와도 동등하게 말을 트고 살지 못했을 테니까. 그래서 기방의 여인에게 정을 주기도 한 거고.”

“흠, 잘나신 왕족에게도 고충은 있단 건가?”

“비범하다는 건··· 사실 한 발자국 뒤에서 보면 별 것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융 전하는 보통 사람이야.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현명하고, 아주 약간 총명한 정도의 범인에 불과하지.”

“나는 모르겠다. 아무래도 한창 굶주리던 어린 시절에 비하면, 그까짓 사연은 시덥잖게만 들린단 말이야. 외로움이 뭘 어쨌는데? 먹고 살아야 사색도 할 수 있는 거 아니냐?”

“···아무튼, 나는 그의 일생에 통틀어 정말 몇 안 되는 친구라 할 수 있겠지.”

“확신하는 거 같은데. 설마 그것도 네 능력으로 본 거냐?”

그랬다.

빅터는 상대에게서 일종의 신뢰나 동경에 가까운 감정의 흐름을 관찰했었다.

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강대한 힘.

세간에 어떤 일이 벌어지던, 일말의 보수조차 원치 않고···.

오직 마녀만을 사냥하는 덩치 큰 색목인.

황태자는 그런 빅터의 모습에서 자기가 은근히 바라고 있던 자유를 엿보았기에.

“야아, 5년인가 4년 전부터 갑자기 동방과의 무역 거래가 활발해진 게, 어쩌면 우연이 아니었을 지도 모르겠다.”

“억측이다, 로이드. 물론, 이번처럼 취미나 수집 삼아 무기를 들여오는 경우도 종종 있었겠지만···.”

“아냐, 내 촉은 잘 맞거든. 뭔가 있어. 그 황태자 나리, 아마 너한테 잘 보이려고 수작을 부린 것 같단 말이지?”

“우연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나갔다.”

“그거야 두고 보면 알겠지.”

끼익.

로이드가 농을 가볍게 내뱉자마자, 마차의 바퀴가 멈춰 섰다.

이제 빅터는 내릴 준비를 한다.

초대받은 자는 오직 그뿐.

황태자가 빅터만을 지목했기에.

“잘 다녀와라. 그 양반한테 물어보라고. 우리의 일정까지 미뤄야할 정도의 중요한 그 볼일이 뭔지.”

“오냐. 그때까지 내 목이 무사히 붙어 있다면.”

로이드는 새삼 놀랐다.

내용은 개뿔만큼이나 재미없을지언정, 빅터가 딴에는 넉살좋게 농으로 받아쳤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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