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103화 (103/186)

권위의 장(1)

1.

날이 밝음과 동시에, 빅터 일행은 크로이 상단의 책임자를 찾아 나섰다.

마녀 수색에 앞서 보급은 필수 사항.

먼 여행이 될 것이니, 네 사람이 일주일 이상 보낼 수 있는 식량의 확보가 우선이었다.

“으, 또 허드렛일인가요? 사부, 매번 이러는 것도 지겹지 않아요?”

“시끄럽다, 리리 리. 입을 놀릴 여유가 있으면 나무 상자 하나라도 더 나르도록.”

“치잇···.”

“아랑을 봐라. 너보다 어린데도 불평 없이 잘 움직이지 않느냐?”

빅터 딴에는 애쓰는 동생 앞에서 솔선수범을 하라는 의미였지만, 오히려 리리 리는 입을 비쭉 내밀었다.

“아랑은 바보니까···.”

“리리 리.”

“···네, 네! 일하면 되잖아요! 그게 사람 된 자의 도리이니까!”

크로이 상단에겐 항상 신세를 지고 있어.

매번 지원받는 입장에서 그들의 일을 조금 도와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거역할 수 없는 빅터의 가르침.

리리 리는 불평하면서도 결국 마지못해 몸을 움직였다.

그런데···.

“···이야, 놀랐어. 요즘엔 동방에서도 무역이 꽤나 활발해졌구만. 불과 십년 전까지 쇄국을 고집했던 게 거짓말 같을 정도야.”

로이드가 사과 한 알을 씹으며 걸어 나온다.

껄렁껄렁한 걸음.

양손에는 자기 짐만 가득해.

상단의 물건을 옮겨줄 생각은 추호도 전혀 없어보였다.

“그런데 빅터, 너 언제부터 밀수범이 된 거냐?”

“···듣기 거북하군.”

“하지만 이 꼴을 보라고.”

로이드는 곁눈질을 했다.

그가 지적하는 것은 인부들이 부리나케 실어 나르는 흉흉한 물건들에 대해서였다.

“항목을 보니까 끝내주던 걸. 리스트에는 희귀한 향신료와 귀금속이라고 쓰여 있지만, 사실 그 안에 들어있는 건 장인이 만든 장검이 200자루. 얼씨구? 저만한 분량이면 라이플도 100정은 되겠는 걸?”

묘하게 나무라는 말투.

하지만 심각하지는 않다.

그는 빅터를 놀릴 계기에 단지 신이 난 것뿐이었다.

“누가 봐도 이건 불법 아니냐?”

무신경한 목소리로 로이드가 지껄이자, 나무 상자를 쌓아 올리던 빅터가 무거운 고개를 들었다.

결코 틀린 말은 아니야.

잘못 걸리면 국제 문제로도 발생할 수 있는 문제였기에.

마침 빅터가 전달한 짐더미에 든 것도 스무 개의 투척용 단검, 그리고 대량의 흑색화약 탄환이었다.

“···그래. 공식적으론 허가되지 않은 무기 거래다. 만에 하나, 본국에서 발각되기라도 하면 극형을 면치 못하겠지.”

“하하, 이거 조심해서 빼돌려야겠는 걸?”

“로이드.”

“이 칼 한 자루가 암시장에선 얼마에 팔릴라나?”

위험발언.

찌릿, 주변의 인부들이 노려본다.

“···이보쇼,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좀.”

상대가 사냥꾼이라는 걸 알면서도 대놓고 지적을 해, 꽤나 초조한 눈치였다.

“이쪽도 먹고는 살아야 합니다. 최대한 사냥꾼인 댁들을 지원하고 싶지만, 상단의 신뢰가 무너지면 우리의 미래가 불확실해지니까요. 그리고 아무리 장사치라고 사람 목숨을 빼앗는 무구를 함부로 팔아넘기고 싶진 않습니다요. 이것들을 옮기는 것도 나름의 사정이···.”

그제야 분위기가 무거워진 것을 눈치 챘는지, 로이드가 손바닥을 저었다.

“다··· 당연히 장난이지, 장난! 이 몸은 언제나 상인 여러분께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그 덕에 우리가 마음 놓고 마물들과 싸우러 다니는 거니까 말이야!”

“그렇게라도 말씀해주시니 다행이군요.”

그래도 불만이 다 풀린 것은 아닌지, 인부는 연신 굳은 표정이었다.

자칫하면 싸움이 날까, 빅터는 둘 사이를 제지했다.

“로이드, 이건 우리가 동방에서 우호적인 환대를 받는 이유와 깊은 연관이 있는 문제다.”

“아아, 그쯤은 나도 알아. 높으신 양반 하나가 상단이랑 독점 계약을 했다는 거 아니냐. 동방의 귀족님께서 말이야. 아무튼 서방과의 자유로운 무역을 보장하고, 사냥꾼들이 오고 가도 문제없도록 배려를 해준다는 조건으로.”

상식 아니냐, 상식.

당연하다는 듯 으스대는 로이드의 반응에, 빅터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왜냐하면, 로이드가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기에.

“차라리 그것뿐이라면 다행이었을 거다.”

“뭐?”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설명해주마.”

대화 도중에 빅터가 고개를 돌렸다.

그가 보는 방향에서 누군가가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아는 사람이야.

빅터는 바로 그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홀든 공.”

“빅터 님, 여행 채비를 마쳤습니다. 언제든 출발 하시지요.”

초록색 코트를 입은 통통한 체형의 상인.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과 노년 사이의 사내였다.

그는 크로이 상단의 동방 무역을 책임지는 중간 관리자, 홀든이었다.

“고용인들을 시켜 좋은 품종의 말과 마차를 확보 했음죠. 이번 여행길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언제나 고맙소. 매번 신세만 지는군.”

“별 말씀을. 다른 건 필요 없으니, 다음에도 살아서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음.”

“당신은 유독 사냥꾼만이 아니라, 우리들··· 검을 들지 못한 자들 모두의 희망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홀든, 그는 사냥꾼이 되지 못한 이였다.

마녀로 인해 고향이 사라지던 때, 운이 좋아서 마을 바깥에 있었던 자.

고작해야 상인에 불과했던 그에겐 어둠의 존재와 싸울 힘도, 용기도 한참 모자랐어.

결국 사냥꾼의 삶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평온한 일생을 보내기에는 너무도 잃은 것이 너무도 컸기에.

그는 크로이 상단을 통해서나마 그들을 조력하기로 한 것이었다.

“빅터 님, 당신이라면 알아주시겠지요.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같은 과거를 공유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이오.”

“처자식을 잃은 심정이란, 역시 직접 겪어봐야만 아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저는 누구보다 당신의 고통을 압니다.”

그랬다.

그 또한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아버지였던 것이다.

다섯 살과 여섯 살인 자매.

심지어 딸이 둘씩이나 있었어.

늦은 나이에 겨우 얻은 소중한 보물이었다.

비극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어나, 두 딸이 어둠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홀든이 마녀에게 원한을 가진 연유도 바로 그러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비록 노쇠한 흔적이 역력하지만, 당장 홀든의 표정에서는 오래된 증오 특유의 독기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어.

그는 무거운 운명에서 해방된 얼굴이었다.

세월이 지난 탓에 마음이 누그러진 것인가?

끝내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일까?

···아니, 그가 분노에서 해방된 이유는 지극히 단순했다.

이미 오래 전에 복수를 이뤘기 때문이었다.

바로 빅터의 손으로 통해서.

염원하던 원수의 목을 손에 넣을 수 있었기에.

“저는 당신 덕분에 구원받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홀든에게 빅터는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이 하찮은 지원에 부담을 느끼실 필요는 없습니다.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말씀만 해주십시오. 힘이 닿는 데까지 돕겠습니다.”

“솔직히 당황스럽소. 점잖으신 홀든 공께서 갑자기 왜 이런 극성을···.”

언제나 같은 출전.

하지만 홀든의 태도는 평소와 사뭇 다르다.

역시나 그는 뭔가를 눈치 채고 있었던 것인가?

“설마···.”

“유명한 이야기죠. 이미 저희 상인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퍼져있습니다.”

홀든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이번에도 수상한 붉은 머리의 여인이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졌다··· 라고.”

우연인가?

필연인가?

하필 빅터가 이번 임무에서 향할 지방이 바로 그 무대였다.

미래를 예언하는 신묘한 무당이 있다는 소문.

그리고 적발의 출현···.

그 모든 것이 한 곳, 대륙의 중심부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빅터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던 소식이기 때문이다.

그가 난색을 표한 이유는, 기밀이 사냥꾼이 아닌 다른 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단 사실 뿐이었다.

“어디서 새어나간 겁니까? 언제나처럼 지령의 내용은 극비로 다루었는데.”

“하필 문제가 되는 그 여자를 맨 먼저 발견한 게, 이쪽 상단에서 고용한 현지인 일꾼입니다. 숨기는 게 더 어려운 정보지요.”

“흠.”

“물론 어느 누구도 그게 자색의 마녀라고 하진 않습니다, 빅터 님. 밀항자는 흔하고, 또 붉은 머리도 드물지 않게 대륙 여기저기에 퍼져있지 않나요? 저만해도 그런 여성을 여럿 알고 있습니다.”

“물론이오. 그런 건 이쪽도 잘 알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불확실한 정보에 휘둘렸다가 일을 그르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니.”

“그 당시, 빅터 님의 젊은 혈기는 저도 잘 기억하고 있지요. 그야말로 도끼를 든 귀신이 아니었습니까?”

“···면목 없소.”

다행히 지금 빅터에게 격정의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겪은 일.

전에도 비슷한 소식은 있었어.

그때마다 빅터는 그 지역을 방문해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하나, 대부분은 헛소문.

정보나 이야기가 와전된 적이 많았다.

정말로 마녀가 있었다고 해도, 그게 빅터가 찾던 육망성의 그녀는 아니었다.

어차피 동방인이 보기엔 옅은 갈색머리도 붉게 보이는 것은 매한가지였기에···.

“홀든 공, 걱정 마시오.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터이니.”

“하하, 확실히··· 예전의 빅터 님과 비교하면 지금이 훨씬 의젓하지요.”

고난을 하나하나 넘어오면서, 5년 사이 빅터는 놀라울 정도의 냉철함을 얻었다.

어쩐지 타인을 대하는 자세까지도 좀 더 부드러워졌어.

그것은 옆에서 지켜보던 로이드도 크게 체감될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에 빅터는 클라르테라는 붉은 머리 여성을 보자마자 목 졸라 죽일 뻔한 전적도 있으니···

“하지만 친구여, 어떤 임무이던 간에 항상 조심하시길. 특히나 이번 전장은 신수新獸의 땅이라 들었습니다. 현지인들에게 듣기로, 그곳에선 아주 요사스런 짐승이 나온다고 하니 말입니다.”

“신수라···.”

“나는 이제 새로운 슬픔을 견디기엔 너무 늙었습니다. 이제 동지의 죽음을 소식통으로 듣는 건 사절하고 싶군요.”

걱정스런 말과 함께 무운의 악수를 건네는 홀든.

그는 빅터가 동방으로 넘어온 이후로 사귄 몇 안 되는 지인.

특히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이기도 했다.

차마 확답하지 못하고, 빅터는 그저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사부! 제 할당량은 다 했어요!”

어느새 리리 리가 저 멀리서 손을 흔든다.

성인 남자도 해내기 어려운 짐 나르기를 마쳤는데도 아직 여유가 있어 보여.

반면, 그 옆에는 녹초가 된 아랑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랑, 내기는 내가 이긴 거다? 봤지? 내가 올긴 게 다섯 짝. 하지만 너는 고작 네 개.”

“무식하게 힘만 쌔.”

“뭐? 방금 뭐라 그랬지?”

“아니, 누나는 못 당하겠다고···.”

“흥, 당연하지! 내가 두 살이나 많은 걸!”

“···그런 문제일까?”

둘 사이에는 모종의 경쟁까지 붙었던 모양이야.

자기 나름대로는 아랑보다 일을 좀 더 했다며 으스대기까지 한다.

툭.

무언가가 어깨를 건드려.

아니나 다를까, 로이드였다.

“그럼 슬슬 가보실까? 상인 아저씨가 말했던 그 신수의 땅인지 뭔지로.”

막 사과를 전부 먹어치웠어, 과육이 사라진 꼭지만을 입에 물고 있었다.

버릇없게도, 로이드는 그것을 바닥에 뱉어내더니.

“자, 집합! 꼬맹이 제자들아! 기대하도록 해라. 이 로이 삼촌께서 즐거운 여행길을 위해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보따릴 풀어줄 테니까.”

어차피 말도 통하지 않을 것을···.

“너는 동방의 언어부터 먼저 배우는 게 좋지 않겠나?”

“왜? 어차피 네가 다 번역해줄 텐데.”

“···지금 나더러 네놈의 헤픈 수다를 일일이 통역해서 애들에게 들려주란 건가?”

“그럼 달리 무슨 방법이 있는데?”

“···.”

“이건 동화 같은 거라고. 내용이 좀 자극적이고 외설적인 게 섞여있긴 하지만, 요즘 애들은 조숙하니까 괜찮겠지.”

“아서라, 이 정신 나간 자식아.”

빅터는 그게 리리 리나 아랑에게 악영향을 미치지나 않을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왁자지껄한 여행의 예감에, 빅터는 시작을 하기도 전부터 진이 빠졌다.

그런데 그 순간.

로이드나 빅터가 마차에 오르기도 전에···.

“거기 색목인들··· 잠깐 멈춰보시지.”

검은 도포를 입은 무리가 몰려온다.

그들은 이 일대의 치안을 지키는 관군···.

“방금 댁들이 옮긴 짐짝 속을 한 번 봐야겠군.”

어느새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

무기만 들지 않았을 뿐, 위협적인 포위였다.

인부들은 물론,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리리 리와 아랑도 사로잡힌 상태···.

대처하기엔 늦었다.

“이,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저희는 당국의 허가를 받고 장사하는 건데···. 거래처인 지역 유지분과도 이미 이야기가 끝낸 문제입니다.”

홀든이 최대한 정중한 동방의 말을 전했지만, 감독관으로 추정되는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바로 그 감찰관의 지시로 우리가 온 것이다.”

“예? 그럴 리가요?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오늘 아침, 임시로 부임한 최고 지휘관께서 결정하신 일이다.”

“너무 하십니다. 이런 억지가···.”

홀든의 개입에도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오히려 크로이 상단과 빅터 일행을 잡아둔 사이, 이미 관군들이 짐을 뒤지고 있었다.

당연히 내용물을 들키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무기, 전부가 날붙이에 화포입니다!”

“이 상자도 그렇습니다!”

“역시 그랬군. 너희가 시장에 서방의 무기를 몰래 풀던 자들이었나?”

“···.”

“여봐라, 이들을 당장 포박하고 물품을 모조리 압수해라.”

성가신 일.

빅터는 최악의 경우 무력 충돌까지 각오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감독관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고압적인 말을 건넸다.

그보다 더 높은 관직을 가진 자의 명령인가?

“너무 일을 소란스럽게 만들지는 말도록.”

“···예? 하지만 현장에서 밀수가 발각된 상황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즉시 검거하는 것이 원칙···.”

“자네, 귀가 먹었나? 나는 방금 하지 말라고 했는데?”

“조, 존명!”

감독관은 즉시 무릎부터 꿇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그를 내버려둔 채.

최고 지휘관으로 추정되는 작자가 빅터의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왜소한 몸집을 가진, 서른 쯤 되어 보이는 관록의 사내.

짧은 머리를 위로 올려 이마가 다 보인다.

짚은 눈썹과 크게 뜬 눈은 빅터를 마주보는 내내 단 한 번도 깜빡이지 않아.

그의 광택 없는 시선은 묘한 박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틀림없는 동방의 민족이야.

하지만 놀랍게도 그의 복장은 서양의 옷.

검정과 흰색으로 이뤄진 연미복에 가까운 행색이었다.

“오랜만이군, 빅터.”

아는 자인가?

로이드가 그렇게 묻기도 전에, 빅터는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동시에 빅터까지 무릎을 꿇는다.

동방에서 취할 수 있는 최고의 경의···.

로이드는 경악했다.

호전적인 그조차 꼬리를 말 정도의 상대란 말인가?

이어서 상대는 호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만하게. 자네가 이렇게 나오면 기껏 평범하게 변장한 의미가 사라지고 말았잖는가?”

어딜봐서 평범하다는 것인지.

빅터는 속으로 기가 막혔다.

“여전히 장난이 심하십니다, 전하.”

“뭐, 어쩌겠는가?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짐은 친구도 만나질 못하는 처지인데.”

그러면서 연미복의 사내, 빅터가 전하라는 칭호로 부른 인물이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시게, 맹우여.”

“···그럼, 실례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그 손아귀를 맞잡고 일어서는 빅터를 바라보며, 로이드는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자세를 낮춰라. 로이드, 이 분께서는···.”

그러자 그 마음을 읽은 빅터가 겨우 입을 열었다.

“이 동방 전역을 다스리는 대국, 적나라 ‘시나(चीन)’의 황태자. 진융이시다.”

“···너 지금 나를 놀리는 거지?”

“갑작스런 상황이라도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이다.”

“저, 저 홀쭉한 양반이··· 동방의 와, 왕위 계승자라고?”

“우리가 이 대륙에서 당당히 활동할 수 있는 건 모두 이 덕분이지.”

아뿔싸.

듣고 보니 뒷짐을 진 자세가 보통이 아닌 것처럼 보여,

이렇게 많은 사람을 부리면서도 익숙한 태도에 말로는 표현 못할 품격이 느껴졌다.

로이드는 급히 입을 닫고 빅터의 지시에 따라 그의 자세를 따라했다.

방금 자신이 내뱉은 실언이 심각한 무례란 걸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다.

하나, 정말 다행히도···.

이 자리에 모인 관군들 중에서 서양의 말을 아는 이는 없었다.

“이 멀대같은 자도 자네의 사냥꾼 동료인가, 빅터?”

“···예, 그렇습니다.”

“흐음, 얼굴이 마치 뱀 같은 사내로고. 생긴 것만 봐선 영 미덥진 못한데.”

그 솔직한 감상에, 고개를 아래로 향한 빅터의 입가가 피식하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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