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101화 (101/186)

망각의 장(1)

1.

마몬의 적석···.

초자연적 기현상을 만들어내는 마녀의 보석.

그 불가사의한 돌에 대해 빅터와 로이드가 자세한 대화를 개개한 것은 그로부터 수 시간이 지난 뒤였다.

하지만 이들은 그에 앞서 보다 중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될 지어니···.

그것은 그들의 숙적, 아스트랄이 품고 있는 진정한 목적과··· 어떤 슬픈 운명에 대한 담론이기도 했다.

2.

숙소.

달이 올려다 보이는 고풍스런 건물의 3층 난간.

로이드는 그곳에서 왼팔을 올린 채, 유유자적 순풍을 쐬고 있었다.

‘좀 더 낙후된 곳일 줄 알았는데. 휘유, 이렇게 보니 동방도 썩 나쁘지만은 않군.’

이게 이국의 풍취라는 건가?

그는 나름대로 동쪽 대륙이 가진 건축양식과 풍경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밤하늘 아래.

해가 진 도시였음에도 여기저기에 은은한 등불이 퍼지는 게 끝내줘, 이는 서양에선 볼 수 없는 신묘한 모습이었다.

마치 반딧불이 같아.

어쩌면 낮보다도 밤의 세계가 더욱 화려하고 밝은 것인지도 몰랐다.

‘이 정도면 한 달 내내 쥐뿔도 재미없는 배 안에서 견딜 보람이 있지.’

특히 크로이 상단에서 통째로 빌려준 여관이 은근히 위치가 좋았던 것도 행운이었다.

앞마당이 훤히 보일 정도···.

제대로 손님만 잘 관리한다면 상단이나 타지의 관광객을 상대로 벌이가 괜찮을 지도 몰랐다.

예쁜 아가씨들을 동반한다면 이루 말할 필요도 없겠지.

은근히 괜찮은 수완이 아닌가?

본인이 사냥꾼이 아니었다면 나름대로 훌륭한 장사치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시덥잖은 생각을 하며 로이드가 슬쩍 입 꼬리를 올린다.

그리고는 홀짝.

그는 오른 손에 든 자그마한 그릇에 담긴 음료로 목을 축였다.

“···크, 빅터 자식, 이 좋은 걸 자기 혼자 5년 넘게 독점해 왔단 말이지?

동방에서 흔한 과실을 발효시켜 만든 물건으로···.

술을 못 마시는 로이드였지만, 종업원의 권유로 마지못해 맛을 봤다가 그만 푹 빠져버리고 만 것이었다.

고작 약주 몇 잔에 취기가 올라, 노련한 사냥꾼조차도 그간 오래도록 잊고 있던 여유와 나른함이 동시에 몰려왔다.

하지만 너무 긴장이 풀렸던 탓일까?

“···면목 없다. 하지만 나도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라.”

“으흐어으아억!”

로이드는 갑자기 등 뒤에 나타난 빅터의 출현조차 눈치 채지 못했다.

“뭐··· 뭐냐, 후배! 너였냐?!”

“뭘 그렇게 놀라고 있지?”

“아니, 임마! 기척도 없이 다가오니까 그렇지!”

역시 술에 너무 취해서 경계가 허물어졌던가?

···아니.

아니었다.

로이드가 아무리 방심했다곤 하나, 이렇게까지 가까이 접근한 상대의 발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를 증명하듯, 빅터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군. 걸음걸이를 숨기는 게 이젠 버릇이 돼서.”

“오호라, 그게 잘나신 체의 유파가 가진 동방의 비술이냐? 혹시 그 꼬마 아가씨가 내 단검을 몰래 훔쳐낸 재주도?”

“그래. 리리 리도 그 정도 기본은 몸에 베여 있었지. 주로 장난질에 더 열심히 쓰곤 하지만.”

“그렇다면 그림자나 가루는 필요없단 이야기인데···. 못 보던 사이에 너도 참 재미있는 걸 익힌 거 같다?”

“음, 낙엽 흘리기라는 보법이다. 대스승 베누다의 기술이기도 하고.”

“오! 쓸만하겠는걸. 어디··· 나도 한 번 배워볼까?”

“그건 네가 얼마나 동방에 머무느냐에 따라 달라. 단기간엔 힘들 거다.”

“···익히는데 얼마나 걸리길래?”

빅터가 말하길.

사람은 단련하기 나름이라 했다.

머리가 좋고 운동신경이 남다른 자라면 최단기간으로 반 년.

범인은 일 년간의 진득한 수련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일 년이라고? 아, 그럼 난 관두련다. 기껏 동방까지 왔는데 땀내 나는 수련까진 하고 싶지 않거든?”

끈기나 근성 따윈 질색이야, 로이드는 질색하며 혀부터 찼다.

“징하구만. 빅터, 넌 역시 굉장한 자식이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 아직 내가 더 놀랄 게 있어?”

“글쎄···.”

“그렇게 나오시겠다? 그럼 나도 생각이 있지.”

로이드는 빅터가 무엇을 부담스러워하는 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연극배우와 같은 과장된 몸짓을 하더니.

음유시인 특유의 높은 고음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오오, 과연 무적의 빅터님! 역시 모두가 동경하는 사냥꾼의 귀감답다네! 만인의 영웅! 동방의 활약은 저 멀리 서국까지 전해지리니!”

“···너무 그러지 마라. 나는 재능이 없어서 익히는 게 남들보다 훨씬 느렸으니까.”

“아이고, 나리. 농담도 잘 하셔.”

빅터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자신은 햇수로 2년 이상이 걸렸다고 순순히 털어놓았다.

덩치가 쓸데없이 큰 탓에, 이론을 실천하기 전까지 오랜 시행착오가 있었다고.

“내가 요령이 없는 놈이란 건, 누구보다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나?”

“하! 뭐, 그건··· 그렇지.”

로이드는 짓궂게 피식 웃어보였지만, 그 미소엔 결코 빅터의 노력에 대한 폄훼가 스며있지 않았다.

필시 오래도록 반복된 노력의 결심이 숨어있으리라.

묘하게 가라앉은 빅터의 얼굴엔 그런 고난의 흔적이 엿보였기에.

“여하간, 네가 날 찾으러 왔단 건··· 꼬맹이들은 재우는데 성공했단 의미겠지?”

“그래. 둘 다 이면 공간에서 원귀를 만난 게 어지간히도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알게 모르게 기를 빨리기도 했는지 지쳐서 축 늘어졌더군.”

“좋아. 그럼 이제 육아담당의 소견을 좀 들어볼 수 있을까?”

“육아··· 뭐?”

“아니, 그건 그냥 농담이고. ···사실 내가 묻고 싶은 건 어떤 여자애에 대한 거지. 네 첫 번째 애제자 말이야.”

“무슨?”

“그 꼬마 아가씨, 사실은 그거잖아?”

로이드는 오른 손을 들더니, 검지와 새끼를 제외한 모든 손가락을 붙였다.

흡사 귀를 세운 토끼.

또 어찌 보면 여우나 늑대를 닮은 모양···.

그것은 사냥꾼들 사이에서 어떤 사악한 것을 가리키는 제스처였다.

“이제 좀 털어놔라, 임마.”

가벼운 재촉.

흠, 하고 빅터는 무거운 신음을 삼켰다.

갑자기 분위기가 심각해졌어.

로이드의 표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뭇 진지하게 변했다.

이미 과실주의 취기 따위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아.

요마와 뒤섞인 육체가 순식간에 술의 성분을 분해버린 모양이었다.

“···알고 있었나?”

“뭐, 대충은.”

로이드는 어깨를 들썩이더니 이제 술병을 거꾸로 뒤집기 시작했다.

몇 방울 흘러나오는 걸 경박하게 혓바닥 위로 떨어뜨리고 있어, 어지간히도 입이 심심했던 듯 보였다.

“리리 리라고? 그 아가씨는··· 이식을 받지 않았지. 그런데 정안이 없는데도 어둠 너머를 꿰뚫어보더라.”

“···.”

“분명 마기를 감지하고 있었어. 그때부터 감 잡았지. 절대 보통이 아니라고. 나 참, 그런 건 소문으로만 있는 줄 알았는데.”

“로이드, 말을 돌리지 말아다오. 리리 리에 대해 어디까지 파악하고 있지?”

“그 아이가 마녀였단 것까진 알아.”

침묵.

빅터는 잠시 후 한숨을 내쉬었다.

로이드가 나쁜 마음이 없다는 걸 확신하고 나서야 내놓은 반응이었다.

“···리리 리는 자신의 과거를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 것 같더라. 나이 또래에 비하면 너무 천진난만했지. 지나칠 정도로 왈가닥에, 철도 없고···.”

“차라리 아랑 쪽이 의젓하지.”

“그래! 바로 그거야! 그 녀석, 사내치곤 싹수가 있더라고.”

“사연이 있지만 강단 있는 아이다. 그 녀석과 함께라면 리리 리도 조금이나마 성장할 테지.”

“···뭔 자식 자랑하는 아버지 같은 얼굴을 하고 자빠졌냐?”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팔불출.

로이드는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쳇, 아무튼 나도 이런 경우는 직접 본 게 처음이라 별다른 말은 못하겠지만 말이야. 이제 털어놔 봐. 언제까지 숨길 셈이었냐?”

“조만간 설명하려고 했었다. 대스승 크레이그께도 서편을 보낼 생각이었지.”

“아, 그러셔? 기왕이면 좀 일찍 해주지 그랬어?”

빅터는 로이드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의 파동이 그저 섭섭함뿐이라는 걸 간파했다.

암안까지 사용할 필요도 없어.

로이드의 눈동자는 좀 더 자신을 의지해주길 바랐다.

“내가 말했지? 어린애는 안 팔아먹는다고.”

그제야 빅터는 사실을 털어놓기로 한다.

“···3년 전쯤, 나는 제물로 바쳐지기 직전의 마을을 방문했다.”

“타이밍이 좋았군?”

“아슬아슬했지. 분명 마을 사람들을 저편의 존재에게 바치는 것까진 막을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계약이 끝난 상태였다. 너무 늦었어. 지금도 그 당시를 떠올리면, 아둔한 나 자신에게 치가 떨린다.”

왜냐하면 끝내 비극을 막지 못했기 때문에, 라고 빅터는 덧붙였다.

한 불행한 소녀가 있었다.

그 아이의 인생은 언제나 족쇄와 함께.

걸음마를 시작한 시점에선 언제나 목과 양손, 양다리에 구속구가 달린 채였다.

기억조차 못하는 어린 시절, 한 부잣집에 일꾼으로 팔려 왔기 때문이었다.

노예···.

소녀는 언어를 배우기도 전에 주인에게 고개를 숙이는 법부터 배웠다.

철이 들 무렵에는 이미 모진 노동과 허드렛일에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소녀는 그만 깨닫고 만다.

그 집안에 자신과 같은 나이대의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주인에겐 딸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인형처럼 예쁘고 귀여웠다.

노예인 소녀가 보기에 모든 면에서 자신과는 달랐다.

자기처럼 흙과 먼지투성이가 아니야.

피부는 하얗고, 목소리는 청아했으며···.

추운 마구간에서 말똥 냄새가 나는 볏짚을 덮고 소녀와 다르게, 상대는 언제나 따뜻한 방에서 포근한 이불 속에서 잠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결정적인 차이는···.

성장할수록 목을 죄여오는 속박.

언제나 팔에 달라붙는 성가신 수갑의 무게.

그리고 발목의 살점에 끝없이 스쳐 염증을 일으키는 가증스런 쇠붙이의 존재였다.

“그 아이는 당연히 의문이 생겼을 거다. 자신이 주인집 딸과 근본적으로 얼마나 다른 지···.”

결론은 간단하다.

둘 다 인간의 자식.

모두 동년배의 여자아이.

그러나 현실은 잔혹하다.

태생의 차이가 모든 것을 뒤엎어버리기에.

“흥, 어차피 흔한 이야기잖아. 그런 건 어디에나 있는 신파라고.”

“그래.”

“새삼스러울 것도 없네. 인생은 원래 불공평하잖아? 이 세상은 출신에 따라 별별 부조리한 일이 생기니까.”

소녀의 사연이 짜증난 모양인지, 로이드는 거칠게 등을 난간에 기댄다.

달관한 듯 함부로 말을 뱉지만, 결코 그걸 받아들이지 않을 셈이었다.

“그래서? 결국 그딴 이유로 그 애는 아스트랄이랑 계약을 받아들일 거냐?”

빅터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배고픔에 굶주리기 싫었다고 하더군. 매를 맞는 것도, 손이 부르틀 때까지 풀을 뽑는 것도 말이다.”

“···알만해. 노예가 해방을 바라는 것도 당연하지.”

처지를 직접 비교할 대상이 생겨난 순간···.

소녀의 비참함은 상대적으로 더욱 크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증오가 되어 저주를 불러온다.

진심으로 세상을 원망하는 자의 그 간절한 외침은, 차원 사이에 암약하는 사악한 존재를 부르기에 충분했으리라.

그리하여, 또 새로운 마녀가 이 세상에 생겨나고 말았다.

하지만 이때, 빅터는 그 소녀의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빅터, 네가 그 고리를 끊어준 거지?”

“음.”

그는 회상한다.

자신이 순수한 유성의 파편으로 이뤄진 도끼를 통해서, 막 마녀가 된 소녀의 운명에 개입한 순간을···.

“어떻게 한 거야? 성공할거란 보장은?”

“어째서인지 알 수 있었지. 믿기 어렵겠지만, 이것에겐 의지가 담겨있다.”

빅터는 도끼를 뽑아들어 로이드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푸른 광체가 그의 의지에 반응해 번쩍이는 듯 보였다.

“그 때, 나는 처음 깨우쳤다. 마를 베어내는 이 무구라면, 아주 작게나마 아이와 연결된 놈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고.”

결과만 설명하자면 그것은 성공했다.

의식이 끝난 직후.

아직 어둠의 유대가 견고해지지 않은 틈을, 빅터는 놓치지 않았다.

갈랐다.

베어냈다.

본디 존재하지 않을 계약의 흔적.

정안으로도 비춰질 리 없는 차원의 맹점을···.

“이거 놀라운 걸. 이론상 가능할 지도 모른다고··· 설마하긴 했지만, 정말로 아스트랄과의 계약을 무효화시키다니··· 이거 본토의 대스승들이 들으면 놀라 자빠지겠는데? 좋아, 날이 밝으면 바로 배편으로 소식을 알리자.”

“아니, 그건 좀 참아다오.”

하지만 그 대가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일방적으로 차원 사이의 규율을 깨부순 반동이 계약자에게 전해졌기에.

“리리 리의 정신연령이 보통보다 낮은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으으음, 빅터. 그러니까 너는 이렇게 말하는 거냐? 그 부작용이 기억의 상실이라고?”

“그렇지.”

“아니, 그건··· 오히려 다행인 거 아니냐?”

불행한 과거를 잊어버리고 새로 출발할 기회.

결코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다.

때로는 모르는 것이 나은 사실도 있는 법이기에.

“아니, 기억만 잃는 정도라면 다행이지.”

“그럼 뭐가 또 있단 말이야? 부작용은 그거면 충분한 거 아니었어?”

그러나 빅터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경악의 사실을 토로했다.

“리리 리는···.”

아이를 가질 수 없다.

빅터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 목소리엔 비통과 슬픔이 담겨있었다.

사실은, 마녀가 된 아이를 구할 수 있는 방법엔 또 다른 잔혹한 조치가 있었기에.

그것은 바로 마의 세계에 이어진 어떤 내장 기관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나는 그 아이의 ···을 적출해야했다.”

“뭐, 뭐라고? 빅터, 너 임마··· 방금 무슨 소릴?”

“···.”

“장난 이지? 아니면 내가 잘못들은 건가?”

깜짝 놀라 되묻는 로이드에게 빅터는 이를 악물었다.

처절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한 일을 더 이상 숨길 생각이 없었다.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건 다른 의미가 아니야.

거기엔 그 무엇보다 직설적인 뜻이 담겨있었다.

이윽고 빅터는 다시 입을 열어,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내가··· 이 손으로 직접 리리 리의 자궁을 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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