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종의 장(5)
6.
공교롭게도, 하늘에는 해가 기운다.
상가가 아닌 구석의 뒷골목은 어둑하기 짝이 없어.
아직 밤이 오려면 한참이나 남았음에도, 여기저기 음산한 그늘이 저 있었다.
그것이 묘하게 요사스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긴장한 소녀의 숨소리도 그 무거운 공기를 한층 더 깊어지게 만들어 갔다.
“아랑! 내 뒤에서 절대 떨어지면 안 돼!”
다급한 목소리.
거기엔 지금껏 소년이 소녀에게서 본 적 없는 위기감이 담겨있었다.
그 정도로 리리 리는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누나, 대체 뭘···.”
리리 리가 적대하는 것이 아랑에겐 보이지 않았다.
소년의 눈동자에 비춰지는 것은 그저 황토와 자갈로 쌓아올린 돌담···.
그리고 깨지고 닳아빠진 바닥의 풍경뿐.
아무리 봐도 특별히 달라진 건 없어.
아랑은 리리 리가 자신을 놀리려고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잔말 말고 있어! 지금만큼은 내 말을 고분고분히 들어달란 말이야!”
그 초조해 보이는 태도에 거짓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칫, 무기가··· 하필 이럴 때!”
소녀는 괜한 소동을 일으키지 말라는 사부의 당부를 순순히 지켰다.
그래서 그만 숙소에 자신의 전용 무장인 ‘링 블레이드’를 두고 온 것이다.
지금 당장 그녀가 마땅히 사용할 수 있는 거라곤, 기껏해야···.
‘···비녀?’
그랬다.
소녀는 어느새 자신의 머리에 꽂혀있던 쇠붙이 막대를 뽑아들고 있었다.
아랑은 그때 처음으로 리리 리가 머리를 풀어헤친 것을 보았다.
의외로 미려한 장발이야.
말아 올려 고정했을 때엔 몰랐지만, 그 길이는 허리까지 내려올 정도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야.
소년은 그보다 소녀의 손아귀 쪽에 집중했다.
“미치겠네. 그나마 이거라도 챙겨 와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나비를 형상화시킨 장식은 둘째치자.
그 아래에 드러난 길쭉한 부분이 날카로워.
길이도 단검 정도는 된다.
최소한 호신용이라 부르기엔 충분해보였다.
역시나 평범한 장신구는 아니야.
그것의 몸체 부분은 은은한 푸른빛을 내는 금속질의 칼날이었다.
‘이건 어디에선가···.’
본 기억이 있다.
그다지 오래 머릿속을 더듬을 필요조차 없어.
바로 빅터가 다루던 기이한 형태의 도끼와 매우 닮았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리리 리의 비녀는 그 파편의 일부로 이루어져있었으므로···.
“···뭔가 이상해. 지금껏 이런 적은 없었는데.”
소녀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동요를 감추지 못해.
그 낙천적이고 활달하던 리리 리조차 두려운 기색이 역력하다.
빅터와 함께하면서도 경험해보지 못할 정도의 일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 벌어진 사태가 그 정도로 심각한 것일까?
아니···.
지금 그녀가 무서워하는 것은 미지의 현상 탓이 아니야.
물론 자신의 안위 때문도 아니었다.
그건 바로 이 자리에 지켜야할 사람···.
즉, 아랑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넌 벽을 등지고 있어! 내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그녀는 알았을까?
어느새 자신이 소년을 대하는 태도가 변했음을.
성가신 짐덩이라 불평하기에 앞서, 애초에 보호해주는 것이 당연한 동생이라 느끼고 있었다는 걸.
하지만 리리 리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으니···.
“리리 누나!”
“조용히! 넌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니까!”
“그게 아냐! 뒤를 보라고!”
“뭐?”
자신이 처한 상황의 정확한 이해였다.
아랑의 외침에 뒤늦게 시선을 배후로 향하자···.
그곳에선 터무니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벽이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아랑이 기대고 있었던 담이 홀연히 자취를 감췄어.
그뿐만이 아니라, 거리의 구조 또한 변해있었다.
“마, 말도 안 돼!”
깜짝 놀란 리리 리가 앞을 보자, 이번엔 또 커더란 무언가가 코앞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골목을 이루던 건물의 일부였다.
···이어서 개변이 반복된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지만, 이제 주변의 풍경은 완전히 이질적인 장소로 바뀌어 있었다.
“잠깐만, 아랑! 이건 우리가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릴 때마다 배경이 뒤섞이고 있어!”
“···이게 그 결계인지 뭔지 하는 거야?”
“아니야. 이건 결계도, 영역도 뭣도 아니라고! 완전히 다른 뭔가··· 마치 다른 세계에 들어와 버린 것 같아.”
아는 것이 없는 아랑은 논외.
식견이 짧은 리리 리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결국 보이는 것에 밖에 의지해야만 한다.
“···사부가 말했어. 마의 존재랑 싸울 땐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으니, 침착하게 응하라고.”
“어, 어떻게?”
“오감에 의지해야지.”
우선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정황이다.
수시로 달라지는 사방.
미로나 다름없어.
그래도 최소한 손을 뻗으면 눈앞의 구조물이 잡히기는 한다.
다시 말해, 환각처럼 성가신 술법은 아니란 의미였다.
다음은 정체불명의 기척을 풍겨오는 마기의 흐름···.
“누나, 저기···.”
“네 눈에도 보여?”
“응, 아주 똑똑히···.”
그림자가 저 멀리에서 나타났다.
사람의 실루엣.
흐릿한 잔상이 뻥 뚫린 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것은 일견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랑, 저거 설마 앞으로 걸어가고 있는 거니?”
“어? 이쪽으로 오는 줄 알았는데?”
“하지만 거리가 전혀 좁혀지지 않잖아?”
전진을 하는 건지, 후진을 하는 것인지조차 파악이 안 돼.
정체는 물론, 그 이전에 적개심을 가진 것조차 알 수 없다.
이 시점에서 리리 리는 빅터의 가르침인 ‘침착’을 잊고 있었다.
“아씨, 한 가지만 하란 말이야!”
소녀가 땅을 박찬다.
리리 리는 급한 성미를 끝내 참지 못하고 달려 나가고 말았다.
하지만.
“누나!”
그것이 실수였다.
리리 리가 뜀박질을 함과 동시에, 눈앞에 보이는 ‘그것’이 반응했기 때문에.
“···앗?!”
높은 시력을 가진 소녀의 눈에는 보였다.
순식간에 상대가 바뀌었다는 것이···.
공간 자체가 뒤틀렸어,
조금 전까지 적으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서 있던 그 장소에는···.
어느새 아랑이 멀뚱히 서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그녀의 뒤에는···.
“설마!”
어리석은 리리 리는 그제야 눈치 챘다.
멀찍이 떨어져있던 시커먼 존재와 아랑의 자리가 바뀌고 말았다는 것을.
“쩍, 쩌적···!”
리리 리가 그림자라고 착각했던 것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새카만 머리칼을 가진 마른 여자···.
너무 긴 나머지 바닥에 질질 끌릴 정도로 긴 산발이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지저분하게 얽힌 흑발 사이로 섬뜩하게 번뜩이는 것만이 있을 뿐···.
뒤집힌 눈깔이 드러난다.
돌출된 아가리가 사악하게 경련했다.
덧붙여, 그 치아들은 하나같이 날카로운 송곳니로 가득 차있어.
오로지 눈앞의 소녀를 물어뜯기 위해 젖혀진 상태였다.
“쩌적, 쩌억!”
“히익!”
리리 리는 잠깐 기겁했지만, 금방 재빠르게 반응했다.
퍼억!
날렵하게 오른발로 걷어찬다.
그것은 요물의 턱에 정확히 적중했어, 상대를 그대로 나자빠지게 만들었다.
“씨이, 깜짝 놀랐네. 별 것도 아닌 게···.”
요괴.
망량.
어쩌면 귀신이라 부를 법한 무엇인가였는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것쯤, 소녀가 사부와 함께하면서 보아온 적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긱, 기긱···.”
“어딜!”
상대가 몸을 일으키려하자, 리리 리는 반사적으로 팔을 휘둘렀다.
그 손끝에는 비녀의 칼날이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파직, 파지직!
괴물의 목이 타들어간다.
머리카락 끝부터 하얗게 문드러지더니, 그것은 곧 가루로 변해서 산산조각이 났다.
마의 존재를 용서치 않는 신비한 푸른 금속의 힘이었다.
“그래서 이 녀석은 대체 뭐 였던 걸까?”
예기치 못한 출현치곤 싱거웠어.
리리 리는 멀리서 달려오는 아랑에게 손짓을 했다.
“리리 누나!”
“야, 봤지? 이 누님께서 방금 유령을 퇴치했···.”
“그게 아니야! 어서 움직여!”
“어?”
아직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달려오는 아랑의 뒤에는, 말 그대로 무리가 있었기에.
망령들···.
모두가 비쩍 마른 몸으로 헐벗고 있다.
하나같이 눈덩이가 움푹 들어간 기이한 자들이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전부 귀밑까지 찢어진 입을 벌리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왜 자꾸 이런 일이 생기는 건데에에!”
“누나가 모르는데 낸들 알겠냐고! 우선 뛰기나 해!”
또 다시 소년이 소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이어서 기약 없는 도주가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달리면서도 어떻게든 이 사태를 타파할 방법을 궁리했다.
“누나가 저놈들 다 쓸어버릴 순 없는 거야?”
“제대로 된 무기도 없는데 무슨 수로? 너는 내가 무슨 괴물로 보이니?”
“혹시나 해서 한 번 물어본 거야. ···아니,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해? 여기서 빠져나가려면?”
“으으으, 여기가 결계라면 그냥 마녀만 무찌르는 걸로 끝나겠지만···.”
문제는 이 장소는 결계 따위가 아니란 것에 있었다.
심지어 적은 권속인 사역마에도 속하지도 않는다.
당연히 영역의 주인 또한 있을 리 없어.
결국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계속해서 달아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거 거짓말이지?”
분명 한참이나, 심지어 반대 방향으로 달려 나갔는데도 어느새 망자들이 정면에 당도해 있다.
고개를 돌리는 족족 시야가 혼란스럽게 뒤집어져···.
앞에도, 뒤에서도 군세가 몰려들었다.
더는 달아날 곳이 없어.
두 사람은 양측에서 몰아붙여지고 있었다.
순간, 아랑은 생각했다.
어쩌면 이곳은 저승의 입구가 아닐까 하고···.
그렇다면 지옥인가?
사기꾼을 도둑질로 응징한 것에 들뜬 탓에?
악으로 악을 제압하는 걸 정당화시킨 잘못으로 인해서?
아랑은 두려운 나머지 현실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악몽이야,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질 리 없어.”
“흥, 그럼 잠에서 깨어날지 모르니 내가 허벅지라도 꼬집어 줄까?”
“하나도 재미없거든?”
이 와중에서도 농담이라니, 대체 정신세계가 어떻게 된 것일까?
아랑은 리리 리의 인격이 의심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안심해, 아랑.”
“뭐어?”
“이게 네 말처럼 나쁜 꿈이라면, 금방 일어나게 될 테니까.”
아랑의 손에 이끌려 도망치기 전전···.
리리 리는 구조요청을 보냈다.
그것은 언젠가 빅터가 소녀에게 알려준 최후의 수단.
비녀 속에 담긴 또 다른 비밀의 기능이었다.
“···느껴져. 나는 알 수 있어. 아무리 주변이 뒤섞여서 엉망이 되도··· 본질은 같으니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우린 지금 완전히 포위되었단 말이야!”
“응, 신호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 머지않아··· 바로 지금!”
그때였다.
팟.
자리에 선 소녀와 소녀 사이의 공간에 어떤 균열이 나타났다.
마치 불투명한 헝겊을 반으로 가른 것만 같은 흔적···.
그리고 그 사이에서 크고 투박한 손이 튀어나왔다.
리리 리는 그걸 알아보고선 곧장 기쁨의 외침을 내뱉었다.
“사부!”
“···이 말썽쟁이 놈들.”
이어서 피로에 찌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늦은 시간까지 돌아오질 않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만.”
거칠고 굵은 음성이다.
어딘지 모르게 쌀쌀맞고, 메말라있으며, 또한 서투르기까지 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두 사람에게 있어서, 그것은 세상 그 무엇보다 든든한 울림이었다.
“흠···!”
이번에는 양손.
허공에 나타난 팔이 틈을 벌린다.
한쪽에는 견고하게 감긴 쇠사슬이.
또 다른 쪽에는 사나운 형상의 도끼가 들려있었다.
이윽고 사람 하나가 통과할 수 있을만한 공간이 마련되자···.
거대한 몸집과 흉흉한 기운을 머금은 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그림자’란, 결코 우스갯소리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의 의미.
그는 정말로 어둠으로 응집된 외투를 두른 채, 음지의 이면 세계에 발을 들였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