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종의 장(2)
3.
찻집.
동방의 전통 장식이 들어간 기와지붕 아래, 이국적인 차림새의 두 사내가 방문했다.
빅터, 그리고 로이였다.
“그간 어떻게 지냈지?”
의외로 먼저 입을 연 것은 빅터 쪽.
그는 실내에 배치된 자리 하나를 꿰차자마자 말했다.
설마하니, 길었던 타지에서의 생활이 그로 하여금 외로움을 주고만 것이었을까?
아니, 거기엔 어떤 이유가 있었다.
이어서 그 까닭은 눈치 챈 로이드가 질겁한다.
왜냐하면···.
“워워. 그만해, 임마. 그건 좀 참아주라. 무슨 심문하는 거 같잖냐? 기왕이면 살갑게 말로 하자고.”
그는 빅터가 타인의 감정과 기억을 읽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에.
“너도 알잖아? 나도 숨기고 싶은 과거가 있는 놈이란 걸. 그러니까 멋대로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진 말아줘.”
질겁하는 로이드에게, 빅터는 슬쩍 미소를 흘렸다.
“미안하군. 이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서.”
“켁, 정말이냐? 그, 그럼 방금 내가 한 생각도?”
허나 그것은 괜한 걱정이었다.
“아니, 농담이다.”
“···엉?”
“이제 능력의 강도를 줄이는 것쯤이야 간단하지.”
“···.”
“나도 그 동안 놀고 있진 않았다.”
과거와 달리, 빅터는 이미 그 능력을 조절하는 방법을 깨달은 지 오래.
단지 그는 오랜 만에 만난 친구를 조금 놀려주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로이드는 헛웃음을 하더니.
“너, 임마··· 성격이 좀 변한 거 아니냐?”
“글쎄.”
“맙소사, 그 독기에 찬 도끼마, 선혈의 빅터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지···.”
“난 예나 지금이나 그런 이름으로 불린 기억은 없다.”
“어, 아니었냐? 지나가면서 한 번쯤은 유명세를 떨쳤던 것 같기도 한데?”
“단언컨대.”
“···뭐, 사소한 건 넘어가자고. 여튼 간에, 어깨에 힘이 좀 빠진 것 같아서 다행이네.”
“그렇게 보이나?”
“예전의 귀신같은 널 떠올리면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임마. 아까도 그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여자애한테 잡히기나 하고 말이야.”
“후, 그게 한참 연하인 레이 사저에게 ‘누님’이라고까지 부른 놈이 할 말이냐?”
“야, 이··· 그 이야기가 갑자기 왜 나와? 아무튼 간에, 비꼬는 언변까지 늘어난 게 묘하게 찝찝하구만. 후배, 너 혹시 감까지 잃어버린 건 아니지?”
로이드는 반은 장난삼아한 이야기였지만.
여기서 빅터가 침묵했다.
그러고 보니 남의 눈을 신경 쓴 지도 오래됐어.
동방에 머문 이후로 항상 고된 수행과 임무만을 반복했기에···.
하지만 로이드의 발언에 기분이 나쁜 건 아닌지, 그는 슬쩍 고개를 끄덕인다.
어쩌면 녀석이 옳을 지도 모른다.
언젠가 대스승에게 들었던 말처럼, 마음이란 소모되는가?
그 어떤 증오라도 시간이 지나면 마모되기 마련인 것인가?
그런 빅터가 괜히 불안해져.
의구심과 함께 로이드는 빅터를 다시금 확인하려 들었다.
“빅터, 동방에 머무르면서 사냥을 얼마나 한 거냐?”
“일일이 새어보지 않아서 모르겠군.”
“뻔히 보이는 거짓말은 하지 마. 너처럼 요령 없는 놈이 그걸 잊어버릴 리 없지.”
잠시 후, 빅터는 담담한 목소리로.
“마흔 둘.”
나름대로 고심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 점잖은 반응에도 불구하고, 로이드는 질색을 했다.
“···미쳤군. 5년 사이 마흔 둘이라면, 단순 계산으로도 매년 여덟 명 이상을 죽···.”
“로이드, 입을 조심해라.”
공교롭게도 이 장소는 확 트인 공간.
흉흉한 이야기를 꺼내기엔 무리가 있다.
“뭐, 어떠냐? 다들 동양 사람들뿐이고, 우리말을 알아듣는 사람도 드물 텐데.”
“경솔하긴.”
“너도 고지식한 것만큼은 여전한 모양이구만.”
로이드는 씁쓸하게 웃었다.
동지의 변하지 않은 부분에 안심이 드는 건 과연 다행인 일일까?
“후배, 물어보면 솔직하게 답해줄래?”
“뭘 말이지?”
“설마 게슈펜스트Gespenst가 가까운 거냐?”
망령.
그것은 인간성을 잃어버린 존재.
모든 마음의 힘을···.
이븐 가지의 분말을 소모해버린 사냥꾼의 말로를 뜻했다.
그 단계에 들어가면 돌이키지 못해.
사역마, 외래종과 같이 ‘마魔’로 분류가 되고 만다.
그렇기에 사냥꾼들은 오랜만에 동료와 대면할 때마다 상대의 변화를 관찰한다.
자칫 어둠에 이끌려 사람의 길에서 벗어나기 전에.
적어도 같은 사냥꾼의 손으로 조치하기 위해···.
“로이드, 설마 그걸 확인하기 위해 나를 찾았던 건가?”
로이드는 어깨를 들썩인다.
그런 이유도 있고, 라고 말하며 본심을 숨기지 않는다.
애초에 빅터가 마음만 먹는다면 속임수는 통하지 않기에.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진 마라. 너도 잘 알겠지만, 이것도 다 필요한 절차니까.”
“그렇지.”
“크레이그 영감이 걱정한다고.”
“대스승의 호칭을 멋대로 생략하지 마라.”
“하, 동방의 속담 중에 이런 말도 있지. 뒤에서 나랏님 욕도 한다고! 난 말이야, 그 노친네한테 불만이 이만 저만 많은 게 아냐. 온갖 시시콜콜한 심부름은 나한테만 다 시키고···.”
로이드는 아차 싶었다.
모처럼 편한 상대를 만나 떠벌이고 되고 말았기에.
“음, 뭐··· 나도 나름대로 고생하고 있단 이야기지.”
“수고하는군.”
“···그래서 대답은 어느 쪽이야?”
빅터는 눈을 치켜뜬다.
설명은 필요 없어.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로이드, 정안을 집중해라. 네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
“음, 이건···!”
로이드는 눈앞에서 끓어오르는 깊은 분노의 형상을 목격했다.
강렬한 기새.
검은 화염이 이글거린다.
그것은 도무지 끝을 알 수가 없어.
그 정도로 무거운 감정의 응어리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때, 로이드의 뇌리를 통해 뭔가가 떠올랐다.
예전에 빅터와 함께 동행하던 시절, 그가 품고 있던 가루의 농밀함이···.
“···체, 너한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어떻게 된 영문일까?
빅터가 가진 이븐 가지의 분말은 쇠락하기는커녕.
오히려 과거보다 더욱 거센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었다.
이치를 역행하는가?
아니면 표류자에게서 받은 유산으로 인한 결과물인가?
어느 쪽이든 결론은 나왔다.
로이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괜한 걱정이었구만.”
“이걸로 만족했나?”
“그래. 역시 넌 특별한 놈이었단 말이지.”
로이드는 차마 부끄러워서 대놓고 말하지 못했지만.
그가 빅터에게 가진 감정은 동경에 가까운 질투였다.
유성의 후예, 빅터의 유명세는 그만큼 사냥꾼들 사이에서 남달랐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그와 함께 싸운 전례가 있다는 것만으로 사석에서 자랑거리가 될 정도였기에.
“크으··· 너는 점점 멀어지는구나. 이 선배는 슬프다! 그 어설프던 애송이 빅터가 지금은 스승이라!”
“징그러운 소리 마라, 로이드.”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는 네가 대견해서 그런다, 임마!”
“···우리에게 출세 따위가 있을 리 있나?”
“말이 그렇단 거지. 그래도 우리 동기 중에서 스승이라 불리는 녀석은 너 뿐이라고.”
전에 가볍게 말한 우스갯소리가 일부 현실이 된 것 같아.
자기 딴엔 감회가 새로운 로이였다.
그는 수년간의 반가움이 한 번에 터지기라도 한 듯.
“이런 날엔 술이지.”
“여긴 그런 곳이 아니다.”
“알아, 임마. 나도 너무 이르게 도착해버린 게 안타까울 정도라니까.”
“나에겐 다행인 일이지.”
오후였다면, 그는 독주을 잔뜩 시켜 주정을 부렸을 지도 몰랐기에.
“도르프하임엔 언제쯤 돌아올 거냐? 다들 널 보고 싶어 하는데.”
“음.”
“너도 궁금하지 않아? 항구 집결지 식구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아니라면 거짓말이다.
빅터의 표정을 읽었는지, 로이드는 자연스레 말을 이었다.
“우선 대스승 크레이그, 그 양반은 여전해. 항상 그렇듯 뜻 모를 소리만 하고 있지. 절대 한 번에 가르쳐주는 법이 없어. 예전부터 그랬지만, 사람 쪽팔리게 꼽 주는 게 취미인 영감이야.”
어지간히도 쌓인 게 많나보다.
하지만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유추하자면, 정정하다는 뜻이나 다름없으리라.
“아이라 누님은 이제 슬슬 혼기가 위험하지. 언제까지고 공방에서 쇠붙이만 잡기엔 너무 아까운 여자니까.”
“···네 사견 말고 다른 이야기는 없나?”
“그 아름다운 양팔의 화상 흉터가 더 심해졌단 것말곤 딱히?”
아, 그리고 지하 무기고가 더욱 비좁아 졌지.
···라고 로이드는 덧붙였다.
역시나 대장장이 일에 전념하고 있다는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레이 사저는?”
“어쭈, 심의 유파를 떠나왔으면서도 그 계집애 사정만은 유독 궁금하시다?”
“좋든 싫은 은인이니까.”
“그래. 그건 나도 이해해. 나에겐 그게 빌헬미나 누님이셨으니.”
로이드는 팔짱을 끼더니.
“···그런데 말이야. 참, 걔 상태는 뭐라 말하기 힘든 상태라서.”
“무슨 말이냐?”
“심록 토벌전 이후로 좀 맛이 갔다고 해야 할까?”
“자세히 말해봐라.”
“원수를 갚은 이후론 감정을 완전히 죽였더라. 화를 안 내.”
“뭐?”
“내가 신경을 긁어도 말이야, 전혀 반응이 없어. 가끔씩은 웃기까지 하더라니까? 아니, 사람 성격이 그렇게까지 변할 수 있나?”
“···.”
“예전엔 사소한 것까지 꼬투리 잡아서 윽박질렀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확실히, 기존에 레이가 가진 면모와는 전혀 달라.
빅터는 사뭇 그녀의 상태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뭐··· 그것도 다 심의 유파를 이끌 차세대 유망주라 그런 거 아니겠어? 천재의 머릿속을 나 같은 범인이 알 수 없을 테니까. ···아, 그렇지! 그녀의 휴케바인은 사냥꾼 역사상 최고의 안정 단계라고 하더군. 잔심이 사라진 만큼 일절 낭비가 없어서 더욱 강해졌다고 크레이그 영감이 말하더라.”
“그래···.”
“야야, 좀 더 반응해 봐. 이야기해주는 사람 입장에선 재미가 하나도 없잖아.”
그래봐야 로이드의 근본은 떠버리에 수다쟁이.
상대가 침묵을 하든 말든 그는 전혀 여의치 않았다.
“다음은 도리스 누님 이야긴데, 이게 또 기가 막히거든.”
“···그 미친 여자가 또 무슨 짓을 했나?”
“아니, 그거야 일상이고. 내가 할 말은 그게 아니라, 클라르테 아가씨에 대해서지.”
그 이름이 언급됨과 동시에, 빅터의 입술이 견고하게 닫혔다.
“도리스 누님은 결국 이식자의 역할에서 손을 때버렸어. 아버지인 대스승 알베르트랑 불화가 심해졌다나?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내가 짐작하건데, 그 여자는 새로 생긴 장난감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진 게 아닐까싶어.”
장난감?
설마 클라르테를 가리키는 것인가?
빅터가 되묻자, 로이드는 착잡한 목소리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가씨도 참 불쌍하다니까. 하필 직속을 도리스 누님이 맡아버려서.”
“···끝내 그녀도 사냥꾼이 되고 말았나?”
“그래. 이미 3년 전에 이식이 끝났지.”
이 얼마나 얄궂은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빅터는 그만 새치로 물든, 복수귀로 변한 클라르테의 얼굴을 떠올리고 말았다.
“야, 빅터. 너무 클라르테 아가씰 얕보진 말아. 넌 모를 거야. 그녀가 그간 얼마나 노력했는지.”
밤의 마물들을 추격하며 세계에 대한 지식을 쌓는 것에 일 년.
이식에 맞춰 각오를 다잡는 데에 또 일 년.
이어서 모든 과정을 끝내고서 실전 임무에 투입되는 것으로, 나머지 인생을 보내는 삶···.
그것이 결코 가벼울 리 없었다.
“맞아. 엄청나게 힘겹지. 그만큼 클라르테 아가씨의 각오는 진심이었단 소리야. 너한테만 하는 이야긴데, 이미 그녀의 무기술은 어떤 의미에선 나보다 뛰어나.”
“농담하는 건가?”
“내가 아무리 허당이어도 그런 소릴 웃자고 할 수 있을 거 같냐?”
로이드는 언짢은 표정이었다.
그만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진짜란 말이야. 단순히 검술만 본다면··· 대련에서 내가 클라르테 아가씨를 이길 수 있는 경우는 높아봐야 3할이지.”
“그 정도란 말인가?”
“너도 그녀랑 다시 만나면 각오해야 할 거다.”
“음?”
“짜샤, 넌 여심을 몰라도 너무 몰라.”
로이드의 손바닥이 빅터의 오른쪽 어깨를 토닥였다.
“클라르테 아가씨는 최근까지도 너한테 차인 걸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거든.”
“···.”
“이 죄 많은 놈 같으니.”
로이드는 뭔가 오해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것을 가볍게 풀기엔, 너무도 많은 시간이 지나 있었다.
“로이드. 내가 클라르테를 피하려 했던 데엔 중요한 이유가···.”
빅터는 지금에서라도 그 전말에 대해 설명하고자 운을 띄우려 했다.
그런데···.
“사부, 빅터 사부!”
갑작스레 사람들이 모이는 공공장소에서 철없는 고성이 울렸다.
아랑과 심부름을 마친 리리 리가 막 돌아온 것이었다.
“보고 드릴게요! 상단은 가져온 짐을 다 내렸고, 뒷정리도 완벽하게 끝냈어요!”
“그래, 수고했다.”
“네! 아주 고생했답니다, 사부!”
팟!
리리 리는 양손을 내밀었다.
노동의 대가를 달라고 노골적으로 재촉한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로이드는 폭소를 터뜨렸다.
“이야, 목소리가 아주 쩌렁쩌렁하군. 완전 힘이 넘치는데? 빅터, 네 첫 제자가 요 꼬마 아가씨냐?”
“어라, 누···구?”
서방의 언어였기에, 리리 리는 로이드가 하는 말을 몰랐다.
결국 통역은 빅터의 몫이었다.
“인사해라, 리리 리. 이 녀석은 로이드···.”
슬쩍.
빅터는 능글맞은 상대의 얼굴을 한 번 흘겨보더니.
“이번 임무의 손님이자··· 내 오랜 전우다.”
로이드가 알아듣지 못할 말로 쑥스러운 소개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