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종의 장(1)
1.
···길었던 겨울이 끝나고.
이제는 봄의 온기가 세상에 도래했다.
초목이 돋아나 꽃이 한창 만개할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소년의 방랑이 시작한 지 어느덧 두 달 째···.
여정은 수해를 넘어 광야로.
국경 바깥의 말라붙은 대지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지금, 아랑은 다시 한 번 새로운 세계의 발을 들이려 하고 있었다.
“빅터 사부! 저기, 저기 좀 보세요!”
들뜬 목소리.
리리 리가 마차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손을 붕붕 흔들어대며 지나가는 행인들을 가리킨다.
너무 흥분해있어.
어찌나 기쁜 지 콧김이 다 보일 정도였다.
“어쩜, 저게 다 물이에요! 지금까지 봤던 그 어떤 강보다 커요! 열 배, 스무 배··· 아니, 이건 비교도 안 돼!”
연배에 어울리지 않는 천진난만함.
바다를 생전 처음 본 아이의 반응은 적나라했다.
밀려오는 파도가 그렇게 신기한가?
“사부는 저 너머에서 오셨다고 했죠? 거기까진 얼마나 걸려요? 네, 네에?”
“···아, 좀 그만해, 리리 누나! 말들이 놀라잖아!”
그러나 소녀의 갑작스런 난동이 마부 석의 소년에겐 달갑지 않다.
하지만 불평을 해봐야 철없는 상대가 알아 들을 리도 없었다.
리리 리는 여전히 방방 뛰면서, 이번엔 아랑의 어깨까지 툭툭 건드려가며 언성을 높였다.
“얘, 아랑! 저거 봐! 배야! 엄청 큰 배!”
“아니, 배가 좀 큰 게 뭐 대수라고?”
“그럼 대수지! 저기엔 가축도 실려 있단 말이야! ···아, 하긴 너도 저런 건 처음 보겠구나. 아는 게 없으니 그만큼 시큰둥한 거겠지.”
또 놀릴 건수를 물색하는가?
그녀는 몇 주간이나 동행하면서 어느 정도 동생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 누그러지긴 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역시 그녀 자신의 정신연령에 있었다.
하지만 아랑은 순간 그 사실을 간과해버렸다.
그만 리리 리를 상대로 진지하게 대꾸를 하고 만 것이다.
“응? 그야 나는 시골 토박이 출신이니까 당연히···.”
“훗후, 촌놈이래요!”
“···.”
입을 슬쩍 가리면서 음흉하게 웃는 리리 리였다.
시덥잖은 도발.
아랑은 알았다.
여기에 넘어가면 유치한 말장난이 시작되고 만다는 걸.
‘···내가 참자. 언제나 있는 일이잖아.’
어째서 연하인 소년 쪽이 다 큰 처녀보다 인내해야하는 것을 둘째치더라도.
아랑은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울컥하는 속마음을 억눌렀다.
그 다음은 쉽다.
적당히 맞장구치기면 충분하니까.
“뭐, 그렇게 말하는 누나는 엄청 대단한 곳에서 자랐나봐?”
“흥, 당연하지! 이 몸으로 말할 것 같으면 대도시 천단 출신의 영애란다!”
“거기가 어딘데?”
“하? 너 정말 아는 게 하나도 없구나! 내 고향 천단은 말이야, 비단이랑 황금이 오가는··· 그러니까 동방에서 가장 유명한 물류의 중심지라고?”
“흐응···.”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의 길이만도 백리! 주택은 수십만 채나 있는 또 하나의 수도나 마찬가지지!”
“아, 그렇구나.”
“나는 그런 멋진 곳에서 태어났단 말씀이지! ···야, 그런데 제대로 듣고 있어?”
“어.”
얼떨결에 대답은 했지만, 아랑은 이미 그 열변을 한 쪽 귀로 흘리고 있었다.
말을 다뤄야하기에 정면만 주시하고 있으니, 더욱 무심해보여.
하필 이럴 때에만 리리 리의 눈치는 날카로워졌다.
“그 건방진 표정은 뭐야? 모처럼 이 누님이 세간의 상식을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는데?”
“···어차피 그 지식들도 전부 스승님께서 가르쳐주신 거 아냐?”
“아, 아니거든!”
“정말?”
“왜, 왜 말을 하다말고 빅터 사부를 보는데?!”
그러면서 리리 리도 슬쩍 뒤를 돌아본다.
거기에는 한층 더 무표정해진 빅터의 얼굴이 있었다.
“방정맞다, 리리 리.”
잠시라도 조용히 할 순 없는 거냐며 언질을 건네 보기도 하지만···.
“거봐, 사부도 별말 안하시잖아? 이건 온전히 내가 아는 거라니까?”
이마저도 은근슬쩍 자기변호에 이용해먹는 행태.
그렇다고 자기주장이 합리화되는 것도 아닐 것을···.
그 뻔뻔함에 소녀의 사부는 이마를 짚었다.
“후우.”
깊은 한숨.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지, 옆에서 지켜보던 아랑의 기가 다 빠질 지경이었다.
“됐어. 사실은 별로 궁금하지도 않아.”
“엉?!”
“리리 누나가 말하는 건 절반 이상이 허세일테니, 들어봐야 영양가도 없고.”
“뭐야아아아?!”
우당탕!
마부석과의 거리가 꽤 되는데도 무모하게 양손을 뻗어온다.
동문간의 주먹질은 원칙적으로 금지.
그래도 연하의 남동생을 괴롭히는 방법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리리 리는 노골적으로 뺨이나 허벅지를 꼬집을 셈이었다.
“아팟!”
“그러게 어디서 누님한테 대드는 거야!”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 뭐?!”
“이게 끝까지···!”
마차가 요동친다.
그 꼴을 차마 내버려두지 못해.
겨우 빅터가 끼어들었다.
“···이 멍청한 놈들, 작작하지 못해!”
결국 아랑은 사부가 직접 고함을 치기 전까지 피곤한 공방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2.
항구 도시 람도藍島.
그것은 동방 최대의 곡창지대와 가장 인접한 부둣가.
섬이라는 명칭이 붙었지만, 엄밀히는 내륙에서 살짝 튀어나온 지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름의 유례는 적나라하게 드러난 바다가 사시사철 짙은 쪽빛을 띄고 있기 때문.
특산품은 당연히 생선을 비롯한 해산물이며, 동서양의 상인들로 북적인다.
‘···라고 빅터 사부가 말씀하셨지.’
그랬다.
이 모든 것은 도착하기 전에 스승이 설명해준 내용들이었다.
이어서 빅터는 마차에서 내림과 동시에, 두 사람에게 한 가지를 더 당부했다.
“잘 기억해둬라. 이 도시엔 우리의 조력자들이 주둔하고 있다. 바로 크로이 상단이라는 서방의 아군이지. 리리 리, 너는 전에도 그 관계자들과 만나봤으니 잊지 않았겠지?”
“네에! 물론 알다 마다요, 빅터 사부!”
참으로 유쾌한 대답이야.
혼이 난 직후임에도 여전히 기분이 째지는 리리 리였다.
오히려 주눅 든 쪽이 어울리지 않을 지경.
빅터는 또 다른 제자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그래, 다음은 아랑.”
그는 더 이상 소년을 ‘꼬마’라고 부르지 않았다.
모종의 사건을 거친 뒤로, 그는 아랑은 한 사람의 사내로서 인정했기에.
“너는 이 문양을 머릿속에 잘 익혀두도록.”
그러면서 빅터는 화승총에 그려진 것을 슬쩍 보여주었다.
“이렇게 끝이 뭉뚱한 십자의 마크다. 과거 북방 귀족이었던 ‘크로이 가’의 문장이지.”
“아···.”
“이런 자수가 그려진 서방의 상인들은 같은 편이라 봐도 무관할 거다.”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들을 찾아라.
빅터는 그렇게 당부하며, 살짝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랑, 전에도 말했지만. 네가 굳이 나와 같은 사냥꾼의 길을 걸을 필요는 없다.”
“···.”
“원한다면 아는 선장에게 추천장을 써주마. 저 크로이 상단처럼, 평범한 삶을 살면서도 우리를 도울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빅터 사부, 저는···.”
여담이지만, 이제 아랑도 빅터를 ‘아저씨’라 부르지 않게 되었다.
유황동굴에 숨어있던 마녀와 대면한 이후···.
리리 리가 갑작스럽게 예의를 지키라며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언제까지 사부를 그렇게 부를 건데? 우리와 쭉 함께 지낼 거라면 연장자와 스승에 대한 태도부터 고쳐!’
강요 끝에 마지못해 한 부끄러운 흉내.
여태껏 그 어떤 어른에게도 존대해본 적 없던 아랑이었지만···.
모로 가나 도로 가나, 무의식에 있던 존경심은 어떻게 해서도 표출되는 것이었다.
소년은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담아, 고개를 들며 말했다.
“저는 좀 더 사부에게 많은 걸 배우고 싶습니다.”
그 목소리에는···.
과거에 빅터가 보아온 그 누구보다도 강단 있는 결의가 담겨져 있었다.
“고집불통 제자는 리리 리 하나만으로 충분한데.”
말은 그러면서도, 그의 입가는 슬그머니 아래로 휘어져있다.
그것은 빅터가 이따금씩 드물게 보여주는 유쾌한 미소였다.
“···자, 그럼 둘 다 슬슬 움직이도록. 우린 먼 길을 찾아온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네에?”
“뭘 놀라는 거냐, 리리 리? 내가 그저께 미리 말했을 텐데.”
“아, 물론 임무 자체는 알아요. 안 까먹었다고요! 분명 서국에서 오는 동지랑 합류하는 거였는데···.”
“잘 기억하고 있군.”
“그래도 어차피 급한 일은 아니죠?”
“이미 하선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상선의 짐을 내리는 걸 도와주는 게 사람의 도리지.”
“그, 그놈의 도리! 제가 그 말에 약하단 거 잘 아시면서!”
“무슨 불만이라도 있나?”
“그치만 저희도 방금 전에 도착한 걸요?!”
“그래서?”
“가끔은 쉬게 해달라고요!”
“···.”
“모두가 사부처럼 피로를 모르는 무한 체력의 괴물 같은 게 아니란 말이에요!”
리리 리는 휴식 시간도 없이 부려먹느냐며 볼을 크게 부풀렸다.
그 반항적인 태도에, 빅터는 순식간에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주뼛.
심상찮은 분위기에 아랑은 긴장했다.
그가 화를 내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건 상대를 오래 겪어보지 못한 아랑의 오해였다.
“···나중에 용돈을 주마.”
“얼마나요?”
“언제나처럼 은화 한 닢이면 충분하겠지.”
“한참 모자라요! 지금은 아랑도 있는 걸요!”
“그럼 두 닢···.”
“아이, 사부우! 통 크게 세 닢으로 해줘요!”
기적의 계산법.
그러나 빅터는 이렇게 나오는 리리 리를 이기지 못한다.
대신 그는 조건을 걸었다.
노는 것은 나중.
당장은 중요한 일부터 마무리할 것.
“정말이죠? 그 약속 꼭 지키셔야 해요, 빅터 사부!”
“오냐.”
“와아아!”
빅터의 동의에 리리 리는 짝, 하고 박수를 쳤다.
“들었지, 아랑? 그럼 당장 말부터 맡기고 다시 여기로 집합해!”
“···속물.”
“하? 너 방금 뭐라고 그랬어?”
“아니, 아무 것도.”
“그럼 얼른 움직여! 빠릿빠릿하게!”
“알겠어. 알았다고! 그러니까 괜히 말을 더 자극하지 마! 잘못하면 뒷발굽에 차인단 말이야!”
“난 안 맞을 자신있지롱!”
“아, 진짜아아아!”
“리리 리. 너도 같이 가라.”
“네? 제가 왜요?”
“아랑이 길을 잃지 않게 네가 돌봐줘야 할 것 아니냐?”
“그건 싫···.”
“명령이다.”
“···.”
한 차례 소동이 일어나고서야, 아랑과 리리는 겨우 자리를 비울 수 있었다.
하지만 빅터가 기다리는 손님이 도착한 건 그와 거의 동시였다.
사실, 그는 아까 전부터 그들 일행을 먼발치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야, 천하의 빅터도 어린 제자 앞에선 의외로 서글서글하구만. 이건 전혀 예상을 못 했는데?”
살짝 비꼬는 어투와 함께, 북적이는 인파 사이에서 누군가가 슬쩍 나타났다.
챙이 넓은 모자와 그 아래로 드러나는 은발.
이어서 몸에 걸친 사냥꾼 코트는 그의 정체를 짐작하게끔 만든다.
단, 전반적으로 마른 체형과 큰 키는 그만이 가진 고유한 개성이기도 했다.
얼굴은 썩 잘 생긴 편이다.
표정이 능글맞아, 벌어진 입가가 살짝 뱀을 닮았다는 것만 빼면 이목구비가 뚜렷한 편이었다.
덧붙여 그의 목소리는···.
“야, 후배. 잠깐 못 본 사이에 덩치는 더 커진 주제에··· 인상이 너무 가벼워진 거 아냐?”
경박하기 짝이 없어.
속에 담긴 감정은 전혀 다른 것임에도, 애써 밉쌀 맞은 소리만 들어놓는다.
“설마하니 타향살이 하다가 현지처랑 붙어먹기라도 한 건 아니지?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도리스 누님이나 클라르테 아가씨가 많이 실망할 텐데.”
“···웃기지 마라, 이 망할 자식아.”
“하하, 그야 당연히 농담이지. 거봐, 너도 재미있으니까 지금 웃는 거잖아?”
허나 그 특유의 말투 덕분에 빅터는 상대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오랜만이다, 로이드.”
“그래, 빅터. 나도 죽도록 보고 싶었다, 쨔샤!”
두 사람은 바로 악수를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