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94화 (94/186)

흉리의 장(6)

9.

내부는 의외로 따뜻했다.

바깥은 겨울이었지만 동굴 깊은 곳까지 냉기가 스미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미묘하게 축축한 온기···.

공기는 탁하고 불쾌해.

심지어 부패하는 향취가 주변을 가득 매우고 있었다.

그만큼 안쪽이 폐쇄되어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뭔가가 섞인 연기다. 마셔봐야 좋을 건 없겠지. 꼬마, 가능한 코를 막도록 해라.”

겨우 마기인지 뭔기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또 이런 꼴인가?

그래도 빅터의 지시대로, 아랑은 소매로 얼굴을 가린 채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숨 쉬기에도 벅찬 상황.

하지만 소년은 속으로 복잡한 생각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마녀···.’

자기네 지방에선 요녀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명칭.

그들은 마물을 부리며 사람을 곯린다.

때로는 하나의 마을에 재앙을 내리기도 하고···.

가장 무시무시한 전승 중에는 거대한 도시···.

아니, 나아가선 한 국가마저도 홀린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왜 그 전설을 지금까지 잊고 있었을까?’

아랑은 어릴 적에 마을의 미친 노파에게서 들은 무서운 민담하나를 떠올렸다.

‘과거에··· 아주 먼 옛날, 대륙에서 가장 높은 위용을 자랑했던 제국이 있었다고 했지.’

혼미한 의식 속에서, 소년의 몽상세계는 유년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스스로를 위대한 지배자라 칭한 황제···.’

그 이름은 라반이라고 했다.

지평선 너머로 보이는 모든 영토는 제국의 땅.

그 과정에서 수많은 피가 흘렀다.

오랜 전쟁 끝에···.

기어이 동방의 구석구석까지 손에 넣은 무패의 왕은, 어느 날 천하에 다시없을 희대의 선언을 내걸었지.

모두가 놀라 뒤집어졌다.

지금껏 전란에만 관심을 두던 폭군이, 갑작스레 유일무이한 황후의 존재를 선포했으니.

소스라칠 정도로 아름다운 미색을 가졌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무서울 정도로 총명한 지혜의 소유자라서?

···진실은 모른다.

허나 이 황제의 고집이 가벼이 시대에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는 분명했다.

바로 노비 출신의 황후를 들이는 것이었기에.

그것도 들어본 적 없는 소수민족의 씨였다.

이어족異語族.

알아 듣지 못할 다른 말을 쓰며, 사소한 문화교류조차 받아들이는 걸 거부했기에 멸망당한 자들의 후예였다.

즉, 처음부터 속내가 있었다는 이야기···.

황후가 후세에 요녀라 불리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야.

교묘하고도 요사스런 술법으로 황제를 홀려버린 것이다.

‘당연히 수많은 가신들이 난색을 표했지.’

하지만 혈기왕성한 황제는 답했다.

자신이 가장 자신있어하는 형태로.

바로 폭력을···.

극렬히 반대하는 신하들과 후궁까지 모두 도륙하는 방식으로 해결하고 말았다.

‘다음은··· 그 다음은 어떻게 됐더라?’

자세한 중간 과정까진 모른다.

그것은 객관적 역사라기보다 허황된 동화에 가까웠다.

이제 와서 확인할 방법도 없는 신화 속의 이야기···.

하지만 그런 소년도 이야기의 결말만큼은 확실히 알았다.

‘멸망.’

가뜩이나 썩어있던 국가였다.

앞뒤 가리지 않고 땅덩이만 불려놨을 뿐이었기에.

정복당한 식민지는 언제나 칼을 꺼낼 기회만 호시탐탐노리고 있었지.

그러나 황후의 등극을 기점으로···.

동방에는 지옥도가 펼쳐졌다.

그녀는 어찌나 요망하면서도 사악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일까?

황제가 정실의 숙소에 행차하기라도 하면, 그는 일주일 내내 모습을 내비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망자의 행색.

시간이 흐를수록 황제의 용안은 피골이 상접해갔다.

그만큼 음습한 향락에 빠진 것이 원인이었을까?

생기를 빨아들이는 요물과의 성교가 그토록 좋았단 말인가?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아, 갑작스레 황제에게서 광증이 발병했다.

‘그야말로 의심암귀疑心暗鬼.’

황제는 황당무계한 망상에 빠져 가까운 형제와 친인척들부터 몰살하기 시작했으며.

조금이라도 신경을 거스르면 어떤 충신이라도 직접 목을 베었다.

민중에게선 지독할 정도의 공물을 거둬들인 주제에.

지시를 이행하지 못하는 이들은 예외 없이 극형을 내렸다.

‘거기다 하필 그 해에 최악의 흉년이 몰려왔고···.’

본디 병사들에게 돌아가야 할 식량마저도 제대로 공급되지 못하게 되었다.

더는 돌이킬 수 없어.

이쯤 되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해.

전국 각지에서 반란과 봉기가 일어났다.

기껏 손에 넣은 영토는 또 다시 찢겨졌지.

제국의 몰락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하지만 요녀는 끝내 잡지 못했다고···.’

그랬다.

분노한 민중이 황제의 처소에 들이닥쳤을 때엔 이미···.

귀신처럼 창백한 얼굴의 황후가, 은장도로 황제의 몸을 난도질 한 뒤였다.

그녀는 궁전의 모든 이가 들을 수 있을 만큼 무시무시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리곤 안개로 변해 수많은 무리가 보는 앞에서 사라졌다지.

‘과연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소년은 반신반의했다.

산신을 섬기는 마을에서 살아왔지만, 언제나 미신에 적개심을 품고 있었기에.

당연히 요괴나 요녀 따위도 있을 리 없다고 척을 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사실일지도 몰라.

지금 소년의 세계는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민담에는 숨겨진 또 다른 전승도 있었으니까.

바로 요녀를 처단하는 자들의 뒷이야기가···.

‘회색 갈기를 가진 늑대 무리···. 은발의 사도가 역적을 무찌를지니.’

지금 아랑을 이끄는 사내···.

그것이 전설의 실체였다.

빅터의 모습에서, 소년은 비로소 전설이 마냥 허황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앗, 사부! 저기에···!”

리리 리가 외쳤다.

샛노란 빛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동굴 속 깊숙이까지 들어가서야 겨우 무엇인가가 드러났다.

이 무슨 자연의 조화인가?

천장과 더불어 벽면이 몽땅 불투명한 주황색 암석으로 장식되어 있어.

더불어 사방에서 보다 심해진 악취가 들끓고 있었다.

빅터는 그 광경을 빤히 지켜보더니···.

“놀랍군. 이건 유황동굴이다.”

과연, 특유의 냄새는 이것 때문이었나?

“다감에도 이런 비경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무뚝뚝한 그로서는 꽤나 드문 감탄의 표현.

하지만 그것도 그다지 오래가진 않았다.

갑자기 구석에서 느껴진 인기척···.

빅터는 곧장 자세부터 잡았다.

곧 그들의 숙적이 모습을 보였다.

“···기어코 여기까지 왔나요?”

처음에는 그림자.

이어서는 맨발.

순서대로 각선미를 가진 종아리와 허벅지가 드러났다.

다음은 깔끔하게 자른 검은색 단발머리···.

역시나 출신은 동반의 민족.

그렇게까지 미녀는 아니지만 적당히 호감이 이목구비를 가졌어.

허나 기가 약해보이는 인상이었다.

처진 눈동자가 동요한 듯 유난히 떨린다.

조심스레 살짝 내민 얼굴에도 겁먹은 기색이 역력해보였다.

“침입자가 들어왔나 했더니. 여, 역시··· 사냥꾼이었군요.”

그 움직임은 은근히 느리고 조심스럽다.

건너편에서 빅터가 뿜어내는 흉흉한 살기를 걱정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저벅.

그가 한 걸음 움직이자, 마녀는 기겁하며 튀어나왔다.

“자, 잠깐만요?! 그렇게 핏대까지 새울 필요는 없잖아요? 이 표정을 봐요! 저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요.”

“···.”

“아시겠죠? 전 이미 오래 전에··· 그, 그러니까 거의 이십년 가까이 은둔 중이라! 그래서 그 사이에 어떤 못된 짓도 하지 않았어요! 아, 아니지! ···라기 보단 할 수조차 없었어요!”

암약하고 있었던 주제에 꽤나 겁쟁이에 수다쟁이.

“어머, 어머나··· 귀여운 아이들도 함께 동행 했구나? 아, 안녕?”

어색하게 실실 웃으며 손까지 흔들고 있어.

소년이 보기에, 그녀는 단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농가나 시골의 처녀처럼 보였다.

‘저게 마녀라고?’

소년은 얼이 빠졌다.

요수들을 다루는 미신 속 주인공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일까 경계하고 있었건만···.

그 싱거운 말투에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한 것이다.

앞장 선 리리 리도 마찬가지.

그녀의 미간이 살짝 들썩여, 놀란 나머지 쥐고 있던 무기를 다 떨어뜨릴 뻔 했을 정도였다.

“···사부, 뭐 잘못된 거 아니에요? 저 푼수가 정말 우리가 쫓던 그거라고요?”

“그, 그거란 말은 너무 심했당···. 나도 이래 뵈도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인···.”

“뭐?”

“힉!”

찌릿.

쓸데없는 사족에 리리 리의 시선이 날카롭게 변했다.

자기보다 한참 어린 소녀에게까지 기백에서 밀리는가?

지나칠 정도로 눈치를 봐.

흠칫거리며 시선조차 맞추지 못한다.

아무래도 그런 본성의 소유자···.

아랑은 이런 모습까지도 마녀의 연기일거라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다, 당신들이 얼마나 강한 지는 잘 알았어요. 바깥에서 느껴진 기운만 봐도 그건 확실해요. 제가 남긴 마기를 먹으려고 찾아온 외래종들까지 모조리 무찌르다니··· 저는 대항하지 못해요. 그러니까 대화로 풀···.”

마녀는 양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최대한 살갑게 말을 걸어왔다.

“그래, 네년의 진명은 ‘미향’이로군.”

“···그걸 어떻게?”

하지만···.

철컥!

“어···라?”

격쇠를 당기는 소리.

언제 꺼내든 것인가?

빅터의 오른손에는 이미 화승총이 쥐어져있었다.

“아?! 아아아아아!?”

타앙!

이어서 그의 손아귀에 들린 총구가 불꽃을 뿜었다.

활짝 펼치고 있던 마녀의 손가락이 폭발했다.

“···히, 히야아아아악!”

고통을 숨기지 못하는 적나라한 비명.

마녀는 뒤로 나자빠지더니, 엄지만 남겨진 오른손을 필사적으로 쥐고 발광했다.

하지만 빅터는 그 가여운 상대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이 추호도 없어보였다.

“사, 살려···!”

말을 끝마칠 틈조차 주지 않아.

콰직!

마녀의 아래턱이 시원스럽게 날아갔다.

바닥에는 작살난 하악골과 이빨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진다.

쓰러진 그녀에게 나가간 빅터가 그대로 도끼를 휘두른 것이었다.

“아, 아그··· 아악! 아아악!”

“···속지마라, 꼬마.”

뒤돌아 달아나려는 마녀의 발목을 절개하며, 빅터는 아랑에게 말했다.

동정해선 안 돼.

이것은 사람의 거죽을 쓴 괴물이라고.

“얼핏 무해한 척 비굴한 소릴 늘어놓고 있지만, 지금까지 이 계집에게 당한 인간의 수만 봐도 거의 백 명에 달한다.”

그의 눈에는 보인다.

죽어간 자들의 혼백이···.

그것은 흡사 넋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사념의 아지랑이였다.

“내 얼굴을 봐라, 마녀 미향이여. 너에게 목숨을 잃은 이들의 사념이··· 나를 여기까지 인도했다.”

동시에 느껴진다.

마녀의 과거가.

너무나 어리석은 나머지 항상 손해만 보고 살았던 한 여인네의 희극···.

요령이 없어.

그러나 욕심이 많았다.

일곱 남매 사이에 태어난 애매한 위치였기에, 부모의 관심을 받지 못했어.

그 누구보다 사랑이 고팠다.

그래서 음란한 추파임을 알면서도 수많은 남정네들이 다가오는 걸 막지 못했지.

소문은 급속도로 퍼져만 갔다.

어느 순간, 그녀는 더러운 창부 따위로 불리고 있었다.

그러자 정분을 나누던 사내들도 전부 여인을 외면했어.

마을에선 자연스럽게 고립 당했다.

그것이 밉다.

그 일방적 비난이 너무도 증오스러웠다.

결국 순수한 애정만을 원했던 젊은 아가씨는 자신의 미래를 팔고 말았다.

어찌 보면 기구한 운명.

안타깝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특수한 힘을 통해 이 모든 걸 알게 된 사내는···.

“오직 자신만이 불행하다고 착각하지 마라.”

이를 매정하게 일축할 뿐.

“아직 목숨이 두어 개쯤 남았는데 재생이 안되는 게 그렇게 이상한가? 이해하지 못하겠나? ···놀랄 것 없다. 어차피 네년은 곧 죽을 테니.”

빅터는 두려움에 떠는 마녀의 정신세계를 계속해서 간파하고 있었다.

“그간 몸을 감춘 이유는 뭐지?”

“아으··· 으우으!”

“···오호, 마기의 소모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라? 이 배알도 없는 년. 그토록 죽는 게 두려웠나? 그런 주제에 잘도 제물은 넙죽넙죽 잘 받아 처먹었군.”

“아··· 아이아.”

“이렇게 멀리 떨어진 마을에선 무슨 수로 아이의 시신을 받았지? ···그래, 그거였나? 언제나 마기가 부족해질 쯤 촌장과 작당을 했다고. 그런데 속아 넘어갔다? 수년 째 제대로 제물을 받아본 기억이 없어? 이거 놀랄 노자군. 너는 얼마나 푼수이기에, 인간 따위에게 이용까지 당한 거냐?”

“···.”

“두려우냐? 분하고 치욕스럽나? 암, 그래야지. 그래야만 할 것이다. 네 년은 그만한 책임이 있으니까.”

그것은 심문이자 고발이었다.

이때, 아랑은 눈치 챘다.

그가 상대의 마음을 모조리 읽을 수 있단 사실을.

“용서를 구하기엔 너무 늦었다.”

너는 이미 너무 많은 비극을 만들었어, 라고.

빅터는 그렇게 덧붙였다.

“안심해라. 사후에 너를 벌할 저 세상이나 지옥 따윈 없으니.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안식처다.”

“으우, 이이··· 아아!”

죽고 싶지 않아.

마녀는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물론 상대에겐 통할 리 없어.

겁먹은 마녀의 반응을 주시하며···.

그는 마녀가 절망에서 도망치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선 수지가 맞지 않지. 여태 네가 저지른 죄의 값을 치루기에 그건 너무도 모자르다. 그러니 최소한···.”

“우우으으···!”

“뒈지는 순간까지라도 최대한 괴로워해라!”

쿠직!

이번엔 두 다리를 뭉개버렸다.

마녀는 이제 달아나기는커녕, 괴성과 함께 바닥에 사지를 휘젓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허나 그 발버둥도 이내 멈춘다.

잘려나간 절단부의 끝마디부터 하얗게 말라붙어, 석화가 시작되었기에.

“···잘 봐둬라, 꼬마. 이것이 마을을 미치게 만들고, 네 동생을 죽게 하고, 너의 운명까지 뒤흔든 그 ‘산신’의 실체이니.”

아이를 잡아가는 산신.

마을에 비극을 만들어내는 무시무시한 존재.

허나 미신이 만들어냈던 미지의 공포는 이제 어디에도 없다.

지금 아랑의 눈에 비치는 것은···.

반쪽만 남은 얼굴로 자신에게 필사의 애원을 하는 여인의 모습이었다.

“어떻게 할 테냐?”

“···.”

“원한다면 직접 복수할 수 있게 해주지.”

이미 용서라는 선택지는 없다.

아랑이 뭐라고 하든 빅터는 알아서 마무리를 하겠지.

그렇다면···.

“···나는···.”

아랑은 눈을 질끈 감는다.

그리고 속으로 되뇌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가슴 속에 품어왔던 어떤 감정을···.

잠시 후, 소년이 일생일대의 결의를 떠올렸다.

그 마음의 소리를 들었는지, 빅터는 살짝 놀란 듯이.

“···그래.”

허나, 동시에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가혹한 선택.

아이가 내리기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래도 소년은 받아들인다.

사내가 건넨 화승총을···.

그 안에는 이미 장전해둔 여분의 총알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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