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리의 장(5)
7.
숲 속 깊숙이 들어갈수록 그들의 전투는 더욱 처절해졌다.
현실과 동떨어진 광경.
그 일거수일투족 바라보며, 아랑은 기이를 온 몸으로 체험하고 있었다.
이매망량魑魅魍魎의 세계.
괴력난신怪力亂神이 판친다.
보이지 않는 마물과 싸우는 은발의 색목인과 남장의 소녀···.
모든 게 기존의 상식을 깨부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도망치지 않는다.
최대한 눈을 부릅뜨며 현실을 직시하려 했다.
‘고개 돌리지 마, 아랑. 저 남자의 전부를 보는 거야!’
처절한 살육.
그것은 일견 일방적인 싸움처럼 보였다.
안광이 어둠을 꿰뚫자, 사방에서 요마들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도끼날의 궤적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푸른 섬광과 검붉은 핏자국이 교차한다.
거대한 그림자가 맹렬히 지나간 자리에는 어김없이 토막 난 이형의 사지가 튀어 올랐다.
“역시 빅터 사부! 외래종들이 상대가 안 돼! 마치 짐승 같아요!”
“나는 이대로 마기의 중심까지 돌파하마. 잡졸들은 너에게 맡기겠다.”
“어라, 혼자서 가시게요?”
“···사역마나 중합체가 없다고 방심하지 마라, 리리 리.”
“앗, 자꾸 그러시면 좀 불안한데!”
잔말은 필요 없어.
그걸 끝으로, 빅터는 두 사람을 내버려둔 채 돌격했다.
“휴우, 사부도 참···. 이 도움도 안 되는 녀석까지 데리고 어떻게 싸우라고요?”
허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소녀의 얼굴은 여유 만만했다.
다수와의 싸움이 익숙한 지, 표정에 움츠리거나 주눅 든 모습이 일절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더욱이 링 블레이드를 다루는 리리 리의 움직임은 신묘하기까지 해.
지켜보는 아랑의 입장에선 범접하지 못할 어떤 영역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압!”
부우웅!
어느새 새로운 고리가 손에서 팔꿈치로 옮겨간다.
남 몰래 링을 하나 더 가지고 있었던가?
아니, 그것은 애초부터 나눠지는 장치로 되어 있어.
하나의 원반을 반으로 쪼개어 두 자루의 곡검으로 변환시킨 것에 불과했다.
“이것 봐! 넌 이런 거 절대 흉내도 못 낼 걸!”
소년의 시선을 눈치 채고 리리 리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말투가 방정맞았지만, 몸짓만은 요염하기 그지없다.
흡사 무희가 지켜보는 관객을 안달 내는 것 마냥···.
동작 하나하나가 모두 위험한 묘기나 나름 없었지만, 그때마다 예리한 외곽의 칼날이 정확히 적을 베어 나갔다.
몸을 둘러싼 원반에 사각은 없어.
다루기에 따라선 공방일체다.
리리 리의 자신감만큼이나, 아랑으로선 따라할 엄두도 나지 않는 놀라운 무술이었다.
‘그래도!’
짐짝 취급은 사양이야.
순순히 보호만 받고 있을 아랑이 아니었다.
‘···보인다! 여전히 모습은 흐릿하지만 못 볼 정도는 아니야!’
주변을 자세히 관찰하자, 땅에 쌓인 눈 위로 발자국이 나타났다.
틀림없다.
뭔가가 리리 리의 배후로 접근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소녀는 그 기습을 몰라.
신나게 눈앞의 적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누나, 뒤!”
숨을 크게 들이쉬지 말라는 경고는 이미 잊은 지 오래.
목청껏 지른 목소리로 리리 리가 반응하기엔 너무 늦어.
소년의 몸은 이미 달려 나가고 있었다.
별다른 수는 없다.
날이 있는 무기조차 구비하지 않은 채로.
그저 바닥에 나뒹구는 뾰족한 돌멩이 몇 개만을 챙겼을 뿐이었다.
하지만 소년의 돌팔매질은 보통이 아니었다.
“저리··· 꺼져!”
어릴 적부터 마땅한 장난감 없이 호수에서 보낸 시간이 많아서였을까?
살아있는 것에게 조준한 적은 처음이었으나.
아랑의 솜씨는 수십 걸음 앞에 있는 자그마한 표적을 맞출 수 있을 정도였다.
끈이 달린 자그마한 가죽 주머니에서 튀어나간 탄환이 불가시의 적을 노린다.
그리고 그 결과는···.
콰직!
절묘한 명중이었다.
“앗!”
다행히 그 기척에 리리 리가 뒤를 돌아본다.
마물이 꽤나 아슬아슬한 거리까지 다가왔던지.
소녀는 서둘러 몸을 낮추었다.
핏!
보이지 않는 발톱이 머리 위를 살짝 스쳤지만, 소년의 개입 덕에 그 기습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하앗!”
이어서 리리 리의 반격이 작열.
쌍수의 링 블레이드가 반원을 그리며 상대를 갈라버렸다.
모든 것이 비춰지진 않았지만, 소년은 소녀의 승리를 확신했다.
눈 더미 사이로 움푹 파인 자국들이 연달아 나타났기에.
“괜찮아, 누나?”
“···칫, 멋대로 끼어들긴!”
“어? 아니, 난···.”
“괜히 잘난 척 하지 마! 네가 아니었더라도 이 정도쯤은 간단했거든?”
딱히 아랑이 배짱을 부린 것도 아니었건만.
등골이 오싹한 순간에서도 리리 리는 고집을 부렸다.
“약해 빠진 꼬맹이 주제에, 너는 잠자코 내 활약이나 구경하고 있으면 된단 말이야!”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으려던 것인지.
리리 리는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 더욱 치열하게 싸웠다.
주변의 모든 적을 정리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십 수분···.
빅터의 모습은 저 멀리로 사라졌다.
남겨진 것은 리리 리와 그녀의 보호를 받던 아랑뿐이었다.
“···누나랑 아저씨는 항상 이런 것들과 싸웠던 거야?”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어?”
“보통은 사역마를 상대해. 하지만 마기가 뿌려지면 엑조틱의 잔당들도 나타나니까 이런 경우도 드물진 않아.”
“엑조··· 뭐라고?”
“아, 맞아. 넌 무식한 꼬맹이니까 서방의 명칭으로 부르면 못 알아듣겠지? 그건 우리말론 외래종이라고 하는데··· 아, 아니! 너 내가 숨을 참고 있으랬잖아?!”
“지금은 괜찮은 거 아니야?”
“···으이그, 말을 내가 말지.”
한차례의 광기가 스쳐지나가자, 겨우 주변의 탁한 공기가 누그러졌다.
그제야 아랑은 겨우 당당하게 말문을 열 수 있었다.
“외래종은 또 뭔데? 이제 좀 속 시원히 가르쳐주라. 둘이 대체 뭐하는 사람들인지. 이국의 퇴마사? 누나나 아저씨는 모두 신통력을 가진 거야?”
나만 아무 것도 모르는 건 불공평해, 라고 소년은 말을 이었다.
그 물음에 소녀는 눈길도 주지 않고 코웃음만 쳤다.
“안 알려줄 거지롱.”
“왜? 아깐 나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잖아?”
“흥이다! 오히려 너 따위가 없는 편이 나는 더 편하네요!”
“언제까지 심술만···.”
“시끄러워! 바쁜데 자꾸 말 걸지 마!”
“뭐어?”
“난 사부랑 다르게 조각이 없단 말이야! 그래서 마무리를 꼭 해야 한다고!”
“그건 또 무슨···.”
“조용히 해, 좀! 허투루 했다가 사부한테 혼나면 네가 책임질래?”
하지만 리리 리는 정말로 다른 것에 몰두 중이었다.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괴기스런 파편들을 발로 짓뭉갠다.
단 하나라도 남겨선 안 된다며 혀를 차더니.
한참이나 지나서야 속이 시원하다는 얼굴로···.
“···휴, 됐어. 이걸로 다신 재생하지 못하겠지.”
꽤나 고된 일이었던 것일까?
심지어 소매로 이마를 닦기까지 한다.
하지만 땀을 흘린 것은 아니야.
소녀가 쓸어낸 것은 핏물이었다.
자기도 눈치 채지 못한 사이, 미간에 찢긴 상처가 생긴 것이었다.
“···.”
아랑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품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천 조각.
손수건이라 부르기에도 초라한 것을 찢어서 붕대처럼 만든다.
“어, 뭐야?!”
이어서 아랑은 대나무를 파내 만든 물병을 기울였다.
리리 리의 상처를 씻어내기 위해서였다.
“가만히 있어 봐.”
아랑의 손길에 화들짝 놀란 리리 리 였다.
물론 곧 그 행위에 악의가 없음을 깨달았지만···.
“···건방진 꼬맹이. 주제에 사내인 척 하고 있어.”
“···.”
“앗, 알겠다! 나한테 점수 딸 생각이지? 하지만 메롱이다! 누가 속을 줄 알고? 이딴 짓 해봐야 하나도 안 통하네요!”
이 와중에도 혀를 내민 독설.
유치한 도발로 소년의 선의를 깔본다.
허나 아랑은 넉살좋게 무시하기로 했다.
비록 사부인 빅터의 명령이라곤 하나.
지금껏 무시무시한 존재들에게서 보호해준 소녀를 차마 미워할 순 없었기에.
심지어 그 과정에서 다치기까지 했다면 더 더욱···.
“조금만 참아. 피가 멈출 때까지만 이러고 있어줘.”
“까불지 마. 뭘 어린애 토닥이듯이 말하는 건데? 나는 너보다 연상이란 말이야.”
“나도 알아. 여러 번 들어서 기억해. 리리 누나가 두 살이나 많다는 거.”
“머, 멋대로 친한 척 내 이름 부르지 마!”
“···뭘 어쩌란 거야?”
“금지! 아무튼 금지!”
툴툴거리지만 의외로 리리 리가 얌전히 있어준 덕에 처치는 금방 되었다.
“흉은 안 질 거 같네.”
“어, 정말?”
이제야 리리 리가 살짝 기쁜 듯 반응한다.
아닌 척해도 은근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인가?
소년은 자신의 이마를 타고 내려온 사선의 흉터를 가리키더니.
“나랑 다르게 금방 나을 거야.”
하얀 천이 금세 빨갛게 물들었지만, 다행히 리리 리는 상처 자체가 그렇게 깊진 않았다.
경미한 찰과상.
일주일 정도만 곪지 않고 잘 넘긴다면 새살이 돋아나겠지.
그것은 누이나 마을의 어른들에게 자주 얻어맞은 경험이 있었던 소년이었기에 알 수 있는 지식이었다.
“···이상한 녀석.”
리리 리는 멋쩍은 기분에 고개를 획 돌렸다.
“너, 이깟 지저분한 옷감에 넘어갈 정도로 내가 싼 여자로 보여?”
“그런 거 아니야.”
“속셈이 뻔해. 그런다고 내가 널 다시 봐줄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거든?!”
“알았어, 알았어. 난 생색낼 생각 없으니 누나 마음대로 생각해.”
“어, 잠깐만. 너 설마 그거···.”
“응?”
허나, 리리 리는 곧 깨닫고 만다.
소년이 자신을 치료하기 위해 사용한 천 쪼가리가 무엇이었는지를.
그것은 어떤 의미로 유품이나 다름없어.
바로 아랑이 죽은 여동생을 품고 있었던 보자기였다.
“으···.”
묘한 죄책감에 소녀는 급히 입을 다문다.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발을 동동 구를 뿐이었다.
하지만 아랑은 개의치 않는 듯.
“괜찮아. 아저씨가 말한 것처럼, 아유는 이제 없는 걸.”
빅터가 들려준 생명의 이론.
그것이 아랑으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갈 의지를 주었다.
물론 전부 떨쳐내는 것은 불가능하겠지.
이따금씩 여동생을 떠올릴 때마다 동요가 찾아올지도 몰랐다.
허나 인간이란 적응의 동물.
그간 아랑은 충분히 슬퍼했어.
눈물도 충분히 흘렸다.
가혹한 오열이었지만, 그만큼 자비로운 망각도 일찍 찾아온다.
그걸로 소년은 비로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으씨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경건함에, 소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마치 자기가 어린애같이 느껴져.
못마땅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너, 정말 끝까지 우릴 따라올 셈이야?”
“응.”
“세상에는 모르는 게 더 나은 진실도 있어.”
드물게 무게를 잡는 목소리.
이는 그녀의 사부의 말투를 흉내 낸 것이었다.
“두렵지 않니? 한 번 알게 되면, 다신 평범한 생활로 돌아갈 수 없어. 그건 그만큼 끔찍한 지식들이니까.”
지금껏 소녀는 소년을 얕보고 있었다.
분명 이번 일을 경험하고 나면 줄행랑을 치겠지.
다른 또래의 아이들과 다를 것도 없어.
심지어 어른이라도 별반 차이는 없다.
지금껏 봐온 모든 사내가 그래.
믿음직한 존재란 오직 빅터 사부와 그보다 오랜 경력을 가진 대스승 뿐···.
더욱이 아랑은 자신과는 달리··· 지극히 평범한 소년처럼 보였기에.
그러나···.
“누나, 이상한 소릴 하네?”
“하?”
“내가 이걸로 도망칠 거였으면 벌써 진즉에 튀었을 거야. 이런 이상한 공간까지 따라오지 않았을 거라고.”
피식.
소년은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무던하고 안락한 인생 따위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누이에게서 잉태된 자신의 뒷사정에 비하면···.
세상에 요괴들이 넘치는 것조차도 별 것 아니라 느껴졌기에.
한 번은 내다버린 목숨.
이미 아랑에게 거칠 것은 없었다.
“그리고 난 아저씨한테 빚을 졌어. 최소한 그걸 갚기 전까진 이대로 못 죽거든.”
그 순간, 리리 리는 생각했다.
이건 동년배 소년이 할 법한 대답이 아니야.
그렇기에 허세나 거짓말일 가능성이 있다.
그 편이 현실적이다.
납득이 간다.
어차피 어린애의 유치한 객기···.
현실에서 도망칠 곳이 사라진 나머지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거라고.
“난 너 싫어.”
하지만 전투 중 미약하게라도 도움을 받는 건 사실이다.
심지어 어설프게나마 상처까지 치료받았다.
소년이 빅터 사부에게 신세를 졌다고 여기는 것과 같은 연장선에서, 이 또한 빚이라고 한다면···.
‘신세를 지면 반드시 갚는 것이 인간의 도리다.’
일전에 빅터 사부가 그녀에게 건넨 가르침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이어서 또 다른 기억이 소녀의 뇌리를 스친다.
오래 전, 고통의 나날에서 해방된 어느 날이···.
그 편린은 리리 리의 사고를 지배하는 일종의 구속과도 같은 것이었다.
‘리리 리···. 너는 인간이다. 비록 한 순간이나마 그 영역에서 벗어났다 할지라도, 앞으로는 절대 길을 이탈해선 안 된다. 그렇기에··· 너는 사람의 미덕을 언제나 명심해야 해.’
이해하진 못한다.
빅터를 만나기 이전의 기억은 어째서인지 흐릿했기에.
리리 리가 나이에 맞지 않게 정신연령이 어린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바로 수 년 단위의 과거가 증발해있었던 것이다.
유일하게 그녀가 아는 사실은···.
자신의 이름이 ‘리리 리’란 것과 열댓 살에서 더는 성장하지 않는 몸을 가졌단 정도.
하지만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리리 리는 가슴 언저리가 꾸욱 조여 드는 기분이 들었다.
‘솔직히 도리나 미덕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 들어봐야 제대로 알 지도 못하겠는 걸.’
단지 그걸 어겼을 때, 실망하는 사부의 얼굴이 참을 수 없이 괴로울 뿐.
그래서 리리 리는 가능한 그의 지시를 지켜야만 했다.
사부는 소년을 지키라고 명했어.
남은 것은 그걸 완벽히 수행하는 일뿐이었다.
“···흥, 괜히 더 나대다가 다치지나 말아.”
“응? 뭐?”
“입 다물고 따라오기나 하란 말이야!”
머리에 꿀밤을 먹이는 것으로 소년의 입을 막는다.
칭찬을 해주기엔 쑥스러워, 허나 차마 내치지도 못해.
그나마 이것이 당장 리리 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화답이었으리라.
그리고 마침···.
퍼엉!
하늘이 번쩍였다.
그것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발사된 신호탄이었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 불꽃의 아래에는 빅터가 대기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좋아, 휴식 시간 끝! 우리도 슬슬 움직여야지.”
“···.”
“야, 뭘 멍하게 보고 있어?”
“어, 어어?”
소년은 자기도 모르게, 화려하게 갈라지는 녹청색 섬광에 넋을 잃었다.
원리는 녹이 쓴 구리가루에 흑색화약을 조금 더한 정도의 단순 화학반응에 불과했지만.
불꽃놀이를 처음 본 시골 소년에게는 까무러치게 놀라운 것이었다.
이계의 마물은 두려워하지 않는 주제에 지극히 사소한 속임수에는 깊은 흥미를 보이다니.
리리 리는 아랑의 모순된 순진함에 기가 다 막힐 지경이었다.
“자, 서둘러. 빅터 사부가 우릴 부르고 있으니까.”
이때, 소녀는 알았을까?
자신이 아주 자연스럽게 소년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는 사실을···.
8.
···두 사람이 걸음을 멈췄을 때, 그 앞에는 빅터의 당당한 뒷모습이 있었다.
그는 어떤 장소를 주시하면서 도착한 소년과 소녀에게 손짓을 건넸다.
뻥 뚫린 암벽 사이의 통로···.
그것은 동굴이었다.
“마침 잘 왔다, 리리 리. 별 일은 없었나?”
“네, 사부! 이 정도쯤이야 식은 죽 먹기죠!”
역시 방심한 모양이군, 하고 빅터가 읊조렸다.
리리 리는 자신의 머리에 붕대가 감겨있다는 것조차 까먹은 눈치였다.
“그보다 사부, 여기까지 몰아붙인 건가요?”
“아니. 나는 그저 마기의 근원을 쫓았을 뿐.”
“그러면?”
“놈은 처음부터 쭉 이 안에 있었다.”
“네에? 우리가 결계까지 여기까지 밀고 들어왔는데도요?”
“둘 중 하나일 거다. 달아나지 못했거나, 달아날 필요가 없거나.”
“함정···일까요?”
“그건 직면해봐야 알겠지.”
그러면서 빅터는 아랑을 바라보더니.
“꼬마, 너도 가겠나?”
“이제 와서 무슨 말이야, 아저씨? 그야 당연히!”
“여기엔 ···가 있다.”
소년은 되묻지 않았다.
왜냐하면 잘못 들은 게 아니었기에.
빅터가 언급한 그것이란, 다름 아닌 원수의 존재였다.
지금까지 허상이라 치부했던 것.
그러나 그 언급만으로도 마을 사람들은 광기에 사로잡혔다.
누이의 운명을 뒤틀려놓았으며.
자신과 죄 없는 일곱 아이의 목숨까지 앗아갔던 그 증오스런 이름···.
‘산신···!’
그 짤막한 단어에, 소년은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분노의 감정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