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92화 (92/186)

흉리의 장(4)

5.

“···아저씨랑 넌 대체 뭘 쫓고 있는 거야?”

리리 리와 단 둘이 된 기회가 생기에.

아랑이 겨우 그 질문을 꺼냈다.

여동생을 뭍은 지 이틀째 되던 날이었다.

그러나.

“네가 그걸 알아서 뭐하게?”

리리 리는 아랑에게 호의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인상이 둥근 편인 소녀였지만, 어째서인지 소년을 대할 때만큼은 날을 세워서 말을 하는 것이다.

“바보 같은 게, 눈치도 없어!”

“뭐야?”

“너 완전 무 쓸모거든?”

이렇게 나오면 성격이 불같은 아랑 쪽도 잠자코만 있지 못한다.

허나 반론할 말도 없어.

틀린 말이 아니다.

당장 자신은 일방적으로 이들과의 동행을 고집부리고 있을 뿐이었기에.

“우리는 바쁘단 말이야. 그런데 네가 쫓아오니까 맘씨 착한 사부께서 자꾸만 보폭을 줄이신다고.”

“···.”

“까놓고 말해서 성가셔! 나 너 엄청 싫어!”

“정말이야?”

“그래! 리리 리는 못생기고 지저분한 너 따위, 너무너무너무 질색이라고!”

“아니, 그거 말고.”

“···잉?”

“네가 날 고깝게 여기는 거야 잘 알아. 상관없어. 미움 받는 건 나도 익숙하니까.”

“이, 이게···.”

“그보다 진짜야? 나 때문에 지체되고 있다는 게···.”

“흐, 흐흥! 그야 당연하지! 우리 스승님은 굉장한 사람이야! 도술이나 축지법도 쓸 수 있단 말이야. 너 따위만 없었으면 지금쯤 산을 두 개는 더 넘었을 걸? 사부 혼자였으면 벌써 목적지에 도착하고도 남았···!”

이크, 하고 리리 리는 급히 자신의 입을 막았다.

자기마저 스승의 발걸음을 따라가지 못한단 걸 들킬까봐 말을 멈춘 것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좀 더 착잡한 심정이었기에···.

‘나도 나름 필사적이었는데.’

그럼에도 이 속도가 신경을 써준 것이라고?

설마하니 이마저도 배려 받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그러고 보니 사내가 지금껏 땀 한 방울 흘리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소년은 점점 더 빅터를 사람이 아닌 뭔가 다른 존재처럼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아저씨는 뭐랑 싸우는 건데?”

“야, 너 지금까지 내가 한 말 제대로 안 들었어?!”

“들었어. 내가 못난이라며? 주제를 알라 그거지? 자, 전부 인정할게. 그러니까 얼른 알려 줘.”

“···어, 어어?”

말주변만큼은 리리 리보다 우수한 아랑이었다.

“이 철면피··· 썩을 꼬맹이 같으니!”

“너도 작은 건 마찬가지잖아?”

“이래 봐도 난 열 일곱이거든?!”

“두 살 밖에 차이 안 나네, 뭐.”

엄청 큰 거지!

그렇게 속으로 포효하나,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뭐, 어쩔 수 없네. 다소간의 무례는 손윗사람인 내가 참아줘야지.”

좀 더 연상의 여유를 보여주고 싶었던지, 리리 리는 애써 목소리까지 변조시킨다.

그러나···.

“어. 그건 참 고마워, 리리 누나.”

아랑은 상상 이상으로 약삭빨랐다.

“누, 누가 함부로 그렇게 부르랬어?!”

“그럼 뭐라고 해?”

“시끄러워! 지학志學도 안 되는 주제에!”

“지학? 그건 또 뭔데?”

“학문에 뜻을 두는 나이! 열다섯 살을 말하는 거야!”

“아하.”

“아는 게 없구나? 그러니 부끄러움도 모르는 게 당연하지!”

“맞아. 우리 누님도 밥벌이를 하려면 뻔뻔해야한다고 가르쳐줬거든.”

“이, 이···.”

소년에겐 타격이 없다.

면전에서 험담이나 무시를 해도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랑은 역공을 시작했다.

“그런데 누나. 아까부터 계속 잘난 척만 하고 있는데, 사실은 그쪽도 잘 모르는 거 아냐?”

자존심을 건드린다.

리리 리는 거기에 바로 걸려들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빅터 사부에게 가르침을 받기 시작한 지 어언 1년도 더···.”

“그럼 알려 줘봐.”

“싫어!”

“왜? 어차피 누나나 나나 그 사람한테 짐덩이인 건 마찬가지 아냐?”

피식.

아랑은 대놓고 입가를 올려 보였다.

지금까지 당했던 험한 말들의 복수.

허나 역습이었던 만큼, 리리 리가 받은 정신적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너···.”

아까 들었었구나아아아!

···라고 외치며 참다못한 리리 리가 달려들었다.

꼴사납게도.

소년과 소녀는 엎치락뒤치락하며 바닥을 굴렀다.

그런데 그 광경을···,

“···뭣들 하는 짓이냐?”

어느새 자리로 돌아온 빅터가 지켜보고 있었다.

“앗! 사, 사부···.”

리리 리가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하필 쓰러진 아랑의 위에 올라탄 채, 양손으로 그의 뺨을 잡고 늘리고 있었다.

“아, 안 때렸어요!”

그래.

주먹으로 치진 않았지.

아직은 말이다.

“···이젠 철 좀 들어라, 리리 리. 너는 작년에 과년瓜年을 채웠잖느냐?”

여담이지만.

과년이란, 동방에서 부르는 결혼하기에 적당한 처녀의 나이를 뜻하는 것이었다.

“사부, 전 시집 같은 거 갈 생각이 없···.”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다.”

깊은 한숨.

보아하니 말귀를 못 알아 듣는 일이 한 두 번 있었던 게 아닌 모양이었다.

“나 참, 이래선 잠깐 자리를 비우지도 못하겠군. ···꼬마.”

빅터는 아랑에게 손짓 하더니.

“모닥불을 정리해라.”

“···아.”

“바로 출발할 테니.”

자연스럽게 지시를 내린다.

마치 리리 리에게 대하던 것과 거의 다르지 않은 명령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적지 않게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나도··· 일행으로 봐주고 있는 거야?’

이어서 그는 뭘 멍하니 있느냐고 핀잔까지 주었다.

어째서일까?

분명 무뚝뚝한 말투에 일방적인 대우일 텐데.

아랑은 그 말이 기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자신을 필요로 해준다는 그 사실이···.

6.

눈이 쌓인 밤의 풍경은 창백하다.

월광이 지면에 내려져, 새하얗게 반사된 절경을 만들어낸다.

‘···어른들이 종종 말하던 풍류라는 게 이런 거였구나.’

세계를 바라보는 소년의 눈동자가 빛난다.

아랑은 밤을 좋아하지 않아.

더욱이 보름달이 뜬 것은 진저리가 날 정도로 질색했다.

허나 지금만큼은 달라.

소년은 스스로 놀랄 정도로 자연이 지닌 미美에 현혹되어 있었다.

만약 그가 음유시인이었다면, 지금 느낀 감동을 어떻게라도 표현했으리라.

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런 감상을 가진 건 오직 소년뿐.

뒤돌아선 빅터의 뒷모습에서는 처절한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마치 전쟁터를 앞에 둔 병사의 기백···.

그의 안광은 평소보다 날카로워져 있었다.

심지어 리리 리도 마찬가지야.

스승의 분위기에 압도되기라도 한 듯, 언제나 촐싹거리던 움직임에 긴장이 스미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다, 리리 리.”

“네, 사부!”

빅터의 표정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모자챙의 각도 때문인가?

아니,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어둠의 농도가 짙어진 탓이었다.

이 시점에서 소년은 위화감을 느낀다.

뭔가가 변했다.

그것은 세상을 유지하는 어떤 규칙이 뒤집어진 것만 같은 꺼림칙함이었다.

이윽고 아랑이 눈치를 챈다.

어느새 그림자의 방향이··· 정 반대가 되었음을.

하늘이 요사스런 색으로 물들었다.

군청이 파랑에서 초록으로 흘러가더니, 이내 소용돌이를 연상시키는 형태로 바뀌었다.

‘순식간에 날이 밝다니···.’

아니, 사실은 그마저도 순간의 착각에 불과했다.

요변은 멈추지 않아.

끝내는 샛노란 빛깔에 주홍색이 얽혔어.

그야말로 토혈···.

마치 병자의 목에서 뿜어져 나온 고름과도 같았다.

“아저씨, 이건···.”

“쉿! 조용히 해, 바보야! 살아서 나가고 싶다면 아무 말도 하지 마!”

손바닥이 아랑의 입술을 막는다.

지극히 당연한 의문을 품는 아랑에게, 리리 리는 곧장 침묵을 권했다.

“여기서부터는 마녀의 영역이야. 비명이나 공포가 담긴 말을 내뱉으면, 그 순간 마의 표적이 되고 말 걸?”

“···.”

“너무 깊게 숨을 들이 쉬는 것도 안 돼. 보통 사람은 절대 마시면 안 되는 공기로 꽉 차있으니까.”

소년은 그게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어.

하지만 소녀의 경고가 결코 헛소리가 아니란 것만큼은 알았다.

왜냐하면, 눈앞의 사내가···.

농담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빅터가 오른 손에 거대한 뭔가를 집어들었기 때문에.

‘도끼?’

물론 모양은 그 도구를 닮아있다.

허나 그렇게 단정하기엔 너무도 기이한 형태.

칼날 부분에서 묘한 푸른빛이 흘러나오는 것은 둘째쳐도···.

손잡이까지 같은 재질의 금속으로 된 것은 대체?

쇠로 재련해서 만든 게 아닌 건가?

표면은 들쭉날쭉하고 부자연스럽다.

인위적인 가공의 흔적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리리 리, 그 아이를 부탁한다.”

“네에? 하지만 사부?!”

“명령이다. 절대로 죽게 하지 마라.”

“씨이···.”

소녀가 불평하기도 전에, 그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곤 뜬금없이 빈 공간에다 도끼를 쥔 손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니야, 저건 허공이 아니라···.’

투명한 실루엣이 공간에 겹쳐서 일렁인다.

그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머지않아 어떤 것이 아랑의 얼굴에 튀었다.

“윽···!”

급히 소매로 닦아보니, 그것은 파란색에 가까운 보랏빛 액체였다.

끈적거리고 역한 냄새가 나.

기분 나쁠 정도로 점성이 높은 오물이었다.

“칫, 어쩔 수 없네!”

팟!

이어서 가까이 있던 리리 리의 몸도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는 맨 손이었나 싶더니, 또 언제 꺼낸 건지 특이한 물건을 들고 있었다.

펼쳐드는 장치로 된 커다란 원반.

하지만 속이 비어있고 바깥쪽은 흉흉한 칼날이었다.

한쪽 부분이 그나마 천 조각으로 두텁게 쌓여있지 않았다면···.

이것은 들어 올리는 것만으로도 손아귀에 깊은 자상을 남겼을 게 틀림없었다.

아랑은 그것의 이름을 몰랐지만, 사실 이 무기는 바다 건너에선 링 블레이드Ring blade라 불리는 대형 풍화륜風火輪의 일종이었다.

“하아아앗!”

부웅!

소녀는 날았다.

동시에 아름다운 윤무輪舞가 펼쳐졌다.

원반을 회전한다.

그 맹렬한 움직임이 소년의 코앞에 있던 불가시의 적을 튕겨냈다.

팔꿈치와 손목을 이용한 오묘한 연속 동작과 함께 리리 리가 파고든다.

무술에 문외한이었던 소년이 보기에도, 소녀가 누군가를 밀어붙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잘 봐. 아까 우리가 뭘 추적하고 있는 지 물었었지? 이게 바로 그 대답이야.”

잠시 후, 공방을 멈춘 리리 리가 바닥 위의 뭔가를 걷어찼다.

그러자, 아주 일순간이었지만 보였다.

아랑은 그것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허억!”

지렁이 같은 것이 땅을 긴다.

희멀건 색을 가진 회충의 무리···.

하지만 그 실루엣만큼은 사람의 모습과 다르지 않아.

바글거리는 벌레들로 이뤄진 사지와 몸뚱이를 가지고 있었다.

‘···요괴?’

실존했단 말인가?

그런 미신 속 어둠의 존재가?

우욱.

너무도 역한 광경에 소년은 구토감이 저절로 끌어 올랐다.

토막이 났는데도 움직이고 있어.

리리 리는 성가셔하면서도 그것들을 하나하나 찢어발겼다.

“너도 비위가 참 약하구나? 그럼 그럼, 겁날 만도 해! 으스스하지? 무서워서 죽을 것 같지? 하지만 아직 멀었어. 이건 시작에 불과하거든? 곧 우릴 따라온 걸 후회하게 될 거야.”

아무렇지도 않다면 거짓말이다.

이런 악몽 같은 세계 따위, 아랑은 모른다.

하지만 이미 눈으로 본 이상 돌이키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자, 이제 어떻게 할 테야?”

그렇게 물어오는 리리 리에게 아랑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곤 의지가 담긴 시선을 보낸다.

소년은 각오했다.

빅터란 사내의 모든 것을 전부 지켜봐주겠다고.

그걸 위해서라면, 앞으로 어떤 기이한 현상이 펼쳐져도 견뎌 내고 말리라고···.

그는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자이기에.

그나마 있었던 것조차 잃어버린 입장에선 무서울 건 없었다.

괴물은 겁나지 않는다.

악의를 품은 인간에 비하면 그건 아무 것도 아니니까.

정말로 두려워해야하는 건 지금껏 자신이 봐왔던 추악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뿐···.

이 시점에서 아랑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 뿐이었다.

‘나는··· 저 남자처럼 되고 싶어!’

언제나 동경해왔다.

과묵하지만 다정한 자.

막강하지만 힘을 함부로 쓰지 않는 자.

그러면서도 타인을 위해 싸우는 자.

망설이지 않는 굳은 신념의 협객.

그런 어른이···.

그런 인간이 되길 소년은 진심으로 소망했다.

물론 방법은 모른다.

아버지가 없는 사생아는 십 수 년간 길고 긴 방황만을 해왔기에.

허나, 지금에야 비로소 그는 감을 잡는다.

직접 보고 배울 수밖에 없다는 걸.

그렇기에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었다.

아랑은 강대한 공포에 짓눌리기보다, 그에 당당히 맞서는 빅터의 뒷모습에서 용기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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