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90화 (90/186)

흉리의 장(2)

2.

“어디, 계속 해볼 텐가?”

거구의 사내는 명백한 힘의 차이를 보여주었다.

원래대로라면 꼬리를 내리고 몸부터 살펴야 할 터···.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재정신이 아니었다.

눈앞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이방인을 두려워하면서도 그 이상의 공포에 지배받고 있었기에.

“죽여 버려!”

“산신께서 노하시기 전에 어서!”

적어도 상대는 사람이다.

분명 피도 흘리겠지.

그렇다면 죽일 수 있어.

아무리 강한 힘을 지녔다한들 동시에 달려들면 장사가 없다.

그것은 한낱 인간에 불과할 테니.

척!

마을 사람들은 무기를 든다.

녹슨 괭이와 쇠스랑.

어설픈 죽창과 가래 따위들···.

대부분이 농기구였지만 살의만 품는다면 언제든 흉기로 변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방해하지 마라!”

“어, 어서··· 제물을!”

일렁이는 횃불 사이로 이성을 잃은 자들의 얼굴이 드러났다.

살인에 대한 자제력을 잃어버린 다수의 군중···.

모두가 하나같이 충혈된 눈이야.

집단으로 광기에 절여져 있었다.

그러나···.

“재미있군.”

위축되지 않는다.

스물 이상의 장정을 앞에 두고서도.

사내는 물러날 기색조차 없다.

단지, 그는 눈을 부릅뜰 뿐이었다.

해봐라.

얼마든지 상대해주지.

마치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 이 머릿수가 보이지 않는 거냐?”

“겁 대가리를 상실했나?!”

저벅.

사내가 오른쪽 발을 내디뎠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당한 움직임이야.

그걸 지켜보는 무리조차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그는 무기도 없는 맨손으로···.

“그건 사람을 향해 겨눌 물건이 아니다.”

“헉, 허억···!”

상대가 쥐고 있던 농기구를 빼앗아 분질러 버렸다.

“끄억!”

빠각!

가장 앞에 있던 자의 얼굴을 후려갈긴다.

덩치만큼이나 거대한 주먹이었다.

일격에 상대가 나가떨어졌어.

산산조각 난 턱주가리에 비하면, 뇌진탕 따위는 부가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세상에!”

“누가, 누가 저 자식을 좀 막아!”

퍽!

콰앙!

남자가 팔을 휘두를 때마다 연달아 행렬이 무너진다.

무모하게 날붙이를 휘두르며 반항한 이도 있었지만, 예외 없이 덩치의 왼팔에 막히고 만다.

‘이럴 수가!’

과연.

쇠사슬은 이걸 위해 휘감고 있었던 것인가?

아랑은 기겁했다.

무기를 든 사람들 앞에서 이런 대응이 가능하다니?

하지만 소년이 놀라기엔 아직 이르다.

곧 덩치 큰 이방인이 더욱 신묘한 기술을 사용했기에.

“···후우우.”

이방인은 앞으로 나아가서면서 숨을 깊이 들이 쉬었다.

기묘한 호흡.

그리고 땅이 흔들릴 정도로 강력한 보법.

이내 범상치 않은 기운이 그의 오른팔을 타고 질주한다.

“흡!”

쿠와아아아앙!

보이지 않는 충격파가 눈이 쌓인 수해를 요동치게 만들고···.

그가 내지른 주먹에 대여섯 명 이상이 뒤로 튕겨나갔다.

그들은 아무렇게나 처박혀 인사불성이 되었다.

‘강해, 이 사람은 엄청나게···!’

한바탕 날뛴 직후임에도, 사내에겐 지친 기색이 없다.

심지어 이마저도 굉장히 봐주고 있단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싸움의 영역을 초월했어.

이미 일방적인 제압에 가까웠다.

“이 요괴 놈···!”

“사, 사람이 아니야!”

상대가 가진 압도적인 무력에 마을 사람들은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반대로, 소년은 자기도 모르게 덩치 큰 이방인을 경외하고 있었다.

그의 우직한 등 너머에서 귀기鬼氣가 뿜어져 나오는 것만 같아.

마치 전설에 나오는 무신武神을 눈앞에서 영접하고 있는 기분이었기에.

이어서 사내는 결정타를 보냈다.

“다음은 또 누구냐?”

“크으···.”

“네놈인가? 아니면 너냐?”

“그만! 타국의 여행자여. 이걸로 멈춰주시게!”

몰려든 사람들 사이에서 한 노인이 치고 들어온다.

그는 아랑이 사는 마을의 촌장이었다.

“그대가 얼마나 비범한 지 잘 알았소! 우리 젊은이들이 상대가 안 된단 것도 충분히···.”

“···.”

“하지만 이해해 주시게! 우리에게도 이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단 말이외다!”

“호오, 애들을 때려죽일 정도로 간절한 이유란 게 대체 뭐지?”

“그, 그건···.”

이 지경까지 와서도 눈치를 살핀다.

촌장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마을 사람들이 말을 꺼내기 망설이자···.

사내가 처음으로 무뚝뚝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것은 경멸이었다.

“···말종 새끼들, 같잖은 거짓말을 하고 있군.”

“뭐, 뭐라?”

“꼬마.”

“···아?”

“정신 차리고 일어서라.”

어느새 사내는 아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늦은 감이 좀 있지만, 혹시 모르니 묻겠다. 내가 정말 괜한 참견을 한 건가?”

“아니···.”

“저들의 말처럼 너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냐?”

“그, 그럴 리 없잖아! 나는···!”

소년이 울컥하며 부정했다.

거구의 사내는 그 얼굴에서 뭔가를 읽어낸 듯이···.

“그럼 그렇지.”

착각이었을까?

아주 잠깐이었지만, 아랑은 그의 무표정에서 미소를 본 것 같았다.

사내는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았다.

격려도, 칭찬도 일절 없이···.

한 번 쓱 하고 눈을 맞춘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소년은 어느새 두려움을 잊었다.

인정받은 기분.

마치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그가 보장한 것 마냥···.

“잘 들어라, 멍청한 놈들. 이 숲에 너희가 두려워하는 산신 따윈 없다.”

거구가 읊조렸다.

그는 마을 사람들을 비난하는 투를 숨기지 않았다.

“너희에게 내려진 저주란 것도 이미 오래 전에 끝난 일이야.”

“네, 네까짓 게 뭐라고 멋대로 지껄이는 것이냐?!”

“다 아는 수가 있지.”

사내는 모자를 벗더니, 자신의 왼쪽 눈을 가리켰다.

그러자 기이하게도 그의 흰자가 순식간에 검은 색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내 눈은 속이지 못한다.”

사람들은 놀라움에 말문을 잃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는 대대로 동방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승 중 하나···.

바로 모든 진실을 꿰뚫는 암안暗眼이었기 때문에.

“네, 네놈이 산의 신령님이라도 된단 뜻인가!”

“이번엔 신령인가? 세계관이 참 빈곤하군.”

“도깨비 놈! 역시 너는 흰 피부의 요괴였구나!”

당연히 촌장은 거품을 문다.

그는 마을의 오랜 비극을 직접 목격한 생존자였다.

모든 걸 정면에서 부정하는 사내가 달가울 리 없었다.

하지만 이국의 나그네는 단호한 목소리로 장담한다.

“이 자리에 요물이 있다면 그건 네놈뿐이지. 십 년 넘게 순진한 마을 놈들을 가지고 논 사악한 늙은 여우가 말이야.”

“너 이 노옴!”

“···그래. 아이들을 바쳤나? 매년 마다 마녀와 거래를 했군. 네놈은 그 육신이 불경한 실험의 재료로 쓰일 걸 뻔히 알고도···.”

촌장은 사내가 입을 열 때마다 흠칫하며 놀랐다.

대부분은 소년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뭔가 정곡을 찌르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용케도 이 허술한 거짓을 십 년 넘게 유지하셨군. 대가는 뭐였지? 금은보화? 지하실의 비밀 금고라··· 많이도 긁어모았군.”

“촌장님··· 이게 다 무슨 말입니까?”

“드, 듣지 마라! 전부 마귀의 잔꾀다!”

“돌이켜 봐라. 매년마다 희생자를 지목한 장본인이 누구였는지를.”

“그건···.”

“이익!”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한 자리에 모인다.

촌장을 향해서였다.

설마하니, 전설이 사실이었던가?

저 거림직한 눈은 정말로 상대의 마음을 꿰뚫어보기라도 하는 것인가?

“속지마! 내가 무엇 때문에 소중한 주민들에게 그런 짓을 하겠나? 우리는 모두 가족이 아니더냐?”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저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지금까지···.”

“닥쳐!”

촌장은 자신을 의심스레 바라보던 청년의 정강이를 걷어차 버렸다.

그 행동이 도리어 역효과를 냈다는 걸 자각하지도 못하고서···.

그는 이방인에게 살벌한 삿대질을 내밀었다.

“뭣들 하느냐! 당장 저 놈을 쳐 죽이지 않고!”

허나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다.

사내에게 얻어맞은 자들은 아직 기절한 상태야.

이대로 덤벼봐야 결과는 뻔히 보일뿐더러···.

‘우리는 왜 지금까지 눈치 채지 못했을까?’

저주는 없을지 모른다.

아니, 설사 한 때는 있었다고 해도.

암안을 가진 이방인의 말처럼 이미 모든 게 끝났을 수도 있다.

잔잔한 수면에 파문이 일어나듯···.

지도자를 향한 의심암귀가 그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

“설명해주십시오, 촌장!”

“돌았냐? 너, 설마 저 이방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암안의 소유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잖은가?”

“다 헛소리야! 산신께선 존재하신다!”

“그래, 그간의 제물이 헛되었을 리 없어···.”

“아직도 모르겠나? 우린 속은 거라고!”

“촌장부터 잡아! 놈이 달아나지 못하게!”

혼란.

촌장을 의심하는 쪽과 두둔하는 세력으로 나누어지고 만 것이다.

무리는 반으로 갈라져 주먹질을 시작했다.

결론이 어떻게 나던지 간에···.

이들은 결코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겠지.

허나 상황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부!”

예상치 못한 이변이 일어났기에.

뒤이어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든 것이다.

“빅터 사부!”

쾌활하지만 방정맞은 음성이 나무 위에서 들려온다.

가지 사이를 타넘는 자그마한 인영人影이 원숭이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또 절 내버려두시고 혼자서만··· 으, 으악!”

콰당!

불청객이 추락했다.

칠칠치 못하게도.

그것은 아랑의 바로 앞에서 엉덩방아를 찍었다.

‘여자애?’

머리칼을 뒤로 정돈하서 화려한 비녀를 꽂은 동년배의 여자아이···.

차림새는 덩치 큰 사내와 같이 서국의 복식이었지만 피부색이 달랐다.

흑안 흑발을 가지고 있어.

인종은 아랑과 같은 동방의 민족이었다.

“아이, 아파라···.”

“촐싹대지 마라, 리리 리.”

“씨이, 전부 빅터 사부 때문이잖아요. 불빛이 보인다고 갑자기 튀어나가면 어떻게 해요?”

“남 탓부터 하는 그 버릇은 고치지 못하겠나?”

남자가 성을 내며 노려보지만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녀는 입을 삐쭉 내밀려 불만을 토로했다.

“흥이네요. 저는 그림자를 못 다룬단 말이에요.”

“···.”

“그보다 사부, 제가 없던 사이에 한바탕 하셨던 건가요?”

“그렇게 됐다.”

“저한텐 사바세계의 일에 절대 끼어들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 당부하시더니?”

“필요한 일이었다.”

“네에, 물론 그러시겠죠! 그래서 성과는 있었나요?”

“···헛걸음이다. 이 땅엔 결계가 사라진 지 오래야. 흔적은··· 좀 더 앞에 있군. 채 지우지 못한 마기가 산맥 너머에서 일렁인다. 아마 마녀가 숨은 은신처도 그 인근이겠지.”

소녀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무뚝뚝한 사내와 다르게, 여자애 쪽은 왈가닥 성격이 그대로 드러났다.

결국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은근히 우스운 만담이 되어버렸다.

도저히 나쁜 무리로는 보이지 않아.

주변을 에워싼 마을 사람들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허탈감에 빠졌다.

“···대체 정체가 뭐냐, 네놈들은? 왜 하필 이 시기에 나타나서···.”

그 사이, 촌장은 젊은이들에게 포박당한 상태였다.

그가 이 식은땀을 흘리며 물었지만 덩치는 입을 굳게 닫았다.

반면, 동행한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장난기 있는 표정을 지었다.

“사부, 모 처럼인데 오랜만에 그거 한 번 복습 해볼까요?”

“아서라, 리리 리.”

“왜요? 저 우민들에게 알려주죠. 우리가 세간에 어떻게 불리고 있는지.”

덩치 큰 사내는 이마를 짚었다.

말로 해봐야 알아들을 상대가 아니라고 달관해버린 것이었다.

“···네 멋대로 해라.”

“거기 할배! 귀를 씻고 잘 들어. 우리는 말이야!”

소녀는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끼더니.

“항마사, 퇴마객, 파수꾼, 그림자들, 쐬기를 박는 자, 회색늑대들···!”

평생 한 번 들을까 말까한 생소한 명칭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뭐더라? 위아으 헌··· 셉헤 브레익?”

대부분은 어눌하고 어색한 발음.

그래서 바로 옆에서 듣던 소년조차 그걸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아, 잠깐만! 저 멀리 바다 건너, 사부네 고향에서도 불리는 특별한 이름이 또 있다고 했었는데, 그게··· 어어어?”

갑자기 소녀는 머리를 싸매기 시작했다.

그 꼴이 망신스러워.

큰 몸집의 색목인은 여자애의 머리에 자신이 쓰던 모자를 깊이 씌워버렸다.

“됐다. 네 기억력엔 기대도 안했으니.”

“앗? 잠시만요, 사부! 조, 조금만 더 생각하면 떠올 릴 수 있어요. 그러니까··· 분명 헤, 헤센··· 헤센야흐···.”

“어차피 말해봐야 이 자들은 알아듣지도 못할 거다.”

그러면서 사내는 등을 돌린다.

이제 촌장의 처우는 마을 사람들의 문제···.

그의 관심사는 아랑에게로 향해 있었다.

“꼬마.”

그 부름에 소년은 고개를 들었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크게 보여, 이방인의 키는 거의 7척에 육박했다.

마을에서도 이만큼 거대한 몸집은 없었어.

도저히 같은 인간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다.

대체 뭘 먹으면 이렇게 성장할 수 있는 것일까?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너를 고용하마. 밤눈은 밝은 편이냐?”

“···네?”

“이 산을 잘 아는 길 안내꾼이 필요하다.”

“사부,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정안을 쓰면 그런 거 아무래도 필요 없··· 읍!”

“···넌 입 다물고 있어라, 리리 리.”

어째서?

왜 하필 자기냐고 묻는 것이었지만, 이 시점에선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그럼 가지.”

남자는 거절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는 이미 소년이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런데 그 순간.

“아, 아랑···.”

누이가 소년을 불러 세웠다.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일은 단지 악몽에 불과했던 것일까?

그녀는 거짓말처럼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가, 가지 마. 이 누나를 버리지 말아주렴!”

누이가 아랑의 낌새를 살피며 조심스레 다가온다.

소년의 발은 멈춰 있었다.

“조금 전에 그거··· 전부 거짓말인 거 알지? 다 너를 생각해서, 네가 미련 없이 도망치길 바라서 했던 말이야. 아랑을 낳은 게 나라니··· 그럴 리 없잖니?”

속셈이 뻔히 보였지만···.

여기서 소년은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너마저 사라지면 나는···. 부탁이야··· 이제 모든 오해가 풀렸잖니? 응? 그러니까···.”

아랑의 시선이 누이와 사내를 번갈아 본다.

누나는 애처롭게 울부짖었다.

의지할 것이 필요해, 돌이켜보면 예전부터 그녀는 남에게 매달리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었다.

병적인 의존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누나는··· 내가 없으면 안 돼.’

반면, 이국의 방문자는 여전히 굳은 표정이다.

정체를 몰라.

수상하고 의심스럽다.

소년은 갈등했다.

가족을 버리고 생전 처음 만난 사내를 뒤따른다니?

그게 과연 옳은 길일까?

‘하지만 누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아랑은 안다.

극한의 상황에서 보여주는 모습···.

그것이야말로 숨길 수 없는 진심이라는 걸.

그렇다면 자신은 누나의 자식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설사 그럴 지라도 아랑은 망설인다.

이대로 모른 척하면, 예전처럼 지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알량한 희망을 품고 마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

더욱이 아랑은 아직 어린 나이다.

아이라면 잔혹한 진실보다 안락한 거짓을 자연스레 바라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리고 아기···.

어린 여동생을 돌보는 데엔 역시 어머니의 존재가 필수 불가결하다고···.

“···선택은 네 몫이다.”

이방인은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저 멀리까지 걸음을 옮긴 채였다.

나아가는 그 움직임에 망설임은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거리를 벌린다.

어쩌면 소년이 뒤따르지 않길 바라는 것인가?

아랑은 은연중에 그들의 길이 결코 평범하지 않으리란 걸 떠올린다.

분명 가혹하겠지.

차라리 이 자리에 남아 과거와 같이 보내는 게 나을 지도 몰랐다.

평생.

쭉 무지한 채로.

앞으로도 모친을 누님이라 부르며 눈 가리고 아웅 하면서···.

···하지만 소년은 곧 자신에게 선택지가 없음을 눈치 챈다.

잔혹한 현실만큼은 어찌할 방도가 없었기에.

그만큼 겨울 산의 냉기는 치명적이었다.

“아유···.”

아랑은 자신이 지어준 여동생의 이름을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것은 작별인사였다.

품속에 머물고 있던 작은 생명은···.

어느새 숨소리를 멈춘 채 차갑게 굳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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