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83화 (83/186)

인계의 장(7)

7.

순간, 시간이 멈췄다.

주마등走馬燈.

삼십년이 채 되지도 않는 내 일생이 스쳐지나간다.

빠르지만, 동시에 느긋하다.

어찌 보면 지루하기까지 할 정도다.

‘나는 어째서 이걸 보고 있는 거지?’

그 이유는 간단하다.

뇌수 안에 스며든 표류자의 유산이, 내가 가진 모든 능력을 개화시키기 위해 안전장치를 풀고 있기 때문이지.

···그래.

이제는 안다.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그런가?

나는 이것을 위해 태어난 것이었나?

원리는···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었다.

‘이븐 가지의 분말.’

그것은 강고한 인간의 감정.

동시에 간절한 마음의 발산.

그렇다고 한다면···.

응용하기에 따라 터무니없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도 가능하다.

‘우선 타인의 가루를 양도받는 방법이 있다.’

그건 레이를 통해 몸소 확인했지.

허나, 그마저도 어디까지나 소모되는 것.

명백한 한계가 존재한다.

결국은 사용자의 주체만 바뀐 것에 불과하다.

부작용은 항상 존재한다.

지나치게 많은 이븐 가지의 분말을 소비한 사냥꾼은 망령이 된다.

게슈펜스트가 그 말로지.

그렇기에 동지들은 위험한 상황이 아니면 극도로 가루의 사용을 제한한다.

결코 가볍지 않다.

그림자를 두르는데 필요한 조건?

그것에 대스승의 명령까지 필요한 것도 무리가 아니지.

하지만···.

‘나만은··· 다르다.’

내가 가진 정신감응능력.

타인의 감정을 받아들이는 이 힘은···.

특정 조건만 만족한다면 얼마든지 마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고농도의 가루를 급격히 생성해내는 것이다.

‘별에서 온 자가 섬의 민족에게 한 실험은··· 모두 이걸 위해서였던 건가?’

나는 표류자의 의식 너머에서 또 다른 진실을 보았다.

그녀의 사과가 지나치리만큼 간절했던 이유는···.

바로 이 능력이 마녀들 이상으로 불경하고 사악한 결과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생명을 모독하고, 인간에게 남은 마지막 긍지마저도 긁어 바치는···.

그야말로 악마의 기술이었기에.

‘원망한다, 표류자! 나는 너희를 용서할 수 없다!’

뇌리 속에서 뭔가가 빛났다.

어떤 지식이 멋대로 흘러나왔다.

그것은 죽음.

지성을 가진 마지막 순간에 도달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것이었다.

또는 목숨이 위험한 위기의 순간···.

우리는 흔히들 주마등이 스친다고 표현한다.

그것은 과장이 아니야.

실제로 사람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생명을 가진 자로서, 어떻게든 살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우리의 뇌는 모든 기능을 총동원한다.

스스로가 보유한 모든 지식을 훑어내지.

아주 사소한 경험마저 이끌어내 위기를 모면하려 한다.

그 모든 것은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다.

새가 한 번 날갯짓을 하는 것보다도.

심지어는 눈 깜빡할 사이보다 더 빠르게.

거의 낙뢰에 비유할 수 있다.

과장을 덧붙여 고목마저 불태워버릴 수 있는 번개가 인간의 머릿속에서 잠깐 동안이나마 번뜩이는 것이다.

그리하면 선명하게 남은 뇌의 파장이 주인의 육체가 죽음에 이르렀다 해도 남게 되고 만다.

혼이 잔류한다.

바로 혼탁하게 뒤섞인 고밀도의 정신 에너지이다.

그것이 진짜 사념의 정체였다.

‘그렇기에, 죽음 직전에 품은 감정의 증폭도는···.’

거기다 이 땅은 죽음으로 넘친다.

아직 사역마의 육체에는···.

중합체를 이루고 있는 피와 살에 수 많은 원념이 머물고 있다.

나는 그들을 모두 받아들였다.

그리고 나의 의식은 다시 전장으로 돌아갔다.

8.

유성을 전부 떠올리진 못했다.

이만한 질량을 들 수 있을 만큼 이 힘이 익숙하지도 않을뿐더러···.

오래도록 유지하는 것도 불가능했기에.

하지만 나는 곧 방법을 찾아냈다.

나누면 된다.

자르고 쪼개서 흩뿌리는 것으로.

당장 내가 들어 올릴 수 있는 최대한의 파편을···.

전부 유성의 선체를 투창으로 변환 시킬 수 있었다.

‘아직이다, 조금 더··· 조금만 더!’

모자라다.

턱 없이 부족하다.

유성이 가진 모든 부피를 온전히 끌어내기엔, 아직 사념의 힘이 한참이나···.

하지만 내겐 시간을 끌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가루의 사용으로 몸이 무거워, 내장까지 부하가 걸리는 게 느껴졌다.

거기다···.

“···크!”

제어가 힘들다.

정밀한 조정을 기대할 순 없었다.

이대로라면 앞에서 싸우는 아군에게까지 영향이 미칠 터.

“앙리, 지금 바로 대스승들께 후퇴의 신호를···!”

“예?”

“지령을 부탁한다. 나는 그걸 사용하지 못하니까, 어서!”

무례한 요구였지만, 다행히 앙리는 상을 파악하고 당장 실행해주었다.

그녀가 급히 가슴을 쥐어 대량의 가루를 흩뿌리자, 머릿속에서 큰 소리가 울렸다.

그것은 마치 표류자의 신호와 흡사했다.

<대스승들이시여! 빅터 씨가··· 해냈습니다. 전원 전선에서 이탈을!>

지시가 온전히 전해졌는지, 세 개의 기운이 각자 다른 방향으로 산개한다.

지령이 땅 아래에서 싸움을 이어가던 레이에게도 전해졌는지, 그녀도 자리를 뜬 것인 느껴졌다.

이제···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어졌다.

나는 한계에 도달 했다고 생각한 시점에서 바로 팔을 휘둘렀다.

“쳐 먹어라···!”

지상으로 암청색의 폭우가 내린다.

그것은 하나하나가 사람의 반신 정도의 크기···.

당연히 그 부피만큼이나 굉장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창격의 폭풍이 휘몰아친다.

모든 것을 찢어발기는 정화의 바람이었다.

오직 마를 파멸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외계의 병기란···.

절대적인 힘이란 이런 것을 말하는가?

파편은 적에게 스치는 것만으로도 폭발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입자가 닿는 족족 마기를 무력화시킨다.

나는 계속해서 가슴 속으로 외친다.

적을 꿰뚫으라고.

뭉개고 찢어버리라고.

창공의 눈을···.

심록의 마녀가 숨어 있는 중합체를 모조리 날려버리라고!

‘가라, 모두 쓸어버려! 한 놈도 남기지 마!’

더는··· 이 싸움에서 아무도 목숨을 잃어선 안 된다.

나는 아직 대스승 크레이그의 본심을 몰라.

레이의 과거에 대해서도 묻지 못했지.

대스승 알베르트에 대한 오해를 풀고 싶다.

대스승 베누다의 오만한 면상에 한 방 제대로 날려주고 싶단 말이다!

“쿨럭!”

빌어먹을···!

갑자기 눈앞에 핏물이 튄다.

멋대로 식도를 타고 거품이 섞인 각혈이 올라왔다.

익숙하지도 않은 능력을 연습도 없이 써먹은 탓이었을까?

아니면 이것이 본래 인간에겐 허락되지 않은 힘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온 몸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그저 하늘의 적을 겨누기만 할 뿐인데도 팔의 근육이 경련을 일으킨다.

손가락 마디의 사이의 힘줄이 끊어지는 것처럼 요동친다.

가슴이 터질 것 같군.

하지만 나는 멈출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고작 이 정도로 무너진다면···.

모두의 각오가 개죽음이 되고 만다.

이까짓 아픔쯤은 충분히 견뎌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커틀러스? 그리고 팔시온과 매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몸이라곤 하나, 죽음을 앞둔 그들의 정신적 공포가 결코 가벼울 린 없었을 것이다.

실험체를 자처하며 이미 스스로가 한참 전에 죽었다고 달관했지만···.

최후의 순간까지 보여주었던 네놈들의 기지는 나 이상으로 뜨거운 것이었다.

그렇기에 허투루 쓸 수 없다.

이 능력은··· 살아있는 놈이 있는 있는 힘껏 휘둘러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기에!

‘어디냐? 본체는··· 심록의 중심은 어디에 있지?’

나는 유성의 창끝이 향하는 모든 영역에 정신을 집중했다.

적은··· 괴멸했다.

흉물스런 육편들이 시뻘건 체액을 뿜으며 기울어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창공의 눈은 내부에 파고든 파편에 산산조각이 나며 격침되었다.

하지만 있었다.

단 한 놈이···.

외눈박이 괴물이 펼쳤던 보이지 않는 보호막으로 무장한 개체가 하나.

우습게도 가장 뒤에 있던 녀석이다.

그것도 눈에 띄지 않도록 크기도 가장 작다.

지금까지 아담한 몸집으로 다른 중합체를 방패삼아 위기를 모면한 모양이군.

그 정보만으로도 나는 심록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었다.

망할 겁쟁이 년···.

설마하니 끝까지 숨어있을 생각이었나?

자신을 따르던 프라이케르 가이스트들을 희생시키고.

북적이는 사역마들 뒤에서 유유히 우릴 쓰러뜨릴 작정이었나?

고오오오!

심지어 이젠 후퇴까지 하는군.

불리해지니까 몸을 사리려는 거냐?

이제 와서?

지금껏 수많은 목숨을 유린해놓고···

조금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고 자기 혼자만 도망치시겠다?

대단하신 전술이야.

감탄스러운 전략이다.

그딴 게 용납될 것 같으냐?

네 생명이 그만한 가치가 있을 성 싶은가?

“어딜···!”

나는 다시금 오른손을 쥐어 보인다.

그리고 마음속 깊이 어떤 이미지를 떠올렸다.

그것은 내 왼팔에 칭칭 감긴 쇠붙이와 같은 형상이었다.

구속의 상징.

바로 사슬을···!

“하아아아···.”

아직 폭발하지 않은 유성의 파편들이 한 자리로 결집한다.

그것은 이윽고 내가 바라는 모습으로 재구성되었다.

산맥이나 거성을 통째로 쓸어 담을 수 있을 정도의 그림자···.

거대한 쇠사슬이 허공에서 나타났다.

나는 그것을 적에게로 날려 보냈다.

목표물은 마녀가 숨어든 창공의 눈···.

“놓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만들어낸 쇠사슬의 끄트머리에 달린 것은···.

일단 파고 들기만 하면 내부에서 걸려 고정되는 구조의 갈고리였으니까!

콰지직!

물리적 공격을 막아내던 투명한 막이 무력화 되었다.

그 따위 장난은 모든 마기를 해제시키는 유성의 파편 앞에선 그저 먹이가 될 뿐이다.

이윽고 사슬을 인도하는 네 갈래로 벌어진 작살이 육중한 고기의 벽을 관통한다.

더는 섬광을 발하지 못하도록.

눈동자로 추정되는 위치를 짖이긴다.

내가 기대한 대로, 갈고리는 튼튼하게 고정되었다.

남은 것은 당기는 일 뿐이었다.

“이리···와라!”

나는 젖 먹던 힘을 다 해서 사슬의 회수를 명령했다.

···유성의 파편으로 만들어진 구조물이 붕괴를 시작했다.

이것이 마지막이다.

내 몸은 이 이상 가루를 견뎌내지 못해, 그럴만한 여력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무게는 충분하다.

방향만 지정한다면···.

어차피 마녀의 마지막 중합체는 중력에 이끌려 지상으로 곤두박질 칠 것이므로.

‘모든 것은··· 위에서 아래로.’

그것이 이치.

자연의 섭리다.

내려와라, 시체를 기워 만든 불경한 살덩이야.

복수자가 기다리고 있다.

느껴지는군.

그림자를 두른 누군가가 저편에서 날아오는 것이.

굳이 눈으로 확인할 필요도 없어.

이 강직하고 고결한 마음의 파동은···

아름다운 검희劍姬.

심心의 유파가 자랑하는 나의 사저인, 레이 엔쯔이 밖에 없으니.

“덩치!”

아니, 네가 향해야 할 건 내가 아니잖아?

봐라.

고대하던 응징이···.

원수가 눈앞에 있지 않나?

놈은 도망칠 수 없다.

이제 추락하는 놈에게 마무리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녀는 하늘 위에서 내게로 손을 뻗었다.

바보같이···.

무방비해진 심록을 양단하는 것보다, 당장 무너지는 지면 위의 선 내 안위를 걱정한 것인가?

결과적으로 그 판단은 옳았다.

운이 좋았지.

레이의 손을 잡고 떠오르자마자, 땅 아래가 급속도로 침강되었기에.

하지만 왜일까?

휴케바인의 그림자로 전신을 두르고 있으면서도, 묘하게 얼굴만큼은 드러나 있었다.

그녀의 입술에 주체할 수 없는 물결이 진다.

눈망울이 흐려져 있어, 레이는 울고 있었다.

“멍청이··· 넌 정말이지, 최악의 사제다!”

하지만 내가 살아남은 게 기뻤던지, 그녀는 동시에 미소를 띠기도 했다.

거기에는 순식간에 긴장을 풀리게끔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칭찬이라도 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닥쳐! 너 같은 거한텐 파쇄권도 아까워. 각오해. 돌아가면··· 두 다리를 부러뜨려서 한 달 내내 독방에 가둬둘 테니까!”

“그건 좀 봐줬으면 좋겠군.”

“개자식··· 입만 살았구나, 아주.”

살벌하게 노려봐도 어쩔 수 없다.

삶던지 굽던지, 이미 나에겐 말대답할 기력조차 남지 않았으니.

“···레이.”

“뭐, 왜? 또 뭐?”

“나머지는 네 몫이다.”

“···.”

“심록의 목은 너의 것이다.”

결계가 사라진 지평선 너머로, 마지막 창공의 눈이 가라앉는다.

땅 아래 문드러진 찌꺼기를 튀기며 역겨운 열매가 떨어졌다.

어느새 돌아온 대스승들이 사방을 포위했다.

달아날 곳은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처단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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