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80화 (80/186)

인계의 장(4)

4.

어느덧 몰려오는 적들이 진격을 멈췄다.

일부 포위망만 유지한 채, 마물의 무리는 후퇴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사정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뒤로 빠진 사역마들의 문드러진 육체는··· 지상에 뿌리를 내린 역겨운 나무들과 융합하기 시작했다.

하늘을 향해 거대한 줄기가 솟아올라, 그것은 ‘창공의 눈’이라는 것과 직접적으로 이어졌다.

이어서 마기의 흐름이 집약된다.

놈은 대지로부터 힘을 공급받고 있었다.

“···그때랑 똑같아.”

“레이···.”

“내가 모든 걸 잃어버렸던 그 날이랑 완전히···!”

레이의 몸을 중심으로 이븐 가지의 분말이 소용돌이친다.

그림자와 일체화된 코트가 휘몰아쳐, 녀석의 감정을 그대로 대면했다.

격노.

지금 그녀는 도리스와 맞붙을 때 이상의···.

그간 함께 지내면서 보여준 적이 없는 강렬하면서도 순수한 증오를 뿜어내고 있었다.

‘나는 레이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한다.’

내가 가진 정보는 그녀의 나이가 갓 스물을 넘겼다는 것.

그리고 아주 어린 시절부터 대스승 크레이를 따라 마녀 사냥꾼의 길을 걸었다는 정도다.

나머지는 내가 접해온 경험으로 짐작만 할 뿐이다.

‘녀석의 손가락에는 굳은살로 가득했지.’

그건 아무리 가혹한 일을 하는 소녀라 해도 쉽게 나타나지 않으리라.

수도 없이 검을 연마했겠지.

손아귀가 몇 번이나 찢기고 문드러질 만큼···.

그 흔적은 요 몇 달 사이, 내가 도끼를 미친 듯이 휘둘렀음에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즉, 레이의 노력은···.

나 따위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가혹했던 것이다.

‘힘 들었겠지. 분명 몇 번이나 울었을 거다.’

외적으로 레이는 만사를 냉철하고 날카롭게 대하지만···.

사실은 섬세하고 나이에 맞는 순진함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또 그걸 숨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

성가신 꼬맹이다.

존경하는 대스승의 가르침을 지키려고 가능한 절제하면서도, 타인에게까지 예의를 강요한다.

가끔은 지나치게 느껴질 때도 있을 정도다.

물론 그 의도가 나쁜 것이 아니란 건 명확하지만.

···아니, 오히려 나는 그녀가 이따금씩 욱하는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 은근히 귀엽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사냥꾼이 되지 않았다면 이보다 더 솔직한 아가씨로 자랐겠지.

착하고 배려심강한···.

검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수선을 즐기며 동방의 여인으로.

‘그래, 분명 그럴 것이다.’

마녀가 없었다면···.

아스트랄이 이 세계에 손을 뻗지만 않았더라면!

“심···록!”

레이가 땅을 박찼다.

“부족의 원수···! 너만은··· 너만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이이이!”

아니,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그녀는 단지 지금껏 감정을 억누르고 참아왔을 뿐이었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련희 꼬마!”

대스승 베누다가 불러 세웠지만, 레이는 이미 날개를 펼친 뒤였다.

내가 막기에도 너무 늦고 말았다.

“하아아아!”

휴케바인이라는 단계에 이르면, 인간은 하늘이란 경계마저 초월하는가?

레이는 제비가 바람을 타고 비상하듯, 맹렬한 기세로 허공을 날았다.

퍼엉!

그녀의 정면에서 툴루이의 목숨을 빼앗은 폭발이 일어났다.

하지만 아무리 이성을 잃었어도 레이는 레이였다.

몸에 익은 몸놀림으로 불가사의한 공격의 궤도마저 파악하고, 검신으로 그것을 갈라버렸다.

놀라운 기지였다.

보이지 않기에 피하면서 치는 것이 곤란하다면, 차라리 피하기 전에 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적과의 거리를 좁히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숨어 있지 마!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

파아아앗!

그림자가 담긴 레이의 검격이 하늘에 떠오른 중합체에게 닿았다.

나는 보았다.

그녀가 내지른 공격이 창공의 눈의 측면에 큼지막한 상처를 남기는 것을.

정안, 그리고 표류자가 내게 건네준 또 눈동자가··· 저 멀리 떨어진 경관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치잇!”

통하지 않는다.

그녀가 베어낸 것은, 겉으로 드러난 적의 얇은 표피뿐이었다.

아니, 애초에 ‘창공의 눈’이라는 놈의 몸은 수십 겹의 껍질로 이뤄진 것 같았다.

“이탈해라, 련희여! 당장!”

급박한 목소리로 대스승 베누다가 고함쳤다.

나도 그녀가 바로 거리를 벌리길 간절히 바랐다.

왜냐하면···.

레이를 비추는 하늘의 시선이 기괴한 색깔을 발하기 시작했기에.

부우우웅!

광선이었다.

그것의 정체는 태양광과 지면의 생기를 빨아들여 일순간에 내뿜는 사악한 빛의 열선이었다.

“···큭!”

다행히 레이는 전신을 그림자로 뒤덮어 그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그 결과, 날개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어 땅으로 추락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아직 흡수가 덜 된 마물들과 마계의 꽃들로 가득했다.

“레이 사저!”

“아서라! 련희를 걱정할 때가 아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강하다. 지금 상황에선 차라리 적진 가운데 떨어진 게 다행이다!”

대스승 베누다의 말이 맞았다.

레이를 격추한 창공의 눈이, 이번에는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서둘러라, 애송이! 내 뒤로 와라!”

막아낼 방도가 있는가?

허나 당장은 망설일 여유가 없다.

빛의 포격이 날아오자마자, 나는 그의 지시를 따라 몸을 날렸다.

“흡!”

다행히 대스승 베누다의 비책은 통했다.

그는 대량의 가루를 흩뿌려, 우리의 앞에 거대한 그림자의 장막을 전개했다.

일순간, 마녀와 우리들의 영역이 반대가 되었다.

어둑한 그늘이 찬란한 섬광에 맞선다.

“망할 계집··· 수법이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구나!”

대스승 베누다가 이를 간다.

그 말에 담긴 의미는 창공의 눈이 발사하는 열선에 대한 것이 아니야, 수 십 년 전에 자신의 가족을 빼앗은 걸 논하고 있었다.

“결코 잊지 않으리. 네 년이 이 땅에 내린 저주와 재앙으로 인해···.”

심녹은 레이뿐만이 아니라 그의 원수이기도 했던 것이다.

“나는 50년 전, 네년에게 삶을 부정당했다.”

그가 본심을 드러내자, 여태껏 안개 속에 감춰져 있던 대스승 베누다의 과거가 느껴졌다.

‘···짐작은 했지만, 역시 그는 부족의 지도자였던가?’

약 300명 정도의 군집.

광활한 대지를 누비던 기마 민족이었다.

오래 전에 대국에게 고유의 영토를 잃었기에 그들은 유랑을 업으로 삼았다.

겨우 척박한 땅에 정착하여 세력을 늘리기 시작할 쯤···.

베누다, 아니 번호라는 이름의 청년이 우두머리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가장 강인한 육체의 소유자이며, 그 누구보다 부족을 사랑한 남자의 계승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지했다.

긴 세월을 떠돈 탓에, 그들은 변덕스런 자연에 대해 가공할 정도의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공포는 신앙이 되었다.

즉, 우리 변방인들과 마찬가지로 미신에 심취해 있었다.

‘베누다는 달랐다. 그는 선대 족장에게 사람들을 다루는 법을 배웠지.’

부족을 살리기 위한 대장의 교육에는, 환경에 순응하는 것 이상의 용기가 강조되었다.

물론 홍수는 무시무시하다.

태풍 또한 얕볼 것이 못된다.

마찬가지로 산사태도 두려운 것이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세계의 일부다.

자연은 울지도, 웃지도 않는다.

베누다는 어린 시절부터 그 이치를 알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하지만 그의 부족들은 아니었다.’

결국 나의 고향과 같이, 베누다의 백성들도 종말을 맞이했다.

살아 움직이는 숲···.

더럽혀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사역마의 시선에 사람들은 미쳐버리고 말았다.

베누다를 제외한 소수의 몇 명을 제외한다면.

바로 그의 자식들이었다.

아들 둘과 딸 하나.

대스승 베누다는 살아남은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사냥꾼의 길을 걸었다.

허나, 그것이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다.

“30년 전··· 너는 기어이 내 혈육들까지 빼앗았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베누다만큼 강하게 성장하지 못했다.

장남은 이식에 실패했으며, 장녀는 일 년도 채우지 못하고 임무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나마 차남은 스승급의 베테랑으로 성장했으나, 끝내 비참하기 짝이 없는 죽음을 맞이했다.

대스승 크레이그, 알베르트, 베누다가 참전했던 대 심록전에서···.

“그리고 10년 전에··· 너는 또 한 번 내 앞에서 무고한 이들을 도륙했다!”

그 무대는 레이의 마을이었다.

심록의 출현을 예견한 사냥꾼들이 소집되었지만, 이미 마을 사람들은 사역마의 재료로 소비된 뒤였다.

그리고 괴멸적인 결과만을 남긴 채···.

어린 소녀가 새로운 복수자로 거듭날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기억이 닫혔군. 그가 냉정을 되찾은 건가?’

그 말 그대로, 대스승 베누다는 만전의 상태였다.

분노하고 있지만, 레이처럼 막무가내로 쳐들어갈 만큼 어리석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슬픔을 곱씹는다.

오래 전 잃었던 자식들과,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은 휘룡과 툴루이를 기리며···.

대스승 베누다는 한 가지를 다짐했다.

“애송이들아, 너희만큼은 버릇없이 굴지 말지어다. 이것만큼은 명심해라.”

이 자리에 선 모두를···.

나와 대스승 알베르트의 제자 삼인방, 그리고 레이만큼은 지켜내겠노라고.

“세상을 뜨는 순서의 섭리만큼은··· 어겨선 안 되는 것이다.”

부우우웅.

빌어먹을, 하필 창공의 눈은 다음 발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눈동자에서 또 한 번 이변이 생긴다.

표면이 이전보다 더욱 강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과연, 충전을 오래한 만큼 위력이 강해지는 것인가?

“쯧, 다음 건 좀 위험할 지도 모르겠군.”

어울리지 않게 불안한 말을 꺼낸다.

그조차도 완전히 막아낼 자신이 없어보였다.

“여차하면 산개해라. 애송이, 너는 앙리를 부축해다오. 내 장벽이 위험해진다 싶으면 언제든 달아날 준비를 하도록.”

그는 목숨을 걸 셈이었다.

허나 상황은 그런 대스승 베누다를 비웃을 타이밍을 노리기라도 한 듯···.

파아아아앗!

맹렬한 파괴의 빛이 날아온다.

그것은 대스승 베누다가 필사적으로 친 그림자를 녹이기 시작했다.

피하는 것은···.

너무 늦었다.

범위가 너무 넓어, 이건 이미 달아나고 자시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그 순간···.

“···후, 아슬아슬했습니다.”

“동감일세.”

또 하나의 장막이 펼쳐졌다.

이어서 한 겹이 더 추가된다.

둘 다 대스승 베누다의 것보다는 작지만, 더 견고하고 정돈된 형태였다.

거기엔 익숙한 마기의 기운이 풍겨오고 있었다.

“크레이그, 알베르트···. 이 망할 자식들! 나타나는 게 너무 늦지 않나?”

“이거 원, 대스승 베누다시여.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떴습니까? 당신께서 약한 소릴 하시다니요. 어쩌면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보다 기력이 줄어 드신 게 아닌지.”

“어쩔 수 없지. 그는 이제 우리 늙은이들 사이에서도 최고령이 아닌가?”

어느 때보다 간절한 구원이 우리에게 찾아왔다.

그들과는 잠깐 떨어졌을 뿐인데도···정말 오래도록 만나지 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뭘 하다 이제 기어왔는지 변명이나 해봐라.”

“성가신 중합체들이 서넛 마리쯤 있어서 미리 손을 봐줬지요. 몸 상태가 나빠서 조금 걸리고 말았습니다.”

“···보아하니, 네 꼭두각시들 몸에 친 장난을 너 자신에게도 한 것 같군.”

“저는 제 기술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흠, 그런데 이것이 유성입니까? 흥미롭군요. 나중에 시간을 들여서 분석 해보고 싶습니다.”

“알베르트, 너는 여전히 기분 나쁜 자식이다. ···크레이그, 너는 또 도움 안 되는 놈들만 달고 왔구만?”

대스승 베누다가 턱으로 가리킨 방향헤는 열 댓명 남짓의 인원이 있었다.

고블린즈···.

검을 든 니코와 니엘의 모습이 슬쩍 보이는군.

“너무 그러지 말게나. 예상보다 쓸만한 병력이었으니.”

마물들과 격하게 싸웠던 모양인지, 그 수가 반절 이하로 줄었다.

“미안하네, 대스승 베누다. 동행한 용병대를 지휘하느라 일손이 부족해서 말이지. 그래서··· 우리 레이는 어떻게 되었나?”

“흥, 이제 와서 꼬마 련희가 걱정되나? 그렇다면 봐라. 저기 네 제자가 잡졸들 사이를 헤집어놓고 있으니.”

그랬다.

레이는 북적이는 마물들을 베어내는 중이었다.

망설임도 없이, 최단거리로 우리가 있는 곳을 향해 길을 트고 있었다.

“그래. 그렇게 된 건가?”

하지만 대스승 크레이크는 레이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녀의 무사함을 믿고 있는 눈치였다.

그는 내 어깨를 툭 치더니.

“빅터여. 잘 견뎌주었다.”

“대스승···.”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겠지. 나도 그렇다. 나중에 천천히 나누자꾸나. 허나···.”

자신의 모자를 내 머리에 씌워주었다.

“다음은 우리에게 맡기도록.”

“가죠. 얼른 이 길고 긴 악연의 종지부를 찍도록 합시다.”

“늦게 합류한 주제에 괜한 폼 잡지마라. 이게 노인네들 반상회인 줄 아나?”

“그것도 좋군요. 이 일이 끝나면 거하게 뒤풀이라도 합시다.”

“동방의 맛 좋은 술을 준비해주게나.”

“···암, 너희 코쟁이들은 구경도 못해본 독주를 내주도록 하지.”

그들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

고오오오···.

순식간에 가라앉았던 공기의 흐름이 변했다.

거대한 마기가 뿜어져 나와, 심록의 결계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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