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계의 장(3)
3.
마물의 군세가 몰려온다.
센티피디아가 쓰러진 것에 마녀가 위협을 느끼기라도 한 것일까?
유성을 향해 몰려오는 무리가 점점 더 늘어나는 기분이다.
300, 400마리···.
보이지 않는 언덕 너머까지 합치면 더 많을 지도 몰랐다.
마기의 흐름을 볼 때, 레기오네네스 급 중합체의 육신을 쪼개서 병사를 만들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쫄지 마라, 애송아.”
“···.”
“이 정도쯤은 30년 전의 대규모 토벌에 비하면 시시한 수준이니까.”
대스승 베누다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제 끝이 머지않았다. 수많은 사역마를 거느린 게 유일한 장점인 심록 이 이렇게까지 총력전을 해온 다는 것은, 이제 놈에게도 여유가 없단 반증이니.”
단순히 격려하는 게 아니군.
그는 진심으로 승리를 점치고 있었다.
우리가 우세하다고 마음 속 깊이 믿는 것이다.
허나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세 명의 제자는 기가 막힌 듯이.
“···그런데 그땐 아군이 마흔 명 이상 있다고 들었지 말입니다.”
“근성이다, 툴루이! 너희가 한 놈 당 5인분을 할 생각하란 말이다.”
“제길, 정신 좀 차리쇼. 거기다 댁은 이제 예순이 넘은 퇴물이란 말입니다! 나이 먹으면서 얻은 건 지기 싫어하는 고집 뿐입니까, 빌어먹을!”
“닥쳐라. 휘룡! 난 아직 20년은 더 싸울 수 있다. 몸소 보여주랴?”
“대스승이시여. 그것도 이 혼란에서 살아남아야 가능한 일이옵니다.”
“···앙리, 너까지 그러기냐?”
나는 잊고 있었다.
이 무리 중에서 나약한 자는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또 하나, 내게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의지가 되는 사냥꾼의 존재를.
“물러서, 덩치.”
레이가 나선다.
놀랍게도 그녀는 나를 안쓰럽게 바라봤다.
다짜고짜 손을 뻗어 오기에, 한 대 때릴 셈인가 싶었는데, 오히려 내 뺨을 어루만지는 것이 아닌가?
“···머리카락이 더 하얗게 변했네. 이젠 본래의 색을 찾아보는 게 더 힘들 정도로.”
“레이, 나는···.”
“시끄러워, 멍청아. 이제 더 이상 멋대로 날뛰게 안 둘 거야. 넌··· 오늘 가루를 너무 썼으니까.”
후우우···.
이어서 레이는 숨을 가늘게 내쉬었다.
그건 한숨이 아냐, 뭔가의 준비였다.
그리고···.
“하아아···.”
나는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그녀가 그림자를 두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가슴을 쥐어짜듯 이븐 가지의 분말을 손아귀에 머금는다.
자그마한 몸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져, 그녀의 은발이 급속도로 연기처럼 변했다.
“잘 보고 있어. 진짜 그림자를 두른다는 무엇인지, 내가 보여줄 테니까.”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제리온을 어설프게 흉내 낸 나와는 차원이 다르다.
신체의 일부만을 그림자에 녹이는 도리스의 기술과도 차이가 있지.
심지어 대스승 크레이그가 보여줬던 모습과도 어딘지 모르게 이질감이 느껴졌다.
레이가 뒤집어 쓴 그림자는 매우 안정되어 있었다.
이것이 가능한가?
정신을 고양시키는 가루를 흩뿌렸음에도, 레이는 몸과 마음 모두가 가라앉은 채 였다.
눈앞에 뻔히 보이는데도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아, 무서울 정도의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소곳하다.
흡사 날개를 접은 검은 깃털의 새처럼···.
“실로 아름답다. 검희여.”
그 모습을 지켜보던 대스승 베누다는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크레이그 자식은 밉지만, 너 만큼은 인정해줄 수밖에 없구나. 그 어린 나이에 심心의 극의, 휴케바인Huckebein의 경지까지 도달했는가?”
“부끄럽습니다, 대스승 베누다.”
“휴케···바인?”
“흉조란 뜻이야. 아주 오래 전, 가루를 써서 마녀와 싸운 최초의 사냥꾼의 별명에서 딴 거지.”
그러면서 레이는 나에게 시선을 맞췄다.
지켜봐라.
그리고 배워라.
이것이 네가 도달해야할 미래다.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같이.
“같은 문하간의 훈훈한 가르침도 좋다만, 슬슬 준비해라. 놈들이 온다.”
그의 말처럼, 저 너머로부터 흙먼지가 일어난다.
땅이 울리고, 괴성과 함께 마물들이 돌격해오기 시작했다.
우리가 만전의 태세를 갖추자, 대스승 베누다도 자신의 무기를 꺼내보였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너클···.
그것은 처음부터 대스승 베누다에 맞추어 제작된 것처럼 보였다.
네 개의 구멍에 크고 투박한 그의 손가락이 들어간다.
주먹을 쥐자, 호랑이의 발톱을 닮은 날카로운 돌기가 전개되었다.
“내가 왜 호권虎拳이라는 이명으로 불리는 지 이제 알겠느냐?”
자신의 육체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군.
오직 거리를 좁혀서 적을 때려죽이겠다는 강인한 의지가 엿보인다.
“배워두도록 해라, 곰 같은 애송이. 내가 증명해보이마. 그림자에만 의지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자신의 신념을 관철할 수 있다는 걸.”
대스승 베누다는 자세를 잡았다.
한 발을 앞으로 내지른다.
그리고 양손을 들어 올려 언제든 주먹을 뻗을 수 있게 준비했다.
맨 먼저 달려온 적이 도약함과 동시에, 그의 왼손이 절묘한 각도로 마물의 창을 흘겨 보냈다.
이 또한 무의 극치인가?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은 채, 최소한의 힘으로 막아낸 것이다.
거친 성격과 커다란 몸집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섬세한 동작···.
나는 그 모습에서 레이의 검무와 일맥상통하는 뭔가를 보았다.
“합!”
뒤이어, 대스승 베누다는 달려드는 마물의 무리에게 오른 주먹의 정권을 날린다.
부웅!
어깨와 허리가 살짝 들썩이는 것만 보였을 뿐이지만···.
어느새 괴물의 두상이 사라졌다.
머리가 터져서 즉사해버린 개구리가 뒤로 나빠져지는 와중에도, 그의 오른팔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낭비가 없는 놀라운 기술이다.
일순간 감정을 폭발시켜 만들어지는 가루를··· 그는 주먹에 담아 때려 박았다.
“후우우···!”
대스승 베누다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한 동안 호흡하지 않을 셈이야, 그 이유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두 손을 동원한 난타亂打.
그러나 그 주먹에 단 하나 허툰 것은 없다.
대스승 베누다의 너클은 오직 적들의 급소만을 파고들었다.
얼마 지나지도 않아, 정면 돌파를 시도하던 사역마들이 곤죽이 되어 피를 뿜었다.
이 양반 앞에서는 수십 마리가 몰려들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어 보인다.
대스승 베누다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벽이었다.
“오랜만에 스승님께서 신나셨지 말입니다···.”
“하여간 날뛰는 거 좋아하는 노친네라니까, 빌어먹을!”
반면, 대스승 베누다의 제자들은 화려하게 날뛰고 있었다.
부상당한 앙리를 제외하면, 나머지 두 사람은 묘한 형태의 장병기를 쥔 상태였다.
이븐 가지의 가루을 머금은 창끝이 제멋대로 휘어진다.
삼절곤 형태로 세 번 접히는 신기한 구조의 창대가 그것을 가능하게끔 만들었다.
때로는 종과 횡을 베고, 또 어떨 때는 사선에서 날아와 찔렀다.
더욱이 이들은 자신의 무기에 그림자를 두르는 것에 익숙해보였다.
‘저 두 사내··· 강하군.’
사방이 둘러싸인 상태임에도 대스승 베누다가 뒤를 신경 쓰지 않는 것도 납득이 된다.
그들은 고수였다.
휘룡과 툴루이가 선 자리에는 어지간해선 뚫지 못할 어떤 영역이 구축되어 있었다.
“하아아앗!”
하지만 레이 사저의 역량은 그 이상이었다.
까마귀가 날개를 펼쳤어, 그녀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밞고 날아올랐다.
개구리를 닮은 마물들이 뱉어내는 무수한 혓바닥의 창이 하늘로 뻗어가지만, 명중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레이는 칼날에까지 그림자를 담아, 땅 아래를 기는 여러 마리의 괴물들을 단 한 방에 날려버렸다.
가히 마술과도 같은 검기였다.
‘나도 질 수만은 없다.’
다리가 후둘거리지만, 잡졸 몇 마리 정도를 처리하는 건 일도 아니다.
나는 방어선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마물들의 목을 순차적으로 베어냈다.
다행히 유성의 파편이 가진 힘은 여전해, 아주 가벼운 찰과상이어도 충분한 효과를 보여주었다.
날이 파고든 부위가 급속도로 하얗게 굳어가는군.
그래···.
나는 아직 싸울 수 있다.
모두에게 뒤처지지 않고 적과 맞설 수 있다.
하지만 내 의욕과는 다르게,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피로는 완력까지도 약하게 만드는가?
양단할 수 있는 모가지를 완전히 베지 못했어, 숨통이 덜 끊어진 마물 하나가 발악을 해왔다.
다행히도, 나에겐 이 실수를 보충해줄 아군이 남아있었다.
파앗!
대스승 알베르트의 세 제자.
커틀러스, 팔시온, 매서가 절묘한 타이밍에 개입했다.
좌측 상, 정중앙, 우측 하···.
셋이서 하나인 것처럼 자연스러운 연격이 개구리 마물의 사지를 토막 냈다.
“무리하지마라, 빅터. 검희 레이의 말대로 너는 좀 쉬고 있어.”
그때, 커틀러스는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의외로군.
이어서 그들은 늘어뜨린 관절과 절도 있는 기병도의 조합으로 몰려오는 적들을 상대했다.
그로부터 십 수초···.
모두가 저마다 역할을 맡기 시작하자, 피부에 와닿을 정도로 전선이 안정화된 것이 느껴졌다.
‘이건··· 해볼 만하다.’
든든하군.
이만한 아군을 두고서 나는 왜 그토록 불안에 떨었던 것일까?
몰려오는 마물들을 끊어내기에, 우리들의 힘은 충분하도고 남았다.
거기다 추가적인 쾌조도 있었다.
각각 남과 북쪽 방향에서 내려오는 무리의 수가 눈에 띠게 줄어들었어, 바깥에 흘러들어오는 마기 또한 급속도로 흐려지고 있다.
강대한 두 개의 힘이 적진에 파고들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용병단과 대스승 크레이그, 그리고 대스승 알베르트의 존재를 떠올렸다.
“좀 더 견뎌라, 애송이들!”
“노친네나 잘 하쇼!”
“이 짓거리도 지긋지긋하지 말입니다···.”
효과가 나타난다.
마녀의 결계가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하늘을 좀먹던 청록 빛이, 유성이 가른 자리를 중심으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여명의 빛이 새어나온다.
어둠이 물러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퍼어어어어엉!
“커···어!”
“아니?!”
순식간이었다.
폭발과 함께 대스승 베누다의 제자 중 마른 사내 쪽이 쓰러진 것은.
어떻게 된 거지?
그의 얼굴을 비롯한 상반신이 거짓말처럼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
“빌어먹을, 툴루이! 왜 네가?!”
하지만 당장 우리에겐 그 의문을 품을 여유조차 없었다.
“크아아아악!”
섬광이 번쩍였다.
동시에 툴루이를 부축하려던 휘룡이란 남자의 가슴에도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뭐냐, 이것은···?
바위산 마을의 거미 중합체가 썼던 공기 압축탄?
아니, 아니다.
이 공격은 그보다 빠르고 정확하다.
“툴루이··· 휘룡!”
대스승 베누다는 본능적인 몸놀림 덕에 가까스로 자신에게 덮쳐 든 불가사의한 공격에게서 몸을 피했지만···.
이내 찢어지는 목소리로 목숨을 잃은 제자들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그때, 항시 절제되어 닫혀있던 그의 마음이 아주 잠시동안 보였다.
툴루이와 휘룡은 그가 10년 가까이 곁에 둔 두 제자···.
그들은 고된 훈련 끝에 스승이란 칭호를 받기 충분할 정도로 성장했으나, 그럼에도 대스승 베누다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고집불통들이었다.
서로 티격태격하고 험한 말이 오가던 사이였으나, 그것은 대스승 베누다가 두 사람을 마치 아들처럼 여기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렇게 나올 테냐? 오냐, 그렇다면 오늘로 결판을 내자. 긴 원한의 종지부를 찍어주마. 심록··· 다감의 배신자, 동방인의 수치여!”
대스승 베누다는 일그러진 얼굴로 하늘 저편을 노려보았다.
그곳에는 구름에 가려진 뭔가가 보였다.
무수한 파편과 껍데기로 이뤄진 기괴한 형상의 거대한 눈···.
엄밀히는 눈을 닮은 형상의 중합체일 테지만, 내 모자란 어휘로는 그 외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그것은 노골적으로 태양을 가린 채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레이는 그 부자연스런 물체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창공의··· 눈!”
그 목소리에는 그녀의 한껏 압축된 분노가 담겨있었다.
레이의 마음이 요동친다.
그림자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정도의 격렬한 흔들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