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의 장(4)
5.
수십 분에 걸쳐 우리가 도달한 장소는 그야말로 이질적인 비경 그 자체였다.
물이 증발한 호수가 보였다.
스푼으로 피소시지의 표면을 주걱으로 퍼낸 것 마냥 말끔하게 도려 나가진 구덩이였다.
‘만약 신화 속에 거인이 실존한다 해도, 이건 힘들겠지.’
그랬다.
그건 인간의 신앙이 만들어낸 같잖은 상상력 이상의···.
자연이 만들어낸 터무니없는 현상이었으니까.
충돌한 자리에 생명의 발자취는 보이지 않는다.
미지의 색채가 드리운 그 곳에 남은 건, 오로지 유리가 된 모래와 그을린 바위뿐이었다.
‘숲의 짐승들에겐 재앙이나 마찬가지다. 이 주변에 사람이 살지 않았던 것이 다행··· 아니, 기적이군.’
이처럼 천재지변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만이 아니라 저 별들 너머의 외계에서도 이따금씩 찾아온다.
운석.
홍련의 꼬리와 함께 천공을 꿰뚫는 우주의 방문자···.
성 하나를 통째로 지을 수 있을 정도의 땅을 파헤쳐버린 그것은, 마치 스스로의 존재를 과시하듯 지상에 거대한 낙인을 남겼다.
뻥 뚫린 황량한 대지가, 인지를 초월한 우주적 재해가 내 귓가에 속삭인다.
보라, 인간이여.
나는 하늘 저편에서 여기에 도래했다고.
“좀 더 아래다.”
대스승 베누다의 인도는 구덩이의 중심까지 이어졌다.
으깨진 모래와 같은 지면을 밞을 때마다 발목까지 푹푹 들어간다.
이 주변의 지질이 견고하지 못했던 탓인지, 유성은 보다 지하 깊숙한 곳까지 파고든 듯 보였다.
“입부터 닫고 숨을 참아라.”
갑작스런 요구, 그에 대꾸를 하기도 전에 갑자기 몸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키가 작은 레이는 순식간에 머리까지 파묻혔고, 이어서 가면 삼인방과 내가 뒤를 따랐다.
“쿨럭!”
제기랄, 조금이지만 토사를 삼켜버렸다.
콧구멍을 통해 비린 흙냄새가 진동한다.
당장 대나무를 파낸 물통을 꺼내 서둘러 입안을 게워내자, 제일 마지막으로 내려온 대스승 베누다가 그런 나를 비웃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애송이. 우리가 만날 아가씨는 저 밑에 있지. 젊은 놈이 골골대지 말고 빠릿빠릿하게 움직여라.”
고작 그 정도로 말하지 않아도 안다.
이 유사 아래에서 고개를 들자마자, 어둠 속에 숨은 깊은 수렁을 맨 먼저 확인했으니까.
“연희여, 너는 가면 쓴 인형들을 살펴주도록. 그 녀석들은 보이는 게 없을테니 말이다. 쯧, 정안조차 없는 불량품 주제에 용케도 여기까지 왔군.”
커틀러스 일행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는 연신 ‘인형’이나 ‘불량품’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허나 놀랍게도 그 속내에는 다른 뜻이 숨겨져 있어, 대스승 알베르트에 대한 혐오만큼은 레이나 나의 감정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아쉽지만 여기선 횃불을 쓸 수 없다. 가뜩이나 공기가 부족하니 말이다. 허나 너희도 사냥꾼을 자처하는 자라면, 하는데 까지 근성으로 버텨봐라.”
기본적으로는 베누다도 삼인방의 처참한 몸 상태를 염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레이에게 굳이 챙겨주라고 언질도 해둔 것이겠지.
또 그것만으론 모자랐는지, 품에서 얇은 밧줄을 꺼내 애써 그들에게 쥐여 주는 모습이 묘하게 친근하다.
“꽉 잡고 쫒아 와라. 경고하건데, 도중에 쓰러지면 그대로 버리고 갈 테니.”
굳이 매정한 소릴 하지만, 내 정신감응을 속일 순 없다.
그의 거친 말투와 거침없는 행동의 이면에는, 은근히 섬세하면서도 깊은 배려가 숨겨져 있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굉장히 넓군.’
그고 작은 갈레길이 보인다.
마치 미로 같아, 유성이 떨어져서 지면 아래에 고여 있던 지하수가 빠진 탓에 생긴 흔적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건 뭔가 불안하다.
“애송이, 네놈은 자칫 생매장될까봐 걱정되는 얼굴이군.”
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얼핏 절묘하게 퇴적된 지층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언제 무너져 내려도 이상하지 않은 구조였기에.
“신기하지 않나? 단지 하늘에서 돌덩이가 하나 떨어졌을 뿐인데, 지하에 이런 동굴이 생겼다는 게?”
“예, 대스승 베누다.”
그러면서도 레이는 냉정을 유지한 채 주변을 신중하게 둘러보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호기심보다도 안전의 확보였다.
가뜩이나 대스승 크레이그와 떨어진 상황이라 심기가 날카로웠으리라.
“흥, 별로 놀라지도 않는군. 그간 크레이그 자식을 따라다니느라 별에 별 꼴을 다 봤다 그거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는 아직 한참 배울 것이 많기에···.”
“괜히 겸손 떨 필요 없다. 10년이란 세월은 너에게도 결코 가볍지 않았을 테고. 네 늠름해진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으니. 그 작은 꼬마가 이렇게 대성할지 누가 알았겠느냐? 돌이켜보면 시간도 참 빠르군.”
“그건··· 예전에 저를 맡아주지 않으셨던 걸 후회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기어오르지 마라. 그건에 대해서 나는 아직도 반대다. 예나 지금이나 크레이그와 알베르트 놈은 동지를 무리하게 늘리길 바랐던 모양이지만, 이따위 병정놀이 따위··· 애꿎은 피해자만 늘어날 뿐이다.”
“하지만 대스승 크레이그께서는···.”
“그 자식의 장광설은 신물이 난다. 놈이 가르친 서양 출신의 사냥꾼들은 하나같이 이놈이고 저놈이고 오합지졸, 제대로 된 전사가 없었어. 그 멍청한 제자 놈도··· 그 자식들에게 영향을 받아 옛 버릇을 못 버렸지. 연구자의 하찮은 포부만 집어치웠다면 지금쯤 멀쩡히 살아있었을 것을!”
“···그의 전사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당연하지. 놈의 숨통이 끊어지자마자 지령이 내려오더군. 제리온, 이 등신 같은 자식! 생전에도 능글맞아서 마음에 안 들었거늘, 감히 이 늙은이 보다 먼저 세상을 뜨다니! 절대로 용서가 안 되는 불효막심한 놈이야!”
제리온의 이름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나는 잊고 있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언젠가 빌헬미나에게서 들었었다.
제리온는 먼 훗날 그의 후계자가 되었을 지도 모르는 사내였다고.
꽤나 제자를 아꼈는지, 생전의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대스승 베누다는 오만상 인상을 썼다.
“흥, 스스로 내 무덤을 팠군. 그 망할 제자 놈 생각을 하니 기분만 잡치는구나. ···마침 다 왔다. 보아라, 저것이 유성의 진짜 정체이니.”
대스승 베누다의 손가락 끝이 향한 곳에는, 또 다시 나의 상상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제 이만큼 깊게 내려와야 했던 이유를 알겠지? 꼬락서니가 저 따위니 어쩔 수 없었던 거다.”
과연, 납득이 간다.
왜냐하면 그것의 전반적인 형태가 나선에 가까웠기 때문에.
‘항구 도시에 있던 대성당··· 어쩌면 종탑보다 크겠군. 깊숙이 파고든 걸 감안하면 그보다 거대할지 모른다.’
아니, 그보다···.
덩치가 가공할 정도란 건 둘째 치고, 모양이 기괴하다.
흡사 어떤 나무의 과실을 본 따서 만들어놓은 것만 같았다.
“대스승 베누다, 저것은···.”
나보다 경험이 풍부한 레이마저도 처음본 것인가?
그녀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그에게 재차 확인을 요구했다.
“왜 그러지? 꼬마 연희여. 그간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다르더냐?”
“다른 정도가 아닙니다.”
“그럼?”
“저는 예전에 대스승 크레이그와 함께 별똥별이 떨어진 곳을 탐방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이런 것은···.”
“그렇겠지. 이 몸에게도 이 외계의 돌덩이는 생소하니 말이다.”
돌··· 이란 표현만으론 부족하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그보다는 금속질에 가깝다.
흠집이 없는 푸르스름한 광택에 희미하게나마 윤기가 흐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엄밀히는 달라, 또 다른 뭔가가··· 내가 알지 못하는 질감이 엿보인다.
나는 이런 것은 태어나서 처음 본다.
차가운 인상을 줘야할 쪽빛이 어째서인지 동시에 온기를 품고 있질 않나···.
만지면 오싹함이 전해질 것이 뻔할 터일 한낱 광물에서, 마치 살아있는 생물의 곁에서나 느껴질 숨결이 전해져 오다니?
나는 반사적으로 대스승 베누다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설마 이건··· 살아있는 겁니까?”
“의외로 눈치가 빠르구나, 애송이. 어찌 보면 그렇다고도 볼 수 있지.”
“확답을 해주십시오.”
“네 짐작이 맞다. 이것은 하나의 거대한 생물인 셈이야. 하지만 절반만 맞았다.”
그렇게 말하더니, 대스승 베누다는 갑자기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하는 소리가 지하 내부에 크게 울리자, 나선의 유성 주변으로 서넛 개의 그림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원채 그늘진 위에서 튀어나와 얼굴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모두가 사냥꾼 특유의 복장이었다.
대스승 베누다의 제자들인 모양이었다.
“너희들뿐이냐? 앙리, 휘룡, 툴루이.”
“예. 다른 동지들은 식량을 찾으러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래, 알겠다.”
“그보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대스승이시여.”
우선은 마른 체형의 여성이 인사를 올린다.
그녀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우리를 맞이했다.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신지요?”
“또 시작이냐? 잠깐 자리를 비운 정도로 일일이 안부를 올릴 필요는 없다, 앙리여. 이 몸은 보다시피 멀쩡하다.”
이어서 살짝 턱이 굵은 사내가 끼어든다.
“그런데 대스승 베누다, 저 자식들은 또 누굽니까?”
수염투성이에 지저분한 인상이군.
생긴 것에 어울리게 대스승 베누다에 못지않게 거친 목소리였다.
상대의 물음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우리를 턱 끝으로 가리켰다.
“심과 기의 지원군이다. 우릴 도우러 왔다가 이렇게 흘러들어온 모양이더군.”
“오, 그러면···.”
“그래. 유감이지만 보다시피 어설픈 애송이들이다. 지원군으로서 전력은 기대하기 힘들겠지.”
“이거 끝내주는군요, 젠장!”
“휘룡, 내가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겠나? 너는 조금이라도 말투에 신경을 쓰도록 해라.”
“아, 이거 죄송하군요. 원채 배워먹은 게 없어서요. 손님들에게 죽을죄를 졌습니다, 빌어먹을!”
성질을 부리는 걸 감추지 않는다.
앞서 나타난 여자에 비해 예의란 걸 모르는 눈치다.
대스승 베누다는 이 상황이 익숙한 지, 사내의 뒤통수를 한 대 갈기며 말을 이었다.
“까불지 말고 공손히 대해라. 이들 중엔 너희보다 선배이며, 동시에 검희의 칭호를 받은 아이도 있으니.”
“예? 그 소문의 검희 려연희가···.”
“바로 그 연희다.”
“호오···.”
최소한의 예우였던 것일까?
레이의 이름이 거론되자 휘룡이라 불린 사내는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키는 나보다 훨씬 작지만, 얼핏 어깨의 너비부터 시작해서 말뚝이나 목의 근육이 굵은 것을 염두 할 때···.
결코 만만한 육체의 소유자는 아니다.
그도 오래도록 강도 높은 단련을 거친 듯 보였다.
“···대스승, 그렇다면 당분간 우리는 이 토끼 굴에서 지낼 수밖에 없겠지 말입니다.”
이번에는 음침한 사내가 나타났다.
양 뺨이 움푹 파인 것이, 마치 병자를 연상케 하는 외모였다.
그는 눈이 전혀 보이지 않게 깊이 모자를 눌러쓴 채, 음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슬슬 제 무덤을 미리 파놓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이 들지 말입니다···.”
“벌써 우는 소리 하지 마라. 따로 불만은 받지 않겠다. 어차피 당장 우리가 할 일은 정해져 있으니.”
“그것도 이제 익숙해졌습니다. 대스승의 억지에 따르는 것도···. 이보다 더 상황이 나빠질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배짱이 좋구나, 이젠 내 말에 비꼬기까지 하고 말이다. 하지만 툴루이, 그 말인즉슨, 오늘 네 몫의 칡뿌리는 후배들에게 양보해도 좋겠지?”
“그딴 맛대가리 없는 것 따위, 얼마든지 좋지 말입니다···.”
“녀석, 말버릇하고는.”
“양보하는 미덕은 전부 당신께 배운 것입니다, 대스승 베누다···.”
“그럼 칭찬도 할 필요 없겠군.”
“인색하시지 말입니다. 오늘은 바깥에서 무얼 잡아오셨습니까?”
아무래도 우리가 바깥에서 대스승 베누다를 만난 것은 우연이었던 듯했다.
마침 그가 식량 조달을 위해 지상의 우리와 마주했던 것이리라.
“땅 위는 오염이 심했다. 새나 토끼 같은 들짐승은 물론, 대부분의 식물이 말라죽었더군.”
“역시 그랬습니까···.”
“대신 내가 오가며 잡아둔 두더지 몇 마리를 꺼내두마. 오늘은 씹을 거리가 좀 늘어날 거다.”
“오, 두더지 구이라! 그건 진수성찬아닙니까! 이 휘룡, 불씨를 준비하도록 하지요, 제기랄!”
“입조심하랬다, 휘룡.”
“···신나서 죽겠지 말입니다.”
“툴루이, 넌 거기까지 해라.”
“진심으로 자살하고 싶어졌습니다, 간에 기별은 가겠군.”
“이 개자식들이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다른 유파의 꼬맹이들 앞에서 이게 무슨 망신이냐!”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하소연 하듯 서로 툭툭 던지지만, 그러면서도 깊은 유대가 머물러 있다.
마기를 밀어내는 유성의 영향권에 숨어든 채 고립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대스승 베누다 휘하의 제자들 간의 결속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그것도 아주 잠시 동안이었다.
“그런데, 앙리.”
“예, 대스승이시여.”
대스승 베누다가 눈을 부릅뜨며 한 명을 지목하자, 순식간에 다른 제자들이 입을 닫았다.
조금 전의 소란이 사라졌어, 이젠 그의 목소리 외엔 아무 것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것의 상태는 어떻게 되었지?”
“많이 안정되었습니다. 좀 전의 발광이 거짓말처럼···. 단지, 조금 전에 무엇에 반응했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고 지만요.”
“그런 건 상관없다. 이미 짐작되는 게 있으니까. 그보다, 앙리. 다시 한 번 접촉할 수 있겠나?”
“···당신께서 명령만 하신다면 언제든지.”
“좋아. 그럼 당장 이 녀석들에게도 그녀를 소개하도록 하지.”
지시와 동시에, 앙리라 불린 여성이 모자를 벗었다.
그러자 부드럽게 감긴 두 눈 사이로 짙은 안광이 번쩍였다.
그 여인은 나보다 젊거나 비슷한 또래로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어쩐지 지쳐 보이는 인상이었다.
분명 그녀 또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냥꾼이었으리라.
“이쪽으로.”
앙리가 땅을 파고든 유성을 향해 손을 내밀자 주변이 살짝 흔들렸다.
“흠, 이건 볼 때마다 신기방기하군.”
“···신호를 알아내는 데에만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요.”
“아니, 전부 너의 덕이다. 오직 너만이 할 수 있는 공이기도 하지.”
설마하니 지진을 불러온 것인가 싶어서 놀랐지만, 곧 그 원인이 드러났다.
쩌적, 쩌저적!
당장 나선의 끄트머리가 풀리기 시작했어, 똬리를 튼 뱀의 몸통이 젖혀지듯···.
그것은 안으로 통하는 입구를 열어젖혔다.
‘이럴 수가, 이것은 또 다른 통로인가? 그게 아니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대스승 베누다가 앞서 말한 이야기처럼, 이 유성은 정말로 살아있었던 것이었다.
“이쪽으로.”
앙리는 담담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손짓을 했다.
두려워할 필요 없으니, 이대로 들어서면 된다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어째서 였을까?
그 순간, 내 눈에는 그것이 깊고 어두운··· 무저갱의 위장으로 이어지는 짐승의 아가리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