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72화 (72/186)

유성의 장(3)

4.

짐작하건데, 내 생각보다 마녀 사냥꾼의 역사는 오래되었을 것이다.

비록 모종의 이유로 조직의 이름이 정해지지 않았을지언정···.

수많은 싸움을 통해 대를 이어온 경험은 이들에게 각기 다른 형태로 전승되고 있었다.

그리고 대스승들은 유파라는 형태로 전통과 가르침을 현대까지 유지하고 있지.

‘대스승 크레이그의 경우는 정신의 영역을 특히 강조했다.’

그는 생각하고 탐구하는 자···.

의지와 절제, 마음가짐.

즉, 심心이다.

‘하지만 의욕만 앞선다고 현실을 극복할 순 없다. 그건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안다.’

그래서 고안된 것이 기技.

그것은 스스로를 갈고 닦으며 반복된 수련을 통해 선천적인 능력의 한계를 초월하는 걸 목적에 둔다.

지식과 지혜로서 의지를 수행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대스승 알베르트는 그보다 지식을 활용한 개발에 기울어져 있었지. 그 정도가 심할 정도로.’

이식에서 통과하지 못한 자들에게 마저 싸울 수 있는 힘을 부여함은···.

분명 그의 입장에선 의술의 궁극적인 도달점일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선이 있기 마련이다.

대스승 알베르트의 기술에 대한 집착은 이미 광기의 영역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정도를 지키려면, 또 하나의 이치가 필요한 것이다.’

아무리 바라고 기도해도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인륜을 포기한 기술은 비극만을 낳는다.

우리에겐 보다 본질적이고 알기 쉬운 원점이 필요했다.

싸울 수 있는 몸, 각오를 담아내고 수행할 육신이···!

누구나 팔만 있다면 칼은 들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아무리 뛰어난 검술 이론을 알고 있다 해도··· 정작 그걸 휘두를 몸이 온전치 못하다면?

결국 마지막에 의지할 수 있는 건 체體뿐이다.

‘그리고 그 체의 유파를 대표하는 자가 바로···.’

동방의 대스승, 호권虎拳 베누다였다.

“오냐. 잘 돌아왔다. 꼬마 련희.”

대스승 베누다는 또렷한 발음으로 레이의 본명을 불렀다.

자세히 보니, 머리칼을 제외한다면 그에게서도 동방의 민족 특유의 생김새가 있군.

어쩌면 레이와 같은 출신일지도 몰랐다.

아니, 그건 아무래도 좋다.

그보다···.

‘저것이 늙은이의 몸이라고···?’

과연 체體의 유파를 대변하는 자로군.

그는 노인··· 이라고 부르기가 망설여질 정도의 건장한 육체의 소유자였다.

주름살이 엿보이는 얼굴은 그렇다 치더라도, 드러난 상반신은 건강한 탄력을 유지한 구릿빛이었다.

선명하게 남은 근육과 핏줄은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로 부풀어있었다.

이것이 노쇠한 상태이라고 한다면, 그는 분명 평생 동안 단련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리라.

“대스승 베누다, 당신이 어째서 여기에···.”

엄밀히 말해 뜻밖의 인물은 아니다.

애초에 우릴 동방으로 불러들여 도움을 요청한 이가 바로 대스승 베누다였기에.

하지만 레이의 질문에는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었다.

마녀의 결계를 지나 위치하는 이 ‘벽’ 속에서··· 어째서 그가 머물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보이는 그대로지.”

대스승 베누다는 어깨를 들썩였다.

“내 제자들, 정예 선발대를 매장시킨 놈들의 면상을 보고 싶어서 이렇게 몸소 찾아온 거다.”

너희들처럼 말이다, 라며 그는 덧붙였다.

호쾌하게 말하곤 있지만···.

결과만 봐선 오도 가도 못하게 갇혀버렸단 의미로군.

“···아!”

레이는 잠시 주저하더니, 겨우 잊고 있었던 한 마디를 내뱉었다.

“저 려연화··· 대스승 베누다이자, 다감의 대족장이신 번호煩虎 님께 뒤늦게 예를 올립니다!”

레이는 급히 고개를 숙이면서도, 나에게 그걸 따라하도록 눈치를 주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대스승이 나타났으니, 당연히 따를 수밖에 없나?

하지만 상대는 오히려 레이의 인사에 미간을 굳혔다.

“집어치워라. 이제 와서 코쟁이들의 예절 따윈 질색이니까.”

이어서 그는 거친 말투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망할 놈의 크레이그 자식, 질리지도 않고 제자들에게 겉멋만 가르치는 모양이군.”

“···.”

“다 쓸데없는 짓이야. 진정한 존경이란 자연히 몸에 배여 나오는 거지. 중요한 건 마음이라고 떠들어대는 주제에 뻔히 보이는 가식이나 가르치고··· 정말이지 웃기지도 않는다!”

의외였다.

존경해마지 않는 대스승 크레이그의 험담을 면전에서 들었음에도, 레이가 상대에게 대들지 못한 것이다.

분한 마음을 속으로 삭히기만 할 뿐···.

그녀는 무거운 침묵으로 대스승 베누다의 폭언을 견뎌내고 있었다.

오히려 내 쪽에서 열이 받기 시작했어,

“···확실히 잘 알겠습니다. 대스승 베누다.”

“으음? 네놈은 또 뭐지?”

“당신의 행동을 보니, 예절이 어째서 중요한 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대스승간의 관계나 우위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내가 존경하는 이는 대스승 크레이그뿐이며, 매몰찬 대우에 레이가 쩔쩔매는 꼴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애송이,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거냐?”

나는 그가 바라는 대로 가식 없는 한 마디를 내뱉고 말았다.

“은인의 모욕을 잠자코 듣지 못하겠단 소리다.”

“야, 덩치···?!”

나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갔다.

그리곤 나와 덩치가 거의 차이 나지 않는 노인네의 코앞에서 눈을 부라렸다.

나는 한 대 얻어맞을 것을 각오했다.

그런데···.

“푸···하하하하!”

레이가 정색하며 나를 바라봤지만, 우려와는 다르게 대스승 베누다는 폭소를 터뜨렸다.

기가 막혀서 웃은 것이 아니야, 어째서인지 그는 진심으로 즐거운 듯했다.

“생긴 것만큼이나 건방진 자식이군. 그래, 그게 바로 강골이지. 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지? 하지만 나는 네놈이 맘에 드는군. 이렇게 내게 대들 수 있는 자식은 제리온 이후로 처음이로구나. 여봐라, 연희여. 이 애송이의 이름은 뭐지?”

“빅터··· 라고 합니다.”

그는 나를 흘겨보더니.

“오, 그렇군. 알겠다. 소문의 그 자식이란 말이지? 너도 이 녀석을 본받아라. 애비와 같은 존재를 욕하는 이 늙은 꼰대에게 있는 그대로 느낀 감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당당한 여자가 되어라.”

“···.”

“자, 그러면···.”

그때였다.

콰앙!

이마에 강렬한 통증과 함께 눈앞이 번쩍했다.

무식하기 짝이 없는 박치기··· 머리가 깨질 거 같군.

나는 어느새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잘 부탁한다, 빅터!”

대스승 베누다는 내려다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빌어먹을 노친네···.

나는 앞으로도 절대 이 작자를 좋아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놈 보게. 아직도 반항적인 눈을 할 수 있나? 크레이그 놈에게 주기엔 아까운 자식이군.”

“큭···.”

그는 내 멱살을 잡더니, 바로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일으켜 세웠다.

분명 도중에 균형을 잡았음에도 일방적으로 끌어올려진 것이다.

“놀랐나, 애송이? 딴에는 완력에 자신이 있는 모양이지만, 세상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

믿을 수가 없다.

힘에서 내가 밀렸다고?

내가 성을 내며 팔을 뿌리치자, 그는 소탈하고 경박한 표정으로 어떤 제안을 걸어왔다.

“같잖은 심心의 유파 따윈 집어치우고 내 아래로 들어와라. 진짜 강함이 무엇인지 몸소 가르쳐주지.”

“웃기지··· 마라!”

“멍청한 놈. 왜 거절하지? 네놈은 아무리 봐도 심이나 기가 아니라 나와 같은 인종인 것을.”

“잠시만요! 그건 말도 안 되는 말씀입니다, 대스승 베누다! 덩치··· 아니, 빅터는 최소한 저희 문하에서 앞으로 3년 이상은 수련을 쌓아야···!”

“언제 적 고리타분한 방식이냐? 그런 논리라면 나도 할 말이 있지. 바로 연희, 너를 빼앗아간 크레이그 자식에게!”

“그때 당신은 제가 사냥꾼이 되는 걸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잘도 말대답을 하는구나. 정말 많이 컸군. 아무튼 나는 놈에게 받은 걸 그대로 돌려줄 뿐이다.

“그런 억지가···.”

“착각하지마라. 까짓 제자 한 놈 받는 걸로 내 오랜 원한이 풀릴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얄궂은 일이다.

나는 끝내 대스승 베누다의 말을 순수하게 부정하지 못했으니.

닮은꼴이라고 해야 할지···.

나도 은연중에 저자와 내가 비슷한 계통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스승 베누다에게선 순수한 열기가 느껴진다.

대스승 크레이그나 대스승 알베르트와 같이 억눌린 뭔가가 보이지 않아, 있는 그대로의 본능적인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호전적이다.

또한 거침없다.

원하는 것은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겠다는 의사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군.

그는 늑대가 아니다.

오히려 사자와 같은 사내···.

그야말로 쇠사슬로도 구속할 수 없는 맹수 그 자체였다.

“뭐, 그런 건 나중에 여유가 생긴 다음 천천히 이야기하도록 하고.”

레이의 언변에 밀렸는지, 대스승 베누다는 시선을 다른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유성의 영향 탓에 들어오지 못하고 사라져가는 마기의 아지랑이가 있었다.

“이제 너희들의 사정을 설명해봐라. 오래도록 이 곳에 머물러 있어서 바깥 세상의 소식을 못 들었으니.”

레이는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이야기가 현재에 가까워질수록, 대스승 베누다의 탄식이 더욱 깊어져갔다.

“알베르트도 여전한가 보군. 약해빠진 주제에 도움도 안 되는 제자들만 이렇게 보내다니.”

그는 우리를 흘겨보더니.

“곰 같은 애송이 한 놈에, 명령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꼭두각시 낙오자 세 녀석이라··· 그나마 이 무리 중에선 연희, 네가 쓸만하겠군.”

“과대평가십니다. 저는 아직···.”

“내 안목을 무시하지 마라. 판단은 내가 한다. ···어쨌든, 너희도 여기까지 도달했다면 다 눈치 챘겠지. 우리 선봉대가 말라 죽어가며 지난 한 달간 놈들에게서 무엇을 지켜 왔는지를.”

“한 달?”

“내 제자들이 그냥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거라 생각했느냐?”

“아닙니다. 당연히 뭔가 그럴만한 사정이 있을 거라고···.”

“식량이 떨어진 이후부터 전선이 밀리기 시작했다. 고용된 용병들이 하나같이 미쳐버려서 말이야. 어찌어찌 결계를 통과한 녀석이 지령을 보낸 모양이지만, 역시 오래도 걸렸군. 그 놈도 끝내 돌아오지는 못했고.”

“그런데 대스승 베누다, 역시 이곳에는 유성의 파편이?”

“그렇다. 그것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굉장히 온전한 물건이지. 아니, 원석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귀족의 영지 하나를 통째로 뒤덮을 정도이니.”

그는 조금 전 대스승 알베르트가 지었던 것과 거의 다르지 않은 웃음을 보였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고대로부터 별똥별이 떨어진 지역은 어둠의 기운을 흩뜨리는 성지聖地로 모셔졌다고 한다. 그것은 지면을 파고들고 뿌리를 내려서 오래도록 마기를 막아냈지. 우리가 유성의 파편을 손에 넣은 것도 전부 그런 허물어진 유적들을 통해서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다르다. 전례 없는 새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야.”

“그게 정말이라면 모든 이에게 멸마의 무구를 쥐어줄 수 있을 지도···.”

“그뿐만이 아니다. 이곳은 우리 모두의 전초기지가 될 것이니까.”

“예?”

“이미 살아남은 내 제자들이 진지를 구축하고 있다. 이 엿 같은 대치 상태만 끝나면 언제든지 요새로 만들 수 있도록 말이다.”

진지?

요새라고?

설마 유성이 떨어진 자리를 터로 삼아서 성이라도 지을 셈인가?

그게 가능하다면 꽤 훌륭한 전략적 요충지가 될 지도 모른다.

조건이 좋았다.

은발의 사냥꾼에게 호의적인 대륙, 마기가 차단되는 지리를 고려한 다면···.

마녀와 싸우는 자들에게 있어서 최적의 보금자리라 해도 과언은 아니지.

그런데···.

“경과가 좋다. 마침 그것도 보름 전에 알에서 깨어났으니.”

이어지는 대스승 베누다의 설명은 수수깨기에 가까웠다.

“깨어나다니, 무엇이 말입니까?”

“당연한 걸 묻느냐? 별 세계의 공주님이 말이다.”

영문을 모를 소릴···.

이것은 비유인가?

내가 놀란 만큼이나 레이도 동요한 눈치였다.

우리의 반응을 즐기기라도 하듯, 대스승 베누다는 자신의 나쁜 성격을 숨기지 않았다.

“쯧, 답답한 것들 같으니. 그런 것도 모르느냐? 크레이그, 알베르트···. 그간 놈들이 어지간히도 정보를 통제한 모양이군.”

그는 한숨과 함께 등을 돌렸다.

그러자 무수한 흉터와 칼자국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등짝에는 오래된 흠집과 최근에 생긴 상처들이 빼곡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최전선에서 살아가는 전사의 증표였다.

이어서 그는 우리에게 손짓을 하더니.

“따라와라. 직접 보여주마.”

유성이 떨어진 중심부로 안내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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