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71화 (71/186)

유성의 장(2)

2.

그것과 마주한 나는 잠시 동안 얼어붙었다.

오거급 중합체의 덩치 때문에 위압당한 것은 아니었다.

지네의 마물이 말을 했다는 사실도 놀라 웠지만, 그것이 보이는 반응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간성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너무 높은 곳에 있었기에 일그러진 표정까지는 잘은 보이지 않으나, 분명 그 목소리에는 흐느낌이 담겨있었다.

“너희가 감히 기기를···. 나를 이끌어주던 다정한 오라버니, 언제나 베풀기만하던 기기를!”

기기란 그 외눈박이 꼽추를 말하는 건가?

이름을 읊조릴 때마다 가공할 슬픔과 증오가 느껴진다.

그래, 잘 알겠다.

너에게 있어서 우리는 동료를 죽인 원수이라는 말이로군.

녀석은 악에 받친 얼굴로 우리를 흘겨보며, 숲을 등분할 수 있을 정도의 육중한 앞발을 들어올렸다.

당장이라도 우릴 찢어발기고 싶어 하는 게 뻔히 보일 정도다.

그 뒤틀린 모습에서, 나는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할 거북함을 느꼈다.

‘또다. 괴물 주제에, 마녀의 졸개 주제에 울분을 품고 있다니···.’

아니나 다를까, 또 다시 멋대로 정신감응이 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만··· 나는 저것에 대해 알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여지없이 내 의지를 무시하고, 어설프게 사람을 닮은 마물의 과거를 보여주고 만다.

노예의 아이···.

임신이 제법 진행된 상태에서 배를 걷어차인 충격으로, 날 때부터 두 다리를 쓰지 못한 소녀가 있었다.

평생을 손톱이 부러질 만큼 팔을 뻗어 기어 다녔지.

어딜 가든 환영받지 못하고, 멸시만 당한 인생이었다.

그 아이는 채 한 살이 되기도 전에 입을 줄이기 위해서 가장 먼저 산에 버림받았다.

들짐승에게 산 채로 잡아먹혔을 것이다.

그 직전에 늪을 보금자리로 삼아 살아가는 마녀에게 주워지지 않았다면.

“···큭!”

나는 스스로의 손등을 질근 깨물었다.

통각이 돌고 나서야 겨우 개 같은 환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딴 사정 따윌 보여준다고··· 내가 너희를 동정할 성 싶으냐?’

이 능력은 편협하다.

안타까운 과거나 인간을 증오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뒷배경이 있단 건 충분히 알겠지만···.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비극까진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나는 안다.

저 지네 요괴, 변방의 전설 속에 등장하는 센티피디아Centipede 여인은···.

오거급 중합체의 육신을 얻기 위해 그만한 희생자를 바쳐서 만들어진 결과물이란 걸.

아직도 심록이란 자가 어떤 마녀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바로 적지 않게 돌아버린 미치광이라는 사실이다.

뭐가 프라이케르 가이스트냐?

무엇이 자아를 가진 사역마라는 거냐?

이것은 어떤 사악한 상상력이 만들어낸 결과물인가?

어느 누가 고목조차 초라하게 보일 정도로 거대한 독충과 가녀린 여성의 몸을 합쳐놓을 수 있단 말이지?

흉하기 짝이 없다.

저것은 존재해선 안 된다.

고통스러운 과거만을 되새기며 인간을 미워하는 괴물 따위···.

차라리 숨통을 끊어주는 것이 이롭다.

우리에게도, 저 괴물 자신에게도 말이다.

“좋은 기백이다, 빅터. 중합체를 상대로도 거침이 없는가?”

내가 도끼자루에 쥔 손으로 힘을 불어넣자···.

대스승 알베르트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너희도 저 혈기를 배우도록.’ 이라며 실없는 농을 던지는 것이 아닌가?

눈에 핏발이 선 적을 앞에 두고 이 무슨 여유를···.

그런데, 이어서 그는 의미심장한 소릴 늘어놓았다.

“하지만 자네는 아직 그 힘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 같군.”

어찌된 영문이지?

설마 그는 나의 ‘정신감응’에 대해서 알고 있었단 말인가?

“어떻게 그걸···.”

“숨기려고 했었나? 물론 나도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네만. 역시나 그랬군. 내 예상이 맞다면 자네는 이 싸움에서,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우리를···.”

“···.”

“아차, 내 입이 극성이군. 보아하니 대스승 크레이그가 굳이 자네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내가 설명하는 건 주제넘은 짓이겠지. 실언이니 잊어주게.”

이제 와서 은근슬쩍 뒤로 빼다니.

이 노인네··· 대체 무슨 꿍꿍이지?

뭐든 다 안다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군.

대스승 크레이그와는 또 다른 부류의 짓궂음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놓인 상황에 그를 추궁할 시간은 없었다.

쿠구구구궁!

다시금 땅이 흔들려, 거대한 지네의 모든 발이 지축을 두드리기 시작했으니.

공격할 셈인가?

아니, 이상하게도 그럴 낌새가 보이지 않는다.

상대는 단지, 당장의 울화를 참지 못해 성질만 부리고 있을 뿐이었다.

“뭐가 불만이지, 독충 아가씨? 갈 길이 바쁜 우리에게 할 말이라도 있나?”

여기서 대스승 알베르트는 넌지시 말을 건넸다.

예의를 위장하지만 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도발이었다.

그런데 상대는 또 거기에 걸려들더니···.

“실토해! 너희 중에서··· 기기의 숨통을 끊은 건 누구지?”

애처롭게도 매달리듯 질문을 해온다.

위화감이 들었다.

모습은 다 큰 성인 여성이지만, 말투가 어쩐지 아이와 같았기 때문에.

대스승 알베르트도 그것을 느꼈던 것일까?

그는 어린애를 달래듯 위를 올려다봤다.

“호오, 아가씨. 그걸 알아서 뭘 어쩔 셈이지?”

“죽일··· 거야. 사지를 베고, 뱃속을 찢고, 전신을 녹여서 기기의, 오라버니의 무덤에 바칠 거야!”

“원수를 건넨다면 남은 사람들은 살려주겠나?”

“침입자는 모두 죽인다! 하지만 원수를 맨 먼저 죽여!”

“수지가 안 맞는군.”

“알게 뭐야! 나는 지금 오라버니의 복수를 하지 않으면 못 참아!”

그 눈알이 달린 내장 덩어리와의 유대가 상당했던 모양인지, 요마는 힘겹게 소리쳤다.

“곤란한 요구를 하는 숙녀분이로군.”

대스승 알베르트는 웃음을 참으면서 우리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보거라. 이 짐승은 오거급 중합체의 힘을 지녔으면서, 정박아 수준의 지성을 품고 있다. 감정이 앞서서 제대로 된 판단조차 못하지.”

내가 착각한 게 아니었군.

어쩐지 적대하는 우리를 곧장 후려갈기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싶었다.

이건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알아둬라. 덩치가 큰 프라이케르일수록 이처럼 정신이 덜 여문 경우가 많다. 보아하니 마음의 성장이 열 살 정도에서 멈춘 듯 하군. 하지만 방심은 말아라. 본디 어린 아이의 악의야말로 세상에서 무서운 것이기도 하니까.”

허나 여기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자네들은 나서지 말게. 내가 하는 걸 지켜보고만 있거라.”

대스승 알베르트는 자신의 제자들 대신 앞으로 나서더니.

“여기다.”

“아아아아아?”

“바로 나란다. 멍청한 계집아.”

지네의 마물에게 자신을 지목했다.

“내가 그 괴물의 가슴팍 깊숙이 칼을 찔러 넣었다.”

“너어어···!”

“추하게 애원하는 놈의 눈깔을 발로 짓뭉개주었지. 어떠냐? 더 들어보겠나?”

“크아아아아아!”

바람이 역행한다.

지네의 전완이 살짝 들썩인 것만으로도 사방의 공기가 빨려 들어갔다.

어어서 거대한 붉은 단두대가 대스승 알베르트의 머리를 노리고 엄습해왔다.

“죽어! 죽어버려어어어!”

쿠콰아아앙!

난타가 벌어졌다.

지네가 지면을 내리칠 때마다 폭발이 일어났다.

대량의 진흙이 사방으로 튀었어, 어느새 그 자리에 가파른 언덕이 새로 생겨났다.

그런데···.

‘이럴 수가···.’

일순간, 나는 대스승 알베르트의 상체에 마물의 공격이 정확히 파고든 것을 보았다.

그는 피하지 못했다.

최후의 순간까지 피할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뭔가 노림수가 있었던 게 아니었나? 설마하니 이렇게 허망하게···.’

그때였다.

희미한 실루엣이 흙먼지 속에서 나타난 것은.

“난잡한 응석이로구나, 추잡한 벌레 여인아.”

그렇지.

대스승의 칭호를 가진 그가 이토록 허망하게 죽을 리가 있나?

마물이 짓뭉갠 것은 대스승 알베르트의 목숨이 아니었다.

그는 아슬아슬한 순간에 어떤 기술을 사용했다.

바로 그림자를···.

비현실에 숨어들어 물리적인 공격을 차단했던 것이었다.

“나는 잠시 이것과 놀고 있으마. 너희는 이 틈에 유성의 영역까지 달리도록.”

“존명.”

“대스승 알베르트! 아무리 당신이라도 혼자서 프라이케르를 상대하는 것은···!”

“검희 레이여. 나는 괜찮다.”

“돕게 해주십시오. 여기선 협공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내가 비록 전성기를 지나 노쇠했다곤 하나, 저따위 기워 만든 장난감에게 당할 정도는 아니란다.”

“하지만!”

“내가 지금껏 오거급 중합체를 몇 번이나 상대해봤다고 생각하나?”

예상치 못한 이변이 또 한 번.

“키··· 키야아악!”

방금 전까지 땅에 연달아 내리박히던 지네의 앞발에 균열이 일어나더니, 시커먼 액체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느 틈에 벤 거지?

대스승 알베르트의 오른 손에는 어느새 재벨Säbe이란 이름의 곡검이 들려져 있었다.

“가거라. 커틀러스, 팔시온, 매서. 임무를 내리마. 너희 셋이서 목숨을 걸고 우리의 희망을 반드시 지켜내라.”

“존명.”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은 레이의 지시를 따르도록.”

“알겠습니다.”

나는 그제야 대스승 알베르트가 홀로 남으려고 했는지를 깨달았다.

눈치 채지 못한 사이, 결계에 퍼져있던 다른 마기의 집합체들이 이곳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기에···.

그 수는 셋.

하나하나가 눈앞의 지네 마물만큼의 마기를 머금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중에서 의미 있게 시간을 끌 수 있는 전력은 나뿐이다. 자네들은 있어봐야 방해만 될 뿐이라네.”

아니, 이건 현명한 판단이 아니다.

강한 적이 늘어난다면 이쪽도 한 명이라도 많은 것이 좋지 않은가?

“저는 남겠습니다, 대스승 알베르트.”

“아니, 자네는 더더욱 안 되지.”

“···그건 제가 못미덥기 때문입니까?”

“오해하지 말게. 아직 실력과 경험이 미숙한 건 사실이나, 자네는 충분한 전력일세. 한 사람의 사냥꾼으로서 모자람이 없음이야. 대스승 크레이그께서도 그걸 인정하고 동행시킨 것이니.”

말뿐이다.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지질 않는다.

이 영감탱이는, 그보다 다른 본심을 숨기고 이 자리에 남을 셈이었다.

“흠, 생각보다 빠르군. ···자, 얼른 떠나거라. 이건 명령이다. 유성에 닿아, 마녀의 결계에서 무사히 이탈하라!”

“치···잇!”

명령.

그깟 단어가 뭐라고, 레이는 마지못해 등을 돌렸다.

“가자, 덩치!”

“···.”

“대스승의 명령은 절대적이야!”

대스승 알베르트의 지시대로 마기가 차단된 ‘벽’을 향해 달렸다.

내가 그 뒤를 쫒기 위해 한 걸음을 땐 순간, 또 다시 지네 마물의 맹공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애써 그 울림을 외면하며, 필사적으로 목적지로 나아갔다.

3.

보이지 않는 벽의 내부로 들어서자, 바깥의 기척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하늘을 맴돌던 마기의 흐름마저도 사라져서 기묘한 침묵이 찾아왔다.

‘이건 상상 이상이다.’

넓다.

너비가 어지간한 섬 만할 지도 모른다.

적어도 마기가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거리는 전부 영역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유성이 떨어진 위치가 결계의 중심부일거라 막연히 추측하고 있었건만, 아무래도 그 생각이 틀린 모양이었다.

심록의 마녀가 펼친 방어선으로도 이 주변을 완전히 둘러싸지 못할 정도이니 말이다.

그만큼 강력하단 의미겠지.

대스승 알베르트가 기대한 것처럼···.

이계의 금속을 머금은 유성의 부피도 상당할 것이리라.

“레이, 이젠 어쩔 셈이지?”

“···모르겠어. 이건 내 판단으로 해결할 단계가 아니니까.”

“검희, 저희에게 지휘를.”

“시끄러워. 당장 나한테 뭘 어쩌라는 건데?”

그녀는 복잡한 심경으로 보였다.

그럴 만도 하지.

대스승 크레이그와도 떨어지고, 본래의 목적이었던 마녀 토벌뿐이 아니게 되었으니.

“···우선은 대스승 알베르트의 명령을 따른다.”

“음.”

“유성을 지키면서, 다음은 대스승 크레이그와 용병단··· 일주일 뒤에 투입될 후속 지원을 기다릴 거야.”

“일주일? 후속? 그때까지 여기서 줄창 대기만하자고?”

“사역마는 마기가 차단된 곳엔 들어올 수 없어. 그건 마녀도 마찬가지고.”

“안전하고 자시고의 문제가 아니다.”

못마땅하다.

휘둘리기만 하는 건 질색이야.

나는 싸우기 위해 사냥꾼이 되었다.

마녀의 결계를 먼발치에서 뻔히 지켜보려고 이 먼 동방까지 온 것이 아니라···!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상황은 내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만 흘러갔다.

레이는 이를 악물며 사태의 심각성을 설명했다.

“이건 가벼운 임무가 아냐. 우리들 사냥꾼의 역사에서 전무한 사건이란 말이야. 어쩌면 장기전이 될 지도 몰라. 아니, 이건 이미 전쟁이야.”

“···꼬마치곤 꽤 통찰력이 있군.”

“누구냐?!”

갑자기 끼어 든 목소리에 우리는 즉각 반응했다.

하지만 인기척이 없었어, 이 주변에 누군가가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데···.

“많이 컸구만. 얼굴이 볼만해졌어. 크레이그가 데려간 지저분한 꼬맹이가 이런 미인으로 자라날 줄은 몰랐는데.”

덩치 큰 남자···.

그는 얼굴이 흉터투성이인 거친 인상의 노인이었다.

이식을 받은 흔적인 탈색된 장발의 머리칼과 백화된 정안이 보였지만, 사냥꾼 복장 대신 근육질의 상체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놀랍게도, 그는 나는 물론··· 긴장을 놓지 않고 경계를 서던 삼인방을 재치고, 어느 순간 레이의 등 뒤에 서 있었다.

“뭐냐, 그 얼빠진 표정은? 내 얼굴을 기억을 못하나? 하긴 10년 만이니 당연한가?”

“당신은 설마···.”

“이제 알아보겠느냐?”

상대를 바라보던 레이의 입술이 크게 떨렸다.

그녀는 놀라움과 반가움, 그리고 경외가 뒤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스승 베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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