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의 장(4)
5.
장기전이었다.
싸움은 내가 걸친 코트가 놈들의 피로 축축해지고 나서야 겨우 끝이 났다.
‘···스물두 마리!’
마지막 사역마의 번들거리는 몸통에서 도끼를 뽑아들며, 나는 보란 듯이 레이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언제부터 쉬고 있었는지, 팔짱을 낀 채 고목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대충 다 정리한 거 같네.”
그 말 그대로군.
어느새 마물들에게 생명력을 불어 넣고 있던 마기의 흐름이 멈추어 있었다.
최소한 주변에는 적이 더 없을 것이리라.
“제법이야. 이제 가루에 의존하지 않아도 이 정도는 가볍게 처리하는 걸 보니까.”
웬일로 칭찬을 하며, 레이는 턱으로 내 앞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나와 그녀가 쓰러뜨린 처참한 광경이 펼쳐져있었다.
사방이 보라색 핏물로 물들어, 온갖 크기로 토막 난 괴물의 유해로 가득했다.
“그러면 이 승부, 내가 이긴 건가?”
나는 슬쩍 레이에게 농을 걸었다.
그러자, 역시 그녀는 코웃음으로 대답한다.
“흥, 기어오르지 마. 그깟 하급 사역마 서넛 마리 더 잡았다고 어딜···.”
혀를 창처럼 다루는 이 흉물들은 약하기 짝이 없었다.
단지 수만 많았을 뿐, 지금껏 내가 상대해온 놈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저번 임무에서 상대한 오거급 중합체와 비교하면 영 시덥잖은 수준이긴 하지.”
“건방지네. 잡졸을 상대로 기고만장해가지고.”
그건 그렇지.
이건 레이가 지기 싫어해서 괜히 꺼내는 심통이 아니다.
반대로 내가 까부는 것이나 다름없지.
레이와 나의 격차는 한 눈에도 알 수 있을 정도이니까.
놈들의 피로 흥건한 나와는 달리, 레이는 그 격한 싸움을 이어가는 와중에도 코트에 일말의 얼룩조차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내 나름대로는 강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군.’
“우쭐해하는 건 나중에 해. 지금은 일행과 합류하자. 우리가 많이 끌어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여긴 적의 영토니까. 다시 몰려오기 전에 대처해야지.”
“사역마의 무리가 이외에 더 있을 지도 모른다고?”
“여기선 몇 놈을 처리하든 의미가 없어. 저길 봐.”
제기랄, 레이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니···.
우리가 무찌른 개구리 마물들의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놈들의 시신이 늪과 같은 지면에 스며들고 있었다.
“이제 알겠지? 머잖아 저것들의 피와 살이 다시 재구성 되서 덮쳐올 거야.”
“끝이 없겠군.”
“심록을 처치하기 전까진 말이야.”
“음.”
“서둘러. 지금쯤 그 돈만 두 배로 받아먹는 머저리들이 동요하지 있을 테니까.”
레이는 용병단 쪽의 정신이 문제라고 했다.
그럴 만도 하지.
사실 나도 그들이 걱정된다.
실전 경험이 풍부하고 군사 훈련을 받았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그들은 어둠의 세계를 모르는 평범한 병사에 불과하니 말이다.
허나 레이가 정말 신경 쓰는 인물은 따로 있었다.
‘레이 녀석, 이제 와서 그 말괄량이가 염려되는 건가?’
자주 신경질적이고 퉁명스럽게 말하지만 레이는 은근히 사람을 잘 챙겨준다.
첫 만남부터 서로 으르렁거리긴 했어도, 한 달 남짓 같은 배에서 마주하다보니 레이도 니엘과 어느 정도 정이 붙은 모양이었으니까.
알게 모르게, 그녀는 니엘에게 식료품을 좀 더 챙겨주라고 따로 언질까지 해두었을 정도였다.
‘엄밀히 따지면··· 돈을 주고 고용했다곤 하나, 우리의 복수와는 관계없는 작자들이다. 대스승이나 레이도 그들을 가능한 살려서 보내고 싶어 했지.’
어째서 용병단까지 동행했어야 하는가?
대충이나마 짐작은 간다.
숲 전체의 경관에 영향을 줄 정도의 짙은 마기, 끝이 짐작도 가지 않을 정도의 넓은 결계와 무수한 사역마···.
그 정도로 ‘심록의 마녀’··· 육망성이 강한 적이기 때문일 테니.
어쩌면 이 수로도 부족할지 모른다.
그래서 그토록 많은 수의 선봉대가 돌아오지 못한 것일 테고.
아니··· 그것에겐 아직 우리가 모르는 초월적인 무엇인가가 있는 지도.
“잠깐···.”
그때였다.
앞장서서 걸음을 옮기던 레이가 자리에서 멈추었다.
그녀는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도 그제야 뭔가 이상한 것을 깨달았다.
“레이 사저. 우리가 이렇게 멀리까지 왔었나?”
“그럴 리 없잖아.”
나라도 아무 생각 없이 레이를 뒤따른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분명 지나온 발자국을 역행해서 이곳에 다다랐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주변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좀 전에 우리가 타고 온 마차는 물론, 용병단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당했어. 눈치 챌 틈도 없이 떨어뜨려진 것 같네.”
“하지만 우리는 마기를 쭉 관찰하고 있었다.”
“그랬지.”
“정안을 가진 너와 내가 결계에서 길을 잃을 수 있다고?”
“허둥대지 마! 우리의 싸움엔 언제나 예외가 있어.”
레이는 분한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당연히··· 육망성 급을 상대하는 임무라면 더욱 특이한 상황이 많아지지.”
아니나 다를까, 레이가 말한 변수가 일어났다.
주변의 풍경이 시시각각 변하기 시작해, 끔찍한 형상의 식물들이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숲이··· 이동하는 건가?’
땅에 깊이 파고든 나무의 뿌리가 일렁인다.
바닥에 찍힌 발자국은 제멋대로 사라지고···.
조금 전까지 우리가 지나온 길의 배치가 순식간에 바뀌어버렸다.
심지어 마기의 흐름도 재배치되었어, 아주 교묘하게 미로처럼 뒤섞였다.
과연, 이런 식이었나?
이 소굴은 이렇게 나와 레이를 일행과 격리시켰던 것일까?
“···역겹고 가증스런 침입자 놈들.”
불현 듯, 등 뒤에서 기이한 불협화음이 들려왔다.
분명 사람의 말을 내뱉고 있었지만, 그 음성은 억지로 성대를 맞춰 흉내 낸 것만 같이 불완전했다.
고개를 향하자, 검은 망토를 입은 꼽추가 눈에 들어왔다.
놈은 나무 지팡이에 몸을 지탱한 채, 다시 한 번 징그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게 주인님께서 명하셨다. 네놈들의 고기를 한 점도 남기지 않고 녹여 삼키라고.”
이놈은 요괴인가?
망토 사이로 드러난 얼굴엔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커다란 눈알 하나만이 정 중앙에 박혀있을 뿐···.
당연하게도, 그것은 도무지 인간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어떻게 가능한 거지?
죽은 인간의 살코기로 짜깁기 했을 마물 주제에.
“사역마가 말을 하다니···.”
“뭐가 이상한가? 성한 얼굴 가죽을 가진 사람의 아이여. 태양 아래의 피조물들과 같이, 음지에서 잉태되는 우리와 같은 자들도 있는 법이다.”
“···.”
심지어 어휘까지 유창하군.
내가 경악하자, 레이는 검을 꺼내들더니.
“잘 들어, 덩치. 저걸 만만하게 보면 안 돼.”
“몸집을 보면 그다지 강해보이진 않는데 말인가?”
“멍청이. 겉만 보고 판단하지 마! 정안을 집중해봐. 저 작달만한 놈한테서 나오는 마기를 좀 보라고!”
레이의 지시에 따라 눈을 부릅뜨자, 그녀의 염려가 사실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이제 알겠다. 네놈들은 미숙하고 어린··· 덜 여문 늑대의 새끼들이로군. 나는 태어난 이례 인간의 시간으로 삼십 년 이상 주인님을 섬겨왔다. 그런 나와 마주치다니, 가엾고 불운한지고.”
등골이 오싹하다.
마치 마녀를 앞에 둔 것만 같이···.
놈에겐 그만큼 가공할 마기가 농축되어 있다.
허름한 모양새와는 다르게 결코 만만치 않아, 레이 또한 긴장을 풀지 않았다.
그녀는 칼날을 언제든 휘두를 준비를 하면서, 나에게 설명을 이어갔다.
“···덩치, 사역마에겐 등급이 있다는 건 들어봤지?”
“조금은···.”
“많은 시체를 들여서 뭉쳐 만든 놈들은 중합체라고 불러. 부르트급, 오거급··· 있어 보이는 이름은 다 붙어있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조잡한 장난감이야. 단지 수만 불려서 주물러봐야 부피만 커질 뿐인 거지. 그딴 건 전술과 전략만 뒷받침된다면 어떻게든 쓰러뜨릴 수 있어. 하지만 어줍잖게 지혜를 가진 놈은 그 무엇보다 무서운 적이 되지.”
레이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외눈의 사역마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녀석이 손가락을 가리키자 지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어서 무수한 뿌리가 사방의 땅을 뒤집고 튀어나왔다.
끝이 날카롭게 벼려져 있어, 그것은 가공할 속도로 우리에게 덮쳐들었다.
“하앗!”
그러나, 레이의 검무는 그 보다도 빨랐다.
순식간에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변질된 식물의 말단이 허공에서 흩뿌려졌다.
단, 그녀조차 전 방위에서 날아오는 모든 공격을 피하지는 못 했는지···.
어느새 뺨과 어깨에 흠집이 생겨있었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 상처를 허용하고 만 것이었다.
“큭, 이쪽으로!”
레이는 바닥에 착지함과 동시에, 내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 방향에는 나무의 영향을 받지 않은 큼지막한 바위가 하나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녀의 손길에 이끌려, 우리는 돌덩이 뒤로 몸을 숨겼다.
“···봤지? 저놈은 프리케라이 가이스트Flickerei Geist, 자아를 가진 사역마야. 특별품이지. 마녀의 힘을 나눠받은 결계의 관리자 같은 거야. 놈들은 마법을 쓸 수 있고, 강한 마녀일수록 저런 괴물을 더 많이 데리고 있어.”
레이의 목소리에서 다급함이 느껴진다.
그녀가 혼란스러워 하는 것이 공기를 통해 다 전달될 정도로···.
“망할, 계획이 완전히 어긋났어. 하필 대스승이 안 계실 때 마주치다니···.”
지직!
순간, 내가 기대고 있던 바위에 균열이 이는 것이 보였다.
보이지 않는 땅 속에서 뿌리로 된 작살이 레이의 코앞까지 튀어나왔어, 나는 그녀를 안고 등으로 그것을 받아냈다.
“야?!”
빠르게 몸을 튼 것이 다행이었다.
모처럼 레이가 기워준 코트가 찢겨지긴 했지만, 상처는 생체기 수준이다.
빌어먹을, 숨는 건 쓸데없는 짓인가?
이렇게 되면 맞설 수밖에 없다.
“레이 사저, 우리 둘의 힘이라면···.”
“아니, 넌 물러나 있어. 그 이상 다치지 마. 상대는 내가 한다. 너는 내가 지켜.”
분하게도, 레이는 아직도 내 신변을 걱정하고 있었다.
나를 전력으로 여기지 않고서 오직 자신만의 힘으로 이 상황을 타파할 셈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한 사람의 전사로서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건 대스승이 내린 명령 때문인가?”
“뭐··· 뭐?”
“나를 지켜주라던 한 마디 탓에 이러는 거냐?”
“이상한 소리 하지 말로 내 뒤로···.”
“미안하지만 그 지시엔 못 따르겠다.”
나는 레이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가슴 언저리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구멍에 손을 가져갔다.
“나는 짐이 되려고 여기까지 따라온 게 아니다.”
제리온이 보여준 그 일연의 동작을 그대로 실행한다.
이븐 가지의 분말을 흩뿌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었다.
나는 그림자를 둘렀다.
“덩치, 너···.”
“대스승에겐 비밀로 해다오.”
레이는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가루의 영향인가?
마음이 들뜨고, 정신감응을 통해 그녀의 마음이 전해져온다.
과거의 어떤 장면을 회상하면서 나와 그것을 겹쳐보고 있었다.
선배였던 토드의 일면인가?
아니면 그보다 앞서 게슈펜스트가 되었던 이들의 비극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이젠 대스승의 허락이나 레이의 인정도 사실 아무래도 좋아, 당장 내게 중요한 건··· 조금이라도 이 힘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나는 앞으로 더욱 강해져야만 하니까.
‘지금껏 나는 충분히 쉬었다.’
항상 조바심이 났다.
그러나 배에 있는 동안은 두 사람의 눈을 피해 이븐 가지의 가루를 연습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지.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아주 좋은 기회다.
“레이, 너는 말했다. 눈앞의 저 꼽추는 어떤 의미에선 중합체보다 강한 적이라고.”
“그게 어쨌단 거야? 그보다 그림자부터 어서 풀라고!”
“괜찮다. 나는 먹히지 않으니까.”
“웃기는 소리 하지 마!”
확신이 있었다.
나는 이번 일을 계기로 어떤 가능성을 실험해볼 생각이었기에.
‘앞으로··· 한 걸음이다.’
자아를 가진 사역마.
심지어 마법을 쓸 수 있다고?
···훌륭하군.
예행연습으로 안성맞춤이다.
‘그렇다면 찢어 발겨주마.’
만류하려는 레이의 시선을 애써 외면한 채, 나는 도끼를 들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