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의 장(1)
1.
여정은 대체로 순조로웠다.
출항 일주일째 되던 날에 풍랑을 만나긴 했지만, 우수한 조타수와 선원들이 잘 대처한 덕분에 큰 문제없이 무사히 넘길 수 있었지.
의외였던 것은 용병단의 꼬마인 니엘이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었단 사실이었다.
‘자칫했으면 우리는 이른 시기에 식수를 잃어야만 했을 지도 몰랐다.’
불과 열다섯 밖에 되지 않는 소녀가, 험한 바다의 이치를 꿰고 있을 줄은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육포가 질기고 맛대가리 없다며 식사 시간 내내 불편하던 니엘이었지만, 그런 식탐이 우린에겐 행운으로 작용했다.
십중팔구는 밤중의 소란을 노려 짐칸에서 간식을 빼먹을 속셈이었을 테지만···.
결과만 말하자면, 녀석은 폭풍에 배가 흔들리는 내내 식량을 사수했다.
여분의 물을 담아둔 나무통이 뒤집어질 위기의 상황에서, 녀석은 로프를 짐들과 함께 기둥에 묶어 멋지게 고정했다.
어찌나 생색을 내던지···.
심지어는 나중에 뱃사람들에게 잔소리를 했을 정도다.
“너무 허술한 거 아니야? 폭풍에 이기면 뭐하냐고! 대책없이 말라죽고 싶어? 도착할 때까지 이슬 머금은 걸레 짠 물로 연명하고 싶은 거야? 이봐, 백발 요괴 양반들. 비범한 너희는 괜찮을지 몰라도 선원들이랑 나는 평범한 인간이거든? 보통 인간은 말이야, 소금물 천지인 이 나무 판때기 위에선 먹을 게 없으면 골로 가거든?”
이어서는 마지막에 창고를 정리한 것이 누구냐고 색출해내기까지 했지.
‘그게 나라는 게 문제였지만.’
차마 거짓말을 할 순 없었다.
어디까지나 내가 주의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짐을 내팽개친 게 잘못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내가 그 사실을 순순히 고백하자, 이상하게도 니엘은 나에게 이상하게 친한 척을 해댔다.
단 둘이 있을 상황이 되니 부담스럽게 말을 걸어왔지.
“후··· 좋아, 형씨. 내가 생각해봤거든? 따지고 보면 우리 용병단이랑 사소한 마찰이 좀 있었으니까 출발할 때 여유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해서 말이야.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줄게. 대신 에···.”
속셈이 있었다.
녀석은 노골적으로 그걸 드러냈다.
“늘려주라.”
“뭘 말이지?”
“뭐겠어? 당연히 식량 배급량을 말하는 거지. 밥을 더 달라고.”
식탐이 큰 녀석이구나 싶었다.
“너는 충분히 선원들만큼 대우받고 있을 텐데?”
“대우? 이빨이 깨질 것처럼 단단한 비스킷이랑 곰팡이 핀 빵이? 포도주랍시고 가져온 건 하나같이 삭은 내가 나던데? 차라리 형씨 육포가 났겠다!”
“말린 고기는 질색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야. 난 성장기라고. 여기서 지내는 동안 영양실조에 걸리기라도 하면 어쩔래? 이것 봐. 어른이 돼서 제대로 자라지 않으면 책임질 거야?”
그러면서 어설프게 자신의 가슴이 강조되도록 어깨를 들어올린다.
상스럽다.
어린 꼬마가 창부를 흉내 내는 것만 같아, 나는 그만 눈살을 찌푸렸다.
이 녀석은 부모에게서 수치나 예우를 배우지 못한 건가?
“···상종을 못하겠군. 그렇게나 배가 고프면 나 말고 선장에게나 말해라.”
“당연히 벌써 물어봤지. 근데 사람은 댁들한테 허락부터 받으라고 하더라고.”
“그거라면 난 해줄 말이 없다.”
“아이, 그러지 말고 좀 봐주라. 댁이 이 괴짜모임의 이인자잖아? 하다못해 그 할배한테 언질이라도 좀 해달라고.”
“그건 또 무슨 소리지?”
“말수는 적어, 쓸데없이 무게 잡고 인상만 쓰고 있잖아? 그럼 말 다한 거지. 우리 용병단에도 있거든. 형씨랑 닮은 사람이.”
니코라는 남자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은근히 친근감이라도 느끼는 것일까?
“거기다 나이만 봐도 대충 서열이 보여. 노인네가 대장, 형씨가 두 번째겠지. 배 멀미하면서 맨날 토하는 저 반푼이 언니야가 막내일 테고 말이야.”
“그렇게 보이나?”
“···뭐야, 왜 갑자기 쪼개는 건데? 내가 우스워?”
요령과 실속을 챙기는 기지는 또래에 비해 높을지 모르나···.
미묘한 부분에서 눈치가 없군.
녀석은 인생 경험이 풍부한 척 거칠게 말했지만, 역시 본질은 아직 어린 애에 불과했다.
“기대를 배신해서 미안하군.”
“뭐?”
“잘못 짚었다. 우리 중에서 가장 막내는 나거든.”
“···하?”
니엘은 눈을 크게 뜨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본 니엘의 모습 중에 가장 나이에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뱃머리에서 멀리 떨어진 레이와 눈앞의 나를 번갈아보더니, 이윽고 납득하지 못하고 삿대질을 한다.
“장난 치냐?! 그 면상으로 저 언니야보다 어리다고?”
“물론 나이는 내 쪽이 많지.”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자빠졌네! 한 눈에도 우리 니코 형보다 더 늙은 아저씨 주제에 무슨 농담질이냐고!”
“···나는 아직 이십대다.”
“뻥까지마! 내가 무슨 바보인 줄 알아?”
“아니···.”
“쫌생이 같으니, 끼니 좀 더 챙겨달라니까 사람을 무시하기나 하고! 주기 싫으면 차라리 대놓고 말을 하란 말이야!”
그럴 의도는 없었건만, 니엘은 내가 자길 놀리려는 줄 알았는지 성부터 냈다.
그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를 떠나버렸다.
‘내가··· 그렇게 노안이었나?’
눈치를 보지 않는 꼬맹이가 내뱉은 말치곤 꽤 충격이 크다.
오래 전에 아델에게서 수염이 따갑다며 핀잔을 들었을 때 만큼이나···.
‘하기야, 고향 친구들도 이따금씩 나이에 안 맞는 얼굴이라고 놀리긴 했었다.’
지금은 말할 필요도 없이, 새치 때문에 더욱 그래 보이겠지.
묘한 기분이군.
이식 이후로는 나 자신의 외모를 볼 기회가 없었기에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이곳이 강가 주변이었다면 개울물을 거울삼아 확인이라도 했을 테지만, 지금 우리는 거센 파도 위에 있다.
바다의 수면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거품을 만들어내, 내 모습을 비추기는커녕 무시무시한 심연만을 보여줄 뿐이다.
그 색체는 깊고 무겁다.
새삼스레 나라는 존재가 하찮게 느껴질 정도로 거대한 웅덩이가 눈앞에 있었다.
이곳에 빠지면 무사하진 못하겠지.
비록 어제의 폭풍에 비하면 많이 잔잔해진 상태라 할지라도 말이다.
‘···레이는 죽을 맛이었겠군.’
체질에 따라선 울렁증이 숙취보다도 지옥일 수도 있다는 게 사실인 모양이었다.
특히나 레이는 정도가 심했는지, 파도에 선체가 흔들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내실에서 늘어진 채로 보내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와중에도 레이가 긴장을 풀고 있지 않았단 것을.
요동치는 망망대해의 조류를 견뎌내면서도 그녀의 내면에서 어떤 뜨거운 의지가 타오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단순히 분노라고 부르기에 너무나 잘 벼려진 그것은, 수련과 인내의 결정체이기도 했다.
마치 지금까지 참아온 일이니만큼, 며칠간의 기다림 정도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보일 정도로.
나는 레이가 용병단의 꼬맹이에게 장난스럽게 말했던 ‘수도자’라는 소개를 떠올렸다.
어쩌면 거짓이 아닐지도 모른다.
바다 건너의 원수를 떠올릴 때마다, 레이는 이를 악물어가며 멀미의 고통을 참아내었던 것이다.
‘클라르테와 처음 마주했을 때, 이성을 잃고 튀어나간 내가 다 부끄러워질 정도다.’
만일 이 여행길이 진짜 클라리스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면?
모르겠군.
···가볍게 상상해보아도, 과연 사저만큼 냉정을 흉내나 낼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레이 녀석은 분명 오래도록 참아왔겠지.
10년 가까이 대스승을 따르며 감정을 죽이는 것이 간단할 리 없으니 말이다.
‘진정한 전사에겐 성별도, 나이조차 의미가 사라지는가?’
대놓고 입에 올릴 순 없지만, 레이의 강인함만큼은 인정한다.
이런 면은 배워야만 하겠지.
나는 도착하는 며칠만큼은 그녀가 쉴 수 있도록 파도가 잠잠하길 바랐다.
그러나 내 예상 이상으로 세계는 넓었다.
선박이 멈춘 것은 그로부터 보름 뒤, 거의 한 달이 지나고 난 뒤였다.
2.
“육지다!”
닻을 내리자마자 배를 박차고 나간 것은 니엘이 맨 먼저였다.
녀석은 짐을 내리는 것을 돕지도 않고, 뒤에서 따라온 자신의 동료들이 탄 배 쪽으로 달려갔다.
“허허, 마치 새끼 원숭이 같은 아이로구나.”
대스승은 하선하는 내내 니엘에게 손주를 바라보듯 흐뭇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사실 그는 기회가 될 때마다 니엘을 말동무 삼아 시간을 보냈었지.
그 모습을 보면서 레이는 살짝 질투를 하기도 했지만, 애써 모른 척을 하는 눈치였다.
어쩌면 과거에 대스승에게도 딸이 있었을지 몰라, 나로선 그렇게 짐작할 뿐이었다.
우리의 원로 마녀 사냥꾼이 어린 아이의 기력에 감탄하고 있는 사이, 그 누구보다 도착을 고대했을 이가 드디어 배에서 내려왔다.
“고생했다.”
“흥, 어울리지 않게 신사인 척 할 필요 없어.”
나는 먼저 부두에 내려 레이를 도우려 했지만, 그녀는 내 손길을 거부하며 초연해진 얼굴로 땅을 밞았다.
“괜한 참견이야. 보다시피 난 멀쩡하니까.”
“그렇군.”
“실망했어? 아니면 내가 기진맥진해서 늘어지길 기대한 거야?”
다행히 드센 면은 평소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차마 레이에게 말해주기 미안하지만···.
채 숨기지 못한 안도감과 피로가 동시에 스며있는 그 모습은, 어째서인지 평소보다 미모가 드러났다.
“···5년 만이네.”
“그렇게 오래됐나?”
“응. 한 동안은 정신없었거든. 돌아갈 여유도 없었지. 그땐 우리의 담당구역은 그야말로 격전지였으니까.”
부둣가 너머를 바라보는 레이는 애수에 잠긴 표정이었다.
모처럼의 고향이니 감회에 젖을 만도 하지.
‘···이곳이 동방인가?’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는다.
주변에 보이는 건물들이 내가 살던 문화권의 양식과는 전혀 달라, 지붕을 덮고 있는 물결무늬의 장식들이 특이해보였다.
항구를 오가는 이들의 생김새나 복장도 눈에 띄게 독특하다.
클라리스에게 전해들은 것처럼 모두가 흑발이다.
이건 놀라운 광경이군.
저 나풀거리는 묘한 옷감은 뭐지?
선명한 빨강부터 쪽빛까지··· 색깔이 다양하기도 하다.
소매가 긴 옷이 유행하기라도 하는 것인가?
“정신 차려, 덩치. 우린 관광하려고 온 게 아니니까.”
“음.”
어느새 레이는 평소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등을 꽃꽂이 세운 그녀의 뒷모습엔 긴장감이 맴돈다.
당장 쉴 틈도 없이, 우릴 맞이하기 위해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잘 오셨습니다, 대스승 크레이그.”
네 사람.
전부 남색의 사냥꾼 복장을 입은 사내들이었다.
맨 앞에 선 중키의 남자를 제외하면, 하나같이 하얀 가면을 쓰고 있었다.
“잘 지냈는가?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였지?”
“삼 년도 더 된 것 같습니다. 전과 변함 없이 정정하시군요.”
“자네도 건강해보여서 다행이군.”
“덕담에 감사드립니다. ···허나 당장 화기애애하게 안부를 나눌 여유는 없을 것 같군요.”
“상황을 말해주겠나, 대스승 알베르트?”
알베르트라면, 바로 그 도리스의 아버지가 아닌가?
대스승이 상대의 이름을 올리자, 무리를 끌고 온 연장자는 모자를 벗으며 고개를 숙였다.
첫인상을 말하자면···.
그는 의외로 점잖은 얼굴이었다.
대스승이라 불릴 만큼 나이는 지긋하지만, 마녀 사냥꾼이라 하기엔 너무 유순한 생김새다.
곱게 늙었다고나 할까?
오히려 둥근 금테 안경이 더욱 돋보여, 마치 교사나 학자처럼 보이는 외모다.
도리스와 혈연관계인 만큼, 새치가 섞인 옅은 금발이 더욱 겉모습을 귀족처럼 느껴지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차마 좋다고는 말씀드릴 수 없겠습니다. 심록을 몰아붙이는 데엔 성공했으나 희생이 큽니다.”
“얼마나 심한가?”
“며칠 전에 선봉대가 투입되었습니다. 목적지에 스승급이 셋, 그 휘하의 기량 있는 베테랑들 열다섯 명 이상이 향했습니다.”
“놀랍군. 하지만 무모해. 육망성을 상대로 그런 경솔한 명령을 내리다니···. 대스승 베누다의 판단이었나?”
“예. 이 땅의 지휘권은 그 분에게 있으니 말입니다.”
“그럼 결과는 어떻게 되었지?”
“당연히···.”
그러나, 그는 이어서 점잖은 말투로 꺼림칙한 소식을 알렸다.
“모두 전멸했습니다.”